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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29화 (229/251)

< 두 번째 주인공(4) >

[라인칼 력 709년 8월 31일]

위잉! 위잉!

밤하늘을 떠도는 수십 개의 기묘한 기계 센서들을 피하며, 아라셀리는 우거진 숲을 가로질렀다. 비비안타 제국의 모든 숲은 마법으로 가꾸어져 있어, 모든 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이 균일하게 자라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이 숲은 마치 정글처럼 규칙적이지 못하고 자유분방하게 자라있었다.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마법사 발견! 마법사 발견!

하늘을 날아다니는 축구공만한 구체들이 붉은빛을 내며 발광하기 시작하면, 또다시 하늘에 거대한 ‘기계가 나타나 레이저를 발사하거나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를 지상으로 사출하였다.

굳이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은, 저 기계에 의해 사냥당하고 있는 건가.’

거대한 기계는 마법사 사냥을 끝마치자마자, 하늘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도대체 저 거대한 기계가 어디에 숨어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후우······.’

우선 한시름 돌리겠다 싶은 마음에, 아라셀리가 풀을 밟고서 전진하는 그 순간.

위잉!

갑작스레 머리 위로 구체가 나타났다.

“······!”

순간, 아라셀리는 숨을 멈추고서 잽싸게 나무 아래로 숨었다. 하지만 고작 나무 따위로 마법사들의 세계를 멸망시킨 저 기계의 시야를 피할 수 있을까?

‘마나를 은신해야 하는데······!’

하지만 차원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체내의 모든 마나를 소모해버렸다. 비비안타 제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굳어버린 나인 써클이 완전히 해동되지도 않은 상황.

제대로 된 마법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저 기계들과 싸우면···.

‘···어떻게든 도망쳐야 해.’

그런데, 어디로?

과연 저 기계들의 시야를 피해서, 숨어들 장소가 있기는 할까?

‘차라리, 가까이 접근한 저 기계만 몰래 요격해버리는 게······.’

그리 생각한 아라셀리는 손끝에 마나를 집중하여, 천천히 축구공처럼 생긴 기묘한 기계를 가리켰다.

이제, 발사만 하면, 당장 눈앞에 있는 저것만큼은 소멸시킬 수 있으리라.

그때.

-잠깐! 기다려!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라셀리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녀는 손가락의 마나를 거둬들이고서 즉시 마나를 추적하여 답신을 보냈다.

‘텔레파시? 마법사인가요?’

-······뭐, 뭐야. 어떻게 내 위치를 알고 텔레파시를···.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너! 마법사 맞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묘한 마나 장벽을 두르고 있는 검은색 복장의 누군가가 아라셀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네. 맞아요.’

-역시··· 진짜로 여기에 나타났어.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검은 복장의 누군가가 갑작스레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근데 너 마법사가 맞는데 그런 짓을 했다고?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삐이이이--

격한 텔레파시로 인해 이명이 울려퍼졌다. 아라셀리는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였다.

‘···저것들을 공격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 즉시 마나를 감지해서, 널 잡아 죽이겠지. 저놈들을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개체라도 소멸되는 순간 서로 알아차린단 말이야.

‘······어우. 큰일날 뻔했네요.’

그건 몰랐다. 서로가 연결된 개체라니. 자체적인 텔레파시 구축망이라도 있는 걸까? 하마터면 큰 위험에 빠질 뻔했다.

-일단, 어서 이쪽으로 와. 네가 마법사라는 걸 알아낸 이상, 어떻게든 살려봐야지.

‘알겠어요.’

아라셀리는 천천히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숨어있는 풀숲으로 다가갔다.

“이쪽, 이쪽. 빨리!”

검은색의 천을 몸에 덮고있는 여인이 아라셀리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고서는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이제는 마나가 감지되지 않을 거야. 전자파 차단 망토거든.”

“···전자파.”

“그래. 전자파는 알지?”

유서담에게서 과학기술에 대해 언뜻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SF 세계관에도 다녀와봤지만 여전히 아라셀리에게 있어서 과학이란 미지의 영역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너 무슨 별천지에서 살다 왔니? 이렇게 위기의식도 없고······. 옷은 또 왜 안 입고 다니는 거야?”

