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13화 (213/251)

< 용사 유서담(4) >

비비안타 제국에서 살아가던 시절, 아라셀리가 ‘드래곤의 비늘’을 획득한 계기는 생각보다도 시시해서 내게 별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제 선조 대마법사 라인칼이 드래곤과 교류했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어떤 역사책에는 드래곤에게 직접 마법을 배웠다는 말도 있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대대로 내려오는 드래곤의 비늘이 딱 하나 남아있었어요.’

완전무결(完全無缺).

드래곤의 비늘에게는 그런 수식어를 붙여도 모자람이 없다고 하였다. 그 어떤 생명체의 가죽보다도 단단하고 질겼으며, 그 어떤 물질보다도 마력이 잘 통하는 마도체였고, 그 자체로도 이미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를 품고 있어서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의 최대치가 상승한다고 하였다.

고작 비늘 하나에 그런 효과가 담겨있으니, 드래곤이라는 족속들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감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과 관련된 세계관이 있던 거 같은데······.’

의뢰인이 말하길 모든 세계관에서 인간이라는 종족이 다 똑같은 종족인 것처럼, 드래곤 역시 모든 세계관에서 전부 동등한 종족이라고 한다.

비비안타 세계관의 드래곤과 아스칸타 월드 세계관의 드래곤이 만약 실존한다면 둘 다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

“그래서, 모험가 양반. 드래곤을 찾으시겠다?”

아스칸타 월드의 북서쪽 대륙에는 ‘절음림’이라는 기묘한 산림이 존재한다.

그 어떤 생명체도 결코 소리를 내지 않는 이곳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곤충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소리 그 자체가 적이 되는 이 공간을 일주일이나 헤매인 결과, 나와 아라셀리는 절음림 깊은 산중에 숨어사는 은거 마법사를 만날 수 있었다.

뾰족한 귀에 회백색의 머리칼.

최소 삼백 년 이상 살아있었다는 그 요정 마법사는 우리를 보고서 혀를 끌끌 찼다.

“또 모험가들이 허황된 꿈을 쫓는군. 드래곤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인간들의 역사책에는 이상한 헛소리가 가득 기록되어 있더군.”

드래곤은 레어를 짓고 산다. 산맥 일대의 모든 몬스터를 지배하며, 보물을 좋아하여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하거나 드워프를 협박하고, 허구한날 잠이나 자다가 가끔 세상으로 나와 유희를 즐기고.

“그건 죄다 거짓말이다. 드래곤은 그런 존재가 아니야.”

그럴 리가. 모든 세계는 반드시 ‘클리셰’를 따른다. 드래곤 또한 그 클리셰를 따른다면, 저 위의 목록에 반드시 해당되어야만 할 텐데······.

<유서담, 반드시 모든 존재가 ‘클리셰’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뭐?’

<당신 또한 인간이면서, 클리셰를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나는 주인공 사냥꾼이라고 그런 거 아니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생명으로 태어나, 하나의 ‘스토리’에 몸을 담으면서도 클리셰와 개연성을 거부하는 위대한 존재가 바로 드래곤입니다. 그러니 상식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흐음······.’

들으면 들을수록 드래곤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 수 없게 되어간다.

게다가 의문이 하나 더 생긴다.

‘어째서 드래곤의 비늘은 차원이동에도 보존이 되는가?’

다른 그 어떤 물질도 아라셀리의 불완전한 차원여행에 포함될 수 없었다. 그런데, 유독 드래곤의 비늘만 가능하다.

‘대체 드래곤은 뭐하는 놈들인 건지······.’

아무튼, 결국 아스칸타 월드에서 드래곤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타워’가 건설되는, 대략 석달 동안이나 타워의 재료도 얻는 겸 겸사겸사 여행을 했음에도 드래곤에 대한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으니까.

뭐, 희귀한 재료를 많이 구했으니 꼭 손해뿐인 여행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고.

정말로 중요한 물건은 내가 인벤토리에 보관해줘도 되니, 아스칸타 월드에서의 드래곤 찾기는 여기서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은 감사했습니다.”

