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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21화 (221/251)

< 프린헬스 메이커(4) >

예리나 공주가 고생길이 될 거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아라셀리나 유서담이나 이번 여행이 고생길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등장하는 괴수들은 총기로도 간단히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하기 짝이 없었고, 가끔 삼류 악당들이 건들거리며 다가오면 적당히 쥐어 패주면서 스트레스를 풀면 되었다.

언제나 긴장 속에서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시뻘겋게 눈을 뜨고서 밤을 지새우던 전장에 비하면야, 이건 그냥 힐링 여행이었다.

물론, 예리나에게는 전혀 힐링이 아니었다. 비록 괴수나 도적들이 목숨에 위협을 주지는 못했지만, 스스로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태껏 공주로 살면서 알지 못했던 제국의 이면.

도대체, 500년이 지나도록 이 거대한 제국이 어떻게 유지되었는지조차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참상이 예리나의 두 눈과 귀에 날카롭게 틀어박혔다.

‘주인공 보정으로 유지되고 있었겠지.’

주인공 보정은 참으로 특이해서, ‘주인공이 관측하지 않는 뒷배경’은 물리법칙이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일전에 이세계 용사물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꽤 많은 수의 주인공이 이런 상식개벽계열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나 만백성과 귀족들이 근육을 단련하여 강함으로 모든 것을 취한다는, 말도 안 되는 무식한 설정의 세계관 같은 경우에는 그러한 것이 더욱 심했다.

이러한 세계관의 은근한 변화는 주인공 용사 아이반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근육 단련법을 지니고 있다’라는 그 능력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번 건은 이세계 용사물의 주인공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 당시에는 그저 주인공에게 진짜 상식을 주입시키는 것만으로 간단히 해겨할 수 있었지만, 이 세계는 엄연히 진짜로 존재하는 상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 이 근육 사태가 주인공에 의한 것이 아닌, 500년 전부터 조상들이 바꿔온 것이라는 설정이었으니 주인공 하나 죽인다고 이 설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주인공이 죽으면, 근육 사태의 부작용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어······ 제국은 멸망하는 결과가 되겠지.’

하지만, 만약 예리나가 제대로 된 상식을 가지고서 여황이 된다면.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요.”

“그래.”

그런 부작용은 전혀 없이, 이 세계는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

제왕학은 본디 최고의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지도교사를 초빙한다.

먼 과거에는 숲속에 숨어사는 현자를 데려오기도 했으며, 현명한 마법사에게 배우거나 수학자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으나, 현대의 프리멜리아는 더 이상 학자들을 초빙하지 않았다.

더 용감하고, 더 튼튼한 근육을 가진 자가 곧 지도교사의 자격을 얻는다.

그렇기에, 정상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예리나는 황궁의 구석에 위치한 낡고 녹슨 도서관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하는 사람조차 없어서 첫날에는 하루종일 거미줄을 걷어내거나 먼지를 털어내고, 책을 정리하는 데에만 시간을 쏟아야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몇몇 책은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읽을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공부는 충분히 할 수 있겠어요.”

유서담은 예리나가 펼친 낡은 책을 보고서 혀를 내둘렀다.

대한민국의 500년 전 글자는 조선시대의 글자이다. 현대인에게 500년 전의 글자를 읽으라고 하면 읽을 수 있겠는가?

언어학자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예리나는 옛 시대의 책을 읽기 위해, 스스로 언어학자가 되어 글자를 하나하나 해석해가며 공부를 하였다.

‘대단하긴 대단하네.’

꼭 근육을 단련하고, 적 앞에서 겁먹지 않아야만 강철의 의지를 가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공부를 포기했던 유서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예리나의 저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가 더욱 대단해보였다.

“······근데 넌 뭐 하냐?”

“네? 여기 흥미로운 병법서가 많아서요. 이세계의 언어 체계도 재미있구요. 뭐든 많이 알면 좋잖아요?”

“그러냐······.”

