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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210화 (210/251)

< 용사 유서담(1) >

체르멜트 13호에서의 일은 깔끔하게 일단락되었다.

나는 선원들에게 레드의 죽음을 알렸고, ‘진범’이 따로 존재했다고 알렸다.

그들은 레드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였기에, 두 개의 태양 사이에 끼어서 생존해야만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멘탈을 건드릴만한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레드와 체르멜트 13호의 만행은 영영 이 우주에서 묻혀버리겠지만, 그건 사실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아라셀리. 우리는 이만 가보자.”

“즐거웠습니다, 탐정 유서담. 다음에 또 볼 일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나저나, 우주선도 없이 어떻게 떠나신다는 겁니까?”

“구조선이 오고있다는 신호가 포착되었으니, 이대로 기다려도 됩니다만······.”

“괜찮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아라셀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가 흡수한 ‘개연성’은 아직 세 번 정도 더 쓸 수 있었으므로, 이것을 대가로 나는 아라셀리와 함께 여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우주여행이 아닌 차원여행을 시작한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멸망 진행도가 적당히 위험한 세계 중에서 고르자고.’

<마침 사냥률도 높고, 멸망 진행도가 조금 위험한 수준에 이른 세계가 있습니다.>

‘어딘데?’

의뢰인은 내 눈앞에 해시태그를 띄워주었다.

『마왕은 마왕성을 키운다』

#판타지용사던전경영성장영지물

#악당 #마왕성은내여자친구

‘···정말 지저분한 해시태그네.’

<요즘 유행입니다.>

정말? 저게 유행이라고? 믿을 수 없다.

‘구라치지마.’

<들켰군요.>

‘······.’

의뢰인이 언제부터 저렇게 감정이 풍부했던가.

<곧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서서히 나와 아라셀리의 몸에서 빛무리가 퍼져나오자, 선원들은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몸 조심히 돌아가십쇼!”

“네. 당신들도 구조될 때까지, 화이팅입니다.”

시야가 흐려짐과 동시에 메시지가 송출되었다.

[109레벨의 주인공 ‘디아블로 김’의 세계, 아스칸타 월드로 이동합니다.]

[10···9···8···]

[2···1···0]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눈을 뜨니.

“오오, 그대가 이번 대의 용사인가!”

“······엥?”

황금색의 용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있는 왕좌에 앉은, 붉은 제복의 늙은 왕이 나를 반겨주었다.

[당신은 아스칸타 월드의 ‘구세주 용사님’이 되었습니다.]

뭐?

양손을 번쩍 들고서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산만한 뱃살이 출렁이며 이마의 왕관이 비틀어졌다.

“세계를 마왕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용사가 마침내 당도했도다! 모두 일어나 축복하도록 하여라!”

펑, 퍼펑!!

사방에서 폭죽이 터지더니,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여인들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은빛의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척! 척! 걸어나와 검을 하늘 높이 치켜세웠으며, 왕의 뒤에서 하늘하늘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나타나더니 활짝 웃음꽃을 피운다.

정황상 공주처럼 보였다.

“용사님, 우리 세계를 부탁해요!”

“허허.”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어처구니 없는 상황.

그러나, 썩 나쁘지는 않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나는 그중에서도 적응에 조금 더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크흠.”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저기······.”

내가 천천히 입술을 떼자, 용사의 등장을 축복하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아주 좋은 현상이다.

“마왕 잡으면, 두당 얼마씩 줍니까?”

“······.”

“······.”

일단은 용사가 됐으나, 나는 공짜로 움직여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게, 지금 무슨···?”

주위를 돌아본다. 아라셀리는 내 차원통로에 탑승한 후유증으로 멀미가 나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있다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았다. 아라셀리식 차원 방랑과는 달리, 의뢰인의 차원여행은 의류 등을 보존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일단 제 소개를 하자면,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마왕을 전문으로 사냥하는 베테랑 ‘용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오, 그렇군······!”

“하지만!”

나는 손가락을 척! 들었다.

