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기다림(1) >
아래층의 지원이 없어도, 위젠은 거탑을 오르고 또 올랐다.
비록 창의적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위젠이었으나, 그에게는 59층까지 스스로 오른 경력이 있는 동료가 6명이나 있었고 그들 또한 나름대로 기발한 아이디어와 전투 센스를 갖추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등반이 가능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60층부터는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위젠이 그런 60층 이후의 스테이지를 쉽게 오를 수 있던 이유는 오로지 ‘치트’ 덕분일 뿐, 여기서부터는 수많은 희생과 막심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75층에서 동료 한 명을 희생하였다. 77층에서는 두 명을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게 하였다. 78층에서는 동료가 배신을 하여 직접 목을 쳐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2명의 동료가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였다.
죽음의 직전, 자신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던 동료들의 그 눈빛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났으나, 위젠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그들은 소모품으로서의 역할을 다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79층.
오래도 걸렸다. 순식간에 70까지 도달하던 때와는 다르게 질척하고, 너저분하고, 더럽고, 단순무식하고, 심지어 오래걸리는 그의 공략법에 수많은 ‘관리자’들이 지루함을 표출했다.
[북쪽 하늘의 물고기의 성흔이 하품을 합니다.]
[붉은 동백꽃의 성흔이 등을 돌립니다.]
[이란성 쌍둥이의 성흔이 서로 고개를 젓습니다.]
하지만 괜찮다.
모든 동료들을 잃었고, 관리자들의 신뢰도마저 바닥을 치고 있었지만 그는 ‘개연성’으로 인해 어떻게든 꾸역꾸역 거탑을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거기까지였다.
-···위젠, 도전자 위젠! 내려가야 합니다. 여기서는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
79층, 절규하는 망자의 무덤.
이곳은 아주 특이한 스테이지였다. 왜냐, 하나의 층 전체가 전부 ‘트릭’이었으니까. 클리어 방법? 분명 존재하긴 존재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심지어 튜토리얼의 요정이 알려준 힌트는 여전히 사용할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거기에, 이곳이 트릭이라 불리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
-벌써 3개월째 입니다아! 슬슬 ‘영혼 침식’이 시작되고 있다구요!
그건 바로, 79층에 머무는 도전자의 영혼을 서서히 갉아먹는 아주 특이한 현상 때문이었다. 이 영혼 침식 현상은 제아무리 위젠이라도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 영혼이 79층에 서서히 귀속되기 시작한다는 것.
즉, 영혼 침식이 심해지면 ‘영혼 격리’ 현상이 발생하여 영원히 79층에서 떠날 수 없게 된다.
아직은 3개월 정도밖에 머물지 않아서 그저 출구가 사라지거나, 시스템 메시지를 읽지 못하게 되는 등의 환각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심해지면 이곳에 갇히게 될 터. 79층에 머물게 되는 망자는 결코 이곳을 떠날 수 없었으므로 죽음조차도 탈출구가 아니었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이 조그마한 거탑의 79층에 묶인 채 살아가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는 어떻게든 막무가내로 올라올 수 있었지만, 79층은 정말로 아니었다.
결국,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도전을 포기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겠다.”
천상의 날개 길드를 바로잡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제대로 오르는 것. 시간은 굉장히 지체되겠지만 79층에서 영영 묶이는 것보다는 훨씬 형편이 나을 터다.
[정말로 도전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여태까지의 도전이 초기화되어, 70층부터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
[도전을 포기하였습니다.]
[하층으로 내려갑니다.]
위젠의 몸에 빛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그를 다른 층으로 전송하기 위한 임시 포털이 열린 것이다. 그곳에 몸을 담으며, 위젠은 아래층에서 천상의 날개 길드를 억압하고 있을 유서담을 떠올렸다.
이번에 마주치면, 반드시 죽인다.
*
······그렇게, 계획하고 내려왔던 위젠이었다.
“천상의 날개 길드? 해체된 지가 벌써 한 달이오. 어디 숲속에 처박혀 있다 나오셨나?”
“···뭐라고?”
다시 10층으로 내려왔을 땐, 이미 천상의 날개 길드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신흥 길드’랍시고 7개의 새로운 길드가 생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다른 세력을 구축하였지만 밸런스가 맞았으며 서로를 견제하며 또 돕는 구조였기에 누구 하나의 독점이 우려되지는 않았다.
또한 그들의 가운데서 가장 큰 조직인 ‘비질란테’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기에, 감히 누구 하나 함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천상의 날개가 없다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꼬드기는 데에 얼마나 큰 공을 들였던가. 천상의 날개 길드장 알플라이처럼 비열하고 그릇은 좁은 주제에, 야망 하나만 더럽게 큰 사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그러나,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거, 들었지?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한참 머물던 유서담이 글쎄, 새로운 동료를 두 명이나 데리고 가더니 이번에 기어이 70층에 올랐다더군.”
