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튜토리얼의 거탑(10층) >
지원이 끊겼다.
74층을 도전하던 바로 그날을 기점으로.
위젠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눈앞을 날아다니는 나비 형태의 요정을 바라보았다.
“······연락 두절이라고?”
-그, 그렇습니다아~ 저희는 분명히 내용을 전달했는데에~ 그쪽에서어~ 답을 안 해주는 걸요오~?
“그럴 리가. 알플라이, 그놈은 내 말 한 마디면 지 어미도 죽일 놈이다.”
-그건~ 그렇지요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마안~?
“······.”
그렇다. 그건 맞는 말이다. 천상의 날개의 길드장 알플라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였으나, 자신의 목숨 하나만큼은 끔찍하게도 챙기는 놈이었다.
즉, 자신의 목숨에 위협이 될만한 상황이 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주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데······.
‘···유서담이 그놈을 붙들고 있다고 했던가.’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유서담도 상당한 강자였고, 거탑의 랭커로서 아래층에서는 거의 신처럼 군림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알플라이를 붙잡아다 협박한다? 당장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알플라이가 위젠과의 연락을 끊어버리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래서, 골치가 아팠다.
-어, 어떡합니까아~?
위젠 라인을 탄 요정들은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살폈다. 지금도 관리자들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터. ‘어째서 도전하지 않는 거지?’라는 의미의 메시지가 마구잡이로 송출된다.
하지만, 천상의 날개 길드의 도움 없이는 고층으로의 도전이 어렵다. 그들의 ‘치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층에서의 재료 조달이 필요했으니까.
그렇다고 돌아가기에는······ 74층까지 도전한 것이 너무나도 아깝다. 한 번 돌아가면 70층부터 다시 도전해야만 했는데, 여태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차라리 ‘치트’ 없이 요정들의 힌트만으로 75층으로 향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느으은~ 내려가서 확인해보는 게 낫다고 생각됩니다만~?
“어림도 없는 소리를. 이런 일로 손해를 보고 싶지는 않다.”
-하, 하지만 고층을 공략할 땐 상당히 고생하실 수도 있는데에~?
요정의 말은 타당했다. 비록 위젠이 냉철하고 전략적인 분석으로, 요정들의 약점을 간파했으며 그들의 사정을 자신에게 끌어들여 계약을 통해 ‘치트’를 받아낸 행위만 본다면 상당히 두뇌 회전이 빠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처세술은 결코 거탑의 등반에 쓸모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튜토리얼은 수많은 인간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창의력, 순발력, 독창성, 이해력, 계산력을 비롯하여 전투능력과 상환분석능력 임기응변까지. 그 외에도 매층마다 수많은 인간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이 장소에서······ 인간으로서의 창의력과 독창성이 아예 결여된 위젠은 거탑의 등반에 상당히 불리했다.
그는 오로지 현실만을 바라보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고 옆에는 어떤 남자가 칼을 들고 서있다. 그럼 일반인은 ‘칼을 든 남자가 범인이다!’라는 ‘추리’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더 앞서나간다면, ‘칼을 든 남자를 피해서 도망쳐야한다!’라거나 ‘신고해야 한다!’ 등이 되겠지.
하지만 위젠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었다. 추리능력의 상실. 오로지 현재, 지금 이 순간 벌어진 것을 분석하고 이해할 뿐이다. 위의 전제를 두고서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는 어느 부위에 칼이 찔렸고 출혈이 어느 정도이며 몇 분 몇 초 내에 사망하겠군’ 정도의 생각밖에는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튜토리얼의 요정들은 ‘치트’를 강요하였다. 그들의 방식은 그 어떤 창의력이나 추리력을 필요로하지 않았고, 오로지 전투 능력 하나만을 요구했으니까.
“아니. 상관없다. 그대로 진행하지.”
그러나 위젠은 요정의 말을 거부하였고, 강행하였다. [악역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고구마]라는 세계의 개연성에 의한 행동이었으나 튜토리얼의 요정으로서는 죽을맛이었다.
-아, 알겠습니다아~ 그럼 지금 바로··· 도전하시지요~!
