< 두 번째 주인공(5) >
아라셀리는 유서담과는 조금 다른 세월을 보내왔다. 유서담이 잠깐 사라졌다가 다른 세계로 이동했을 때에도, 아라셀리에게는 최소 1년에서 많으면 몇 년을 더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하르 공녀와의 만남은 정말로 까마득한 옛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가움이 치솟는 것도 당연했으나, 그보다도 먼저 아라셀리의 호기심이 자극되었다.
“대체 차원이동을 어떻게 하신 거죠?”
“후후,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이 왕성한 건 똑같군.”
사하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밖으로 다가갔다. 분명 탄광 안에 위치한 탑이었음에도, 창문에는 각자 다른 공간이 CCTV의 화면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어떤 창문은 바닷가를, 어떤 창문은 절벽을, 어떤 창문은 멸망해버린 도시를, 어떤 창문은 기계로 가득한 밤하늘을.
그녀는 멸망해버린 세계의 전경을 보라색 눈동자에 담았다.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네?”
“평생을 노력했고, 그렇게 그를 따라다녔다고. 나라고 안 될 건 없다고.”
“아······.”
그제야 아라셀리는 자신이 사하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노력했다. 나는 세월과 계절의 여신을 모시는 신녀로서, 이미 시간을 두 번이나 거슬러 올라갔던 경험이 있었지.”
“그럼 역시, 믿음의 힘으로 차원이동을······?”
그러자 사하르는 무슨 쌩뚱맞은 소리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나는 신성력과 믿음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논리적······.”
“그래. 어떻게 카데르 여신은 나를 과거의 시간대로 보낼 수 있었는가. 여신이 존재하는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즉, 신성력이란 도대체 어떠한 ‘원리’로 작용되는가.
신을 과학적으로, 마법적으로 분석에 성공해낸 자는 그 어떤 차원을 보아도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 신성력이 발현되는 원인과 진리에 대해 파헤치기 위해 노력한 철학가나 성직자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내가 그들을 믿을 때, 그들은 대체 무슨 방법으로 내게 힘을 주고, 그것은 무슨 원리로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사하르 세레니티는 공부했다.
성경? 믿음? 신?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신적인 존재, 그러니까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며 3차원 세상에 살고있는 인간들에게 상식선을 무시하여 힘을 부여하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 공부하였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모두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간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학문적으로 접근해야만 했고, 그저 믿고 받아서 대가 없이 사용하던 환상적인 믿음의 힘이 사실은 마법과 별 다를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러한, 아주 단순하지만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진리를 이해해버리게 된 바로 그날.
“나는 모든 신성력을 잃었다.”
“······네에?”
“신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의 정체를 알아내버리는 순간, 신성력의 존재를 그 누구보다 강하게 믿어버려서, 그 본질에 대해 파악해버린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거야.”
나는 이제 더 이상 신을 믿음으로써, 신성력을 받을 수 없다.
그렇게 덧붙인 사하르는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그곳에는 미세한 신성력이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이제 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신성력을 사용하지. 마치, 마법처럼.”
“그 신성력에는,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힘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래. 그 덕분에, 나는 시공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경험이었지. 그간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남자의 인생에 대해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된 느낌이었어. 흥미로웠고, 꽤 즐거웠지.”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를 쫓기 위해 노력했건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도통 알 길이 없더군.”
“아···.”
아라셀리는 유서담에게서 총알 하나를 선물받은 덕분에, 그것을 추적하고 또 추적하여 유서담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하르 공녀는 그게 불가능했다.
“마지막 희망은 있었다. 너와 그 남자가 내 세상에 흩뿌리고 간 이세계의 기운들. 나는 그것을 쫓고, 또 쫓았어. 그 결과······.”
사하르는 창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기계에 점령당한 비비안타 제국의 끔찍한 실태가 적나라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네 고향에 도달하게 되었다.”
“······.”
아라셀리도 말없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공간마저도 초월하는 저 신비로운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복잡한 감정이 자꾸만 가슴을 맴돌았다.
“너는 한때, 그 남자와 함께 내 세계를 지켜주었다.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나 또한 필사적으로 너의 세계를 지키고자 노력해보았지.”
마법사들을 소집하였고, 탄광의 공간을 왜곡하여 과학이라는 것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도록 요새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저들을 막기에는 내 힘이 턱없이 부족하더군.”
위이이잉···!!
창밖으로, 거대한 전함 하나가 솟구쳐 오르더니 그 사이로 수백, 수천 명의 인간이 나타났다.
