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26화 (226/251)

< 두 번째 주인공(1) >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예리나의 황제 즉위식을 볼 수는 없었다. 애초에 프리멜 여황이 곧바로 황권을 놓는 게 아니라, 인수인계 시간은 필요했으니까.

거기에는 최소한 1년에서 3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시간 가속을 할 수도 없었으므로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떠나시는 건가요······.”

“응.”

예리나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유서담에게 황제가 된 자신의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버린다니. 참 야속하다.

“알다시피 나는 한곳에 머물러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렇게 한 사람을 위해 오래 기다린 건 나도 처음이야.”

거의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물론 대부분은 시간 가속을 통해 시간을 단축하기는 했지만, 유서담 또한 예리나와의 추억이 가득 쌓여있었기에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정이 쌓였다고 해서, 멈춰있을 수는 없다. 애당초의 목적은 지구로 돌아가서 헬 게이트를 탐색하는 것.

또한, 지구에서 기다려주는 동료들이 있는 마당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예리나는 조심스레 물어왔지만, 유서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네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날 거야. 황제가 된 이상, 네가 나를 찾아오는 건 불가능해.”

누구처럼 밥만 먹고 마법만 주구장창 파고드는 마법 중독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때는, 진정한 황제가 된 저를 보여드릴 거니까요.”

재회의 약속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같은 차원에 두 번 이상 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하지만 유서담은 이제 꽤 무책임해졌고, 기약없는 약속일지라도 희망을 선물해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 언젠가 꼭 만나자.”

거기까지였다.

떠날 채비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왔던 그대로, 몸 하나만을 가지고 돌아서면 된다.

유서담은 아라셀리와 함께 프리멜캐슬 황성을 빠져나와, 한참이나 걸어서 프리멜시티에서 벗어난 뒤에야 숨을 돌렸다.

“···더 안 붙잡는 게 용하네요.”

“그래?”

“네. 저 집착과 미련 가득한 눈빛은 이제 꽤 많이 봐서 익숙하거든요.”

“어디서 봤는데?”

“그냥 여기저기서요······.”

아라셀리는 한심스럽다는 듯 유서담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딴짓을 하고 있었다.

[199레벨의 주인공을 사냥하였습니다.]

[수명이 1990일 지급됩니다.]

[레벨이 3단계 상승합니다.]

[장기간 프로젝트로 천천히 공을 들여 주인공을 사냥하여, 주인공의 개연성의 상당부분을 흡수하였습니다.]

[레벨이 추가로 2단계 상승합니다.]

[스킬 ‘근육 다지기(A)’를 획득합니다.]

오랜 시간을 들이며, 이미 개연성의 상당부분을 흡수한 덕분이라며 레벨이 무려 다섯 단계나 올랐다.

즉.

[축하합니다! 200레벨을 달성하여, 인간의 한계로 또다시 한 번 돌파했습니다!]

[능력치가 한계를 초과합니다!]

드디어, 목표를 달성했다는 의미가 되겠다.

<유서담>

[도합 레벨: 200]

*능력치

[근력 203] [체력 205] [민첩 201]

[기력 1] [마력 373]

*재능

[검술 S+] [사냥 C] [사격 S+]

[요리 D-] [육감 A] [통찰 B]

[원기 SSS] [집중 B]

[기타···.]

*스킬

[주인공 사냥꾼 Lv. 5]

[백색검법(SS)] [인벤토리(S)]

[달마풍천신법(SSS)]

[정신 집중(SS+)] [신성력 변환(F)]

[아라선영 식 마나 써클링(SSS)]

[백색 마녀의 도서관(B)]

[만물을 냉정한 시선으로(B)]

[기계를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법(A)]

[더블 써클(SSS)] [근육 다지기(A)]

200레벨의 효과는 150때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모든 능력치는 결코 레벨보다 높을 수 없었다. 그런데 200을 넘어가는 순간 능력치가 레벨을 초과해버렸으며, 가능성이 무한히 열렸고 심지어 재능과 스킬이 성장하였다.

스킬은 얼마든지 단련을 하면 성장할 수 있지만 능력치와 재능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틀을 벗어 던짐으로써, 가볍게 틀을 깨버린 것이다.

또한 ‘감각’ 계열의 모든 재능과 스킬이 통합하여, 하나의 재능 [육감 A]이 되었다.

유서담은 주먹을 살짝 움켜쥐고서 체내를 감도는 마나를 느꼈다.