지식을 기억하는 일반인과는 다르게, 인간의 경지를 아득하게 초월했던 아라셀리는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한다. 백색 마녀의 도서관과 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어했고, 그 왕성한 호기심 덕에 언제 어디서나 항상 책을 읽고는 했다.

그런 그녀가 이세계의 전통과 역사가 잠들어있는 도서관에 왔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나 지금부터 시간 가속 할 건데······.”

“저는 괜찮으니까, 교수님 먼저 하세요.”

“컥.”

여태껏 함께 시간 가속을 해왔던 아라셀리가 책에 푹 빠져서는 처음으로 유서담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였는데, 이건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

항상 아빠거리며 쫄래쫄래 따라오던 사랑스러운 딸내미에게 어느덧 사춘기가 와서 냉랭해진 그 기분!

비록 딸은 없었지만, 딸을 가진 아빠의 마음을 순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나 혼자 간다?”

“네에.”

“···진짜 혼자 간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렇다고 말하려던 유서담은 애써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그것을 입에 담지 않고서 홀로 시간 가속을 하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1년.

황위쟁탈전이 바로 코앞이다.

*

황위쟁탈전이라는 특이한 제도는 500년 전, 근육이 제국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당시, 황태자가 첫째 공주보다 근육도 약하고 의지도 약한 주제에 차기 황제라는 이유로 갑질을 해대며 설쳤는데, 여황이 이를 못마땅하게 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날 이후 ‘황녀’와 ‘황태자’라는 이름은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자식은 공평하게 왕자와 공주로 칭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근육을 단련하지 않고서는 감히 황제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폐하. 황위쟁탈전을 위해 세 공주가 모두 모였습니다.”

“음.”

황위쟁탈전은 국가적 프로젝트이자 국가적 축제나 다름없었다. 타국의 참관을 허락하며, 귀족이 아닌 백성들도 구경할 수 있다.

오로지 황위쟁탈전만을 위해 세워진 도시 ‘페로델의 돔’은 한철 장사를 위해 모인 장사꾼으로 북적였고, 상인들에게는 영지를 가진 귀족들에게 어떻게든 들러붙기 위한 기회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목적을 위해 페로델의 돔에 모였다.

저 하늘 높이 펼쳐진 둥그런 형태의 돔을 바라보며, 여황 프리멜 프리멜리아는 자신의 앞에 무릎꿇고 앉아있는 여섯 명을 바라보았다.

첫째 공주와 전쟁 영웅.

둘째 공주와 용사.

셋째 공주와······ 나무꾼.

여황의 시선은 유난히도 나무꾼을 향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그저, 귀족들은 여황을 보고서 수군거릴 뿐.

‘폐하의 근육이 조금 빠지신 것 같지 않나?’

‘최근 근육의 단련을 줄이고 독서를 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쉿! 헛소문이 틀림없겠지!’

‘하지만 정말로 근육이 엄청 빠진 것처럼 보이지 않나? 작년보다 훨씬 얇아지셨단 말일세.’

‘흠! 지금이라면 내가 근력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건방지긴!’

귀족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유서담의 예민한 귓가에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들어 여황을 보니, 확실히 2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근육이 빠져있었다.

‘흐음······.’

고민은 길게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그 어떤 귀족과 백성과 기사와 병사들은 결코 공주들을 도울 수 없다! 만약 전장에서 공주가 죽는다면, 백성들은 그것을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다. 그건 공주가 약해서 죽은 것이니!”

여황의 묵직한 외침에 좌중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개판이네.’

이게 올림픽인지 황위쟁탈전인지 슬슬 헷갈린다.

“전투력을 시험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 ‘난관 돌파’를 지금 바로 시작하겠다!”

그 말이 떨어지자 세 명의 공주가 모두 일어서서 자신의 후견인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후견인에게 믿고 의지하여 살아왔지만, 지금부터는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으리라.

유서담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예리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적엔 잘 먹지도 못하던 열넷의 소녀였던 탓인지, 키도 작고 빼빼 말라 있었는데 지금은 170cm가 넘어가는 훤칠한 키에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쇼핑몰 모델이라도 시작하면 그날 이후로 SNS가 폭발할지도 모르겠다.