위젠은 동료를 이끌고 75층으로 다시 도전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
천상의 날개 길드는 이 거탑 내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거대 규모의 길드였다. 전체 인구수만 따지면 압도적으로 1위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나, 아무나 마구잡이로 뽑은 탓에 인성 문제가 더러 있었고 심지어 길드장조차도 인격적으로 상당히 하자가 있어서 이미지가 좋은 길드는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천상의 날개 길드를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자가, 거탑 내에서 단 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두 명 모두 아래층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거탑을 오르기에 급급했으니, 천상의 날개가 사실상 ‘지배층’이 된 현재까지도 그 누구 하나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자칫 잘못 걸렸다가는 다시는 등반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건 거탑 내에서 자체적으로 치안을 담당하는 조직인 ‘비질란테’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질란테의 수장, ‘안타 아이렌’ 역시 57층의 도전자로서 최상위 랭커라고 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천상의 날개는 건들 수 없었다.
“요새도 그 친구들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면서?”
10층, 도시 몰렌도.
비질란테의 길드 아지트에 찾아온 유서담은 아이렌과 대면하였다. 거탑의 상주민이 가장 많은 10층인 만큼 비질란테의 본부가 있는 것은 당연하였지만, 천상의 날개 길드의 본부 또한 이곳에 있는 덕분에 오히려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아이러니. 아이렌의 표정이 항상 굳어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예.”
아이렌은 유서담에게 공손히 답했다. 1~2개월 전이었다면 모를까, 현재 가장 높은 층의 도전자가 된 유서담은 아이렌으로서도 예의를 차려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그들이 지키는 ‘법률’따위, 단 한 명의 강자에 의해 무너져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음······.”
유서담도 그 [에피소드]에 관해서는 잘 알고있다. 주인공 위젠의 사이코적인 행보에 결국 아이렌에 나섰다는 내용의 스토리. 그러나 아이렌은 공개적으로 위젠에게 처참히 패배하였고, 길드원들마저 모조리 짓밟혀서 다시는 그에게 대들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즉, 현재 비질란테의 위상은 현저히 바닥을 기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단 한 사람의 법률조차 바로잡지 못한 비질란테가 어디 떳떳하게 다른 이들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내가 해결해줄게.”
“······예?”
“해결해준다고.”
주인공 위젠의 행보는 특히나 ‘사이다’에 치중되어 있었다.
수많은 법칙과 법률, 암묵적인 룰과 틀에 사로잡혀있는 튜토리얼의 거탑.
그 안에서, 모든 법칙을 깨부수며 나아가는 주인공 위젠!
가로막는 자는 모조리 때려눕히며, 관리자가 정해둔 법조차 요정들과 함께 무시하고서 성장해나가는 그의 이야기는 분명 사이다로 점철되어있을 것이다. 최근 트렌드 조사를 위해 장르문학을 자주 접했던 유서담조차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분명, 주인공 입장에서는 당연한 에피소드였다. 혼자서 승승장구 잘 나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법을 들먹이며 가로막는다? 곧바로 때려눕히고 ‘내가 곧 법이다’따위의 대사 한 번 쳐주면 속 시원한 사이다로 추천과 코멘트가 우수수 달리겠지.
하지만 이곳은 현실이고, 유서담은 현재 조연의 입장에 서있었다.
“어, 어떻게 해결해주신단 말입니까?”
“얘네 알지?”
유서담의 뒤쪽을 가리키자, 아이렌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뒤에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들이 후드를 벗자, 그 얼굴도 익숙한 여인들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아라셀리와 말레아로군요······.”
“그래. 천상의 날개의 이미지를 왕창 깎아내린 주제에, 아직도 잡히질 않고 있다지.”
즉, 아라셀리와 말레아의 존재는 천상의 날개라는 세력에 있어서 옥에티나 다름없었다. 결코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것을 허락치 않는 천상의 날개에게 유일하게 맞서 싸웠으면서, 아직까지도 살아있었으니까.
“쟤들을 비질란테로 들여.”