“그래, 젊은 인간. 드래곤은 이미 이 세계에 없으니 더 이상 찾는 건 포기하고, 삶이나 즐기라고. 끌끌.”

“······?”

은거 마법사의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우리는 절음림을 나섰다.

*

이맘대쯤, 아라셀리는 꽤 유명한 ‘성직자’가 되어있었다.

마법사는 신성력이 없더라도 마법으로 어느 정도 간단한 타박상이나 해독 정도는 가능했는데, 고위 마법사는 그 수준을 넘어서 아예 의학 지식이 풍부하다면 수술까지도 가능했다.

순수하게 상처를 재생, 수복하는 신성력과는 다르게 마법에 의한 치료는 현대 의학과 굉장히 닮아있었다.

아라셀리는 마법적 지식은 물론 의학적 지식도 상당히 풍부했는데, 타워를 건설하기 위해 아스칸타 월드를 모험하면서 만나는 모험가들이나 마을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아낌없이 치료해주었다.

아픈 사람 돕는 것을 좋아하는 오지랖도 오지랖이지만, 그렇게 마나를 세심하게 다루며 소모할 수록 마나 써클이 더욱 빠르게 성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하여 아라셀리는 어느덧 더블 써클의 2써클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온갖 오지를 모험하는 유서담의 특성상 아라셀리는 유독 많은 사람과 환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결과, 아라셀리는 세상에 ‘성녀’라는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좋은 일이냐고 묻는다면, 유서담은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그가 와있는 장소가 바로 ‘신성교회 성주회’였기 때문이었다.

성주회는 아스칸타 월드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2개의 제국에 버금가는 데다가 전 세계인들 중 50%가 성주회의 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력이 무시무시했는데,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리고, 성주회에는 ‘성녀’가 있다.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서 바깥세상에 얼굴은 거의 드러내지 않지만 정말로 신에게 인정받고 신성력도 풍부한 ‘진짜 성녀’가 있단 말이다.

“······그대가, 최근 용사님과 함께 모험한다는 ‘성녀 아라셀리’인가요?”

용사의 자격으로 교황의 초청을 받은 유서담은 아라셀리를 데리고서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하였다.

값비싼 레드 와인도, 산더미처럼 쌓인 진수성찬도 ‘진짜 성녀’ 레니카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저 가짜 성녀가 너무나도 가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냠.”

······그러든 말든, 아라셀리는 자신의 눈앞에 놓여있는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 과연, 위대한 라인칼 가문의 후계자답게 그녀는 추레한 옷가지와 어울리지 않게도 품격있는 식사 예절을 구사하였다. 그건 아마도 몸에 배어있는 버릇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제 말을 무시하시는 건가요?”

“네? 아뇨. 식사가 맛있네요.”

“하. 성녀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주제에, 부끄러움도 없으신 건가요?”

성녀 레니카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아라셀리를 쏘아붙였다. 성녀라는 이름은 감히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가장 많은 신성력을 타고난 순결한 여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적을 증명해야만 간신히 성녀의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단 말이다!

성녀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 웬 듣도 보도 못한 길거리 천민 하나가 성녀의 이름을 사칭하고 있으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라셀리는 별 생각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걸 저보고 어떡하라는 건가요?”

“···뭐?”

그 뻔뻔스러운 말에 레니카가 반박하려고 했지만, 아라셀리는 그냥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다친 사람들 돌봐주고, 아픈 사람들 치료해주고, 고민 상담 들어주니까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부르던데요. 자격증이 있어야 되는건 몰랐으니까, 사과할게요. 하지만 저는 맹세코 저 스스로 성녀라고 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

레니카를 입을 꾹 깨물었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아라셀리는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성녀라는 타이틀을 붙인 적이 없다.

그저 사람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녀를 성녀로 칭송했을 뿐.

그러나 레니카는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건 죽을 만큼 싫었다.