아니, 자세히 보니 인간이 아니었다. 온몸이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
그들은 손에서 미사일을 발포하거나 눈과 입으로 레이저를 발사하거나, 혹은 손에서 광선검을 사출하여 마나 방벽을 모조리 깨부수며 마법사들이 숨어있던 어떤 장소를 그대로 박살내버렸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전력.
“······최소한, 한 개체당 능력치는 5써클 이상인 걸까요.”
“지휘관급은 그 이상이더구나. 현재 가장 높은 마법사의 경지가 간신히 7써클을 넘어섰는데, 일개 병사들의 능력치가 저래서야······.”
전쟁이 벌어져봐야, 마법사들은 필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
아라셀리가 침묵하자, 사하르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전쟁을 이길 방도가 따로 있으신가요?”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기 전으로 되돌리는 방법은 존재하지.”
“아······!”
그러고 보니, 사하르 공녀는 시간여행자가 아니던가? 아라셀리의 눈에 희망이 잠깐 반짝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게 쉽게 가능했다면 왜 여태 하지 않았겠는가?
“······여태 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겠지요?”
“그래.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첫 번째.
“이 사건이 최초로 시작된 시기는, 무려 100년도 더 이전이다. 아직 내 능력으로 그 정도의 시간여행은 불가능하지.”
아라셀리가 지구까지의 초장거리 차원여행이 불가능하듯, 사하르 공녀에게도 능력의 한계는 존재했다.
그리고 두 번째.
“저들 역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그건 꽤 폭탄같은 발언이었고, 아라셀리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잠깐만요. 그게 말이 돼요?”
“과학에게는 참으로 손쉬운 일처럼 보이더구나. 내가 시간역장을 발생시키면 저쪽의 ‘과학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컴퓨터라는 것에 담아버려서 계산하고, 또 계산하지. 그리고 내가 어디로 시간여행을 했는지 위치를 추적하여 찾아와 역사를 바꾸려는 것을 저지하지. 저 강력한 안드로이드의 힘으로.”
“말도 안 돼······.”
대체 과학은 뭐길래, 마법과 신앙의 힘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컴퓨터라는 것은 내가 평생을 걸쳐서 생각해왔던 것을 단 1초만에 풀어버렸다. 인간의 두뇌 수십억 개는 모여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불합리한 연산 속도를 갖추고 있어.”
“말도 안 돼······.”
“심지어, 내 시간여행은 기껏해야 일주일에서 많으면 열흘 정도를 되돌릴 수 있지만······ 저들은 압도적인 장비를 이용하여 무려 112년 전의 과거까지 통로를 만들어뒀더군.”
“···어? 잠깐만요. 설마, 그렇다는 건······.”
“그래.”
언제나 당당했던 사하르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저들은 이미 한 번 과거를 바꾸었다. 충분히 발전한 과학을 112년 전에 흩뿌렸고, 그로 인해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던 현재가 과학에 의해 지배당하는 세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지.”
그것이 바로 과학이 가진, 그리고 시간여행이 가진 두려움.
거기까지였다. 절망감이 온몸을 관통하였고, 그 고통을 버틸 수 없었던 아라살리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침묵하였다. 사하르도, 아라셀리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라셀리는 간신히 입술을 떼어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죠?”
사하르 공녀는 허공에 손을 뻗어 책 한 권을 뽑아왔다. 그곳에는 여태껏 비비안타 제국이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해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는 첫장을 펼쳤고, 그곳에 적혀있는 첫 번째 날짜를 읽었다.
“597년 8월 31일.”
마법의 세계가 저물고, 과학의 역사가 처음 발발하여 멸망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바로 그 시기.
“이때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지.”
아라셀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간여행으로 한 사람의 영혼과 몸을 112년 전으로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셨나요?”
“그래.”
“그럼, ‘의식’만 보내는 건 어떨까요?”
“의식만이라면······ 가능하겠구나. 과거 사람과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다. 육체도 없이, 대체 무얼 할 수가 있다는 말이느냐?”
“있어요.”
아라셀리는 눈을 감고 집중하였다. 분명 그와 함께 차원을 여행하였건만, 어째서인지 그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전에도 경험해본 적 있다.
“···교수님 역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남자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고?”
“네. 만약 교수님이 112년 전의 그날에 도착해 있다면······.”
사하르와 아라셀리의 시선이 교차하였다.
“어쩌면, 이 세계가 이렇게 변하기 전으로 다시 되돌리는 게······.”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
[라인칼 력 597년 8월 31일]
“양꼬치 사시오! 양꼬치! 페르벤 소스를 듬뿍 묻힌 양꼬치를 사시오!”
