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헬스 메이커(3)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이 세계에 도착한 지도 3년이 되었다. 물론 유서담과 아라셀리는 개연성을 소모하여 [시간 가속]을 하여, 실질적으로 이곳에 머문 시간은 3개월에서 4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은 예리나의 수업 시간이었고, 몬스터가 침입해오는 등의 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시간 가속이 멈출 일은 없었기에 빠르게 이야기를 스킵할 수 있었다.
‘이건 좀 편하네.’
새삼 주인공이라는 존재들이 개연성을 기반으로 하여 얼마나 편리한 삶을 살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개연성을 또다시 몸에 담는 행위는 아주 위험할 것이라고 하여, 더 이상 개연성을 이용해 주인공 체험을 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간, 예리나는 꽤 빠르게 바뀌어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소심하며 자존감 낮은 열넷의 소녀 공주 예리나는 어느덧 열일곱이 되었다.
기품, 매력, 예절 등을 배워서 그녀는 자신을 한껏 꾸밀 줄 알게 되었으며 또한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손동작 하나, 말 한마디에서 황족의 무거운 기품이 느껴졌다.
각종 악기를 다룰 줄 알게 되었고 춤과 노래는 기본으로 하게 되었으며 정치와 병법서 등을 공부하여 아주 비상한 두뇌를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 마법의 성취도도 미친 듯이 체득하여 벌써 3써클을 마스터했다고 한다.
이 세계의 마법사들이 40대에 들어서야 간신히 3써클 언저리에 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무시무시할 정도의 성장이다.
“이번에도 고생 많으셨어요.”
병법학 수업을 끝마친 예리나는 예쁘고 화려한 드레스 대신, 조금 후줄근해 보이지만 여행하기에는 아주 간편한 모험가 복장을 입었다.
일단은 공주라는 신분을 최대한 숨기고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수업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야만 해요.”
“그래? 뭐가 남았는데?”
“제왕학이요.”
제왕학이라. 현대로 따지자면 경영, 군사, 법, 외교, 행정 등의 과정을 한꺼번에 포함시킨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영 미심쩍은 게 있었다.
“황궁에서 배우는 제왕학이 정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다만.”
“네, 후견인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에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오늘날의 제왕학은 ‘근육의, 근육에 의한, 근육을 위한 나라’라는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당연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강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입니다.”
즉, 치안이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건 꼭 말로 들어서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자, 잠깐만요. 제값을 주시지 않으면 오늘 저와 제 아이들은 쫄쫄 굶는단 말입니다······! 당신들을 믿고서 거래했는데···!”
“불만 있으면 네가 직접 힘으로 뺏어가던가!”
퍼억!
“컥···!”
후드를 쓰고 몰래 지나가는 와중, 바로 옆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항구 도시 한발렘.
서쪽 바다 무역의 요충지로서, 교역이 활성화 되어있는 편이었기에 도시에 사는 자들은 대부분이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정말 가진 것이 없는 상인들은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건의 제값이라도 받아내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근육질의 사내 여럿이 비실비실한 사내 한 명을 붙잡고서 구타하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던 예리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잘 먹지도 못하여 근육을 단련하지 못한 ‘가지지 못한 자’들은 잘 먹고 제대로 단련한 ‘가진 자’들에게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조차도 빼앗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면은 황족과 귀족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다고 합니다.”
사에란이 애써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감히 황족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도 죽을 죄였을 것이다. 강자가 가지는 것이 당연한 법도는, 곧 제국 그 자체나 다름없는 프리멜리아 여황의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예리나는 여타의 황족들과는 전혀 다른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심성이 여렸던 그녀는 올곧게 자신의 강함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으로 자꾸만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이다.
“···다행인 부분으로는, 황실 내에 500년 전에 사용되던 제왕학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황실 내에서도 배척받는 학문인지라 지도교사가 없어서, 독학해야만 한다는 게 문제이지만요.”