바깥은 너무 더럽고 지저분한 데다가 위험한 것들이 한가득이다. 몬스터와 강도, 살인귀와 악마들이 존재하는 저 세상으로 나가서 더러운 환자들에게 손을 대기는 죽도록 싫단 말이다.

성녀의 칭호를 얻은 이유는, 그저 가장 편안하고 호화스러운 삶을 살기 위함이었으니까.

유서담은 그런 두 여인의 기싸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기싸움이라기보단, 레니카가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아라셀리는 그러든 말든 스테이크를 씹는 쪽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보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용사여.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게나.”

교황의 그 말이 어찌나 고마웠던지 유서담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이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이건 임금한테 쓰는 말이던가?

*

그날 저녁.

신성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신성결계에, 아주 자그마한 틈이 생겼다. 신성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결계석에 반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세밀하고 정교하게 생긴 그 틈새는 고작 바늘구멍 하나 정도의 크기였는데, 그 안으로 검은색의 안개가 스멀스멀 새어들어왔다.

이윽고, 안개는 두 개의 형상으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오른쪽 이마에 뿔이 달려있었고, 하나는 왼쪽 이마에 뿔이 달려있었다. 둘은 비록 타인이지만, 동시에 하나였다.

“······오른쪽. 문제가 생겼다.”

“왜 그러나, 왼쪽?”

“마왕께서 용사의 동료를 납치해오라 하지 않으셨던가?”

“그래. 그리고 용사의 동료는 성녀 단 한 명 뿐이지.”

“그리고 마침 지금 용사는 연병장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더군. 절호의 기회다, 왼쪽.”

“그게 문제가 아니다, 오른쪽.”

왼쪽이라 불린 사내는 교회의 첨탑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지상을 내려보았다. 지형지물조차 완벽하게 꿰뚫어보는 ‘대악마’의 시선이었기에 교회의 결계나 벽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성녀가 둘이다, 오른쪽.”

“뭐···?”

그렇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성녀가 둘이라니? 그런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두 악마는 아주 뛰어난 대악마였기에, 마왕 디아블로 김의 명령을 받아 오지에서 활동하느라 세간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마왕의 호출을 받아, ‘용사의 동료, 성녀를 납치해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상식적으로 성녀는 한 명인 게 당연했기에 그들은 무작정 교회로 파고들었고, 지금 이 상황에 당도하게 된 것.

“······어떻게 하지? 왼쪽.”

“뭘 어떻게 하겠나, 오른쪽.”

방법은 단 하나뿐.

“두 성녀 모두, 납치해서 돌아간다.”

*

그리고, 그날 새벽. ‘백장미화실’이라 불리는 호화스러운 방에서 혼자 잠을 청하던 아라셀리는 두 눈을 번쩍 뜨고서, 허공을 낚아챘다.

텁!

“······!”

하늘을 가리던 구름이 서서히 걷히며, 달빛이 드러난다. 대악마 ‘왼쪽’은 순간 자신의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대, 대체 언제부터?!’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아라셀리라는 이름의 성녀는 푸른색의 눈동자를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었다. 잠을 전혀 자지 않은 것처럼 선명한 그 눈빛은 자신들의 접근을 미리부터 알고있는 듯싶었다.

“악마는 오랜만이네요.”

그녀가 입술을 떼자, 백장미화실의 벽에 새하얀 빗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황금색의 톱니바퀴가 나타나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삐져나오는 자그마한 빛기둥이 자꾸만 ‘왼쪽’의 힘을 앗아가려고 했다.

‘이, 이건······!’

저항할 수 없다.

이 성녀가, 진짜 성녀가 틀림없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왼쪽은 죽음을 직감했으나.

일순간 그 모든 마력이 걷히더니 아라셀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입을 떼는 순간, 당신은 죽습니다.”

그리 말하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아라셀리는 이불을 깨끗하게 개어놓은 뒤 양손을 왼쪽에게 내밀었다.

“그럼 당해볼까요? 납치.”

왼쪽은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죽기는 싫었기에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용사 유서담(4)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