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사 유서담(2) >
제클펜 왕국.
아스칸타 월드의 ‘2제국 4왕국 1교회’ 중 하나로서, 사실상 세계 최강대국 그리트린 제국과 알라하 신성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게 호구가 잡힌 국가이기도 하다.
“어~ 좋다.”
제클펜 국왕이 준비해준 퍼펙트 화이트 38년산을 마시며, 다섯 마리의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하인들이 준비해준 최고급 만년설 얼음 과자를 먹으며, 나는 그렇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무슨 자격으로?
용사 자격으로.
목욕을 마친 뒤 가운을 걸치고서 나오자 여자 하인들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말했다.
“저어, 시중을··· 들겠습니다···.”
그에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내가 암만 쓰레기라지만, 그래도 양아치처럼 굴지는 않을 생각인데.
“됐으니까 그냥 돌아가서 잠이나 자라.”
“네, 네에? 저희가 매력이 없어서 그, 그러신 건가요···?”
그러면서 울먹거리는 하녀들. 하긴, 용사에게 거절당하면 국왕한테 어떤 처벌을 받을까. 그건 미안하니까 대충 둘러댔다.
“나 사실 남자가 좋아.”
“······그, 그럼 남자 시중을···!”
“한대 맞을래?”
“아닙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애초에 내가 국왕에게 갑질을 하는 건 돈, 여자, 술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인데 말이다.
나만을 위해 준비된 호화스러운 방으로 돌아온 뒤, <찬란한 ‘광휘의 계절’의 맹세+5>를 장착하였다.
SSS급 럭키가이의 세계관에서 구한 이 갑주는 무려 빛의 물질로 만들었기 때문에 야광처럼 상시 발광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신성스러운 느낌이 한가득이었다.
검은 <빛을 잃은 샛별> 대신 에테르 블레이드를 사용했다. 샛별은 ‘악’ 속성인 데다가 저주가 담겨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
그에 비해 에테르 블레이드는 광휘의 계절보단 아니지만 레이저가 사출되는 것으로 ‘그저 빛’의 느낌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거기에 부츠까지 신으면 풀무장 완료. 밖으로 나오니, 왕국에서 준비해준 검정색 고급 로브를 걸친 아라셀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 목욕 좋으셨나요.”
“어. 시원했지.”
“저도 하고 싶었는데······.”
“목욕탕 하나 더 있다니까? 공주가 쓰던 거.”
“혼자 하면 무슨 의미에요.”
“······.”
이 꼬맹이도 가만 보면 점점 더 수위가 높아지는 거 같다.
실제 나이는 나와 비슷하다지만 나이를 대가로 차원여행을 하는 바람에 현재 외모가 너무 어려서 도의적인 책임감과 도덕적인 뭔가가 가슴을 꽉 억누른단 말이지···.
“됐고. 왕이나 보러 가자.”
“네에······.”
내가 아스칸타 월드에서 지낸 시간은 고작 일주일.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지만, 국왕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답답했을 것이다.
마왕 잡으라고 소환한 용사가 모험은커녕 왕궁에 눌러앉아서 사치나 부리고 있다니!
“용사여. 대체 모험은 언제 떠나는가?”
“기다리라니까요. 저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선 모험을 떠나야, 마왕의 하수인도 물리치고 마기에 오염된 땅을 정화할 것 아닌가?”
맞는 말이다.
처음, 아무것도 모르는 용사는 모험을 떠나서 잡졸1부터 사냥을 해야만 한다.
예를 들자면 슬라임, 고블린, 늑대, 오크 등이 그 잡졸이 되겠다.
마왕의 하수인이지만, 그 힘은 취약하기 그지없어 용사의 성장 원동력이 될 뿐인 경험치 자판기들.
그것들을 사냥한 뒤에는 이제 조금 강력한 마왕의 부하들이 나온다.
오우거, 트롤, 와이번, 웨어울프!
