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아인의 땅을 위하여(3) [수정] >
사건 발생 일주일 전.
이란에 막 도착한 유서담 외 헌터 협회의 S랭크 초능력자 4인은 ‘던전 속 표류 차원’을 떠돌고 있었다.
생명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던전과는 달리 그 어떤 몬스터도, 기현상도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곳은 너무나도 고요했고, 4인의 헌터는 적막함으로 인해 인간이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고요하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죽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는 것일까.
주홍빛으로 물든 이 황량한 바위산맥을 건너고 또 건너며 헌터들은 표정을 굳혔다.
“던전 안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사실 정확히는 던전 ‘안’이 아니라 던전과는 다른 어딘가의 공간이었지만 유서담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이곳은······ 떠돌이 차원이 얽히고설키다가, 결국에는 꼬여버린 것처럼 보이는군요.>
표류 차원은 지구 어디에나 존재한다. 던전과 게이트 현상이 발생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비중으로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이란 쪽은 그 빈도가 유독 심했다. 아마도 기존에 발생했던 SSS+급의 던전과 게이트를 처리하지 않은 탓에, 그 강력한 차원의 힘에 이끌려서 또다른 던전이연쇄작용으로 발생하는 듯싶다.
이 떠돌이 차원들은 그러한 수많은 던전들에게 얽혀서, 마치 미로와도 같은 구조가 되었다. 던전의 내부에서 또다른 표류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 하면.
“······앗! 저건 던전 아닌가요?”
표류 차원 내에 아예 던전이 발생하기도 했으니까.
‘심각한데······.’
던전 현상은 현대 과학으로는 증명되지 않았기에, 이렇듯 이란처럼 던전을 방치해놓는다는 게 어떤 의미지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유서담은 차원이 꼬이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기에, 마냥 방치해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던전으로 들어가보자고.”
던전 또한 C~S까지 등급이 상당히 다양했기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S급 던전은 제아무리 베테랑 S랭크 헌터라도 자칫 하다가는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렇게 표류 차원과 던전을 전전하기를 사흘밤낮. 새삼 협회의 헌터들은 유서담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잔머리와 온갖 꼼수들은 사실, ‘멋’이 없는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솔직히 말해서.
헌터로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라고 봐야만 했다.
자신들 또한 베테랑이면서 너무 미디어 매체에 심취해, 화려함에 눈이 멀고 말았던 것일까.
헌터란 본디 조용하고 정확하게, 적을 사살하는 이들이다. 요즘에는 초능력자들이 나와서 사방을 불태우고 광선을 지져대는 등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고서 인기를 얻지만······ 진짜배기 헌터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C급의 괴수를 만나더라도 유서담은 조용히 신중하게 단 한 발의 탄환으로 적을 침묵시켰다. 화려하지도 않고 고작 저랭크 괴수를 상대로 너무 긴장한 게 아닐까 싶지만, 초능력자들의 화려한 능력에 의해 수많은 괴수들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였고, 체력과 자원의 손해를 최소한으로 하여 적을 물리쳤다. 덕분에 협회의 헌터들 또한 사흘내리 잠을 거의 자지도 못했지만 체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어느 표류 차원.
이곳은 적이 없었기에 어느 정도 긴장을 늦추고서 유서담과 함께 야영지를 펼쳤다.
그는 야영지를 펼치는 기술마저도 세심했는데, F랭크 헌터로서 짐꾼 역할을 오랜 시간 해오며 그런 잡기술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협회의 헌터들은 역시 유서담은 뭐든 다 꼼꼼히 처리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나저나, 여기는 예쁜 곳이네요.”
잡초마저도 모두 죽어버린 곳을 과연 초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곳은 그저, ‘공간’이었다. 삭막한 모래로 뒤덮인 공간의 하늘을 바라보니, 반짝이는 별들이 수를 놓고 있었다.
은하수. 지구에서는 더 이상 보기 힘든 그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협회의 헌터들은 간만에 여유를 느꼈다.
“여기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구요?”
“응.”
“멋지네요.”
시간으로 따지자면, 새벽 4시쯤일까.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의, 가장 어둡지는 않지만 가장 아름다운 시간.
하늘은 사실 새카맣지 않다. 별들의 빛으로 인해, 보랏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그러다 문득, 유서담은 그런 생각을 했다.
멸망한 세계의 시간은 사실 흐르지 않는 게 아니다. 시간의 가장 마지막인 황혼에서 멈춰, 모든 생명이 서서히 죽음 속으로 잠들어갈 때마다 새벽을 향해 아주 느리게 달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새벽에 도달한 세계는, 이제 어떻게 되는가?
그는 고개를 치켜들었고, 갑작스레 멀찍이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거기서 뭣들 하는 거야! 여기는 이제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지 않는가!”
흠칫 놀란 협회의 헌터들이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기에 깜짝 놀란 것이다.
