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튜토리얼의 거탑(37층) >
말레아의 일기장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벌어진 일’만이 적혀있다. 예를 들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담겨있지 않다는 뜻이다. 당장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도 간접적으로 내 미래를 유추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37층에서, 우리는 결국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붙잡히면 죽는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면 ‘영원의 모형상자’에 갇히게 된다. 선택은 둘 중 하나. 천상의 날개에게 붙잡혀, 죽을 때까지 치욕을 겪느냐. 혹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자에 갇혀 영원히 잠드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와 아라셀리는, 영원의 모형상자에 갇히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날.]
[마침내 그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서담이라고 했다.]
[최정상의 랭커가, 별것도 아닌 존재였던 나를 눈여겨보고 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37층으로 되돌아갔고, 그곳에서 말레아를 만났던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환희와 설렘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동시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다만 그는 모형상자 안에 홀연히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랜만이네.’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퍽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건 썩 희소식은 아니었다. 듣자하니, 말레아와 아라셀리가 벌써 37층에 도달했다는 모양이니까.
“···흐음.”
말레아의 일기를 덮으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69층, 고대 마멜라 문명의 사원. 그 최종 종착지나 다름없는 ‘보스룸’ 앞에서 나는 주인공 위젠과 대면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 이제와서 모든 걸 포기하고 아래로 내려가겠단 말인가?”
“응. 구해야할 사람이 있거든.”
“으득, 그 전에 널 죽였어야 하는데······.”
지금껏 나는 수도 없이 위젠을 방해하였고, 그 덕분에 저놈이 내게 가진 원한은 상당하였다. 하지만 거탑의 ‘시스템’을 교묘히 회피하여 돌아다닌 덕분에 내가 죽을 일은 없었다. 덕분에, 위젠의 분노만 하루하루 쌓여가고 있었지만.
이제 위젠은 70층으로 향한다. 그 뒤에도 관리자들 몰래 요정의 도움을 받으며 승승장구 하겠지. 그의 동료는 6명이었으나, 60층에서 보았던 동료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모조리 갈아치운 것이다.
60층 이후부터 아래층과 연락할 수 없어, 동료를 이곳까지 데려오는 것조차 고역이거늘 그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새 동료를 뽑을 수 있었다?
어떻게?
그야 당연히, 튜토리얼의 요정을 부려서 아래층과 연락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위젠이 아래층에 심어놓고 연락책 및 심부름꾼으로 부려먹는 길드를 알고있다.
‘천상의 날개.’
아래층과 연락한다는 사실이 들키면 거탑의 관리자들에게 죄다 죽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위젠의 거탑 등반에 필수적이다. 바로 모든 층에는 ‘준비물’이 필요했기 때문.
예를 들어, 51층의 보스룸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24층에서만 구할 수 있는 ‘말랑초’라는 희귀 아이템이 필요하다. 필수로 필요한 것은 아니나, 지니고 있으면 공략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일기를 통해 알고 구해놓았지만, 튜토리얼의 요정들은 자신들이 담당하는 층을 제외하고서는 그런 사실을 미리 알 수 없었기에 아래층에게 반드시 연락을 취해야만 하는 것.
그 심부름꾼이 바로 천상의 날개였다. 그들은 고층의 공략법을 위젠에게서 들을 수 있어서 좋고, 위젠은 60층 이후부터는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는 페널티를 가뿐히 이겨내고서 손쉽게 고층을 공략할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현재, 69층에서.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만약 여기서 도전을 포기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실 경우, 60층부터 다시 도전해야만 합니다.]
[정말로 처음부터 다시 도전하실 생각이십니까?]
드물게도 시스템조차 나를 걱정해주었지만, 뭐 상관없다. 사실 69층까지 올라온 이유는 미리 이곳에 대해 조사해놓은 뒤, 말레아를 빠르게 이끌고 올라가기 위함이었으니까. 애초에 난 꼭대기까지 올라갈 생각도 없었고.
[도전자 위젠 외 6인의 일행이 70층으로 향합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뒤돌아섰다. 뒤에서 튜토리얼의 요정이 뿅 나타나 나를 만류하였다.
-제발요! 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아 됐다니까. 안사요 안사.”
