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기다림(2) >
휘이이잉······.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 소리에 기괴한 웃음이 섞여있는 듯싶지만, 말레아는 그에 대해 별 신경조차 두지 않았다.
-끼기긱···.
-끼익······.
이 귀신들의 특징으로는, 산자에게 들러붙어 그들의 정신을 헤집어놓는 것. 그리하여 정신과 기가 약해지면 그들에게 빙의하거나 아예 백치로 만들어버리는 등 악질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혔으나 말레아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정신은 이미 반쯤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킥···재미없어···.
-히힉···히······.
그러나 이곳에서 유일하게 산자였던 말레아의 곁에는 끊임없이 망자들이 들끓었고, 이제 그들을 달고 사는 것은 말레아의 의무가 되었다.
붉은빛을 띄는 바위의 앞에 무릎을 껴안고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말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서담이 모습을 감춘 이후로, 1년하고도 반 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라거나 ‘잠깐 어디로 갈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라는 식으로 위로를 했다. 혹은, 자신을 버리고 먼저 위층으로 갔다면 뒤쫓을 생각조차 하고 있었다.
하지만 튜토리얼에서는 그 어떠한 메시지도 전달해주지 않았다. 고층의 최초 정복자가 있다면 모든 층에 알람이 오거늘, 아직 그 누구도 79층을 넘어서 80층으로 진입하지 않은 것.
그 어디에서도 그의 소식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압도적으로 최상층에 도전하고 있는 그녀였기에 튜토리얼의 요정들도 말레아를 등반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유서담의 흔적을 거탑 내에서 찾아보고 있었지만, 전혀 소용이 없다고 한다.
“······.”
말레아의 공허한 눈동자에 79층의 전경이 담겼다.
멍하니, 그렇게, 허송세월하며, 앉아있자.
어떤 튜토리얼의 요정이 조용히 그녀에게 접근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정상을 정복하고서 ‘소원’을 비는 게 어떠신지요~?
“···소원?”
-그렇습니다아~ 설마 모른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최정상을 정복하는 데에 성공한 도전자는 소원을 빌 수 있답니다~!
“······.”
그러고 보니, 그랬던가. 여태 소원을 빌기 위해 탑을 오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니까. 즉,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누군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는 소원도, 통용되는 거야?”
-물~론이지요~! 세계 하나의 운명을 통째로 뒤바꿀 수도 있는 소원입니다아~! 고작 누군가를 만나는 데에 사용하기에는 아깝지만~ 결국 소원은 비는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말레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 적막한 공간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도 슬슬 지쳤다. 그러나, 찾을 방법이 없어서 자포자기한 상태였는데.
‘······방법이, 하나 있었구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아······.
“···뭔데?”
-79층에서 너무 오래 머무른 바람에~ 도전자 말레아의 영혼이 완전히 이곳에 귀속되어버렸거든요~?
요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으로 어디를 가든, 당신의 영혼은 이곳에 속박되어 다시 돌아오게 될 겁니다아. 80층으로 향해도, 결국 금방 79층으로 돌아오겠지요~?
그러면서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아~ 빨리 도전하셨어야죠~’라며 요정이 투덜거렸지만 말레아는 전혀 듣지 않고서 걸었다. 이 공간은 굉장히 협소하였고, 80층으로 향하기 위한 보스룸 또한 지척에 있었다.
찰랑···! 발목을 휘감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것은 물질적인 힘이 아닌, 정신적인 힘.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족쇄가 되어, 마치 쇠사슬처럼 말레아의 두 발목을 단단히 묶고있는 것이다. 이건······ 그 어떤 마법적인 힘으로도 풀 수 없으리라.
하지만, 해결하는 법이 없지는 않다.
‘버티면 돼.’
쇠사슬을 억지로 끌고 나간다. 일반인이었다면 이 공간에서 100일 남짓 머무르는 정도로도 영영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튜토리얼의 요정이 말했지만, 말레아는 장장 500일이 넘도록 머물렀음에도 80층으로 향하는 통로에 들어설 수 있었다.
“···윽!”
그러나 이내, 정신이 뒤집히는 것만 같은 까마득한 느낌이 들더니 다시금 79층의 한복판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 공간은 요정의 말대로 ‘죽어서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영혼마저 속박되어, 영원히 떠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오르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말레아에게 포기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계속해서 외부로 발을 내디뎠다. 그 어떤 도전이나 시련과 수수께끼조차 없었거늘 고작 보스룸으로 향하는 것조차도 이렇게나 괴로울 줄은 몰랐다.
