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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14화 (214/251)

< 용사 유서담(5) >

레니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완전히 모르는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건조하고, 어둡지만, 어딘가 품격있고, 고급스러우며, 웅장하지만, 다소 공포스러운 위압감이 느껴지는 장소.

‘아······?’

뭐지?

멍하니 눈을 뜬 레니카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젯밤의 일을 먼저 떠올려본다.

용사 유서담과의 만남은 성녀 레니카도 오랜 시간 기대해왔던 부분이었다.

찬란한 은빛의 갑주를 입고서 온갖 험난한 오지를 여행하며 악을 처단하며 세상을 구하는 용사의 이야기는 어렸을 적부터 숱하게 접해왔고, 또한 레니카의 로망이었으니까.

역사 대대로 용사와 이어진 공주나 성녀의 이야기는 줄곧 들어와서 알고있다.

아마도, 당대 용사와 이어진 여인이 바로 그 시대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여인일 것이다.

레니카는 성녀의 자격을 얻음으로써, ‘이 시대에 가장 행복한 여인’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딛었다고 할 수 있겠다.

혹여나, 용사 유서담과 자신이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살아있는 로맨스가 펼쳐질 테니까!

‘아···.’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그래, 아라셀리가 문제였다.

성녀의 타이틀을 사칭하는 고약한 여자. 그것도 모자라 가식적인 얼굴로 괜히 선행을 베푼답시고 길거리 거렁뱅들이나 치료하는 주제에 사람들의 모든 관심과 사랑과 이목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거지따위가 아닌 그보다 더 가치있는 귀족들을 치료해주는데, 어째서 죄다 그 여자한테만···!’

용사 유서담의 옆에 착 달라붙어있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심지어 성녀 타이틀까지 빼앗기게 생겼다. 그래, 그게 퍽 짜증이 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날 저녁,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아껴두었던 위스키를 병째로 깠다.

···그리고?

웬 거무죽죽한 남자와 마주쳤고··· 그 다음에는······.

“······여기, 어디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무언가에 얻어맞아서? 숙취 때문에? 모르겠다. 두통을 이겨내기 위해 레니카는 손으로 머리를 만지려고 했지만.

철그럭!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철그럭, 철그럭!

“어라···?”

반대쪽 팔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올려보니, 새카맣고 얇은 쇠사슬이 자신의 양팔을 머리 위로 구속한 채였다.

“아, 아으?!”

찰그락!

힘껏 팔을 당겨보았지만, 찌릿한 고통만이 느껴질 뿐 사슬이 끊어질 리가 없었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쉿. 조용히.”

맞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곳을 바라보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양손이 머리 위로 구속된 채 다소곳하게 서있는 소녀, 아라셀리가 있었다.

아라셀리는 잠옷 파자마 차림인 자신과는 다르게 새하얗고 얇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꾸민 티가 팍팍 났다. 결코 납치당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너, 넌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보면 모르나요? 저희, 마왕성에 납치당했어요. 그것도 난공불락 ‘디아블로 김’의 마왕성에요.”

“아, 아······?”

말도 안 돼.

그래, 옛날부터 공주나 성녀가 납치되는 건 흔한 전개였다. 그에 용사가 분노하여 마왕을 박살내는 것 역시.

하지만······. 납치된 공주를 곱게 구해내고 결혼까지 해서 행복하게 사는 건 전부 ‘동화’에서의 이야기였을 뿐이다.

실제의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더라?

“안 돼··· 안 된다고······.”

용사가 그녀들을 구출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마왕에게 참혹한 방법으로 고문당한 그녀들은 인간으로서 살아갈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잃어버린 뒤였고, 설령 제정신을 차린다고 하더라도 죄다 자결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마왕성에 납치당한 그녀들이, 무슨 짓을 당했을지는 너무나도 예상하기 쉬웠다.

그랬기에, 이 상황이 너무나도 절망스러웠다.

눈물이 고였다.

레니카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여 소리없이 흐느꼈다.

용사 유서담이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이 난공불락의 마왕성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년은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 몇 년이 지난다고 해도 과연 이곳을 뚫는다는게 가능이나 할까?

제국과 신성교회가 모두 힘을 합쳐도 결코 뚫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던 바로 그 디아블로의 마왕성이란 말이다!

만약.

정말로 아주 만약에, 용사가 기적같은 힘을 발휘하여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때가 되면, 이미 늦었을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은, 이렇게······.’

