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튜토리얼의 거탑(영원의 모형상자) >
인스턴트 던전, 영원의 모형상자. ‘트릭 던전’이라는 위명에 걸맞게도, 던전에 입성하자마자 나타난 첫 메시지가 이런 것이었다.
[해당 던전은 도전 목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던전은 한 번 입장하는 순간, 반드시 목표를 달성해야만 나갈 수 있다.
그런데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은, 즉 나갈 수 없다는 의미.
말레아는 회색의 벽에 등을 기대고서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어떻게든 천상의 날개 길드원들에게서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트릭 던전은 퇴장이 불가능하다. 그 안에서 굶어 죽든지, 괴수에게 잡아먹히든지,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는단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영원’의 감옥. 죽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이곳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할까. 말레아는 자신의 무릎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긴장의 끈이 탁 끊어지는 순간 모든 게 무력해졌다.
“말레아 씨.”
“응···. 미안. 나 때문에 이렇게 됐네.”
아라셀리에게도 미안한 마음밖에는 없었다. 자신과 함께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녀는 더욱 더 이 튜토리얼 속 세계에서 활약할 수 있었을 테니까. 비록 힘의 제약이 심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가끔 보여주는 마법은 충분히 거탑 내 수많은 명문 길드들이 탐낼만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어서 위기 상황에만 가끔 써야했던 아라셀리의 마법은 랭커들과 함께라면 필살기로 활용할 수 있을 테고, 그녀는 스스로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 없이 든든한 호위와 함께 안전하게 탑을 등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이렇게 궁상맞게 영원의 모형상자 따위에 갇혀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꼴이 이게 뭔가. 이렇게 희망도 없는 상자에 갇혀서, 평생을 죽지도 못한 채······.
‘······.’
말레아가 절망에 빠져들자, 아라셀리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영원의 모형상자에 갇힌 건 분명 절망스러운 일이 맞았다. 평범한 ‘도전자’였다면 결코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을 테니까. 그건 거탑의 ‘시스템’적으로 강제되어있기에 당연했다.
하지만 전혀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말레아 씨. 저기 좀 보실래요?”
“···응?”
아라셀리가 가리킨 곳에는, 웬 화살표가 있었다.
어찌나 성의없이 그렸는지 대충 휘갈겨진 화살표는 어디를 향하는지도 애매모호했다. 하지만 이곳에 길은 하나였고, 가리킬 방향도 하나밖에 없다. 그럼에도 화살표가 있다는 건······.
누군가가 이곳으로 와달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말레아는 저도 모르게 그 화살표에게 다가가 스캔을 하였다.
‘······아주 최근이야!’
여태까지는 모든 흔적에 4~6개월의 시간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 흔적은 바로 최근, 심지어 오늘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말레아는 서둘러 화살표를 향해 달렸다. 이 비좁은 복도에 화살표는 수십 개가 새겨져 있었고, 그것들은 단 하나의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웬 사내가 앉아있었다.
“······.”
그런데 그냥 앉아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휴대용 간이 의자를 펼친 채 등을 기대어 썬글라스를 낀 채로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옆에 설치된 테이블에는 상큼한 레몬빨대가 꽂힌 정체불명의 새빨간 얼음 주스가 녹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거대한 파라솔이 그에게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저, 기요······?”
너무나도 분위기와 맞지 않는 모습에 말레아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러자 그는 말레아를 쳐다보았다.
“······.”
“······.”
그러길 잠시, 그는 선글라스를 슬쩍 콧대로 내렸다.
“싸구려라 존나 안 보이네···.”
그의 눈은 새하얀색이었다. 검은색 머리칼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시리도록 하얀 눈동자. 말레아는 그런 그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특이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지. 튜토리얼의 거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이계의 아이템]을 장착하고 있댔어. 흰색 갑주에 검은색 머리칼, 흰색 눈동자······.’
그건 어떤 유명인의 몽타주였다. 그가 등장한 이래로, 고작 반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 짧은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유서담’이라는 인물을 목격하였고 그 무수히 많은 목격담이 모여서 그의 인상착의를 만들어냈다.
