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헬스 메이커(1) >
예리나가 첫 번째 과목인 ‘기품’을 배우는 데에는 일년 정도가 소모되었다.
당연하지만, 그 동안 유서담이 일년을 전부 허송세월했느냐? 그건 아니었다.
[시간을 빠르게 감습니다.]
애초에 몸에 계속 쌓여있는 바람에 주인공화를 가속시키는 개연성을 억지로 빼내기 위해 이 세계로 찾아왔다.
그 방법은 다름아닌, 시간 가속.
시간 도약과는 다르게 중요한 사건 등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며 예리나와 사에란과 함께했기에 그녀들은 나와 아라셀리가 함께 시간 가속을 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며칠, 예리나와 사에란에게는 일년.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다음 스승님을 찾으러 가볼까요?”
“오··· 그래.”
고작 기품 스텟 하나 올렸을 뿐인데, 사람이 확 바뀌었다. 일년 전의 예리나보다 지금의 예리나가 키도 더 크고 먹는 것도 잘 먹어서 생기도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어른스러워질 줄은 몰랐기에 유서담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예리나에게 기품을 가르쳤던 노파는 “너처럼 깨어있는 공주가 여황이 되면 참으로 좋을 것을! 하여튼 요즘 것들은 멍청해서 탈이야!”이라며 덕담(?)을 해주었고, 그들은 곧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다음으로는 뭘 배우지?”
“‘매력’이에요. 예쁘고, 멋있게 스스로를 꾸미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지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끔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데······ 어찌 보면 기품과 겹치는 항목이 많아서 곧바로 매력을 배우는 게 나아 보여요.”
일 년 사이, 사에란은 유서담을 굉장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사에란은 유서담의 능력을 생각보다 더 과대평가하고 있었기 때문.
‘죽음의 바다에 있던 괴수들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면서, 공주님에게는 티조차도 내지 않으셨어······.’
실상 유서담은 바닷속에서 스턴건과 100만 볼트 채찍으로 해양 괴수들 전기로 지지고 다녔을 뿐인데, 그저 그를 검사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사에란 입장에서는 그가 무시무시한 강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다시피, 요새 매력을 제대로 배우는 공주는 없어요.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매력이란 더욱 아름답고 굳건한 근육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허허.”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입고,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행동무새를 가다듬는 건 연약한 놈들이나 하는 거라는 인식이 단단히 박혀있죠.”
여자는 그저 근육으로 자신을 뽐낼 뿐! 그 이상으로 얼굴에 분칠을 하거나 주렁주렁 보석이 달린 옷을 입는 행위는, 이미 500년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사라져버린 이 세계에서 매력을 뽐내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
매력의 지도 교사 역시도 500년 전 프리멜리아 제국이 ‘근육포밍’ 되면서 대륙의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아니, 좌천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제국의 여황은 더 이상 근육을 뽐내는 데에 쓸모없는 학문을 제국 내에서 가르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으나, 이것마저도 사라지면 제국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지도교사들이 오지에 틀어박혀 문화를 보존한 것이다.
그것도, 500년 동안, 수많은 세대를 거쳐서.
그것은 아마도 실제의 [메인 스토리]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을 이야기일 것이다. 근육 하나로 모든 스토리가 진행되는 이 세계관에서 쓸모없는 학문이 등장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나는 또 스토리의 백그라운드를 찾아다니는 건가.’
유서담은 하품을 쩍쩍 내뱉으며 저 아래에서 걸어가고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현재 그들이 위치한 장소는 ‘말렉 산맥’이라는 곳이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강력한 몬스터가 출몰하는 데다가 지형도 굉장히 험준하여 어지간한 강자가 아니고서야 이곳에 쉽사리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말렉 산맥에는 500년 전 유배된 매력의 지도교사 뿐만 아니라 황족들이 스스로의 강함을 시험하기 위해 이곳을 시험장으로 꽤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그래봐야 C에서 B랭크 필드 수준이었지만······.’
뭐 얼마나 대단한가 싶었더니, 실상 까보고 보니 크게 위험할 건 없는 장소였다.
이 세계에서는 숙달된 (근육)전사들에게도 힘든 모양이지만, 그건 숲을 헤쳐나가는 방법과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한 노하우가 전혀 없어서 그렇다.
하루의 절반을 근육 단련에나 힘쏟으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미리 파악하는 것은 약자들이나 하는 짓!’을 모토로 삼고있는 그들은 영영 공부를 할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그는 나무를 껑충껑충 뛰어 옮겨 다니다가 눈가를 좁혔다. 저 멀리 수풀 사이에서 대기하는 무언가가 외눈 망원경에 포착되었다.
즉시 스킬 [만물을 냉정한 시선으로(B)]를 발동하자 대상의 정보와 약점, 강함의 정도와 에너지 파동이 확인되었다.