79층은 완전히 말레아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그녀는 이 공간 그 자체와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관리자’들의 악질적인 장난이었으나 도전자였던 말레아는 알 길이 없었기에, 그저 도전하고 또 도전하였다.
처음에는 고작 한 발을 내딛었을 뿐인데도 79층으로 송환되었다. 그 다음에는 두 발자국을, 그 다음에는 무려 다섯 발자국을 뛰쳐나갔다. 그녀는 스스로의 도전에 확신을 하였고, 그때부터 말레아의 도전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그러다 영혼이 찢겨나가는 수가 있습니다! 다른 방법을···!
튜토리얼의 요정조차 안절부절하며 그녀의 행동을 말렸지만, 소용없다. 한 번 무언가에 몰입하기 시작한 말레아의 귀에는 그 어떤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
말레아는 눈을 떴다.
선명하다.
어째서, 여태 세상을 고작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뿐일까.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저 붉은색은, 그저 빛의 파장을 각막으로 받아들여 빨갛다고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붉은색이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그 너머로, 현실을 넘어서······ 색이나 실체 따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계.
그곳이 말레아의 시야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평소에는 그들을 볼 수도,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만약 그들을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게 된다면 결국 ‘그들’과 똑같은 몸이 되어버렸다는 말이기에 이 세상 그 누구도 영혼의 실체를 증명해내지 못했다. 그것들을 본 자들은 더 이상 현실에 기록을 남길 수 없는 형태가 되어 구천을 떠돌게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말레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영혼이 완전히 이 세상에 융합되는 와중에도, 육신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가진 미련, ‘기다림’만이 말레아라는 영혼을 존재하게끔 만들었기에 영혼화가 되었음에도 육신을 놓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의 신체를 고스란히 보존한 채로 영혼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잡아당기는 이 정체불명의 억제력 또한 두 손으로 잡고서 뒤흔들 수 있게 되었다.
‘······내 힘으로는, 이 사슬을 결코 끊어낼 수 없어.’
하지만, 이 쇠사슬을 길게 늘어뜨려······ 100층에 도달하는 것 정도라면.
‘가능해.’
그리고 마침내.
[79층의 보스 스테이지로 진입하였습니다.]
[도전자 말레아의 건투를 빕니다.]
그녀는 비로소 도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시작만 한다면, 도전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말레아는 그렇게 믿으며 보스룸으로 들어섰고.
“······어?”
바닥에 떨어져있는, 웬 익숙한 푸른색의 수정구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래층에서 값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녹화 구슬’이었다. 그것도 유난히 등급이 높은 것으로, 영상을 단순히 녹화하는 정도가 아닌 홀로그램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준의 고등급으로 보였다. 이 튜토리얼 전체를 통틀어서 저런 고급 아이템이 과연 5개나 될까.
말레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것에 손을 뻗었고.
그 순간, 허공에 웬 남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지지직!
-아아, 들려? 이거 지금 되는 건가?
푸른색으로 색칠된 그 남자의 얼굴은, 익숙했다. 아니···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여태까지 말레아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유서담이었으니까.
유서담은 허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툭툭 터치하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제대로 한 거 맞아? 자꾸 반짝이잖아.
-지금 시작했어요, 교수님···.
익숙한 목소리에, 익숙한 대화. 그에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지만, 애써 참았다.
“유서담······.”
녹화된 영상이기에 그는 자신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소리를 불렀고.
-응. 나 여기 있어.
“······!”
그는 마치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듯,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뿐이랴. 정확히 눈까지 마주쳤다.
“제, 제가 보이는 건가요? 이건··· 대체, 어떻게 연락을······.”
하지만 곧 착각이었다는 듯, 유서담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도, 지금쯤 네가 나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이제 나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미안해.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다.
-너에게는 가장 먼저··· 사과를 하고 싶어. 말없이 떠나버린 건······ 어떻게 사죄를 해도 소용이 없겠지. 외로움을 많이 타던 너에게 있어서, 동료의 소실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는··· 나도 잘 알아. 너에게 큰 상처를 줬을 거야.
“······.”