“알지. 그 유명한 아라셀리와 말레아를 동료로 삼지 않았던가? 크으, 둘 다 미인이던데 유서담은 복받았군.”
“복받은 게 아니라 당연한 거지. 70층에 올랐다는 것만 해도 이미 능력이 충분히 증명되었으니까.”
지나가는 다른 도전자들의 대화를 엿듣고서, 위젠은 뒤늦게 뭔가가 잘못되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유서담이 70층으로 올라가버렸다고······?’
벌써? 아니, 어느 틈에? 분명 아래층에서 천상의 날개 길드를 억압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유서담이라도 천상의 날개는 거탑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길드였고, 그들을 혼자의 힘으로 다루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까.
“크으, 그나저나 비질란테는 존경스럽단 말이지.”
“그러니까.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천상의 날개 길드에 대항할 생각을 하고 말이야.”
하지만 상황은 위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막상 내려와보니 천상의 날개 길드는 비질란테가 상대하다가 완전히 무너뜨렸고, 유서담은 거탑을 오르고 있단다. 그것도 아라셀리와 말레아라는, 전대미문의 ‘오버 이레귤러’ 두 명을 데리고서.
위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느긋하게 새로운 길드를 포섭하거나, 알플라이를 찾아서 다시 세력을 구축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튜토리얼의 요정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받았던 제약 때문이었다.
[반드시 가장 높은 층에 오를 것. 만약 누군가에게 추월당한다면, 그 즉시 사망한다.]
현재 그는 79층을 포기하여, 70층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유서담이 70층이라면······.
‘······큰일이다!’
위젠은 다급해졌다. 제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위젠이라지만,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할 수는 없었다. 서둘러 70층으로 향한 위젠은 끊임없이 머리로 이 상황을 되풀이하였다.
아마 60층을 오르던 그때부터 유서담은 자신이 ‘어떠한 도움’을 받고있단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같은 층을 몇 개월째 경쟁하던 유서담이었기에 그걸 모를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유서담은 여전히 혼자의 힘으로 거탑을 올라야만 했고, 자신은 요정들의 힘을 받으며 치트를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순간.
그러니까, 69층에서 70층까지 단 한 단계를 남겨둔 그날.
유서담은 난데없이 도전을 포기하고 아래로 내려갔으며, 위젠 자신은 70층으로 올라섰다.
그때만 해도 그는 유서담을 비웃었다. 여태까지의 모든 도전을 물거품으로 만들다니. ‘최초의 정복자’ 타이틀은 이제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69층에서 아래로 내려간 이유가······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유서담은 잔꾀가 상당히 잘돌아가는 사내였다. 그의 꼼수와 계략에 여태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의 별것도 아닌 듯한 행동에는 전부 다 이유가 있었고, 그 뒤에는 철저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70층에 도착하였습니다.]
여태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가장 큰 행동’인 69층의 도전 포기를······ 단순히 바보취급했단 말인가?
“허억, 헉!”
위젠은 가파른 숨을 내쉬며 70층의 보스 스테이지를 향해 질주하였다.
아직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71층으로 향하는 방법은 잘 알고있다. 치트따위 없어도, 먼저 올라가는 것 정도는, ‘도전’을 먼저 외치기만 해도 가능하단 말이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유서담이었기에.
“······오, 이제 왔냐?”
보스 스테이지의 입구에 가만히 앉아서, 위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악질적이고 악독한 처우였다. 상대방에게 단 한 마디로 죽음을 선고하는 것은. 그러나 유서담은 굳이, 일부러 그를 기다렸다. 그 죽음을 선고받는 순간에 그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어서.
여태, 피도 눈물도 없이 수많은 희생자의 시체를 쌓아올려 그들을 짓밟고서 거탑을 오르던 이의 최후를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어서.
“그럼, 손님도 왔겠다······.”
유서담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려 보스룸의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위젠이 그 의미조차도 불분명한 괴상망측한 소리를 내지르며 전력으로 질주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도전하겠다.”
마침내 보스룸의 진척에 위젠이 다다랐을 때, 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아, 아······.”
[도전자 유서담 외 2인이 71층의 정복에 성공하였습니다!]
*
71층의 도전은 참으로 쉬웠다. 유서담은 어째서인지 이곳의 공략법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고, 말레아 또한 기가 막히는 전략을 그때그때 쏙쏙 뽑아냈기 때문이었다.
최고층의 도전자이자, 거탑 전체를 지배하던 천상의 날개 길드의 숨겨진 배후 위젠이 죽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계약 위반’을 이유로 튜토리얼의 거탑 내에서 자체적으로 그의 영혼을 회수해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성질 더러운 숫사자의 성흔이 흥미로운 눈으로 당신을 주시합니다.]