말레아는 홀로 60층을 돌파한 유서담이라는 최정상 랭커를 존경하고 있었기에, 그의 몽타주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매일, 상상하고는 했었으니까.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혼자서 외롭게 거탑을 오르고 있는 걸까. 어떻게하면, 그런 게 가능한 것일까.
[다만 그는 모형상자 안에 홀연히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랜만이네.’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서담 씨.”
[그는 퍽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유서담은 씨익 웃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짓을 하자, 놀랍게도 그 커다랬던 파라솔과 테이블 등의 잡동사니가 어디론가 빨려들어갔다. 혹시 마공학의 극한에 이른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아공간’인 걸까? 잘 모르겠다.
그는 말레아에게 다가오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재회하니 좋네.”
재회일까. 나는 처음 보는데. 말레아는 그리 생각하며 확신했다. 이 남자는, 나를 알고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미래에 만났던 걸까? 그곳에서, 나는 이 남자와 무슨 관계였던 걸까?
그러나, 단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60층의 최정상랭커 유서담이, 바로 여태 나를 도와주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존경하고, 또 존경해 마지않던 사람이 사실은 자신을 여태까지 주시하고, 또 도와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쩐지 가슴이 벅차올라, 말레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과연 여기서 어떤 말을 해야······.
“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젊어. 확실히 젊은 피가 좋아. 나도 젊은 땐 강철도 씹어먹었거든. 산딸기주스 마실래?”
“아, 아뇨. 상큼한 건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 아쉽네. 아라셀리는?”
“저는 마실래요!”
“새거 꺼내줄게.”
“교수님이 마시던 걸로 주세요.”
“아 참, 그거 알아? 이 산딸기주스 내가 직접 농사해서 재배한 거다? 어휴, 57층은 어찌나 할일이 없던지. 거기 랭커들 얘기할 때 맨날 ‘57층의 랭커들은 지금도 지옥같은 전장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다’라고 포장하지? 그거 다 개구라야. 농사짓는 게 도전 포인트거든. 걔들 다 지금 감자캐고 있을 걸? 근데 거기 감자가 무기농이라 맛이 또 끝내줘서 감자탕 먹을 때······.”
“와아, 정말요?”
“···아, 네, 그······.”
······그런데 이 남자.
어째 상상과는 이미지가 많이 다르다.
조금 더, 과묵하고, 냉정하고, 철저한 이미지를 상상했었다. 말은 없지만 무거운 행동 하나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보다는 칼질 한 번으로 적의 전의를 상실시키는.
그런 위대하고 멋진 남자.
“근데 그거 아냐? 감자탕이 감자탕인 이유는 사실 감자가 들어가서가 아니라···.”
“헉, 몰랐어요!”
“······.”
그러니까,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단 말이다.
어쩐지 말레아는 자신이 가슴 속에 품고있던, 존경하고 또 사랑해 마지않던 두 사람(유서담, 그 남자)의 이미지가 한 명이 되어서 철저하게 깨져버리자 넋을 잃고 말았다.
*
“빠져나가는 법은 간단해.”
유서담은 농을 좋아하지만, 그와 별개로 공과 사가 깔끔한 남자였다. 그는 5분 동안 장난스러운 말로 분위기를 풀어놓았다. 그제야 말레아는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그리고 어색하고 축 침체된 분위기를 다시금 끌어올리기 위해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여기서 ‘아니 나도 잡혀왔어’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교수님 진짜 혼나요.”
“······.”
···아닌가? 그냥 헛소리를 좋아하는 건가? 말레아는 순간 머리에 혼란이 왔지만, 애써 그의 이미지를 포장하였다.
“말레아, 너는 아는지 모르겠는데 아라셀리와 나는 다른 차원에서 왔어.”
“네? 저도 다른 차원에서 왔는데요.”
“아니. 그 뜻이 아니야. 너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도전자들은 튜토리얼의 거탑에 의한 억지력으로 끌려왔잖아.”
“그렇···죠?”
“근데 우린 직접 거탑의 문을 열고 들어왔어.”
“······예? 그게 가능해요?”