-아앙~ 도전자 서담~! 제발 올라갑시다! 네~? 저희가 진짜 잘해드린다니까요~?
“왜? 관리자들이 자꾸 뭐라고 그래?”
-그, 그게 아니라~!
나 때문에 요정들이 관리자들에게서 상당한 득을 보고 있었을 터. 그런데 내가 내려간다니, ‘유서담 라인’을 붙잡고 있던 요정들은 상당히 애간장을 타고있을 거다. 지금쯤 ‘위젠 라인’을 붙잡고 있는 요정들이 부러워서 미치겠지.
하지만 걱정마라. 조만간, 위젠을 포함해서 그 요정놈들 싹 다 잡아서 숙청시켜버릴 거니까. 그때까지는 속이 좀 타들어가더라도,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승리자는 너희들일 테니까.
“좀만 기다려. 조만간, 위젠보다 더 빠르게 올라갈 테니까.”
그리 말한 뒤 나는 69층의 도전을 포기하였고.
[37층으로 이동합니다.]
그녀들을 만나기 위해, 포탈 위에 올라섰다.
*
37층, 기울어진 피에렌의 사탑.
[···오늘의 날씨, 맑음. 그럴 수밖에. 36층은 항상 맑은 날씨를 유지했으니까. 아니, 맑다고 해야 할까. 이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한다. 새삼 거탑 내에 농사짓는 사람이 없는지라 그런 건 별로 중요치않은 듯싶지만, 살짝 아쉽긴 하다. 왜냐고? 피부가 건조하잖아!]
[점심으로는 피넛버터를 듬뿍 바른 쿠키를 먹었다. 빵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 20층 전체를 ‘천상의 날개’ 놈들이 뒤덮고 있었으니까. 지긋지긋한 놈들!]
[나와 아라셀리를 향한 원한이 그렇게 깊었던 걸까. 하긴, 그때 40인의 길드원들을 모조리 불구로 만들어버린 바람에 천상의 날개 길드원들의 명성이 추락했다고 한다. 고작 10층의 도전자들에게 당했으니 말이다. 아휴, 속 시원해.]
“뭐 하세요?”
“일기 쓰지. 여유 있을 때 써놔야 하거든.”
“···그거, 36층에서 있던 일 적는 거예요?”
“맞아. 그땐 정신없었잖아. 천상의 날개놈들 진짜 지긋지긋해!”
매일 일기를 적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말레아는 일기가 밀리더라도, 항상 그날 있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해내어 반드시 일기장에 옮겨적고는 했다. 그 놀라운 기억력은 아라셀리조차 깜짝 놀라게 했는데, 평균적으로 인간은 어젯밤 벌어진 일의 40%를 반드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보면볼수록 기억에 관한 특별한 능력이 있으신 거 같아요.”
“그런가? 잘 모르겠어. 하긴, 어렸을 때부터 내가 단어암기는 잘하긴 했지. 계산이 조금··· 응, 엄청 조금 떨어져서 성적이 낮긴 했지만.”
“······.”
아라셀리는 말레아와 함께하며, 취미삼아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고는 했다. 말레아는 과연 알기나 할까? 전설의 9써클 대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자신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여, 아라셀리는 말레아의 계산능력이 굉장히 형편없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법사라는 직업이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암기에 능하고 임기응변이 뛰어나, 이런 미스테리 수수께끼 서바이벌에서 특출난 능력을 보여준다.
“으음, 끝났다. 이제 슬슬 우리도 잘곳이나 찾아볼까?”
“네.”
모든 층에 ‘안전구역’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층에서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노숙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다. 익숙하게 텐트를 펼치던 말레아는 문득,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물었다.
“저기, 혹시 우리는 언제쯤 만날 수 있나요?”
“······?”
그건 아라셀리를 향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 사람’을 향한 질문. 그것은 정말로 단순히, 장난이었지만.
[조만간 만나게 될 거야.]
“······.”
텐트를 펼치기 위해 바닥을 나뭇잎으로 쓸어내리자, 4개월 전쯤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나타났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말레아는 이내 일기장을 펼쳐서 그것들을 새겼다.