[귀가 가려운데 못긁는 대두석상의 성흔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반짝이는 눈동자의 성흔이 당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수많은 관리자들이 말레아 일행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그럴만도 했다. 그들의 도전은 위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니까.
오로지 ‘치트’ 하나로 튜토리얼을 정복해나갔던 위젠은 볼거리가 거의 없었으나, 그들의 방법은 대부분이 전략적이었으며 창의적이었고 뛰어난 센스와 전투 실력으로 인해 관리자들조차 눈호강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72층, 73층을 가뿐히 돌파하였다. 74층은 아라셀리의 퍼즐 맞추기 실력이 활약을 했으며, 75층은 유서담의 잔머리가, 76층은 말레아의 기가 막힌 발상의 전환이 정답을 맞추었다. 77층은 힘겹게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며 간신히 올라섰고, 78층은 모두의 힘을 합쳐서 끝끝내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79층 절규하는 망자의 무덤.
“수고했다. 오늘은 이만 자자.”
유서담의 말과 함께 말레아는 침상을 펴고 자리에 누웠다. 이곳은 비록 어둡고 으스스한 공간이었고, 말레아가 제일 싫어하는 ‘귀신’ 타입의 적이 나오는 공간이었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흐흐···.’
두려움? 아니, 그런 감정 따위는 진작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즐거웠다. 이 순간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말레아는 가슴 설레는 매일을 살아갈 수 있었다. 유서담이 있어서, 아라셀리가 있어서.
생사를 함께하며, 투닥거리기도 하고, 고기 한 점을 두고 다투기도 하며, 진지한 순간에 터지는 어처구니 없는 농담에 미소짓기도 하고, 그러나 결국 모두 함께 잠자리에 들며 내일을 생각하는 그 하루하루가 모두 소중하고 행복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내일도 함께 이 역경을 헤쳐나갈 동료들이 있었기에, 마음 놓고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땐.
“하암··· 오늘은 어디부터 먼저 공략할··· 으음?”
부스스 일어나던 말레아는 뭔가 이상하단 사실을 깨닫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아무도 없었다.
흔적조차 없이, 아라셀리와 유서담이 잠들어있던 침상이 사라져있었다.
“뭐, 뭐야···. 장난치지 마요, 유서담. 갑자기 왜 이런 장난을 치는 거야?”
유서담은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지만, 결코 다른 사람의 멘탈을 뒤흔드는 장난은 치지 않는다. 그 또한 말레아가 가진 가장 큰 상처를 알고 있었고, 이런 위험한 장난은 결코 하지 않을 터였다.
휙, 휙.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무슨······. 나 빼고 먼저 탐색이라도 나간 건가?”
아마.
그때부터 짐작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하며, 말레아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79층을 돌아다녔다.
-이히히······!
-희히힉! 희힉! 희히히힉!
귀신들이 날아다니며, 희번뜩 눈을 뒤까집고 말레아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귀신이라니. 과학적으로, 마법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은 존재들이었건만, 오히려 미지의 존재였기에 더욱 두려웠다.
이 세상에 귀신을 상대하는 법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지팡이를 품에 꼭 껴안고서 말레아는 79층을 떠돌았다. 이 층은 생각보다도 훨씬 좁았고, 한 바퀴를 도는 데에는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유서담과 아라셀리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뭐야······ 뭔가, 이상하잖아······.”
그녀는 턱을 덜덜 떨면서 튜토리얼의 요정을 호출하였다. 이제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리고 있는 말레아였기에, 요정들은 생각보다도 더 호의적이었다.
“차, 찾아줘. 도전자 유서담과 아라셀리······ 그 둘이 지금 어디에 있지?”
-그 둘은 현재 찾을 수 없습니다아~
“그러지말고··· 내가 더 열심히 거탑 오를 테니까, 좀······.”
-으음~ 저희도 곤란한 걸요··· 갑자기 둘 모두 존재가 사라졌거든요~ 당신 뿐만이 아니라, 저희도 열심히 찾고는 있습니다만~ 전혀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군요오~?
“뭐, 뭐라고······?”
믿을 수 없다.
그 유서담과 아라셀리가, 자신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갔다고?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말레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79층의 입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도중도중 튜토리얼의 요정들이 찾아와 ‘어서 이 층을 떠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자신은 결코 거탑을 오르지 않을 것이다. 유서담과 아라셀리를 기다려야 한다. 그들과 함께 거탑을 오르는 것만이 살아가는 이유였으니까.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마침내 1년이 지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유서담은 나타나지 않았다.
< 영원한 기다림(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