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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12화 (212/251)

< 용사 유서담(3) >

내가 용사로서 본격적으로 ‘모험’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떠난 것은 이 세계에 도착한 뒤, 한 달이 지난 무렵이다.

사실 말이 모험이지 거의 휴가에 가까웠다. 간만에 아라셀리와 함께 ‘판타지’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세계를 여행하며, 최근 거의 느끼지 못했던 여유를 마음껏 만끽하였다.

가끔은 멘탈 관리를 위해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지금 내가 휴식한다고 해서 주인공 사냥을 위한 계획이 진행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던가?

“용사님. 말씀하신 첫 번째 ‘타워’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9써클의 위대한 마법 ‘메테오 스톰’의 캐스팅을 위해서는, 꽤 많은 준비과정이 필요했다.

첫 번째로, 유성 소환을 위한 매개체. 9써클의 마법사가 없었으므로 아라셀리가 제작한 특수 타워가 6개나 필요했는데, 마왕성을 중심으로 두고서 정확하게 육망성을 그리도록 배치해야만 하는 것이다.

각각의 ‘타워’는 정확히 500km의 거리를 두고 세워진다. 한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엇나갔다가는 유성이 소환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혹여나 소환되더라도 ‘정확히 육망성의 중심’에 유성이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므로 자칫 잘못하다가는 빗나가는 수가 있었으니까.

“이거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네.”

“9써클의 마법사 없이 9써클의 마법을 사용하려는 거니까요.”

“하긴. 게다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완벽하지가 않네. 골치아픈 결함이 하나 있어.”

내 말에 마법사들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7써클의 마법사들이, 무려 9써클의 마법을 어찌 되었든 재현해내고 있었으니까.

새삼 9써클의 마법이 얼마나 위대한 수준인지 재차 실감할 수 있었다.

백색 마녀의 도서관의 등급이 상승하면, 이런 마법을 더 엿볼 수 있으려나? 백색 마녀는 실제로도 아라셀리보다 최소 두 단계 위의 마법사였으니까.

‘흐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아라셀리의 가능성을 새삼 점치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9써클을 달성하였는데, 만약 ‘더블 써클’을 극한으로 단련하고 본래의 써클마저 되찾는다면?

어쩌면 백색 마녀 그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럴 일은 이제 거의 없겠지만.’

아홉 개의 마나 써클은 이미 굳어버렸고,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안타깝지만, 예전의 힘을 되찾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할지도 모르겠다.

···아라셀리가 정말 천재라서, 원래의 써클보다 더욱 단련하기 힘든 더블 써클을 9써클 이상으로 단련한다면 또 모를까.

“타워의 자태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클라이벤 제국의 궁정마법사이자 7써클 마법사이기도 한 ‘마르벵’이라는 이름의 노인이 감격에 찬 눈으로 외쳤다.

저 ‘타워’ 하나하나는 천문학적인 금전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어떤 마법사도 금전 따위를 신경쓰지 않았다.

저기에는, 감히 인간의 화폐로는 환산할 수도 없는 위대한 마법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산등성이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푸른색의 기둥을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의 ‘그랜드’급 마법사라고 하면, 다른 세계에서는 7써클 수준의 마법사는 되었다.

보통 7써클의 마법사가 되면 ‘대현자’ 혹은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았으며, 그건 비비안타 제국에서도 비슷했다.

즉 아스칸타 월드의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7써클의 수준이라는 것인데, 그에게 갑작스레 9써클 수준의 마법을 보여준다면 대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외적으로 마법을 극한까지 발전시킨 비비안타 제국이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7써클의 마법이 마법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로 표현되고 있었다.

8써클은 선구자도 없었으며, 길도 없었고, 그 벽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두텁고 심연처럼 깊고 어두워서 감히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였다.

그런데, 거기에 아라셀리가 8써클을 한 단계 넘어선 ‘9써클 마법’을 끼얹어버린 것이다.

“용사님. 두 번째 타워를 즉시 만들면 되겠습니까?”

궁정마법사 마르벵은 잔뜩 흥분한 눈으로 나와 아라셀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마법사들이 참으로 호의적이다.

“물론이죠.”

“그럼 지금 당장 출발합시다!”

지금껏 그 어떤 용사도 이런 지원을 받아본 적 없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뿌듯함이 몰려왔다.

“앞으로도, 제가 표시해둔 포인트로 가서 열심히 타워를 세워주세요. 저는 마왕의 눈을 피하기 위해 건설현장에는 갈 수 없으니까요.”

“옙. 물론이지요!”

“그럼 이만.”

마왕의 시선을 핑계로, 심지어 나는 노동의 현장마저도 마법사들과 왕국의 병사들에게 떠넘길 수 있었다.