‘B랭크 중에서도 상위권인가··· 여기에서는 꽤 보기 드문 놈이네.’
즉시 처리해야겠다 싶어서 일어난 그는 여인들을 향해 시선을 슬쩍 돌렸다.
가장 선두에서 아라셀리가 윈드 커터 마법으로 나뭇가지를 예쁘게 잘라서 사에란과 예리나가 걸어가기 쉽도록 길을 터주고 있었다.
공주는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그건 그녀가 이 숲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몬스터를 마주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유서담은 여태 만난 모든 몬스터를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처리해왔으니까.
스슥!
유서담의 구두가 나뭇가지를 튕기며 날아올랐고, 이내 이 일대의 지배자로서 군림해오던 어떤 괴수의 목이 소리없이 잘려나갔다.
*
쏴아아!!
타닥, 탁!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소나기가 쏟아진다. 꽤 커다란 동굴에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모닥불을 쐬고있자니, 어쩐지 감성이 축축해졌다.
어느덧 예리나 공주는 아라셀리와 꽤 친해져 있었는데, 아라셀리의 개인사를 듣는 게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와아. 아라셀리의 고향에서는 마법이 제일 중요한 학문으로 취급받았다구요?”
“응.”
아라셀리는 예리나에게 꾸준히 마법을 가르쳤다. 황위쟁탈전이 열리기까지는 앞으로 4년. 그 안에, 3대 7,500을 치는 괴물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만 한다.
천운이 따른 것일까, 예리나는 사실 예전부터 마법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몰래몰래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그녀는 꽤 축복받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가르치는 입장이나 배우는 입장이나 성취도가 눈에 띄게 늘어나서 서로 즐거울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아라셀리는 왜 고향을 두고 떠나온 건가요?”
그건 예리나 공주의 순수한 궁금증이었고, 사에란 역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여태 함께해온 시간이 꽤 길다. 사에란이나 예리나나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라셀리가 결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안다.
“······교수님을 따라왔어.”
“교수님이라면, 나무꾼님?”
“응. 내 고향에서는 교수님이었거든.”
“아하···. 그런데 왜 여기서는 나무꾼을 하고 계시는 걸까?”
그건 그냥 유서담이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이기에 아라셀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글쎄···. 속세에서 도망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대충 둘러댔다.
그러나 역효과였을까, 예리나 공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구나. 나는 그런 분을, 다시 속세로 끌어들인 거고.”
“아,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고. 교수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으시니까.”
“응···.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드는 의문.
“어라, 후견인님은 어디 계시는 거지?”
그러고 보니 항상 그랬다.
이렇게 다함께 모여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때나, 오지를 돌아다닐 때나, 유서담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가 없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들지 않았다. 아라셀리와 나누는 대화가 즐거워서?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어디에 있든 그의 존재감이 항상 느껴져서 그랬다.
‘왜?’
예리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사에란과 아라셀리가 침묵하자, 예리나는 그녀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동굴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벅, 뚝뚝!
물방울을 흘리며 유서담이 안쪽에서 느긋한 걸음으로 나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물기에 살짝 젖어 있었는데,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짓단에 핏자국같은 게 묻어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잔뜩 피로한 얼굴로 작은 짐승 몇 마리가 들어있는 보따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흐아암···. 밥 구해왔다. 사슴인데, 죽은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더라. 요리해서 먹으면 괜찮겠지.”
“네. 바로 준비할까요?”
“그래주면 고맙지. 해체는 내가 할게.”
그러면서 유서담이 허공에서 식기구를 꺼내자, 아라셀리는 가슴이 손바닥을 마름모 형태로 모아서 주문을 외웠다.
사아아···!
무형의 장막이 퍼져나가며 냄새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지금도 몇 겹의 장막이 소나기와 냉기를 차단하고 있는 데다가 몬스터의 접근조차 알릴 수 있도록 해주고 있었는데 말이다.
“······마법은 대단하네요.”
저건 결코 근육으로는 할 수 없다. 물론, 근육중독자들은 ‘적이 접근하면 그저 찢어발기면 될 뿐!’이라고 말하겠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안전이 아니겠는가?
뚝딱뚝딱 요리를 깔끔하게 끝내고, 아라셀리의 사슴 고기가 완성되자 그들은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비록 재료가 쓰레기라도, 아라셀리는 향신료와 조미료를 어떻게든 더해서 먹을만한 요리를 만들어냈기에 맛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예리나가 설거지하겠다는 것을 극구 만류한 사에란이 뒷정리를 하는 그때, 아라셀리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녀의 정수리에서 머리카락이 삐죽 튀어나와 마지 안테나처럼 흔들렸다.
“······누군가 접근하고 있어요.”
“그래? 짐승이야?”
유서담의 기감으로도 마법의 범위만큼을 감지할 수는 없다.