물론 그 제왕학 또한 백성을 위한 학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유서담은 새삼 다른 세계에 민주주의라느니 뭐 어쨌다느니 하는 사상을 집어넣을 생각은 없었다.
각자의 세계에는 각자의 방식이 있었기에. 그렇기에 유서담은 현재 이 세계의 강자존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삶의 방식이 다른 것이고, 그래서 꺼려질 뿐이다.
‘흐음, 독학이라.’
과연 열일곱의 소녀가 천 년이 넘도록 깊이 있는 역사를 유지해온 프리멜리아 제국의 제왕학을 독학하는 게 가능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주인공 사냥이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에게 달린 적은 없어서 조금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2년이나 시간이 남았으므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어차피 다른 공주들은 근육에 의한 제왕학만을 익힐 뿐이니, 순수 성적으로는 결국 예리나가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예리나는 조금 다른 결정을 내렸다.
“···저, 황궁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일년만 늦춰도 될까요?”
“뭐?”
“네에? 고, 공주님. 제왕학을 공부할 시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집니다.”
“알아요. 하지만, 500년 전의 제왕학을 제가 전부 통달한다고 해서, 올바른 제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
예리나는 가슴아픈 눈으로 이리저리 시달리는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저는, 제왕이 된다면······ 이 나라를 처음부터 완전히 뜯어고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 눈으로 직접 살펴봐야만 해요.”
그녀의 결심에 유서담은 조금이지만 감탄했다.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를 걱정하던 예리나는 이제 없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제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그녀는 그보다도 더 미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제왕이 된 이후, 나라를 어떻게 뜯어고칠지에 대해서.
하루하루 시간이 아깝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만백성이 고통을 받고 있을 터.
“지금의 프리멜리아는, 제국이라는 수식어 자체가 아까울 지경이에요. 차라리 야생이라면 모를까.”
그러면서, 예리나는 유서담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꽤 고생길을 걸을 것 같은데, 따라와주실 수 있나요?”
자그마한 어린 소녀가 철이 들어서, 어느덧 제왕의 길로 한 발자국 걸어들어가는 모습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여행을 그저 주인공 사냥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생각했던 유서담조차 조금이지만 마음가짐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손을 들어서 예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주저했다. 그건 황제가 될 여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므로.
“당연하지.”
*
프리멜리아 제국의 모든 황궁에는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는 시설이 있다.
바로, 헬스장이다.
프리멜캐슬 제0거성, 프리멜 프리멜리아 여황은 전용 헬스 시설에서 근육을 단련하고 있었다.
3대 7천 언저리의 근력을 지니게 되면, 그 근육을 단련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거의 2~3t에 달하는 바벨을 이용해야만 하는데, 그런 장비를 구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고중량의 장비를 거칠게 다뤄도 손상이 없는 건물도 흔하지 않다.
괜히 신분이 높을수록, 돈이 많을수록 더욱 강하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역시, 여황 폐하. 대단하십니다! 데드리프트 2,700kg에 성공하시다니······!”
“과연. 최고의 여전사라 불리던 폐하 답습니다!”
쿵!!
프리멜 여황이 2,700kg의 바벨을 내려놓자 잠시 바닥이 진동했다. 그러나 특수 금속으로 처리된 이 헬스장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여황은 자신의 근육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을 느끼며 손을 쥐락펴락했다.
어떤, 회의감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련한다고 해서, 과연 그때 그 남자의 마법을 내가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자베로프 수호기사가 유서담이라는 이름의 나무꾼에게 패배한 뒤, 한동안은 그의 강함을 인정할 수 없어서 매일 밤잠을 설쳐가며 근육을 단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가 가진 ‘강함’의 원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마법사들이라고 해서,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않던가?’
그들은 비록 근육을 단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식을 쌓음으로써, 제국에게 충분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보라. 이 자그마한 바벨에 무게가 2,700kg이나 나가는 이유도, 마법의 도움이 아니던가?