[허공에 대고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언제쯤 만날 수 있나요?’ 그러자 놀랍게도, 바닥을 쓸어내리자 글귀가 나타났다. 그는 내게 조만간 만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과연,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때, 저 멀리서 수십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아라셀리를 바라보자 이미 그녀는 잽싸게 텐트를 철거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천상의 날개 길드원들. 정말 집요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들을 추격해왔고, 마침내는 37층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챈 모양.
예전에는 자신들의 층수를 속여가며 어떻게든 올랐기에 괜찮았으나, 여기서부터는 정말 막막하다. 층수를 들킨 이상, 천상의 날개 길드원들이 결코 더 위로 올라가게 둘 리가 없었으니까.
천상의 날개에는 4레벨에서 5레벨의 고층의 도전자가 많았기에, 이제 막 3레벨의 장비를 간신히 구했을 뿐인 그들이 대항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숲은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난 지형이었기에, 몸을 숨기기에는 좋았다. 튜토리얼을 오르며 민첩과 관련된 장비를 두른 그들은 상당히 유연해졌기에, 능숙하게 나무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드높은 나무 위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에 몸을 숨기자 뒤늦게 천상의 날개 길드원들이 지나쳤다.
“여기다! 여기 흔적이 남아있어!”
“젠장. 발자국이 근처에서 사라졌군.”
“나무 위로 올라갔을 수도 있다. 철저히 수색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죄다 거기서 거기였다. 말레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나무를 타고 도주하였지만, 순식간에 길드원들에게 발견되었다.
“저기에 있다!”
“잡아! 당장 쫓아!”
“망할···!”
추적이 너무 빠르다. 심지어 50층의 랭커들조차 그녀들을 뒤쫓고 있었는데, 5레벨 부츠의 이동속도 버프는 3레벨의 부츠와는 그 궤를 달리하여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어쩔 수 없다. 도망치려면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야만 한다. 한번 들어가면 다른 도전자들과 그 동선이 겹치지 않는 ‘보스룸 챌린지’가 그에 딱 들어맞았으나, 안타깝게도 보스룸은 이곳에서 멀었으며 심지어 이곳의 메인 시나리오를 전부 클리어하지도 못했다.
남은 방법은······.
‘···인스턴트 던전밖에는 없어.’
들어가는 순간 ‘서버’가 나뉘게 되어, 다른 도전자들이 간섭할 수 없는 장소, 인스턴트 던전. 마침 운이 좋게도 그들의 앞에 그런 인스턴트 던전이 나타났으나, 하필이면 최악의 던전이었다.
“······슬슬 멈추지 그래? 그 앞은 ‘영원의 모형상자’다. 한 번 들어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트릭 던전’이라고. 거기에 잡아먹힌 도전자가 몇이나 되는 줄 알고는 있나?”
거대한 상자 형태의 던전이었다. 일명, 트릭 던전. 도전자들을 유혹하여 그대로 집어삼켜버리는, 튜토리얼 거탑에 존재하는 악질적인 던전 중 하나였다. 소문에 의하면 트릭 던전을 클리어할 경우 어마어마한 보상이 주어진다고 들었는데······ 여태 그런 도전자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낄낄, 게다가 저 던전의 설정은 ‘영원’이잖아? 들어가는 순간, 너희는 죽지도 못한 채 저 어두컴컴한 공간을 떠돌아야 한다. 차라리 우리의 인형으로 사는 게 낫지 않겠어? 여태 저지른 일을 봐서······ 적당히 10년 정도만 가지고 놀다가 폐기해줄 테니까.”
말레아는 표정을 굳혔다. 영원히 저 좁디좁은 어두운 공간을 떠돌며 죽지도 못하는 삶을 사느냐, 혹은 치욕스럽게 살다가 10년 뒤에 죽느냐.
그 어느 쪽도 택하고 싶지 않았으나, 만약 정말로 둘 중 하나만을 골라야만 한다면.
‘제발, 이번에도, 부디······.’
여태 자신을 운명처럼 따라다니며, 조용한 곳에서 도와주었던 ‘그 남자’를 믿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레아는 아라셀리의 손을 꽉 잡은 채, ‘영원의 모형상자’로 뛰어들었다.
[인스턴트 던전 ‘영원의 모형상자’로 진입합니다!]
< 튜토리얼의 거탑(37층)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