잘 알고 있구나. 역시, 내가 싫어져서 떠난 건 아니었던 걸까, 하며.
그가 원망스럽고 또 미웠지만, 결국 또다시 안심을 해버리는 자신의 마음을 느낀 말레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왜, 그랬어요···.”
녹화된 영상이었건만, 멍청하게도 말레아는 그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에게도, 너와 함께 한 시간은 추억이었어.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시간들이었지. 그런데, 나는 그 행복을 완전히 누릴 수가 없었어.
유서담은 말레아의 최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유서담은 그 상황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말레아를 만나서 추억을 쌓고나니 마법 학교에서 만났던 말레아 교장의 최후가 얼마나 쓸쓸하고 비참했는지를 깨닫고야 말았다.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하다못해 수명마저도 억지로 늘려가면서 버티고 버텨서 마침내 그리던 이를 만났건만, 정작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니······.
그건 굉장히 끔찍한 일이었고, 유서담은 거탑을 오르는 내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번 정해진 미래는 바꿀 수 없다. 회귀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정해진 미래를 속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유서담. 당신이 그 일기장을 읽는 순간, 미래는 확정됩니다. 미래의 일이 누군가에게 관측되었기 때문이죠.>
의뢰인은 유서담에게 그리 말하였고, 말레아의 소멸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운명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황에 주어진 모든 것을 이용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에 이 일기장을 써먹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네 미래를 알고 있어. 아니, 그랬었어. 이제는 나도 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떻게 서있는지, 어떤 바보같은 얼굴을 하고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어.
그는 일기장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정해진 그녀의 미래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유서담은 정확히 79층의 도전에 대한 이야기까지만을 읽었고, 거기서 책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79층, 절규하는 망자의 무덤.
도전자의 영혼을 속박해버리는 이 끔찍한 공간에 도착한 직후, 그는 직감하였다. 이 공간이 ‘재회’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너는 분명히 79층에 ‘영혼 속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찾아왔겠지.
“네······. 맞아요. 찾아왔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는 끝까지 자신을 이곳에 남겨두고 떠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대체 왜, 뭐가 문제길래, 그래도, 최소한, 작별 인사 정도는 했어도··· 되잖아요······.”
-···아직은, 때가 아니여서 그랬어.
“······!”
그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말레아의 두 눈동자를 똑똑히 응시하고 있었다.
-말레아. 정말 미안해. 수백 번 사과하고 또 사과해도 부족하다는 건 다 알아. 이 모든 게 내 이기적인 마음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유서담은 말레아의 마지막을 인정하기 싫었다. 기억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만나고서, 고작 그 정도에 만족한 채로 떠나버린 말레아의 최후를 바꿔버리고 싶었다.
그 방법이, 이거밖에는 없었다.
말레아는 유서담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참이나 경청하였고, 이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희망을 담아서.
물어보았다.
“···아저씨.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죠?”
그리고, 기적처럼.
그가 답해주었다.
-응. 만날 수 있어.
그렇게 영상이 종료되었고, 말레아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서 그 수정구슬을 집어들었다. 영상은 다시 재생되지 않았지만, 괜찮다. 그가 남겨두고 간 마지막 물건이었기에 의미가 있다.
조심스레 그것을 품에 갈무리한 말레아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굳건한 결의가 눈빛에 스며들어 있었다. 비록, 자신을 버리고 떠난 유서담이 원망스웠지만, 그를 나무라고 또 사과를 받는 일은 훗날 그와 직접 만나서 하면 될 일이다.
지금은 거탑을 오르는 게 우선이다.
“······도전하자.”
-알겠···습니다아···.
그녀는 거탑을 오르고, 또 올랐다. 그 어떤 동료도, 힌트도, 치트도 필요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했다.
80층, 90층, 그리고 마침내 100층에 올라섰을 때.
말레아는 하늘보다도 거대하고, 모래알보다도 자그마한 형상의 ‘튜토리얼의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가하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가 원래 재학중에던 ‘청연 사립 마법 고등학교’로 돌아와 있었다.
“······어?”
어째서 여기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기다렸다. 공부를 하고, 마법을 연구하였으며, 평범한 사람처럼 생활을 하였다.