하지만 유서담의 머릿속에는 그들의 말이 제대로 번역되어 들어왔다. 그는 서둘러 아이템 <광휘의 계절>을 장착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과 마주하였다.
이곳으로 찾아온 그들은 총 세 명의 인원이었는데, 각자가 서로 다른 종족이었다.
초록색 피부를 가진 덩치 큰 종족과 땅딸막한 난쟁이, 그리고 귀가 뾰족한 푸른 피부의 여인.
“아, 죄송합니다.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요.”
“그래···? 근데, 너 인간으로 보이는데. 혹시 ‘지구인’이냐?”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베르소크 때처럼 고개를 저었다.
“인간은 맞습니다만, 지구인은 아닙니다. 뭐, 지구에 섞여들어 살고는 있지만요.”
지구에서 살고있고, 인간이지만, 지구인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 ‘이계인’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경계심 역시 줄어들 터.
유서담은 일부러 환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만났군요. 당신들도, 지구로 불시착한 이계인들이 맞습니까?”
“···그래.”
“역시. 이계인들이 따로 모여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있단 사실을 뒤늦게 듣고서 찾아왔습니다.”
“뒤늦게 들었다고? 우리는 서로의 차원이동 파장을 느낄 수 있을 텐데······?”
“······.”
그건 몰랐다.
“아, 그게··· 그건 알고 있었는데, 제가 지구 생활에 완전히 동화되어서 찾아올 수가 없었거든요.”
“아, 그래. 그렇군.”
그의 변명에 난쟁이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서둘러 다가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어서 서둘러! 여기를 떠야 한다!”
“예? 왜죠?”
“거, 자네도 이계에서 왔다면 알 거 아닌가! ‘여명’이 시작되면, 차원이 무너져 내린다. 여기는 이미 끝이 도래했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거지! 멀거니 있다가는 휘말릴 수도 있어! 빨리 가세!”
“자, 잠깐······.”
여명은 보통, 희망을 의미하지 않던가? 그런데 차원이 무너져 내린다니.
그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서담은 협회의 헌터들과 함께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아주 특이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허공에 푸른색의 게이트를 생성해서 다른 던전이나 표류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장소는 여전히 생명의 흔적이 남아있는 세계였다.
노을진 하늘, 꽃이 만개한 숲에 우뚝 서있는 건축물들. 지구의 빌딩을 연상케하는 그 건축물들에는 수많은 종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온몸에 풀이 돋아있는 거인, 나무 사이를 타고 돌아다니는 원숭이 인간, 머리에 사슴뿔이 나있는 종족, 팔다리가 두 쌍이나 있는 인류 등등.
수많은 종족이 모여서 생성된 그 공동체는, 유서담으로서도 상당히 흥미롭게만 보였다.
“저, 저게 대체 뭔가요······?”
협회의 헌터들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력을 헌터들의 머리에 둘렀다. 텔레파시 마법의 일종으로, 대화의 내용을 번역해서 들려줄 수 있었다. 모르는 언어를 알아듣게 하는 마법은 힘들지만, 아는 마법을 해석해서 들려주는 마법은 쉽다.
“이제 알아들을 수 있을 거야. 나만 믿고 따라와.”
난쟁이는 유서담을 이끌고 앞서 나가며 말했다.
“자네, 어느 차원 소속이었는가?”
“비비안타 제국이 제 고향입니다. 마법을 사랑하는 세계였습니다.”
“흐음. 그렇군. 마법이라. ‘라칸탈’ 씨와 얘기가 잘 통하겠어. 그나저나······.”
난쟁이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
“자네의 세계는, 어찌 되었는가?”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멸망했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다.
“아뇨···. 멸망의 직전, 차원이동 기술을 개발하여 빠져나왔습니다.”
“그런가. 자네는 운이 좋군. 진짜 ‘멸망’을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진짜 멸망······말씀이십니까? 그게 대체 뭡니까?”
그에 난쟁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손짓했다.
“따라와보게.”
유서담은 그를 뒤따라서 걸었다.
대로를 관통하고 있자니, 수많은 이종족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그들 중에는 인간도 상당히 많았는데, 아마도 차원이동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인간들이겠지.
“여길세.”
난쟁이가 안내한 장소는 다른 낡은 건물들과는 달리, 푸른 크리스털이 박혀있는 아주 독특한 장소였다.
“마법의 제국 비비안타 출신이라고 했나? 마찬가지로 마법의 세계 출신인 라칸탈 씨의 거처다. 우리가 던전과 잉여 차원을 자유로이 건너다닐 수 있는 것도 모두 저분 덕이지.”
난쟁이가 말하길, 그들은 운이 좋게 차원을 이동할 수는 있었지만 그 이동 기술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고 한다.
하긴, 차원이동을 완전히 정립하는 건 아라셀리조차 불가능했는데 이렇게나 많은 종족이 그게 가능했을 리가 없다.