“붕어꼬치가 맛있다! 아! 맛있어! 붕어꼬치!”
어느 동네를 가든, 환상적으로 구축된 도시가 있는가 하면 그 이면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양손에 양꼬치를 잔뜩 들고서 뒷거리를 탐험하였다. 흔히 말하는 하류층들이 사는 세계. 그곳은 마법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채였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달동네랑도 별 차이가 없겠는데······.”
마법이 얼마나 발전하든, 결국 하류층들에게는 그 혜택이 전혀 돌아오지 않는단 것이다.
<그나저나, 그 꼬치는 대체 언제까지 드실 생각이십니까? ‘새로운 문명에 대한 사전답사’라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사전답사에 그렇게 많은 꼬치가 필요합니까?>
“당연하지.”
<···그냥 양꼬치가 좋다고 말하십시오.>
“허허. 여긴 참 편하네. 길거리에서 양꼬치도 팔고.”
뭐, 내가 양꼬치를 좋아해서 그러는 것도 있긴 하지만 사전답사를 소홀히하지는 않았다. 그냥 이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손에 아무것도 없으면 심심해서 양꼬치를 사먹었을 뿐이다.
“그나저나······ 미래의 아라셀리와 동떨어진 채, 과거의 이 시장바닥에 내가 떨어졌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주인공과 마주하여 사냥할 수 있는 운명론적 확률이 가장 높은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즉, 근처 어딘가에 주인공이 분명히 있다는 의미.
“줄거리가 뭐였지?”
<확인해드리겠습니다.>
『마법 세계, 과학으로 지배한다!』
#SF판타지 #싟오궳떻 #엸ㄹ!
#독점 #개발 #갑질 #정복
━
<줄거리>
어느 날, 우연히 떨어진 종이조각 하나. 거기에는 마법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이 담겨져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며 무시당하고 핍박받았던 서러운 하층민의 삶!
이제부터 과학으로 되갚아주마!
━
제목과 소개글부터 아주 살벌한 주인공이다. 경험상 ‘갑질’이 태그에 걸린 놈들이 적당한 적은 없던 거 같은데······.
“근데, 저 이상한 태그는 뭐지?”
<···저도 의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엸ㄹ!’라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해시태그 하나가 있었다.
“흐음······.”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갑작스레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음?”
불길함의 정체는 골목 안쪽에서부터 은근히 퍼져나왔다.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쓰레기 더미와 고양이 우는 소리만이 가득한 그 어두운 골목에 누군가가 있었다.
<저기, 누가 있->
“쉿.”
<···저는 딱히 조용히하지 않아도 아무도 못듣습니다.>
의뢰인의 말을 무시하고서 몸을 벽 뒤로 숨기니, 그 누군가의 정체가 드러났다.
[주인공 피오ㄹ뚫엖ㄹ]
그 아이는 자그마한 꼬마였다. 이제 막 여덟살이 되었을까.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는지 온통 상처투성이에 잔뜩 해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
기이잉······!
‘···뭐야, 저건?’
자세히 보니 그건 ‘누군가’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건··· 기계였다. 기계로 이루어진 인간.
“안드···로이드라고······?”
마법 세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로 그것이 꼬마를 향해 무언가를 건네주고 있었다.
만약 지금 저 순간을 작품으로 따지자면, <프롤로그>가 틀림없을 터.
‘막아야 해!’
그런 생각이 든 즉시 골목으로 뛰쳐나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어 꼬마를 향해 발사하려는 순간.
그 꼬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저 꼬마의 얼굴에, 비비안타 아카데미의 이전 주인공 ‘피올렌’의 얼굴이 잠깐 스쳐 지나간 것은.
그건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었다.
꼬마의 이면에, 그 존재가 실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다시금 피멍든 꼬마의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주인공 파르텔 리안]
“누, 누구세요?”
꼬마의 겁먹은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안드로이드가 그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위험요소 발견. 이레귤러를 배제하겠다.
“젠장!”
안드로이드의 기술력은 분명히 지구의 과학을 아득히 앞선 수준이겠지만, 싸워서 진다는 선택지는 없다. 무조건, 죽이고 저 꼬마를 없애야 한다.
그 순간.
-교수님! 안 돼요! 지금 저 꼬마를 죽이면 ‘패러독스’가 발생해요!
“······어?”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라셀리의 목소리였다.
< 두 번째 주인공(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