절망감이 사무치게 몰아쳤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또각!

멀리서 들려오는 구두굽 소리에 레니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라셀리와 마주보고 있는 형태로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진 벽에 구속이 되어있는 상태였는데, 그 사이로 깔려있는 레드카펫으로 누군가가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칼에 새빨간 핏빛 눈동자.

마왕, 디아블로 김이었다.

입이 귀에 걸리도록 미소를 띤 채, 그는 천천히 두 명의 성녀들에게 다가갔다.

“이거 참, 둘 다 모아놓고 보니 예술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겠군. ‘잠입’ 스텟에 투자를 해두길 잘했어. 이렇게 손쉽게 데려올 수 있을 줄이야.”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레니카, 그리고 아라셀리를 바라보았다. 용사 유서담의 동료는 확실하게 아라셀리였지만, 레니카 또한 나쁘지 않은 전리품이었다.

‘그나저나, 저 여자는 왜 드레스를 입고있는 거지?’

분명 새벽에 잠입했다고 들었다. 레니카는 잠옷차림으로 납치되어 부스스한데, 아라셀리는 입술까지 피빨강으로 물들였을 정도로 화장까지 철저하게 한 데다가 노출도가 살짝 있는 드레스까지 입어서 고혹적인 분위기까지 은근히 풍겼다.

마치, ‘납치당한 성녀는 안타깝고 불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다’라는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풍기는 것처럼.

그리고 사실, 그의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유서담은 ‘납치된 공주 룰북’을 아라셀리에게 보여주며, 마왕에게 납치당하려면 원래 예쁘게 꾸미고 가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고 가르쳤으니까 말이다.

“아, 제 옷이 신경 쓰이시나요? 예쁘죠? 교수님한테 잘 보이려고 신경썼어요. 굳이 예쁘게 차려입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예쁘고 멋있게 꾸미고 싶은 건 인간 본연의 본능이잖아요.”

“······그건 꼭, 납치당할 걸 알고 있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디아블로 김은 짐짓 표정을 굳혔다.

용사 유서담, 결코 평범한 적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다. 그는 어지간한 마스터급 이상의 검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또한 지략도 수준급 이상이었다.

결코 용사를 만만하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들은 그 자체로도 이미 마왕에게는 공포가 되는 존재였으니까.

그런 유서담의 동료가······ 이렇게 쉽게 납치되는 것에도 모자라, 납치될 것을 미리 알고있기까지 했다?

수상하다. 뭔가 수상하다.

···하지만.

“용사 유서담의 전략이 어떤 것이든, 소용없다. 마왕성에 들어온 순간부터 너희들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으니까.”

그건 분명히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고, 레니카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가는 한마디이기도 했다.

“틀렸어······. 아라셀리, 너도 포기하는 게 좋아···. 이곳에 들어온 이상, 영원히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오, 그래. 저쪽의 성녀님은 현실 파악이 자주 잘 되시는 모양인데?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여자들에게는 상냥하고 신사적이니까. 순순히 협조만 한다면 험한 꼴 볼 일은 없을 거야.”

[주인공 디아블로 김이 스킬 ‘스톡홀름 챠밍(A+)’을 발동합니다.]

[비록 납치를 당한 위기 상황이지만 친절히 대해주는 주인공의 다정하고 따스한 모습에, 조연들이 동조합니다!]

레니카의 눈빛이 살짝 풀렸다. 자신을 납치했음에도 상냥하게 대해주는 마왕의 모습에, 어떤 고마움과 애착이 생긴 것이다.

[아라셀리가 스킬 ‘대현자의 눈(SSS)’을 사용하여 저항합니다.]

아라셀리에게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지만.

“그럼, 그쪽의 성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디아블로 김은 아라셀리에게 물었다. 사실 레니카쪽은 전혀 신경쓸 필요도 없었으니까.

“흐음···그게······.”

그녀는 표정을 찌푸리고서 잠시 고민하더니, 갑자기 쇠사슬을 뚜두둑!! 끊어냈다.

“······무, 무슨?!”

황급히 물러나는 디아블로 김.

그러나 아라셀리는 뺨이 간지러워서 잠시 긁기 위해 사슬을 뜯어냈을 뿐이었다.

착!

다시 쇠사슬을 원래대로 붙인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 그렇죠. 저희 교수님의 전략이 궁금하신가요? 어떻게 이 마왕성을 돌파할지.”