“공부는 잘 됐어?”

“물론이죠.”

그녀는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서 드러나는 자신감에 유서담은 안심할 수 있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둘째 공주 케리나가 이 세계관의 주인공, 용사 아이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화분. 엿들어봐.’

-······하여, 동타마틴 연합국에서 강대한 마법을 준비했다고 하는군. 대처할 수 있겠는가?

-걱정 마라, 공주. 마법 따위는 이 근육으로 모조리 부숴버릴 수 있습니다! 공주는 황위쟁탈전에만 신경쓰면 된다!

대충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아마도 메인 스토리로 따지자면, 저건 [2부 스토리]의 떡밥일 것이다.

‘근육 하나로 마침내 제국을 정복한 용사 아이반과 둘째 공주 케리나!’가 1부의 내용이라면 ‘충격! 강력한 마법의 습격?! 하지만 충분히 단련된 근육은 마법을 파괴한다!’가 2부의 내용일 것이다.

본래 하나의 내용만 질질 끌며 전개되면 사람들은 질려하기 마련.

‘이 세계의 결말은 결국 단련된 근육으로 마법마저도 파괴하고, 전 세계를 완전히 통일시키는 내용인가?’

소설을 써본 적은 없지만, 너무나도 많은 클리셰를 접했기에 이후의 전개를 예상하는 것은 쉬웠다.

‘세계의 50%를 제국이 정복했다는 현 상황도 충격적인데 100% 정복이라니······.’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가서 죄다 뭉개버려.”

“후후···. 한 명의 공주가 탈락할 때까지 서로간의 결투는 금지에요.”

“그랬나?”

“그럼요.”

저번에 설명했던 내용이지만 유서담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하지만 예리나는 유서담이 원래 마이웨이를 추구하는 사람인 것을 잘 알았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변함없는 그의 모습이 더욱 좋았다.

“그러면······ 꼭 이기고 돌아올게요.”

현재 예리나 프리멜리아의 마법 성취도는 무려 5써클이나, 다른 공주들의 신체 스펙 역시 그에 상응하는 A랭크 상위권의 수준이었기에 결코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괴력 하나만 믿고 싸우는 전사를 무너뜨릴 수 있는 마법 전략을 아라셀리가 충분히 설명해주기는 했지만,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후우, 이제부터 시작이야.’

세 명의 공주가 묵직한 걸음걸이로 페로델의 돔을 향해 걸어가자 모두가 침묵하였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500년 역사에 다시 없던, 역대급의 신체 스펙을 가진 공주 두 명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3대 7,000을 가뿐히 넘긴 공주들의 싸움은, 도대체 얼마나 치열할 것이란 말인가?

그에 비해 셋째 공주는 여전히 비실비실하고 근육도 거의 없어 보여서, 그저 비난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예, 예쁘기는 정말 예쁘군요.”

“그러게······.”

···그럴 예정이었으나, 5년 만에 돌아온 셋째 공주 예리나는 너무나도 화려한 모습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 소심하고 말도 못하던 막내 공주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예리나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두 언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자신감은, 근육이 없다며 함부로 비판하려던 이들의 말을 쏙 들어가게 만들 정도였다.

다른 그 누구도 알 수 없었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단 한 명.

여황 프리멜 프리멜리아는 예리나가 풍기는 저 기백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선왕이 생각나는 눈빛이군.’

그건, 진짜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기백.

[예리나 프리멜리아가 스킬 ‘황제의 기백(SSS)’을 각성하기 직전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의뢰인은 침음을 흘렸다.

개연성이 서서히 옮겨오고 있다.

예리나에게? 아니다.

유서담에게, 주인공의 개연성이 아주 극소량이지만 조금씩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지?>

개연성은 진작에 모두 소모했다. 주인공이 될만한 행위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자꾸만 유서담에게 불변의 개연성이 이끌린단 말인가.

그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었기에, 그녀의 속이 점점 더 타들어갔다.

< 프린헬스 메이커(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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