“아뇨. 이건··· 사람이네요.”
“사람이라고?”
사람이 이런 오지에는 갑자기 왜?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말이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
“네. 저들도 비를 피하려는 것 같아요.”
여전히 소나기는 거세게 쏟아졌고,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동굴은 이곳이 끝이다.
“후우···. 뭐, 어쩌겠어. 우리가 여기 전세낸 것도 아니고. 공주님이랑 사에란은 저 안쪽에 들어가 있어. 안전하니까.”
저벅! 묵직한 발소리가 거센 소나기 사이로 울렸다. 그제야 유서담은 이곳에 찾아온 자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재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챘다.
‘전혀 기운을 갈무리하지 않았어.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에너지······.’
이윽고, 정체불명의 인원이 동굴에 발을 들였다.
“음? 선객이 있었군.”
“···여황 폐하?”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아닌 프리멜리아 제국의 여황 프리멜 프리멜리아였다. 그녀의 뒤로 또다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여황보다도 더 우락부락한 덩치를 자랑하는 그녀는 여황의 후견인이었던 ‘자베로프 수호기사’였다.
과거, 일곱이나 되는 공주의 후견인 사이에서도 넘을 수 없는 강력한 근육을 보유하고 있었던 당대 세계관 최강자!
자베로프는 사람의 몸집보다도 큰 도끼를 주로 사용했는데, 그녀가 그것을 한번 휘두르면 성벽 따위는 종잇장처럼 찢겨나가서 적들은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예리나와 사에란은 즉시 앞으로 뛰쳐나와서 여황을 향한 예의를 차렸으나, 그녀는 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자네. 이 동굴이 어딘지는 알고 겁도 없이 머물고 있나?”
“숲속의 주인 없는 동굴이지요.”
“주인이 없다니? 주인은 있다.”
예리나와 사에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여황이 다짜고짜 ‘이 동굴은 나의 땅에 존재하며, 곧 나의 것이다’라고 우기면 답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황은 그런 쫌생이가 아니었다.
“이 동굴의 주인은······ 산맥의 패왕 ‘흑아견황’이란 말이지.”
“······.”
“흐, 흑아견황···!”
예리나와 사에란은 몸을 흠칫, 떨고서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 이름도 유명한 괴물, 흑아견황을 모르는 제국민은 없다.
단신의 몸으로 4개의 도시를 무너뜨리고, 결코 침범당한 적 없는 요새 2개를 개박살내버린 뒤 홀연히 사라져버린 전설의 늑대인간이 아니던가?
30년 전 말렉 산맥으로 자취를 감춘 뒤에는 소식이 전혀 들려오지 않아, 서서히 잊혀가는 중이었는데.
‘그런 흑아견황이 이 동굴에···?’
그러나 유서담은 여전히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주인은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제가 이곳의 주인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이제 이 동굴에는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오호?”
그 발언에, 예리나와 사에란은 물론 여황과 자베로프 또한 흥미로운 듯 눈을 강렬하게 빛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이던가? 나 또한 과거, 그놈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패한 뒤 10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붙어볼만 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찾아왔거늘······.”
그리 말하며 스산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갑옷이나 걸치고 다니는 겁쟁이 주제에, 흑아견황을 쓰러뜨렸다고 고하는 것이냐는 말이다!”
콰앙!!
그녀가 발을 구르자, 지반이 거미줄 형태로 쩌적 갈라지며 대지가 뒤흔들렸다. 과연, 어마무시한 근육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지금은 전성기가 지나서 근육이 예전만하지는 않겠지만 이제 힘싸움에서의 테크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 되었을 터.
그런데, 자신조차 쓰러뜨리지 못한 적을 약골 따위가 쓰러뜨렸다니 화가 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유서담은 잠시 고민하다가, 씨익 웃었다.
“그러면, 시험해보시겠습니까?”
“무엇을?”
“제 강함을.”
“건방지군. 그런 실근육은 강함을 볼 필요도 없다. 비실비실해 빠져가지고는, 툭 치면 부러질 것 같구나!”
유서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흑아견황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다른 말을 해서 무얼 하나?
‘정말로 저 샌님이 흑아견황을?’
믿을 수 없다. 애써 잡생각을 떨쳐낸 자베로프는 도끼를 꺼내, 바닥에 쿵 내려찍었다.
“······약골의 거짓을 들어서 무얼 하겠습니까, 폐하. 감히 하늘 아래 가장 태산같은 여황의 앞에서 거짓을 고한 저 선비의 주둥이를 반으로 찢어서 바치겠습니다.”
그에 여황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개박살을 내놓거라. 다시는 함부로 세치 혀를 놀리지 못하도록!”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근육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결코 패배를 상정하지 않고 있었다.
< 프린헬스 메이커(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