이전에는 비교적 편안히 움직일 수 있게 된 마나가, 마치 수족처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고작 5레벨 차이밖에 나지 않음에도 몸이 훨씬 더 가볍고 건강해진 게 느껴졌으며, 끝없이 솟아나는 마나를 느끼고 있자면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봐야, 이제 간신히 테일러 나인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에 유서담은 상당히 침착할 수 있었다.

설중연은 진작 이 경지를 가뿐히 뛰어넘은 350레벨의 현경이었으며, 아라셀리는 과거 500레벨의 9써클을 달성했던 전적이 있다.

그녀들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당장의 준비는 끝났어.’

이제는 정말 지구로 돌아가서 헬 게이트로의 진입을 준비하는 일만 남았다.

“아라셀리. 이번에 내가 지구로 돌아가게 되면, 당분간 이 일을 쉴거 같아.”

“그···러신가요?”

“응. 더블 써클이 됐는데, 아직 지구로의 차원이동은 불가능해?”

그의 말에 아라셀리는 눈을 감고서 차원의 기운을 감지하였다.

“······네. 이곳에서 비비안타와의 거리가 한 발자국이라면, 지구와의 거리는 거의 열 발자국이에요. 거리가 너무 멀어요.”

“흐음. 조금 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다음에 시도해야 하나?”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응? 그럼?”

아라셀리는 조금 아리송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그냥······. 지구 혼자만 멀어요. 다른 대부분의 차원은 지금의 제 힘으로도 나이를 한 살 정도 바치면 얼마든지 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지구는 그게 불가능해요. 혼자 동떨어져 있어요. 마치, 다른 차원들과 격리된 것처럼. 혼자만 다르다는 것처럼. 그저······ 외롭고, 쓸쓸하게. 그렇게 혼자 있어요.”

“그게 무슨······.”

애당초 ‘차원의 거리감’이라는 것을 눈으로 느끼거나 감각으로 느껴본 적도 없는 유서담이었기에 아라셀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라셀리 또한, 차원의 거리감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의 인지도를 넘어간 수준이었기에 제대로 된 묘사가 불가능했다.

‘지구 혼자만 동떨어져 있다···.’

뭔가 이유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려는 그때, 아라셀리의 표정이 살짝 싸해지더니 서서히 굳어갔다.

“이건······.”

“왜 그래?”

“뭔가, 이상해요. 저희 차원에서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아야할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요.”

“뭐? 악마라도 다시 쳐들어온 거야?”

“아뇨. 그게 아니에요. 이건, 마치······.”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저 멀리, 자신의 고향을 느꼈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모든 마나와 3써클의 마나, 더불어 유서담의 마나까지 모조리 소모해야만 했지만 결과는 있었다.

그게 썩 좋지는 않았지만.

“아······.”

다시 눈을 뜬 아라셀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유서담을 바라보았다. 그간 그와 함께 다니며, 수도 없이 보고 느껴왔던 그 기운.

그리고, 어린 시절의 자신을 처참하게 나락으로 내몰고 가려 했던 그 기운.

<······개연성이로군요.>

“뭐? 그게 말이 돼······?”

<아니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어째서 이미 주인공이 사라진 세계에서 또다시 주인공이···?>

“잘 생각해봐. 2부 연재라던가, 외전 연재라던가. 그런 것도 있잖아.”

<주인공이 한 번 죽은 이상, 연재 중단의 수준을 넘어서 그 세계관의 가치가 아예 사라진다고 봐야만 합니다. 다시 주인공이 나타날 일은 거의 없을 텐데,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다시 주인공을 데려다 놓은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군요.>

“······누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가면 갈수록 머리가 아파온다. 아라셀리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유서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공의 재탄생. 그 말은 결국, 그 세계가 멸망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이야기.

아라셀리는 이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어떤 존재가 와도, 그 어떤 강력한 존재가 있다고 하도라도 결코 ‘주인공’이라는 존재를 이길 수 없다.

자신이 혼자 돌아간다고 해서, 주인공을 이길 수는 없단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향이 멸망하는 걸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러고 싶지는 않았으나, 유일하게 주인공을 사냥할 수 있는 존재는 유서담밖에 없는데······.

‘하지만, 교수님은 당분간 주인공 사냥을 그만둔다고 방금 말씀하셨······.’

“뭐 하냐? 빨리 가야지.”

“네?”

“비비안타로 가야 될 거 아니야. 나 먼저 간다? 이제 너까지 배송해줄 개연성이 없어.”

“그, 그게 아니라···. 교수님 당분간 주인공 사냥은 그만두신다고······?”

“···뭔 또 한심한 소리야.”

유서담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헤집었다.

“어차피 헬 게이트 사건 끝난 뒤에, 내 남은 수명은 너를 위해 바칠 생각이었어.”