마왕은 용사의 힘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잡졸2, 잡졸3, 잡졸4를 보내서 레벨 업을 시키고 마침내는 혼자서 드래곤의 모가지마저 딸 정도로 강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게 불가능하다. 말이 ‘용사’지 사실 나에게는 용사의 축복같은 게 아예 없다시피 했고, 그런 잡몹을 잡는다고 해서 레벨이 올라가지도 않는다.
그러니, 지금 당장 모험을 떠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즉, 나는 부질없는 ‘모험을 위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마왕을 사냥할 수 있는 철저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운 뒤, 비로소 ‘아! 내가 저놈을 조질 수 있겠구나!’ 싶으면 그제야 모험을 떠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직 준비가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 준비라는 게 대체······.”
“제가 말씀드린 건 하고 계십니까?”
“······그래. 왕국은 물론, 제국의 마법사들을 끌어 모으고 있지. 용사의 말이니 일단은 듣겠네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황당할 것이다.
하라는 모험은 안 하고, 왕궁에 눌러 앉아서 마탑의 유능한 마법사들을 끌어모으라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가 사냥하려는 마왕은 ‘디아블로 김’. 결코 사냥할 수 없을 것이라는 최악의 마왕입니다. 충분한 준비는 필수불가결이라는 말입니다.”
“그래······. 맞는 말이지. 하지만 디아블로 김은 역대 최강의 마왕성을 구축해냈다네. 그곳으로 들어갔던 수많은 마스터급 기사와 이름 날리는 모험가들조차 살아 돌아오지 못했단 말일세. 어떻게 하려는 겐가?”
디아블로 김은 아주 특별한 마왕이다. 스스로의 힘을 기르는 대신, 마왕성을 아주 극악무도한 난이도의 ‘던전’으로 재구축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
이름하야, 우주존버 작전!
“교수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국왕에게서 마왕성에 대한 브리핑을 받아서 읽은 아라셀리였기에, 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발을 헛디뎠다가는 끝없이 추락하는 나락의 절벽!
지옥의 악귀가 울부짖는 처형대!
용암 속에 똬리를 틀고서 용트림을 하는 드래곤!
머리 셋 달린 지옥의 수문장 케로베로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되는 가시지옥의 관문!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순간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무한의 미로!
마왕성에 존재하는 스테이지 하나하나가 ‘최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흉흉한 것들이었고, 아라셀리는 그것들을 모두 머릿속에 각인하고서 가장 알맞는 대처법을 연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난 브리핑 하나도 안 읽었다.
애초에 마왕성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라셀리. 귀신 붙은 집이 있다고 치자. 퇴마를 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그러자 아라셀리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법이 아닌 평범한 방법으로 생각하면, 우선 귀신과 대화할 수 있는 퇴마사와 그를 호위할 신성기사 다섯을 준비하여 귀신의 원한을 물어야겠지요. 쌀을 쳐서 부정한 기운을 물러내고, 특수처리한 소금을 준비하여 혹시나 귀신이 분노했을 때를 대비해야만 해요. 또, 벼락맞은 나뭇가지를 준비해서······.”
“틀렸어.”
“네?”
“귀신 붙은 집에 대포를 쏴서 불태우면 돼.”
“앗······.”
결국 귀신은 집에 들러붙어 있다.
그런데 굳이 힘들게 귀신을 왜 해치우려고 드는가?
그냥 집을 불태워 없애버리면 되는 것을.
즉, 나는 애초에 마왕성을 공략할 생각이 없었다.
마왕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할 뿐!
비록 아라셀리의 마나 써클은 이제 간신히 1써클을 마스터하고 2써클을 만들고 있는 정도였지만, 이 세계에는 마스터급의 기사(추정 레벨 150~200)와 그랜드급의 마법사(추정 레벨 200)라는 존재가 있었다.
비비안타 제국에서의 전통적인 마법은 혼자 발동하는 것이 아닌 여럿의 마법사가 모여서 사용하는 ‘전략 무기’로도 쓰였다고 하니, 많은 수의 마법사가 모여서 아라셀리의 마법을 사용한다면?
