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헬스 메이커(8) >
하늘 높이 솟아오른 뾰족한 서리 기둥. 그 화려하게 피어오른 얼음꽃의 향연을 보며, 그 어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
“······.”
첫째와 둘째 공주 모두 기절한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홀로 서있는 예리나 프리멜리아의 모습은······.
그저, 아름다웠다.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름다웠고, 황위쟁탈전의 승리자였으며.
곧, 여황이었다.
“아······.”
뒤늦게, 누군가가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의 인생과 가문을 모두 첫째 공주에게 걸었던 어떤 귀족이었다. 누군가는 절규하였고, 누군가는 분노하였으며, 누군가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어떤 후원도 없으며 근육의 재능조차 없던 셋째 공주가 황위쟁탈전에서 이길 수 있으리란 것을.
“나, 나는······ 인정할 수 없어.”
“마법이잖아··· 마법으로 이긴 승부를······ 어떻게 인정하냐고!”
몇몇 귀족들이 현실부정을 하였지만, 소용은 별로 없어보였다.
이미 대부분의 백성과 귀족이, 행상과 기사가, 마부와 여관주인이, 추기경과 수녀가, 약제사와 포목상이, 광대와 방랑시인이, 농부와 사냥꾼이, 철학자와 사공이, 그리고 제국 최고의 기사와 여황마저도.
예리나 프리멜리아라는 존재에게 압도되고 말았다.
그녀의 존재는 이 세계 사람들의 상식 그 자체를 개벽시켜놓았다.
근육. 오로지 근육 하나로 뭐든지 가능했던 프리멜리아 제국이었다.
힘이 세다는 건 곧 신분과 권력이 세다는 것이었고, 무엇이든 원한다면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 제국의 여황은 가장 강한 자여야만 했다.
그래서 마법은 항상 배척당했다. 마법은 결코 ‘강함’과 어울리지 않는, 허약한 자들이나 익히는 잡기에 불과했기에 마법사는 가문의 수치로 여겨져 족보에서 파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며 어딜 가더라도 돌팔매질을 당하거나 비웃음을 받았다.
그런 마법사가, 황위쟁탈전에서 가장 강한 두 공주를 꺾고서 홀로 서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차디찬 마법은 강했고, 아름다웠으며, 가히 황제의 권위에 걸맞을 만큼의 위엄이 있었다.
온몸에 흙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예리나 프리멜리아의 카리스마.
그저 눈을 살짝 흘기며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기는 행위조차 우아했으며 기품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황제를 하기 위해 태어난 여인이라는 것처럼.
여태껏 잊고 있었다.
진정한 황제가 무엇인지를.
어째서 근육이 튼튼하다고, 그저 쇠질 잘하고 주먹 잘 휘두르면 황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가?
진정한 황제는 저 예리나 프리멜리아처럼 기품있고 예절이 바르며 책략과 정치에 능통하고 황제의 품격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무게감이 있어야하는데 말이다.
-···현 시간부로, 황위쟁탈전을 종료하겠다.
여황 프리멜 프리멜리아의 목소리아 중후하게 울려저폈다. 옛날처럼 육중한 느낌은 없었지만, 여전히 무게감 있으며 또한 더욱 깊어진 목소리였다.
-다음 대의 황제가 결정되었군. 모두, 제국의 변화에 준비하도록 하여라.
*
그 시각, 나는 밑작업을 구경하고 있었다.
둘째 공주의 후견인이자 이 세계의 용사라고 불리기도 하는 주인공, 아이반을 사냥하는 밑작업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아이반은 틀림없이 죽음을 맞이할 터. 별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쟁탈전에서 패배한 공주와 그 후견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시스템은 너무 가혹해요. 분명 역사 속 황족들 중에는 황위쟁탈전에 관심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고픈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만약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이 시스템을 당장 먼저 뜯어고치겠노라 예리나가 단단히 결심해버린 것.
나는 그녀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여태껏 노력해온 게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는 않다.
황위쟁탈전에서 승리한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반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으니까.
물론, 다시 말하지만 내가 밑작업을 치는 게 아니다. 밑작업을 구경하는 거다.
“용사! 이대로 정말 죽음을 기다릴 생각입니까! 근육도 없이 허약한 셋째 따위가 제국을 차지했다가는, 분명 타국의 비웃음을 살게 뻔합니다!”
저 말을 한 자는 둘째 공주를 전폭 지지하던 드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는 어떤 백작이다.
“맞는 말이오. 지금까지는 우리가 경쟁해왔지만,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가 되었소이다. 우리 함께 제국을 지켜냅시다!”
저 말을 한 자는 첫째 공주를 뒤에서 후원하던 공작의 충실한 수하로 활동하던 어떤 후작이며.
“함께 합시다, 용사! 첫째 공주의 후견인 마라셀로나 하이반 공작은 늙어서 그런지 황위쟁탈전에서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고 내려놓더군. 믿을 건 용사, 당신밖에는 없소!”