“용사라고 어떻게 공짜로 움직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마왕 사냥은 정말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뜨거운 뙤약볕의 사막을 건너고, 습도 99%의 정글을 헤쳐나가, 지옥의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죽음의 땅을 지나쳐, 마침내 마왕성에 도달하여 처절한 싸움 끝에 마왕을 무찌른다! 그 과정에 대체 얼마나 많은 심력이 소모됩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대가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테이크 어 페이! 베테랑이 프로페셔널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진지하고 시리어스하게 마왕 토벌에 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왕 폐하께서 용사에게 응당한 보상을 지불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 해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은 거의 없다. 받아봐야, 대부분 지구로 가지고 돌아갈 수도 없을 테고.

그러나 내가 이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역사상 모든 용사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홀로 여행을 떠나, 스스로 동료를 구해 마침내 마왕을 토벌했다. 그들의 용맹함은 노래가 되고 또 시가 되어 여전히 세상을 떠돌고 있거늘, 어찌 그대는 보상을 주장하는가?”

“허어, 폐하께서 하나는 아시지만 둘은 모르시는군요. 한때는 그랬었죠. 저 또한 용사로서 활동하며 보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시대가 변했습니다. 용사들은 점점 더 난이도가 높아지는 마왕 토벌에 지쳤고, 아무런 도움조차 주지 않고서 일단 소환했으니 용사랍시고 부려먹기만 하는 국가의 마왕토벌 정책에 화가 잔뜩 났단 말입니다.”

“그건······.”

“아니면 저 그냥 퇴근합니다? 예? 월급도 안 주고 부려먹는데, 파업할까요?”

“자, 잠깐! 그대를 소환하기 위해 ‘2제국 4왕국 1교회’가 모두 힘을 합쳐서 제국의 국가 예산 5년 치에 달하는 금액을 소모했단 말이다! 이번 소환의 책임은 우리 왕국에게 있어서, 그대가 돌아가면 우리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걸세!”

와 뭐야. 나 생각보다 비싼 몸이었잖아?

그렇다고 해도, 말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제 제안을 받아보심이 어떻습니까?”

어차피 돌아올 대답은 하나 뿐이다. 국왕은 결코 용사의 말을 거스를 수 없으니까.

*

이 세계에는 ‘8마왕’이 존재한다.

말 그대로 8명의 마왕이 세계 곳곳에 자리를 잡고서 스스로의 세력을 키운다는 말인데······.

그들의 성향이 ‘악’이라는 점을 제외하고서는, 사실 세력 자체는 인간들의 최강국가라 불리는 ‘2제국 4왕국 1교회’와 맞먹는 수준인지라 전쟁이 조금 잦을 뿐 마왕의 침공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야기를 듣고 의문이 생겼겠지만, 그렇다.

그 무시무시한 마왕성이 8개나 되면서 인간의 7개 세력과 비슷하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마왕들은 마왕성에서만 그 힘이 강해지는 타입이었으며 마왕군의 병력들은 하나하나가 정예병력인 대신 그 숫자가 매우 적었던 것.

그에 비해 인간들은 가끔씩 ‘마스터’급의 영웅들까지 있으면서 심지어 일반 병사들의 숫자도 굉장히 많았기에, 마왕군이 함부로 인간들을 침공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세력이 이렇게 비등했던 건 아니다.

한때는 마왕의 숫자가 무려 30에 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당연히 인간보다 마왕군의 힘이 더욱 강력했고, 세계를 악마로 뒤덮을 수 있는 수준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인간들은 ‘용사 소환 의식’을 통해 천하에 다시없을 ‘비대칭 전력’을 소환했다.

혼자서 태산을 가르며, 바다를 뒤집어 엎고, 하늘을 무너뜨린다는 미친 존재들!

어떤 용사는 소환되자마자 일곱 명의 마왕을 베어냈으며, 어떤 용사는 다섯 마왕성이 연합하여 일으킨 전쟁을 단신으로 막아내기도 했다.

등장하기만 하면 그대로 역사에 한 줄 그어버리는 존재감!

정예 악마? 전략? 병법?

아무것도 필요없다.