그러는 도중 학교에 ‘괴담’이 출몰하기 시작하였으나 이미 저승에 더 가까운 공간에서 1년이 넘도록 생활해온 말레아에게 있어서 그들의 봉인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내친김에, 아예 영혼에 대한 연구까지 진행하며 그쪽 분야의 권위자가 된 말레아는 끝끝내 마법 학교의 교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 남자가 나타났다.
그 때는, 정말로 아슬아슬한 시기였다. 더 이상 거동조차도 힘들 정도로 그녀의 영혼은 희미해져만 가고 있었고 존재감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을 직감했을 무렵, 괴담의 기운이 폭주하였고.
서둘러 그곳으로 향하니.
“···누구십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바로 그 남자가 있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적이 북받아 치솟았다. 말레아는 애써 면사포에 표정을 감추었고, 이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유서담.”
그런데.
“······아, 교장선생님?”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서둘러 확인해보니, 정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난 그 유서담보다도 훨씬 더 과거의 유서담이었다.
세상이 야속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냔 말이다.
절망감이 그녀의 세월을 파고들었다. 여태까지의 삶이 무의미해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희망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이렇게라도 만나지 않았는가.
말레아는 애써 행복한 척, 스스로를 달랬다.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유서담과의 마지막은 썩 달콤했다. 고작 30분, 한여름 밤의 꿈처럼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달콤한 꿈을 꾸며, 말레아는 그렇게 삶의 마지막에 비로소 억지로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서담은 웃지 못했다.
[79층, 절규하는 망자의 무덤]
소멸 직후.
죽음의 순간 조용히 눈을 감았던 말레아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79층, 그러니까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속박되었던······ 바로 ‘튜토리얼의 거탑’에서.
“어···라···?”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뺨과 손목을 만졌다. 이미 존재력 자체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그조차 허락치 않겠다는 듯 그녀의 모든 것을 수십 년 전, 79층에 처음 올랐던 그 당시로 되돌려놓았다.
“아······?”
죽음의 순간에, 꿈이라도 꾸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눈앞에 튜토리얼의 요정이 하나도 아닌 수십 마리가 나타났다. 그들 모두가 당황한 표정으로.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거탑을 졸업한 도전자가 다시 나타나다니···!
-그것도, ‘도전의 자격’을 가진 채로······.
그들은 관리자와 소통을 하는 것인지 횡설수설하였다. 그맘때쯤, 말레아는 자신에게 거탑의 ‘시스템’이 활성화되었단 것을 알았다.
···즉.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건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네, 넵! 관리자님! 아무렴요! 버, 버그 리포트는 즉시 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가장 리더로 보이는 요정이 허공을 향해 굽신거리더니, 이내 이쪽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도오전자 말레아아아~? 왜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방금, 도전자라고 했지? 나 도전자 맞지? 거탑 오를 수 있는 거지?”
-아니, 아, 그게···, 그···.
“맞잖아. 빨리 대답해!”
자리에서 말레아가 벌떡 일어나자, 그녀의 영혼을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이미 너무나도 강대해진 말레아의 영혼은 79층조차도 감히 묶어둘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마치 ‘관리자’를 연상케하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말레아의 앞에서 튜토리얼의 요정들조차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하는 수 없이 리더가 눈을 빙그르르 굴리더니, 간신히 입을 떼고야 말았다.
-···예, 예에. 이, 이번 한 번 뿐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란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두십시오!
“······그래. 한 번이면, 충분해.”
그제야, 말레아는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유서담은 이미 자신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 죽어버린 자신. 그는 자신과의 마지막이 그렇게 끝나기를 원치 않았고, 미래를 억지로 비집어서 바꾸어놓았다.
그는 그녀의 존재가 ‘소멸’한 것이 아닌 원래의 위치로 ‘송환’되었다는 방식으로 미래를 바꾼 것이다. 그날 유서담은 말레아가 소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미래는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의 개연성을 거의 거스르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현재.
말레아는 다시 거탑을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꼭대기에 오르면 ‘소원’을 또 하나 빌 수 있다, 그 말이겠지?”
-마, 맞습니다아~ 그러니까 후딱 최정상 정복하고 빨리 거탑에서 꺼져주십, 아니 나가주시면 정말, 정말정말로 고맙겠습니다아······.
“응. 그렇게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야.”
어느덧 그녀는 수십 년 전, 거탑을 오르며 희망찬 꿈을 꾸던 어린 소녀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 영원한 기다림(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