“···그렇게 되면, 천상의 날개가 저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그걸 노리는 거지. 요즘 이미지 마케팅이 얼마나 중요한 시대야? 저 두 명을 네 길드에 집어넣고서, 천상의 날개에게 대적하겠다고 밝히면 다시 거탑의 ‘율법 수호자’라는 위명을 얻을 수 있지 않겠어?”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긴 했으나, 여태 그들에게 손을 왜 뻗지 않았겠는가. 그랬다가는, 비질란테의 존재 자체가 통째로 말소될 가능성이 더욱 높았기 때문이다. 아이렌이 망설이자 유서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 본래는 자신감 넘치고 신념 하나로 움직이던 저 사내도, 주인공에게 된통 당한 이후로는 아예 전의를 상실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한 번 등장했던 악역이 다시금 복수하겠답시고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독자들에게 고구마 전개는 없었으니까. 저 남자의 성격이 저렇게 된 것 또한 ‘개연성’에 의해 바뀐 것이란 말이 되겠다.
하지만, 그 부분은 유서담이 해결해줄 수 있었다. 그는 개연성의 강제력을 뒤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천상의 날개 길드장을 조금 교육시켜놨거든. 네가 이미지 마케팅을 하는 동안, 그놈은 널 방해하지 않을 거야.”
“···그렇습니까?”
“어. 그러니까, 내가 60층으로 올라간 뒤에 아래층으로 연락 못하더라도 그놈들 꽉 붙잡고 있어. 천상의 날개가 위젠과 내통하고 있거든.”
“위, 위젠······!”
7레벨의 랭커 위젠이 끼어드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싶었지만.
“그놈, 어차피 곧 죽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알았지? 하던 일이나 계속 해. 거탑의 율법을 수호하고 싶다며?”
“알···겠습니다···.”
솔직히 아이렌 입장에서는 유서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천상의 날개가 아예 거탑을 집어삼키기 전에, 어떻게든 그들을 끌어내리고서 비질란테가 비질란테로서 바로서기 위해서는······ 이런 ‘이벤트’가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그럼, 돌아가자.”
비질란테의 아지트에서 빠져나온 뒤 유서담이 기지개를 켜자, 말레아가 불안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자리에 없어도 되는 거예요?”
“어. 상관없어. 어차피 가입명부는 공개되잖아? 지금 너네가 후드 벗고 비질란테 아지트에서 걸어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는 눈이 몇 개야 지금?”
“······굳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말레아가 보기에 유서담은 어딘가 이상했다. 거탑의 등반이 최종목적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목적은 최정상에 올라 ‘소원’을 비는 것이었고, 그건 말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서담은 가장 높은 층을 등반하는 도전자이면서도, 도전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단순히 스트레스 풀이용 놀이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유서담은 가만히 고민하더니, 자신의 품에 들어있던 일기장을 떠올렸다. 지금은 결코 말레아에게 보여줄 수 없는 바로 그 물건. 지금도, 말레아가 매일 밤 써내려가는 일기장.
미래의 말레아는 자신에게 무슨 생각을 하며 일기장을 건네주었을까. 그토록 기다려왔던 사람을 만났는데, 그 상대방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유서담은 말레아의 최후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썩 씁쓸한, 그러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소멸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녀가 그 정도의 행복으로만 만족해야 했을까? 어쩌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전부 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이제 그 또한 인정했다. 이계를 오가며 만났던 수많은 인연은 결코 쉽사리 끊어놓을 수 없다. 지금 이렇게 쫓아온 아라셀리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서담은 자신을 위해 애써준 인연이 있다면.
반대로 그 사람을 위해 끝까지 노력해볼 생각이었다.
“그냥, 네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네?”
유서담이 그리 말하자, 말레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이내 표정을 와락 구겼다.
“완전 늙은이 같은 소리 하시네요. 갑자기 분위기 잡지 마요. 소름돋으니까.”
“······.”
그리 말하며 말레아가 양팔을 부여잡고서 몸을 부르르 떨자 유서담은 웃었다. 확실히 그녀는 미래의 말레아와는 모든 것이 많이 달랐다. 그리고, 미래와는 달리 지금은 매 순간순간이 행복한 것처럼 보이니, 굳이 그때의 일을 지금 미리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돌아가자. 다시 탑을 등반하러.”
그리 말한 뒤, 유서담은 지금쯤 고생하고 있을 위젠을 떠올렸다.
모든 사전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위젠이 알아서 죽으러 와줄 것이다.
< 튜토리얼의 거탑(10층)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