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헬스 메이커(6) >
첫 번째 과목, 전투력에서 예리나 프리멜리아가 그토록 압도적인 모습을 선보였음에도 여전히 근육질의 첫째와 둘째가 이기기를 바라는 이들은 많았다.
마법 따위가 이기기를 원치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과목, 세 번째 과목에서도 다른 공주들은 예리나를 결코 이길 수 없었다.
기품, 예절, 매력, 제왕학, 그 어느 분야에서도 예리나는 뛰어났다.
그냥 뛰어난 게 아니라, 완벽했다.
다른 공주들이 그저 근육을 내세워서 매력을 뽐내고, 근육에 의한 제왕을 꿈꾸는 반면 예리나의 가치관에는 선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근육을 많이 키운 자가 기품이 있어야 정상이었다.
근육을 많이 키운 자가 포징을 하면, 그것이 바로 예절이 있는 것이었고 근육을 많이 키운 자가 곧 매력이 넘치는 게 정상이었다.
예리나 공주? 기껏해야 3대 100은 칠까 말까 하는 수준이다.
기품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는, 매력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는, 카리스마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는 그런 허약한 신체란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가 달랐다.
“여, 역시 둘째 공주님! 근육이··· 남다르시니 기품이 있을 수밖에··· 없지···.”
“마···맞아!”
사람들은 겉으로 첫째와 둘째를 응원하였다. 그러면서, 자꾸만 셋째 공주에게 시선이 가는 스스로를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근육도 없는 저 약골이 뭐가 좋다고 자꾸만 눈이 가는 걸까.
왜 이렇게, 오늘따라 다르게 느껴지느냔 말이다.
근육도 없는 주제에 그녀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위엄이 있었고, 무게감이 있었으며, 깊이가 있었고, 매력이 있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백성들은 귀를 기울였고, 걸음 한걸음에 시선을 빼앗겼으며, 손짓 하나에 고개를 조아렸다.
예리나 프리멜리아에게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풍겨져 나왔다.
[조연 케리나 프리멜리아가 스킬 ‘프론트 더블 바이셉스(S)’를 사용합니다.]
[그녀의 근육이 일시적으로 1.5배 이상 펌핑되어, 압도적인 위압감을 선사합니다!]
둘째 공주의 후견인, 용사 아이반은 수많은 근육 단련법과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선사하는 머슬 포징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계의 지식보다 최소 10년에서 100년은 앞서고 있는, 압도적인 기술력이었으나.
[악역 예리나 프리멜리아가 스킬 ‘황제의 기백(SSS)’을 사용합니다.]
애초에 근육으로 승부하지 않고서, 순수 기량으로 승부하는 예리나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주인공에게 위기가 감지되었습니다!]
[후견인 유서담이 ‘악역’으로 지정됩니다.]
그 메시지를 보고서도 유서담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예리나는 애초에 악역이 될 예정이었단 건가.’
아마도, 첫째 공주는 스토리 전개상 보여주기식 라이벌이었으며 셋째 공주 예리나는 이야기의 절정에 등장하여, 주인공에게 어떠한 위기감을 주게 만드는 악역2 정도의 캐릭터였을 것이다.
아마도 근육을 단련하지 않은 주제에 지식과 황제의 자질, 웅변술 등으로 승부하는 컨셉이었을 터. 하지만 아라셀리의 개입으로 인해, 그녀는 마법까지 익혀서 근육을 뛰어넘는 ‘강함’을 얻게 되었다.
결코 근육 하나만으로 뛰어넘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완벽한 악역!
그러나 이 세계의 주인공은 모든 개연성을 ‘근육’에 쏟아붓고 있었다. 위기가 닥쳐왔다? 그렇다면, 근육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바뀝니다.]
“······셋 모두 훌륭하도다. 가히 황제의 자질을 갖춘 이들이 많으니, 제국의 미래가 밝고 창창하여 안심이 되는군! 허나, 황제의 자격을 갖췄다고 해서 모두가 황제가 될 수는 없는 법. 마지막 시험을 시작하겠다.”
여황 프리멜 프리멜리아는 세 공주를 무릎 꿇린 채, 최종 관문을 설명하였다.