이럴 땐 어떻게 하라고 했던가. 유서담의 메뉴얼을 천천히 떠올린 아라셀리는 슬쩍 웃으며 답했다.

“기억을 잃었어요.”

*

공상과학에 의해 점령되어버린 마법사들의 세계. 그 안에서도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발버둥칠 방법을 찾아내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 터널을 거닐며, 아라셀리는 앞서나가는 마법사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름은?”

“아라셀리.”

“아라셀리라고? 흔한 이름이네. 성씨는 조금 독특하지만. 나는 슈웰. 5써클의 마법사지. 너는?”

“어··· 일단은 3써클이요.”

“······그래? 너 지금 몇 살인데 벌써 3써클이야?”

“어···음··· 서른···이 아니라······ 열일곱······.”

“어린 나이에 대단한데······.”

하긴. 비비안타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시절에도 열일곱에 3써클이면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럼 왜 아까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려고 했던 거야?”

“기억이 없어서 상황을 잘 이해못했어요.”

“미치겠네···. 부모님은?”

“안 계셔요.”

“기억이 없는데 그건 어떻게 알아?”

“헤헤.”

“······후우. 그래. 일단은 넘어가 줄게. 너는 ‘그분’이 직접 데려오라고 하셨거든.”

그분? 아니, 애초에 차원이동을 막 끝낸 직후인데 누가 자신을 데려오라고 했단 말인가?

“그리고 입구에 설치해두었던 센서에 반응하지 않았다는 건 네가 ‘안드로이드’는 아니라는 이야기니까.”

“안드로이드······.”

일전에 유서담이 사용했던 단어였다.

‘기계로 만들어진 인간이라고 했던가······?’

기계라는 존재 자체도 아리송하고 이해가 잘 가질 않는데, 기계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존재는 더욱 더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대체······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된 거죠?”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 일단은 따라와. 네가 반드시 만나뵈야 하는 분이 계시니까.”

동굴은 길었다. 마치 개미굴을 연상케하는 미로같은 구조. 어떤 공간은 넓었으며, 어떤 공간은 비좁았고, 어떤 공간은 막혀있었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었다.

모든 공간에,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인간들, 마법을 사용하는 인간들.

다 헤집어진 옷을 입고서 꾸질꾸질하게 살아남은 그들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지 빼빼 말라있었지만, 그럼에도 웃고 떠들며 억지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이쪽이야.”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인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듯 피로에 찌들어 있지만 누구 하나 잘못 걸리는 순간 그대로 묵사발을 내버릴 것 같은 살벌한 눈빛.

‘······저들이 이곳을 수호하는 전사들이구나.’

아마도 몇 안 되는, 마법을 익힌 전투 마법사일 것이다.

“여긴······?”

“동굴에서 가장 커다란 곳이야. 천장이 다 보이지도 않지?”

“와아···.”

마침내 도착한 장소는, 지하 동굴에 위치한 거대 도시였다. 옛 탄광 마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인지 건축물 자체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저 하늘까지 펼쳐진 천장 아래, 동굴벽에는 수십 개의 구멍이 송송 뚫려있었고 탄광 레일 수십 가닥이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그리고, 탄광의 중심에는 뾰족한 타워같은게 하나 자리잡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죠?”

“‘구원자’님이 머무시는 공간이야. 탄광에서 가장 지상과 가까운 곳을 드렸지.”

“아뇨. 그거 말구요. 저거.”

아라셀리는 타워의 바로 위쪽을 가리켰다. 희끄무리한 안개같은 것이 자꾸만 아른거렸는데······ 아라셀리는 차원방랑자였기에 단번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차원 그 자체가 진동하고 있는 모양새인데요······?”

“······그걸 한눈에 알아보다니, 보면 볼수록 넌 신기하네.”

슈웰은 아라셀리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저건 우리의 희망이야. 일종의··· ‘구조 신호’라고 생각하면 돼.”