“저희는 어디로 가나요?”

“재료 수급. 타워의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재료가 완벽하게 준비된 건 아니거든.”

타워에 사용되는 마법 재료 중에서는 ‘벼룩의 간’이나 ‘뻐꾸기의 양심’, ‘여우가 먹다 남긴 포도’등 희귀한 물건도 있었고 ‘그리핀의 단 하나뿐인 황금색 깃털’이나 ‘겨울잠 자는 북극세쌍룡의 코털’, ‘거대산악곰의 쓸개’ 등 거대 괴수를 처치해야만 구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물론, 목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라셀리의 복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휘황찬란한 아이템과 최첨단 에테르 디스펜서로 무장한 나와는 달리, 그녀는 언제나 허름한 로브에 낡은 나무 지팡이 하나만을 들고다녔다.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차원여행을 대가로, 가지고 있는 모든 장비를 잃어버려야만 했으니까. 지금 이 세계에서 제아무리 뛰어난 장비를 보급받는다고 해도 결국 다음 세계로 이동할 때, 전부 잃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물건만은 다르다.

그녀의 목에 걸려있는 총알 목걸이. 어째서 그것은 차원이동의 여파로 손실되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아라셀리는 비비안타에서도 단 하나밖에 구할 수 없었던 어떤 희귀한 물질의 소량을 간신히 얻어서 총알에 바르는 것으로, 총알 그 자체를 ‘자신의 신체 일부’로 위장했다고 한다.

즉, 차원이동을 하면서 세계 그 자체를 속이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말인데······.

그 재료의 정체는 다름아닌 ‘드래곤의 비늘’.

만약 그것을 더 구할 수 있다면?

아라셀리도 차원을 여행하며 장비의 손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세계에 드래곤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전설에 의하면 드래곤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한다.

‘만약 드래곤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런 이유로, 나는 ‘타워’의 재료를 구하며 겸사겸사 드래곤이 실존하는지 찾아다닐 생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목적도 있고 실속도 있는, 가장 효율적인 ‘용사의 모험’이 아닐까?

*

저번 주인공을 사냥하고서, 유서담은 [기계를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법(A)]이라는 스킬을 얻었다.

이건 기계를 조금 더 정밀하게 다룰 수 있고, 기계의 구조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그보다는 더욱 기계를 ‘감정적으로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힘들어요. 그 이상 에너지를 소모하면 제 몸이 불타버릴 거예요.’

‘핫하! 어서 날 사용해! 폭발하고 싶다구! 폭발! 폭발! 폭발! 빨리 날 터뜨려줘!’

‘졸려··· 그냥 전원 내려주면 안 돼···?’

그렇다. 기계의 웅웅거리는 소리, 파직거리며 스파크가 튀는 소리 등이 전부 ‘말’처럼 들려왔다. 그렇다고 실제로 기계에게 감정이 생겼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유서담이 기계의 상태를 조금 더 선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을 뿐.

이게 도움이 되느냐?

도움이 되긴 되었다.

예를 들어, ‘그냥 잠이나 좀 자자···.’라고 중얼거리는 폭탄과 ‘당장 날 터뜨리라고!’라며 외치는 폭탄이 있다고 치자.

전자의 폭탄을 터뜨릴 경우, 이상하게도 불발이 일어나거나 오작동이 나기도 하고 혹은 그 파괴력이 생각보다 약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후자의 폭탄은 터뜨리면 오발 없이 무조건 터졌으며, 심지어 그 화력 또한 평균보다도 더욱 강력했다.

에테르 블레이드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평소보다 에너지 효율을 더욱 절약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 파괴력을 증대시키는 게 가능해졌고, 윈체스터의 조준력이나 연사력도 섬세해지고 훨씬 빨라졌다.

기계류를 자주 다루는 유서담에게는 그야말로 환상의 서포트 스킬이나 다름없었다.

펑, 퍼퍼펑!!

확산 마법이 인챈트된 가스탄을 터뜨리자, 머리 아홉 달린 늑대 괴물이 바닥에 고개를 쳐박고서 괴로워했다. 폭발의 여파로 찢어진 가죽의 빈틈에 에테르 블레이드를 쑤셔 넣고서 ‘파열’ 버튼을 누르자 에너지가 폭사되며 즉사!

완벽한 연계였다.

나인헤드 울프라고도 불리는 이 늑대는 최소 마스터급 기사 다섯이 달라붙어야만 간신히 처치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보스급 몬스터 중 하나였는데, 그 둘에게 이것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유서담이 나인헤드 늑대를 굳이 잡은 이유는 단 하나.

“얘네 가죽으로 쇼핑백 만들면 귀티 좀 나던데.”