예를 들어서.
“······‘메테오 스톰’ 정도의 마법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바로 그런 거야!”
나는 내가 직접 싸울 생각이 애초에 1%도 없었다.
용사가 뭐 대수인가? 어쨌든 마왕만 물리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로.
“···마탑에서 연락이 왔다네. 지금 바로 용사를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군.”
“그렇습니까? 잘 됐군요.”
메테오 스톰은 말 그대로 하늘을 유영하는 운석 하나를 소환하여 떨어뜨리는 마법이다.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를 메테오 스톰을 두고서 대지 혹은 화염 계열 마법이라고 말하지만, 틀렸다.
저 하늘의 운석을 시공간 마법으로 소환하여, 중력 마법으로 재배열하는 것!
메테오 스톰은 공간계 마법의 극의라고도 할 수 있었으므로, 사용 조건 역시 굉장히 까다롭다.
최소 9써클 이상의 시전자가 필요한 건 물론이요, 천문학적인 액수가 필요한 재료가 어마어마하게 필요했기에 평소 같았다면 결코 사용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무려 메테오 스톰 마법을 익히고 있는 마법사와 무한히 금전이 쏟아져 나오는 지갑이 내 곁에 있지 않던가?
“메테오 스톰 급의 마법을 사용하려면 초거대 마법진 정도는 설치해야 되겠지?”
“네, 네···. 그렇죠. 시전 목표를 중심으로 두고, 최소 여섯 포인트에는 마법의 구축이 되는 기둥을 세워야만 할 거예요.”
운석 소환은 결코 간단한 마법이 아니다. 아라셀리가 본연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9써클’이라는 강력한 마법의 매개체를 대체하기 위해 나는 꽤 발빠르게 뛰어다녀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용사 유서담식의 모험이다.
쓸데없이 고블린 잡고 납치당한 마을주민 구출하고 그런 거 다 필요없다 이거다.
어차피 마왕 한놈 족치면 모든 게 끝나는데, 뭐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해볼까?”
*
한 달이 지났다.
디아블로 김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고블린 부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용사 유서담의 예상 행선지에서 여전히 대기하고 있습니다.
용사가 여행을 시작하면, 마왕이 잡졸들을 보내는 건 암묵적인 룰이나 다름없었다.
마왕에게도 썩 나쁜 일은 아니다. 강력해진 용사를 운 좋게 사냥한 몇몇 마왕들은 역대급의 힘을 얻었던 전적이 있으니까.
디아블로 김의 생각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대의 용사, 유서담이라는 놈을 제대로 키워서 마왕성으로 끌어들여 사냥하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얻을 수 있을 터.
그렇게만 되면, 더 이상 세상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최강의 마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미친 용사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하다못해 최약의 잡몹 중 하나인 늑대 사냥조차 하지 않는다. 용사 유서담이라는 놈은 그냥 정말로 모험이 아닌,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푸르른 들판과 공기 좋은 산, 지저귀는 산새들의 노래를 안주 삼아 약주도 한 잔씩 걸치고 은거 기인을 만나 바둑도 두고, 대충 사기 쳐서 칡즙을 산삼즙이라고 팔아먹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모래성도 만들고, 야자수 열매 따서 마시고···.
정말로 놀러다니고 있다.
용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대체 이 미친 용사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거야······?”
디아블로 김은 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본인이 직접 마왕성 밖으로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그놈 역시 나처럼 전략과 계략을 좋아하는 놈일 수도 있지. 이게 다 계획이라면? 답답한 나머지 마왕을 직접 끌어들이려는 계획······. 좋아, 머리 좀 쓰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디아블로 김은 마왕의 옥좌에 엉덩이를 딱 붙인 채, 근엄하게 턱을 괴였다.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든간에.
“···나한테는 결코 통하지 않는다.”
디아블로 김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여태 수많은 모험가와 라이벌 마왕군의 세력을 무찔러온 ‘주인공’의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 용사 유서담(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