이 바닥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도 마법의 코팅 덕분 아니냔 말이다.
마법이 없었다면, 이만한 근육 단련도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네들은, 평상시에는 어디에서 단련하나?”
“예? 아, 그게···. 전용 헬스장이 따로 있습니다.”
“한번 보도록 하지.”
신하들은 왜 갑자기 여황이 자신들의 헬스장을 보자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잠자코 명령에 따랐다.
제17거성에 도착한 여황은 예고도 없이 변변찮은 귀족들이 사용하는 헬스장의 시설에 들이닥쳤다.
나름대로 단련하고 있던 귀족들이 모두 일어나서 무릎을 꿇으려고 했지만, 여황은 그러지 말라 하였다.
“근육을 단련하는 시간만큼은 방해하기 싫구나.”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굉장히 불편한 얼굴로 다시금 단련을 시작하였다.
여황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열악한 시설에서 근육을 단련하는구나.’
자신이 사용하던 바벨은 아주 자그마한 원판에 무려 1t의 무게가 압축되어 있어서, 근육을 키울 때 전혀 걸리적거릴 게 없었다.
하지만 그만한 압축 마법은 아주 값비싼 재료가 필요했기에, 다른 이들은 쉽사리 사용할 수 없었다.
어지간한 마차보다도 더 거대한 부피의 아령을 들어 올리며, 불편한 자세로 애써 낑낑대는 신하들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치솟았다.
“돌아가겠다.”
여황이 말없이 제0거성으로 돌아가자, 따라 나선 신하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여황의 기분이 언짢은 것인가?
그렇게 다시 헬스장으로 돌아오니, 그 앞에서 다른 신하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살짝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무언가 전달할 말이 있는 듯보였다.
“폐하.”
“말하라.”
“최근 동타마틴 연합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대놓고 도발하려는 듯한 군사훈련을 보이고 있는 데다가, 국경지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겠지. 여황이 변경되는 바로 그 순간이 제국의 힘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이니까.”
역사 대대로, 꼭 모든 공주들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근육은 충분했으나 힘겨루기에서 어처구니없이 밀린 공주들. 근육은 충분하지 못하였으나 그 병력과 인맥이 상당하여 제국을 뒤집어 엎을 수도 있는 공주들. 근육과 인맥 모두 충분하지 못하였으나, 정치질로 혼란을 야기시켰던 공주들까지.
그러나, 결국 여황이 될 수 있는 공주는 단 한 명 뿐.
500년의 역사 동안, 모든 황위쟁탈전에서는 반드시 피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아마도, 둘째 공주가 황위에 오르면 첫째가 반란을 일으키겠지.’
그러나 제국의 병력은 모두 강철같은 근육으로 무장하고 있어, 첫째 공주가 이기든 둘째 공주가 이기든 그 잔여 병력만으로도 연합국 따위는 철저하게 개박살내버릴 수 있으리라.
“······그것이.”
“무슨 문제가 더 있는가?”
“연합국이 근육의 단련을 거의 포기하고서, ‘전쟁마법’을 비밀리에 준비해왔던 모양입니다. 그 위력이 대단하여 성문을 가볍게 뚫어버릴 정도라고······.”
“성문 정도는 나도 쉽게 찢어버릴 수 있다. 고작 그 정도로 겁을 먹은······.”
거기까지 말하려던 여황은 문득 유서담이 떠올랐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약골들. 뒤에서 중얼중얼 주문이나 외우다가 비겁하게 불덩어리나 쏴제끼는 겁쟁이들.
그런 마법사의 인식 그 자체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사내.
“예.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하하, 마법 따위가 어떻게 단련된 근육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제가 너무 우려했던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겠지.”
여황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연합국에서 준비했다는 그 마법을 이대로 방관해도 될 것인가?
위대한 근육의 제국, 프리멜리아의 여황은 처음으로 마법에 대해 걱정을 하게 되었다.
< 프린헬스 메이커(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