“쇼핑백이 아니라 핸드백 아닌가요?”

“둘 다 똑같은 거 아니야?”

“······다르거든요.”

고작 쇼핑백 하나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폭발의 여파로 조금 다치신 거 같은데, 치료해드릴게요.”

“그래.”

아라셀리는 유서담이 아주 살짝이지만 폭약에 그을리자, 가까이 다가와서 치유의 빛을 밝혔다. 그것은 오로지 마법으로 이루어진 빛이었으나, 9써클의 수준에 달한 그녀의 마법은 성직자들의 신성력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왕님. 용사의 동태가 수상합니다.’

그런 용사를 몰래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 하나.

이마에 뿔이 돋아있는 그 사내는 피부가 온통 새카맸기에, 그림자와 동화되어 그 인기척이 거의 새어나가지 않았다. 마치 벌레처럼, 풀처럼, 나무처럼, 자연 그대로에 녹아들어있는 그는 전음으로 자신의 마왕 ‘디아블로 김’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드디어 무슨 계획을 실행하려는 모양이로군!

‘그, 그게 아닙니다.’

-그럼? 지금 용사는 무얼 하고 있지?

‘그··· 나인헤드 울프를 사냥했습니다.’

-······뭐, 뭐라고?! 소환된 지 고작 한 달밖에 안 된 용사가 어떻게 나인헤드 울프를 사냥해! 믿을 수 없군!

‘하지만 사실입니다. 용사는 뛰어난 성직자 소녀를 동료로 두고 있고, 본인 또한 아주 독특한 검술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젠장······ 특별한 용사가 소환됐나 했더니, 만만찮은 놈이었군. 그래서, 나인헤드 울프는 왜 사냥한 거지? 지역 정화? 괴수 제패전? 마기 제압?

‘아뇨, 아닙니다.’

이걸 진짜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하수인은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보고를 올렸다.

‘······쇼핑백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에, 디아블로 김은 잠시 침묵했고.

큰 소리로 일갈하였다.

-···뭐라고 이 새끼야? 지금 장난 쳐?!

‘사, 사실입니다! 저는 결코 마왕님께 거짓을 고할 수 없습니다!’

하수인의 말에 디아블로 김은 이마를 턱! 소리가 나도록 짚었다.

-용사라는 새끼가···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그의 행보를 유추하고, 파악하고, 계산할 수 있어야만 그가 마왕성에 도달했을 때 완벽한 계략으로 그를 함정으로 밀어넣을 수 있을 터.

하지만 이번 대의 용사라는 놈은 도저히 예측하는 게 불가능했다.

소환된 직후 왕성에 일주일 동안 눌러앉아 세금으로 호화롭게 먹고 놀지를 않나, 그러고서 모험을 출발하나 했더니 이번에는 휴양지를 전전하여 여행하지를 않나.

-그랬더니, 이번에는 뭐? 고작 쇼핑백 하나 만들겠다고 안타우림 산맥의 지배자인 나인헤드 울프를 사냥했다고? 미친놈인가 진짜?

그러나, 하수인의 시야 공유를 통해 들어오는 유서담의 모습은 정말로 용사라기보단 수전노에 가까웠다.

용사가 늑대가죽 뜯어내고서 히히덕거리는 꼴이라니.

그러다가 문득 디아블로 김에게 어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인헤드 울프를 사냥할 정도라면 이번 대의 용사는 이미 완성형이라는 의미.

그렇다면, 지금 당장 사냥해도 큰 문제는 없다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다른 마왕놈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가는 눈독을 들일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본인이 직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 하지만, 용사를 끌어들일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하나 있지 않던가?

-저 소녀가 성직자라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디아블로 김은 아라셀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성직자는 파티원과 함께라면 파티의 수준을 두 배에서 열 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한없이 취약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즉, 납치하기 쉽다는 의미.

성직자가 비록 마왕에게 쓸모는 없다지만, 미인을 납치해서 진열해놓은 건 마왕들의 유구한 전통이지 않았던가? 저 소녀는 여태 보았던 그 어떤 미인보다도 아름다워서, 몰래 지켜보고 있는 순간에도 숨이 턱턱 막혀올 정도였다.

탐난다. 용사를 골리는 이유 외에도, 그저 순수하게 저 소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그런 이유로, 지금부터 저 소녀를 납치해서 데려오라.

그건 꽤 위험한 계획이었으나, 디아블로 김에게는 하등 리스크가 없었다.

실패하면 아쉽지만 만약 그에 분노해서 용사가 찾아오면 좋은 거고, 성공하면 어차피 용사가 찾아올 수밖에 없으니 더 좋고.

그저, 용사 유서담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목표였다.

< 용사 유서담(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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