“공주들이여, 익히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최근 동타마틴 연합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그들이 전쟁 마법을 연마하여 제국에게 도전하겠다고 하는군.”
“감히! 마법 따위로! 이번 시험을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까? 제가 당장 나서서 부숴버리겠습니다!”
“저에게 맡겨만 주시지요, 폐하!”
첫째와 둘째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고, 정예 부대를 보유했기에 당장 전쟁을 치르더라도 혁혁한 공을 세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예리나는 달랐다. 그 수많은 귀족들 중 누구도 예리나의 라인에 서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 어떤 세력도 갖추지 못했다.
‘전쟁은······ 절대 무리야······.’
예리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이야기의 흐름상 전쟁 이야기가 나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전쟁에서 공을 세운 공주가 여황이 되었던 역사가 있었기에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 여기서 평범하게 개연성에 의해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었다면, 분명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에게 황위가 돌아가는 식으로 진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주인공이 아닌, 또다른 어떤 간섭에 의해 그 ‘이야기의 흐름’이 살짝이지만 비틀어진 상태.
‘예리나 프리멜리아······.’
여황은 자꾸만 황제의 기백이 느껴지는 예리나에게 마음이 이끌렸다.
시험은 모두에게 공평해야만 한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전쟁의 공을 세우라는 것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여황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귀족에게도 백성들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셋째 공주.’
그러나, 여황이라는 아주 강력한 우군이, 그녀의 편을 들어준다면?
물론 신성한 황위쟁탈전의 시험에서 한 명의 공주를 편애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명예롭지 못하게 황제가 된다면 결코 제국의 미래가 밝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최소한.
셋째 공주에게도 평등한 시험을 치르면 되는 문제였다.
“···아니! 마지막 시험은 ‘대련’이다. 그대들의 강함을 마지막으로 증명하여, 과연 그대들에게 제국의 안위를 맡겨도 될 것인지를 결정토록 하겠다!”
“······!”
여황의 말이 떨어지자 세 명의 공주가 눈동자를 부릅 떴다.
“대련의 룰은 간단하다. 세 명의 공주가 모두 페로델의 돔에 동시에 서서, 다른 두 명의 공주가 쓰러질 때까지 두 발로 대지를 딛고서 버틴다. 페로델에는 정글과 사막, 숲과 평야, 강과 바다가 모두 존재할 것이니 공주들은 현명하게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다른 두 공주를 쓰러뜨리도록 하여라. 질문 있는가?”
세 명의 공주가 모두 침묵하자, 여황은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주들의 활약을 기대하도록 하지!”
목숨과 운명이 모두 걸린 마지막 시험. 예리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길 수 있어!’
*
1vs1vs1의 개인전 대련이 황위쟁탈전 역사상 아예 없던 것은 아니나, 이번 대의 공주들은 역사 속에서도 굉장히 드문 강함과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었기에 어마어마한 관심사가 되었다.
누군가는 노련한 첫째 공주가 이길 것이라느나, 누군가는 강인한 신체를 가진 둘째가 결국 이길 것이라느니 추측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셋째 공주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다시피 했다.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차라리 셋째 공주가 나약하다며 흉을 봤을 귀족들조차 모두 침묵하였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페로델의 돔은 굉장히 거대했고, 세 명의 공주는 각자 다른 위치에서 출발하기에 시작부터 다른 공주를 만날 수는 없었다.
-출발하라!
마법으로 울리는 여황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예리나는 한걸음 경기장으로 발을 내딛었다.
목숨을 건 싸움이다. 여기서 패배하면,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던 유서담마저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럴 수는 없어. 나를 믿고 5년이나 기다려주신 분을 결코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
그녀가 출발한 장소의 지형은 평범한 숲이었다. 험하지는 않지만, 장기간 움직였다가는 체력이 지속적으로 손실될 것이다.
‘전략적으로 싸워야 해.’
모두가 다른 위치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분명히 전략적인 요소를 가미하라는 이야기다.