차원이동을 위해서는 수명을 소모해야만 했다. 그는 수명을 상당량 쌓은 상태였고, 이대로 쭉쭉 수명을 모아서 언젠가는 아라셀리를 지구로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그···렇군요.”

아라셀리는 뺨에 희미하게 홍조를 띠웠다. 이 상황과 썩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만 것이다.

“서두르자. 네 세계가 개판나기 전에 가봐야지.”

“······네!”

별 의미는 없지만, 아라셀리는 유서담의 손을 맞잡고 차원이동을 시전했다. 그의 개연성을 소모하지 않는 탓에 도착하는 장소가 살짝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상관 없다.

이번에도, 계속해서 그와 함께 같은 세상에서 숨쉴 수 있었으니까.

*

한편, 지구.

무림맹주 설중연은 미국땅의 허허벌판에 서서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현재 지구는 꽤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갑작스레 활동을 시작한 헬 게이트. 언제 터져나올지 모른다는 과학자들의 뉴스는 연이어 보도되고 있었고, 몇몇 멸망론자들의 선동에 의해 몇 년치의 식량을 사서 방공호에 처박아두는 사람도 있었다.

“맹주님.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간만에 쉬는 건가요?”

신혜지의 물음에 설중연은 그저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저 과학적인 산출로 인한 수치 덕분에 인간들은 ‘헬 게이트가 팽창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에서 누구보다도 감각이 뛰어난 설중연은 달랐다.

그저, 눈을 감고 있어도 보였다. 귀를 닫으려 해도 들려왔고, 애써 사고하지 않으려 해도 느껴졌다.

저 멀리서 불길한 존재가 스멀스멀, 지구를 향해 자꾸만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헬 게이트는 지구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대화를 시도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또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대체 뭔지······.’

흠칫!

순간, 설중연은 검을 뽑아서 무언가를 겨누었다. 그 찰나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0.0075초.

검이 겨누어진 위치에는, 회색빛의 피부를 가진 웬 사내가 서있었다. 그는 표정이 없었는데, 원래부터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동물이 지구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라고?)”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거기서 거기 아니야? 연약한 피부에 달랑거리는 뼈로 이루어진 신체를 똑같이 가지고 있잖아.)”

사내의 뒤에는 살짝 키가 작은 여인이 서있었는데, 그녀 역시도 회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저들은 무어라 자신들의 언어로 중얼거렸으나 설중연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인간이······ 아닌가?’

설중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이세계에서 찾아온 이종족의 존재는 유서담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그중에는 무공을 익히고자 하는 이가 있었기에 직접 대면한 적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이세계 사람이라기에 저들은 뭔가 이상했다.

마치, 마치······ 자신보다 한 단계 더 위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저들은 나보다 약하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는가?

“(어쨌든, 저 여자한테 기운을 나눠주면 ‘주인공’이 된다는 거 아니야?)”

“(그렇다.)”

“(인간들은 번거롭네~ 왜 하나하나 선택받지 못한 주제에 버러지처럼 꾸역꾸역 삶을 연명하는 걸까? 평생 엑스트라밖에 될 수 없는 운명인데도 자기만족을 하는 건가? 어머, 이 말 안 들리겠지?)”

“(짐승이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풋, 그건 그렇지!)”

회색 피부의 여인은 온통 검은색으로 새카맣게 물든 눈동자를 희번뜩 뜨며 설중연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지구도 빠르게 흡수해야 하니까, 잘부탁 해!)”

그렇게 그녀는 어떤 기운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서걱!

“(······어라?)”

손을 내뻗은 자세 그대로, 그녀의 오른팔이 잘려나갔다.

“(어, 어, 뭐야. 왜, 왜 이래 이거. 어?)”

“(···진정해라. 팔이 잘렸을 뿐이잖나!)”

“(재, 재생이 아, 안 되는······?)”

팔이 잘렸다. 그것도 고작 짐승에게.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완벽한 종족’이었고, 인간같은 하등한 종족의 공격을 결코 감지하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까.

설중연은 검끝을 털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은 모르겠으나, 너희들이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겠구나.”

이런 적이 언제 또 있던가. 하다못해 천마지존으로서, 달마지존에게 멸문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무시를 당한 적은 없다.

그런데 웬 듣도 보도 못한 잡것들이 와서 무시를 하는 꼬라지라니. 설중연으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곱게 돌려보낼 수는 없겠구나.”

직후, 설중연이 춤을 췄다.

헬 게이트에서 찾아온 ‘완벽한 종족’들이 보기에도 더없이 완벽한 춤이었다.

< 두 번째 주인공(1)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