저 말을 한 자는 첫째와 둘째 모두의 라인을 잡고서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하던 어떤 대상인이었다.
[주인공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개연성에 의하여 에피소드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수많은 귀족들과의 밀회. 아이반은 눈을 감고 있다가, 고민을 끝마친 뒤 서서히 눈을 떴다.
“···그래. 맞는 말이오! 우리가 고작 마법 따위에 제국을 내어주기 위해 여태 근육을 단련해왔습니까! 말이 되지 않는 소리지!”
“옳소! 옳소!”
아이반이 외치고, 귀족들이 동조하고.
용사는 자신의 근육에 힘을 줘서 뿌드득! 힘줄을 울끈불끈 돋아냈다.
“오래 지체할 필요는 없소. 당장 오늘 밤, 제국을 뒤집어 엎어서 공주님들을 구하고, 제국을 구합시다!”
반란.
용사와 귀족들은 셋째 공주 예리나를 향해 반기를 들 생각인 것이다.
그건 예리나의 황제로서의 첫 번째 시련같은 것이었으나······ 저 사건에 ‘개연성’이 지대하게 기입해있는 이상 안타깝게도 예리나는 결코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내가 일해야 할 차례라는 소리지.’
내게는 이유가 필요했다.
용사를 죽여도 되는 이유가.
여태까지는 그 이유가 없어서 용사를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셋째 공주 예리나가 여황이 될 자격을 얻었으며, 심지어 저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가자, 아라셀리. 이쪽 세계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시간이 가속됩니다.]
*
“끄아아악!”
“바, 반란이다!”
“네놈들! 그러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느-커헉!”
저녁의 프리멜캐슬 황성은 노을빛을 은은하게 받아서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듯하다고, 어떤 책이 묘사되어있었다.
그러나 그건 더 이상 단순한 묘사가 아니게 되었다. 황성에는 진짜로 불이 붙었고, 피바람이 불었다.
첫째와 둘째 공주를 후원하던 귀족들이 셋째 공주를 인정하지 못하고, 결국 들고 일어난 것이다.
예리나는 자신의 궁전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여황의 친위대가 나서서 반란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귀족들의 병력 역시 만만치 않게 강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반란은 제압할 수 있을 거야······.’
그건 틀림없다. 급조된 사병 따위로는 결코 황성의 정예 병력을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그때까지 과연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있을까?
비록 예리나 자신은 다음 대의 여황이었지만, 여전히 현재의 여황은 프리멜 프리멜리아다. 인수인계가 끝나기 전까지 모든 병력은 그녀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결국,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만 한다는 건데······.
빠직! 쿵!
“읏···!”
아래층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무식하게도 벽을 주먹으로 쳐서 부수고 있는 것이다. 저랬다가는 성이 무너질 텐데.
‘······나를 잡기 위해 급해진 거겠지!’
비록 자신을 지켜줄 자가 아무도 없더라도, 얌전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예리나는 최대한 황성의 가장 위쪽으로 도망쳤다.
본디 여황이 확정된 공주는 제1황성으로 옮겨가는 게 정상이었으며, 만약 그곳에 있었다면 여황과 함께 병력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위쟁탈전이 끝난 직후, 황성을 옮기기도 전에 반란이 발생했다는 것은 결국 다음 대의 황제가 될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
애초에 저들은 반란을 성공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냥.
마법 따위로 황제가 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누가 이대로 죽어줄까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유서담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는데.
예리나는 계단을 박차듯이 즈려밟고서 가장 높은 층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현재 머물고 있던 황성은 제9황성으로서, 꼭대기가 40층이나 되었다.
다른 병력들이 뒤늦게 예리나를 지키기 위해 찾아오더라도 중간층을 장악한 귀족들의 사병에 의해 가로막힐 터.
“저기 셋째 공주가 있다!”
“잡아라!”
“사로잡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냥 죽이도록 해라!”
아래에서 쫓아오는 사병들의 모습을 보며 예리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휘이잉······!!
옥상의 문을 박차고 열자,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슬슬 가을이 시작되려는 것 같다며, 예리나는 잠시 딴생각을 하고 말았다.
탓! 바닥을 박차고서 힘껏 허공에 몸을 내던지자, 뒤늦게 반란군의 날붙이가 그녀가 서있던 자리를 베어냈다.
후우웅···.
“······.”
반란군을 이를 꽉 깨물고서 허공을 디딘 채 서있는 예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자유로이 휘날리며 웃었다.
“활이라도 들고 오지 그랬어요? 아, 그건 원거리 무기니까 겁쟁이들이나 쓰는 거라고 안 쓰시려나?”
예리나는 최대한 허세를 부렸다. 공중 부유 마법은 5써클의 마법이다. 이것을 사용하는 동안은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단 말이다.
최대한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면 간신히 1~2써클의 마법을 캐스팅할 수는 있겠지만 저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는 없다.
‘그래도, 허세 정도는 부릴 수 있겠지······.’
그녀는 양손에 불꽃을 피워올렸다. 단 세 개밖에 못하는 캐스팅 매직 중에서 하나를 꺼낸 것.