말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아라셀리와 유서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거탑을 직접 들어온다는 게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아니, 말이 ‘탑’이지 사실 이곳은 문도 창문도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복합 다양체 차원’이란 말이다. 애초에 ‘문’이 존재할 리도 없는데 어떻게 그게······.
“······.”
하지만, 여태 그들이 보여준 기이한 일들을 보자면, 어쨌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 명은 0레벨의 장비로도 4레벨의 도전자를 가볍게 짓뭉개는 마법사였고, 한 명은 고작 반 년만에 60층에 도달한 위대한 도전자였으니까.
“그리고 아라셀리의 전공이 ‘차원학’이란 말이지. 차원학 알지? 요즘 마법 학교 필수 이수과목이야. 학점도 4점이나 주는데.”
“···아뇨?”
“교수님. 말레아 씨의 차원에는 아직 공간학도 없어요.”
“아, 그랬나? 나 그때 사실 공부 안 해서······.”
“그럴 거 같았어요.”
“······.”
도대체, 이 사람들 대화 따라가기가 힘들다. 공간학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학문이랍시도 사장되지 않았나? 근데 그보다 상위 과목 ‘차원학’이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고? 믿을 수 없다.
“어쨌든, 차원과 차원 사이도 가볍게 뛰어다니는데 이깟 문 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란 거지.”
“네······. 그게 지금, 유서담 씨가 아라셀리를 껴안고 있는 행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나요?”
말레아는 살짝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유서담과 아라셀리는 만나자마자 진한 포옹을 하였다. 처음에는 그게 재회의 포옹인 줄 알았으나, 1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3시간이 지나도록 저러고 있으니 옆에서 보는 입장으로는 굉장히 뻘쭘했다.
“아라셀리의 마력을 내 마력으로 보충해주는 거야. 적당히 채우고 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겠지.”
그리 말하며 유서담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지금쯤, ‘천상의 날개’놈들이 널 괴롭히고 있었겠지?”
“···네, 네. 용케도 아셨네요?”
“나는 다 알지.”
어쩐지 우쭐한 목소리. 말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부터 나는 너와 함께 거탑을 등반할 거야. ‘버스’ 알지? 고층 도전자가 캐리해주는 거.”
“네···. 근데 그거 관리자들이 싫어하지 않나요? 가호를 못받을 수도 있어요.”
“그딴 거 필요없어. 없는 게 더 좋아.”
“그런가요···?”
“어. 몇몇 층은 내가 도와줄 수 없겠지만, 어쨌든 지금부터는 내가 함께 할 거니까 천상의 날개는 고민하지 않아도 좋아.”
그에 말레아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천상의 날개가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거탑의 등반에는 걸리적거릴 것이 전혀 없었다. 60층을 오른 최상위 랭커 유서담이 도와준다면, 결코 그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터.
“그리고 적당히 오르다가, 56층 도착하면 천상의 날개 길드장놈이랑 면담도 하고.”
“······네? 자, 잠깐만요! 그건 좀 위험하지 않나요?”
“왜? 너 괴롭혔다매. 마음의 편지를 보고서 이 대대장은 굉장히 유감스러웠거든.”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 남자, 진심인 걸까?
말레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서담의 입은 비록 농담을 내뱉고 있을지언정, 눈동자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진지한 것이다. 한 번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그 결의에 말레아는 결국 입술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부터, 너를 최정상으로 올려놓을 거야. 도전자 위젠보다도 더 높은 곳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방해가 되는 천상의 날개 길드를 반드시 털어야 해. 알겠어? 너는 누구보다도 먼저, 최정상에 오를 인재야. 이런 곳에서 발이 묶여있을 이유가 없단 말이지.”
“······.”
그 진실된 말에, 말레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유서담은 긴장 풀라는 듯 털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내 아라셀리가 떨어져 나오더니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눈을 감고서 주문을 외우자, 놀랍게도 벽면에 황금빛의 찬란하고도 둥그런 통로가 생성되더니 외부의 세계를 비춰주었다.
“그럼, 가볼까?”
유서담과 아라셀리가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앞장서자, 말레아는 하는 수 없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뒤따랐다.
어쩐지 저들과 함께라면, 정상으로의 등반도 정말 가능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튜토리얼의 거탑(영원의 모형상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