이곳에 모여있는 이들 중 99%는 ‘아주 우연히’ 차원을 표류할 수 있던 덕분에 지구에 불시착한 것이었고, 나머지 1% 정도가 그나마 스스로 차원을 이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차원을 가장 제대로 다루는 사람은 단 한 명, 라칸탈이라고 했다.
“······손님이 왔나 했더니, 인간이었군.”
푸른 머리칼에 푸른색 피부를 가진 사내가 힘없이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그는 소름이 끼치도록 잘생겼지만, 너무나도 무료하고 지루한 얼굴을 하고있어서 매력이 모조리 지워지고 있었다.
“라칸탈 씨. 이 자는 비비안타 출신이라고 합니다. 본인 말로는 지구에 정착해서 적응해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 그건 굉장히 독특한걸.”
서담은 목례를 했다.
“유서담입니다.”
“라칸탈이다. 푸른 별빛에 젖어드는 이슬의 종족이지.”
언젠가 이계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종족이었기에 유서담은 가까스로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다.
“이슬 속에서 피어난 가장 위대한 마법의 종족을 뵙다니. 영광입니다. 마법사로서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런가······ 네 세계에는 우리 종족이 없는 모양이로군.”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협회의 헌터 네 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 대체 무슨 대화야?’
‘나도 몰라······ 해석해서 들려주시는 거 맞지?’
‘영어로 해석해주시는데도 못알아듣겠어······.’
라칸탈은 그런 헌터들을 슬쩍 둘러보더니, 무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순수 지구인도 있군.”
헌터들이 숨을 들이키자 유서담이 서둘러 말했다.
“예. 제가 지구에서 상당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거든요.”
“···오호라. 그 말이 사실이던가?”
“예. 저만의 터전을 만들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놀랍군, 놀라워. 정말로···.”
라칸탈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우리를 찾아온 이유도 있겠지.”
그에 고개를 끄덕인 유서담은 말했다.
“······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물어보게.”
유서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술을 떼었다. 상대방은 마녀보다는 아니지만, 마녀만큼이나 마법을 극한까지 발달시켰다는 이슬의 종족. 어쩌면, 해답을 알고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멸망 이후, 우리들의 세상은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에 라칸탈은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질문이로구나’라며 쓰게 웃은 뒤 답했다.
“어떻게 되기는. 간단하지 않느냐. ······그저, ‘세계’가 우리의 세상을 다시금 ‘하나’로 뭉쳐서 수거해간다. 그뿐이다.”
“······예?”
하나로 뭉쳐서 수거해간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유서담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자 라칸탈이 덧붙였다.
“세계가 우리의 차원을 창조했다. 그렇다면, 반대도 가능하지 않겠느냐? 나는 멸망의 순간을 두 눈으로 본 불행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리 말하며 라칸탈은 자신의 손목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웬, 그와 맞지 않는, 붉은색의 피부같은 것이 덮여있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등을 까뒤집었다. 나무의 껍질 같은 것이 있었다.
허벅지에는 바위덩어리 같은 게 뭉쳐있었고, 쇄골에는 입술같은 것이 있었고······ 온몸에, ‘라칸탈이 아닌 것’이 섞여있었다.
“멸망의 순간, 세계는 하나가 되어 섞여버린다. 마치 점토를 꾹꾹 눌러 담는 것처럼.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지고, 나무와 바위의 구분이 없어지고,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어진다. 멸망은, 그렇게나 덧없는 것이었지.”
그러나, 유서담은 그의 말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라칸탈의 신체에서 벌어진 저 현상은······ 꼭, ‘헬 게이트’를 연상케했기 때문이었다.
“···예의가 없군.”
“아. 죄송합니다.”
라칸탈이 자신의 피부를 가리자, 유서담은 뒤늦게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침착해야만 했다. 아직 확신은 없었으니까.
“그럼, 굳이 그 질문을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는가?”
“그럴 리가요.”
유서담은 애써 담담한 척,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계인이지만 지구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 말고도 또다른 이계인들이 이 지구에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당신들을 돕고자 찾아왔습니다.”
사실 그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도 별로 문제는 없을 터.
하지만, 이 라칸탈이라는 미남자를 본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자는 가능성이 있다.
수많은 이종족들을 이 조그마한 공간에 처박아두고서 통솔할 정도의 능력이 되었으며, 비록 아라셀리처럼 모든 마법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슬의 종족은 본디 ‘마도공학’에 특화되지 않았던가?
반세기 전에 유행했던 RTS게임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를 떠올리면, 이슬의 종족과 굉장히 비슷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난쟁이들, 즉 신화 속에서나 볼 수 있던 ‘드워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손재주는 지구의 장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이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큰 힘이 될 거야.’
< 아리아인의 땅을 위하여(3)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