디아블로 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의 마기가 술술 풍기자, 부하들이 서서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뭔가 이상하다. 저 여자, 어떻게 저 쇠사슬을 저리도 간단하게 뜯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랜드급(7써클) 마법사가 아니라면 결코 풀 수 없는 속박일 텐데······!’

잠시 고민하던 아라셀리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마왕성을 공략할 전략은 없어요. 잔뜩 기대하고 계셨을 텐데,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하네요.”

“······뭐? 그럼 널 버리겠다는 소리냐?”

“아뇨?”

유독 그 말에 예민하게 반응한 아라셀리는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름답지만 몽환적으로 빛나는 주홍빛 샹들리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예술적인 샹들리에를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욱 더 높은 곳, 저 하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마법에,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건 여섯 개의 타워도, 20인의 그랜드급 마법사도 해결해주지 못했어요.”

“무슨, 소리냐?”

메테오 스톰.

지정된 위치에, 유성을 떨어뜨리는 지상 최강의 공격 마법.

그 마법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천문학적인 재료를 모두 구했으나, 아무래도 9써클의 마법을 고작해야 7써클의 마법사들이 모여서 시전하려다보니 결정적인 결함을 결국 해결하지는 못했다.

여섯 개의 타워가 이어진 마력을 모두 받으면서, 마왕성에 메테오 스톰을 시전할 당사자가 필요하다는 것.

이게 뭐가 문제냐면, 여섯 개의 타워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모두 동등하게 분배하려면 결국 모든 타워에게서 똑같은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위치가 바로 마왕성이라는 것.

즉, 마왕성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준비했던 마법인데 그것을 시전하기 위해 마왕성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 그냥 마왕성에 입장하자마자 마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래서 유서담은 직접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마왕성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원래의 예정대로였다면 신성교회에서 교황을 만난 뒤 곧바로 마왕성으로 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마왕의 하수인이 찾아왔을 때, 아라셀리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의 납치 능력을 가진 하수인이 있다면, 혹시 납치당한 다른 피해자가 더 있지는 않을까?’

그녀는 유서담의 신념을 잘 이해하고 있다. 주인공을 철저하게 살해하되, 결코 무고한 피해자를 발생시키지 않으려는 그 신념을.

그래서 아라셀리는 두 눈으로 직접 마왕성을 확인해보고자, 납치를 당했다.

“과연 대단한 성이에요. 만약 정석대로 공략하려고 했으면, 으음. 제가 원래 힘을 되찾지 못하는 이상 상당히 골머리를 썩혔겠어요. 감옥이 어디에 있는지 찾느라 밤새 애를 먹었으니까요.”

“······내 성을 돌아다녔나?”

“새벽에 잠깐이요. 뭐, 자리를 비워주신 덕분이죠. 일반인들이 없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마음 놓고 성을 무너뜨려도 되겠어요.”

“뭐···?”

잘못 들었나?

이 성을 무너뜨린다고?

“헛소리를 하는군······. 이 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아. 방어력에 스텟을 얼마나 투자했다고 생각하나?”

“알죠.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이 성은 완벽해요.”

“그래! 전설의 8써클 마법사가 와도, 결코 무너뜨리는 게 불가능하단 말이다!”

그 말에, 아라셀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그럼, 9써클의 마법은 어떠신가요?”

뚜둑!

그녀의 양팔을 묶고있던 사슬이 갈라지더니, 서서히 아라셀리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황금색의 찬란한 빛무리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마치 오로라같고, 혹은 무지개같은 형태의 톱니바퀴가 그녀의 등 뒤에서 굴러가며, 삐죽삐죽 가시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푸르른 안광을 빛내며, 아라셀리는 레니카를 품에 안아들었다.

쿠구구구구···!!!

저 하늘 높이에서, 무언가 불길한 소음이 한가득 세상을 메웠다.

그녀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마왕 디아블로 김을 향해 말했다.

“지금이라도, 이 마왕성을 포기하면 도망친다면······ 혹시 모르죠.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번쩍!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아라셀리의 모습이 빛이 되어 사라졌고.

고개를 치켜올린 디아블로 김은, 그제야 창문을 통해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지금껏, 인류에게 닥쳐온 그 어떤 재앙보다도 더욱 끔찍하고 커다란 재앙.

지진, 홍수, 해일, 태풍 따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생명의 저항 자체를 불허하는 대재앙.

유성우(流星雨).

그 아름답고도 찬란한 빛의 궤적이,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마왕성으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 용사 유서담(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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