두 명의 공주가 서로 싸우다가 한 명은 탈락하고, 다른 한 명이 지쳐있을 때 공격할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베스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두 공주는 전략을 거의 생각하지 않아. 비겁하게 숨고, 전략을 세우고, 상대의 약점을 골똘이 고민하는 건 약한 자들이나 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오로지 근육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까지 달려온 두 공주였기에, 이번 시험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리나 공주는 천천히 움직이며 마법으로 주변의 기운을 탐색하였다. 거의 1시간 내내 숲길을 걷다보니, 드넓은 갈대 평야 나타났다. 덩치가 큰 두 명의 공주가 몸을 숨기기에 갈대는 너무나도 작았다.
‘그래도 전장으로서 싸운다면, 분명 여기를 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멀리서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꾸웅-!!
이 육중한 충격.
틀림없다. 두 공주가 충돌한 것이다.
‘위치는, 정글인가?’
예리나는 서둘러 정글을 향해 달렸다.
‘하필이면 정글······!’
체력이 약한 예리나에게 있어서 자꾸만 발이 빠지고 지형지물이 울퉁불퉁한 정글은 최악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두 명의 공주가 무식하게 치고받고 싸운 뒤 기습한다면 문제없이 이길 수 있다.
그래도.
‘···전사와의 일대일은, 긴장해야만 하겠지.’
일전에 아라셀리에게 물어본 적 있다.
‘아라셀리 양. 전사와 일대일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야 당연히······.’
그녀는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도망쳐야죠.’
‘···네?’
‘마법사는 절대 전사를 이길 수 없어요. 실력이 동등하다는 가정하에.’
‘하, 하지만 저번에 후견인님은 제국 최고의 수호기사 자베로프를 마법만으로 쓰러뜨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교수님의 수준이 그 기사보다 월등히 높아서 그런 거죠. 하지만 공주님은 그렇지 않잖아요?’
즉, 마법사는 전사와의 싸움을 무조건적으로 회피해야만 한다고 아라셀리는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아주 만약에, 전사와 싸우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그녀는 짧게 고민했고,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손가락을 튕겼다.
‘교수님이 쓰는 방식을 사용하면 되겠는데요?’
‘후견인님의 방식인가요?’
‘네. 그게 뭐냐면······.’
흠칫.
좋지 않은 기분이 느껴진다. 뭔가가 이상하다. 충돌이 너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저들 딴에는 숨기려고 숨겼겠지만, 감각이 예민한 예리나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예리나는 바닥에 손을 짚어 마력을 발산하였다.
‘그래, 과연··· 그렇구나.’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혀 상정하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어쩌면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저벅!
전방에서 두 명의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언니들. 격렬하게 싸우시던 것 치고는 상태가 괜찮아 보이시네요?”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충격. 그건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체력이 약한 마법사에게 가장 불리한 전장인 정글에게로, 예리나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
“······.”
그녀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깊게 드리운 음영이 두 언니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렇다.
자존심 강한 두 언니는, 현실을 직시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별것도 아닌 행위였다. 적에게 약점이나 다름없는 장소로 유인하고 싸우는 척을 해서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정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너무나도 간단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건 저 두 명의 공주에게 상당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결국, 나약한 자들이나 노린다는 ‘약점’을 파악하고, 근육이 부족한 놈들이나 한다는 ‘전략’을 세우셨군요. 그렇죠?”
그래서 예리나는 기뻤다. 누군가 본다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기뻐서 카타르시스가 온몸에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약하다고 멸시당했다. 근성이 없다며 폭언과 욕설을 듣는 게 일상이었으며, 그 어떤 귀족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고, 그럼에도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그런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예리나 프리멜리아라는 자그마한 소녀에게 대항하기 위해 제국 역사상 가장 강할 것이라고 평가받는 두 명의 공주가 힘을 합친 것이다.
조용히 바닥에 손을 짚고 있던 예리나는 천천히 허리를 당당하게 펴고서, 두 공주와 마주하였다.
170cm이나 되는 큰 키였거늘, 2m를 가뿐히 넘기는 언니들에게는 한참 못미친다. 그럼에도 이 광경을 지켜보는 그 누구도 예리나에게 감히 작아보인다는 말을 쓸 수는 없었다.
오히려, 두 공주는 예리나에게서 거대한 벽을 느꼈다. 결코 부술 수도, 넘을 수도 없는 벽.
그런 생각을 한 자신들이 혐오스러워져, 공주들은 근육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언니들.”
< 프린헬스 메이커(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