4써클의 마법, ‘파이엑시티움’이 발동되자 반란군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저, 저게 무슨······.”
“하늘을 날면서 마법을 쓴다니···.”
예리나는 힘껏 손을 휘둘렀고, 옥상의 절반이 뜯어져 나갈 정도의 불꽃 세례가 터져나갔다.
화아아악!!
바람에 의해 불길이 더욱 거세게 번지자, 제9황성의 옥상은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곳보다도 더욱 화려하고 거세게 불타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런 이유로, 예리나가 하늘을 날며 마법을 쓰는 광경은 40층에 도착한 반란군 뿐만이 아니라 지상에서 하늘을 지켜보고 있던 황성의 병력들 대부분이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여태 힘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야?”
“저, 저런 걸 어떻게 이겨···. 하늘을 날면서 마법을 사용한다니!”
이미 그들은 예리나의 공포를 실컷 경험하였다. 두 명의 공주를 가볍게 압도하던 그 위대한 마법을!
“하아, 하아···.”
하지만 그때 그건, 마법이 충분히 준비되었기 때문이었으며 허공을 날면서는 마법을 많이 사용할 수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공중에 부유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동하는 데에는 너무나도 많은 마나가 소모된다. 여황이 칩거하는 제0황성까지 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무리 저들이라도 그때까지 자존심을 세우지는 않을 터.
화살을 잔뜩 준비해와서 마구잡이로 쏴대면 실드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그대로 추락해버릴 것이다.
‘나는, 대체 어떻게······!’
“젠장, 저런 공주를 대체 어떻게 잡으란 거야!”
모두가 절망적인 상대를 두고서 깊은 상심에 빠진 그때.
제9황성 옥상의 바닥이 뜯어지며.
거대한 덩치를 가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 아이반 파에덴이었다.
“요, 용사님이다! 용사님이 우리를 위해 참전하였다!”
“와아아아!!”
아이반은 콧김을 뿜어내며 바닥에 손을 꽂아넣어, 그대로 지반을 뜯어낸 뒤 예리나를 향해 집어던졌다.
꾸웅!!
“꺄악!”
남은 2개의 캐스팅 마법 중 하나인 실드를 펼쳐서 급히 막아냈지만, 심하게 휘청거렸다. 심지어 그것을 맞은 뒤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이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공중 부유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심력 소모가 심하지?”
제국의 다른 전사들과는 다르게, 아이반은 타대륙을 전전하며 마법사들과의 결투를 해본 경험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공중 부유 마법은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예리나가 사용하는 것 자체는 놀라웠으나 결국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화가 없을 것이다.
우드드득!!
다시 한번 바닥을 뜯어낸다.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아이반의 손에 들어올려지자 예리나는 입술에 피가 나도록 꽉 깨물었다.
더 이상 저 공격을 받아내는 건 불가능.
‘정말, 이대로 허무하게······.’
그런 절망적인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
아이반의 머리 위에, 웬 사람 한 명이 나타나더니 뚝 떨어져 내렸다.
퍽!
“컥!”
“켁!”
자신이 들고있던 바위에 그대로 깔려버린 아이반. 그리고 옆쪽으로 데굴데굴 구르며 등장한, 유서담.
유서담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허공에 떠있는 시계를 확인하였다.
“미친···. 왜 이렇게 많이 가속한 거야.”
<마지막 남은 개연성을 쥐어짜내다보니, 시간을 조금 앞질러간 것 같군요. 제 잘못은 아닙니다.>
“···아주 전부 내 잘못이지?”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허공에 둥실 떠있는 예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드레스는 양옆이 탁 찢어져서 달리기 좋은 형태가 되어있었고, 예쁘게 땋아 올렸던 머리는 이미 거칠게 풀어 헤쳐진 채였다.
예리나는 입을 꽉 다문 채로, 뭔가, 뭔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틀어막기 위해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고 있으니까 되게 못생겼다 너.”
“······!”
움찔, 예리나가 몰골을 깨닫고 황급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자 바닥이 들썩이며 누군가가 거칠게 일어났다.
용사 아이반. 흑빛으로 빛나는 자신의 근육을 꿈틀거리며, 마치 한 마리의 맹수를 닮은 눈빛으로 유서담을 노려보았다.
유서담 역시 인벤토리에서 새하얀 검을 꺼내어 용사 아이반에게 겨누었다.
“그래도, 지금 그 모습이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네.”
그 말을 끝마친 즉시 유서담과 아이반은 서로에게 달려들었고.
······짧은 전투 이후, 40층 높이의 황성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15분 뒤.
제국의 정예병력이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폐하. 반란의 주도자, 전 용사 아이반 파에덴이 셋째 공주의 후견인, 나무꾼 유서담에게 패배했습니다.”
전직 용사가 나무꾼에게 패배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여황 프리멜 프리멜리아는 한참을 웃었다.
정말로, 한참이나 웃었다.
< 프린헬스 메이커(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