“구, 구조 신호요? 누구한테 보내는···?”

그녀는 입을 다물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찬란했던 문명은 이미 오래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자그마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뿐.

“희망이 왜 희망인 줄 알아? 기대고는 싶지만, 기대하기에는 너무 희미해서······ 그래서 희망인 거야.”

하아, 슈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년 전쯤에 영웅이 한 명 있었어.”

“영웅이요?”

“응. 무너져버릴 뻔한 우리의 세계를 구해주시고, 평화가 안정되자 돌연 세상의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리셨지.”

“와아··· 그분이 누구인데요?”

“아라셀리 라인칼.”

“네, 네? 왜요?”

“너 부른 거 아니야. 역사에 다시없을 가장 위대한 마법사, 아라셀리 라인칼을 말한 거야.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세상을 악마로부터 구원하신······ 바로 그분.”

그렇게 말하더니 슈웰은 아라셀리를 쳐다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 이후로 아라셀리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어. 네 부모님도 영웅님을 좋아하셨나 보네.”

“무, 물론이죠.”

“아무튼······. 나는 생각하고 있어. 그분은 잠시 잠들어 계신 것뿐이라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악마를 물리치고 세상을 구원해주신 것처럼, 기계들의 세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실 것이라고.”

그리고, 슈웰은 침묵했다. 아라셀리는 고개를 숙였다.

“하하, 뭐···. 허황된 생각이긴 하지? 200년 전에 사라진 대마법사가 다시 돌아온다니.”

“······.”

아라셀리는 밤하늘을 가득 메웠던 기계를 떠올렸다.

조만간 그녀는 나인 써클의 힘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기계들을 단신의 힘으로 해치울 수는 없다. 분명 나인 써클은 신적인 파워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미 완성된 기계들의 군단을 홀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저들은 마법사 사냥의 프로. 그에 비해 아라셀리는 과학에 대해 무지하다.

‘나는······ 이 세계를 다시 구할 수 없어.’

슈웰은 그런 아라셀리를 보고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위로하듯이 말했다.

“걱정마. 우리가 옅은 희망에만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또다른 방법이 있어.”

“또다른······ 방법?”

우뚝, 슈웰의 걸음이 멈췄다. 어느덧 탄광의 중앙에 위치한 드높은 타워에 도착한 것이다. 입구에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슈웰을 보자 표정을 풀었다.

“그 아이가······ 구원자님이 말씀하신 아이야?”

“맞아. 숲에 버려져 있는 걸 데려왔어.”

“예쁘장하게 생긴 거 말고는 잘 모르겠는데······. 어째서 저 아이가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분은 확신하신 거지?”

“글쎄. 하지만 그분은 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

경계를 서는 전투 마법사들을 지나쳐, 타워에 들어선 아라셀리는 잽싸게 마나를 살짝 흘려서 주위를 탐색해보았다.

‘평범하지만 철저하네.’

타워의 내부 전경은 마치 등대처럼 휑하니 허전했지만, 철저한 방호마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만나실 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자 진짜 희망이야. 그러니까 예의를 갖추도록 해.”

“당연하죠. 제가 도덕 점수는 100점이었거든요.”

아라셀리는 긴장을 풀기 위해 장난스레 그런 말을 했고, 슈웰은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이내 허공에 노크를 했다.

“구원자님. 그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더냐? 후우, 들여보내라.

이윽고, 허공에 빛의 실선이 가더니 공간이 갈라지며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나는 들어갈 수 없어.”

슈웰은 그리 말하며 물러났고, 아라셀리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서 내부를 향해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 내부에는.

달빛을 닮은 머리카락을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보라색 눈동자를 희미하게 빛내고 있었다.

“······어?”

아라셀리는 당황하여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다른 시간, 다른 세계에서의 인연.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

“그래.”

그렇기에 결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연.

“오랜만이구나, 아라셀리.”

한때 회귀자였으며, 신녀였고, 공녀였으며, 공작이었고, 황제이기도 했던 그 여인은 영혼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아라셀리를 반겨주었다.

< 두 번째 주인공(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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