용사들은 그냥 그 존재만으로 인간의 세력을 키워주었고, 인간들은 더욱 더 용사라는 존재에게 의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용사 소환이라는 것이 전통이 되고, 관행이 되었을 무렵.

어느덧 세월은 200년 가까이 흘렀고, 이제 마왕들의 세력은 인간들과 간신히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마왕의 공포는 옛날같지 않다. 말이 마왕이지, 사실상 샌드백이랑 다를 게 없단 말이다.

‘그런 세계에서, 마왕으로 환생하다니이이!!’

시간은 5년 전으로 돌아간다.

세상에 ‘용사 유서담’이 드러나기 이전.

이세계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학생 ‘김 군’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 뒤, 눈을 떠보니 이쪽 세계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도, 8마왕 중에서 가장 최약체 마왕으로!

마왕으로서 새로 부여받은 이름, ‘디아블로 김’은 자신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젠장, 너무한 거 아니냐고···.”

거기에 이 ‘마왕성’이라는 놈은 한결같이 똑같은 말만을 반복한다.

[모험가를 사냥하여, 경험치를 흡수하십시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세상에 용사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 열심히 성장해두지 않으면 살아날 길은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싸움같은거 못한단 말이지······.’

디아블로 김은 마법과 전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싸운 전적이라고는 동네 8살짜리 꼬마와 싸워서 이겨본 게 끝인지라, 용사와 직접 칼을 맞댔다가는 그대로 개죽음을 당할 게 뻔했다.

그런 이유로 디아블로 김은 모험가를 사냥해서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게 아닌, ‘마왕성’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건 역사에 다시없을 미친 짓이었다. 세상에, 그 어떤 마왕이 자신의 힘을 안 기르고 마왕성을 기른단 말인가?

아무리 마왕성이 강하더라도, 결국 본인이 강력해야만 하는 게 마왕이거늘!

하지만 그는 다른 마왕들과 사고체계가 달랐다.

함정, 전략, 배신, 이간질.

온갖 더럽고 추잡하고 마왕의 권위 따위는 전혀 없는 방법으로 모험가들을 마왕성으로 유인하여 죽이고 또 죽였다.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5년이 흘렀고.

세상에 ‘용사 유서담’이 소환되었다는 소문이 돌 무렵.

어느덧 마왕 디아블로 김은 최강의 마왕 중 한 명이 되었다.

비록 마왕 본연의 힘은 약하기 그지없었으나, 마왕성 그 자체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한 탓이었다.

세상 그 어떤 마왕이 알았을까.

모험가를 사냥하여 번 경험치를 마왕성에 투자하면 그 효율이 더 좋다는 사실을 말이다.

“디디. 용사가 소환되었다고?”

-그렇습니다, 마왕님.

당당한 마왕이 된 디아블로 김은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그림자색 머리칼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마왕성, ‘다크니스 딜리트(Darkness Delete)’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였으나 현재는 여인의 모습으로 현신한 상태였다.

마치 조각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겸비한 다크니스 딜리트는 디아블로 김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고운 머리카락이 쏟아지듯 어깨 너머로 무너져 내렸다.

-마왕이시여. 용사는 역사 대대로악마들에게 공포를 각인한 존재. 결코 상대할 수 없습니다. 부디 다른 마왕들과 연합하시지요.

“그건 좀 별로. 그놈들 띠껍거든. 그리고, 내가 질 것 같지는 않은데?”

비록 본인의 힘은 인간들의 일개 기사 정도의 수준이지만, 이 마왕성 자체만 두고 보자면 가히 ‘최강’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디아블로 김이 아무리 싸가지없게 굴어도 다른 마왕들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했으며 그 어떤 제국과 신성교회도 디아블로 김의 마왕선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어차피 마왕성에서 안 나갈 거다.”

마왕성은 최강이었으므로 절대무적의 안전을 보장해준다. 그런데 만약, 마왕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용사가 직접 마왕성에 입장한다면?

“그땐, 용사도 내 경험치가 되는 거야.”

디아블로 김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용사라는 존재가 자신의 마왕성으로 찾아오는 그 날이 점점 더 기대되기 시작하였다.

< 용사 유서담(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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