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80화 (180/251)

< 튜토리얼의 거탑(20층) >

[튜토리얼의 거탑에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금일 오후 7시 39분경, 위젠 외 7인의 도전자들이 60층의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대략 한 달이 지나고, 마침내 위젠의 파티가 60층을 점령하였다. 유서담이 어떻게든 꼼수를 써서 막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요정들의 버그성 플레이와 치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가장 높은 층이 정복되면 모든 층의 도전자들에게 알림이 가기에,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다.

“그거 들었어? 60층에서 도전자 유서담과 위젠이 치열한 접점을 벌인 끝에, 결국 위젠이 먼저 61층으로 올라섰다는데.”

그런 한 달 사이, 말레아는 아라셀리와 함께 놀랍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순식간에 거탑을 정복해 나갔다. 유서담이 아라셀리에게 남겨준 일기장은 물론, 유서담이 거탑 곳곳에 표시해놓은 ‘힌트’들 덕분이기도 했으며 말레아의 뛰어난 판단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아라셀리조차 놀랄 정도로 말레아의 순간적인 판단력이나 위기대처능력은 굉장했는데, 수수께끼로 가득한 튜토리얼의 거탑에서 가장 알맞는 재능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리하여 어느덧 그들은 19층을 정복하여, 20층을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어, 들었어. 50층의 랭커들이 그러던데, 60층의 테마는 ‘협력’이라더라? 각 포지션별로 동료가 필요하다고. 위젠이 튜토리얼의 요정을 통해서 59층에서 몇 년이나 머물고 있던 도전자 몇 명을 섭외해서 60층으로 데려간 건 벌써 유명하지?”

“그렇지? 그놈들, 59층 영원히 못 깰 것처럼 굴더니 위젠의 도움 한번에 바로 올라갔네······.”

20층, ‘메마른 사막의 바다에서’라는 이름의 사막 테마의 스테이지는 광활한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 배경이었다. 아라셀리와 말레아는 도시로 개조된 유적지를 거닐며 소문을 엿들었다.

“유서담은 솔로라서 더 이상 못 올라가지 않을까?”

“글쎄. 최소 4인 이상이 무조건 필요하다고 알려진 ‘트라이앵글의 미스테리’도 혼자서 돌파한 유서담인데, 알아서 올라가겠지.”

“하긴. 그 친구가 썼던 꼼수 나중에 들어보면, 아주 기상천외하더라고.”

튜토리얼의 거탑에서 가장 높은 층을 정복한 위젠과 유서담에 대한 이야기들.

말레아는 유독 유서담이라는 도전자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아라셀리에게 속삭였다.

“저 유서담이라는 분 대단하지? 혼자서 저기까지 올라가다니. 나는 절대 못 할 거야.”

혼자라는 건 상당한 부담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힘들고 지쳤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면 조금쯤은 기대어도 좋을 것이며 정신적으로 나약해지고 피폐해졌을 때 그들과 함께라는 생각에 힘을 얻는다면 더욱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서담은 결코 동료를 두지 않고서, 혼자의 힘만으로 거탑을 올랐다. 일견 미련한 짓처럼 보이지만, 누군가가 곁에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말레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신기하고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그에 아라셀리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대단하신 분이에요.”

“그치? 그치?”

고작 한 달이었지만, 생사를 오가는 도전을 하며 말레아는 아라셀리와 조금 더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아라셀리는 분명히 ‘이레귤러’였으며 그중에서도 특출난 ‘오버스펙 이레귤러’였으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자신의 힘을 모두 잃은 탓에, 평상시에는 평범한 소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마법을 제외하고서도 아라셀리는 민첩성이나 순발력을 비롯하여 호신술이 상당한 데다가 말레아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법을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도전도 20층에서 또 가로막히고 말았다.

20층의 ‘최종 스테이지’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로가 있었는데, 그곳을 ‘천상의 날개’ 길드원들이 꽉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

현재 말레아와 아라셀리는 천상의 날개 길드에서 수배중이었고, 심지어 길드장조차 반드시 잡으라고 달달 볶고 있다고 한다. 그때 아라셀리가 사지를 잘라 불구로 만들어 내던져놓은 40층의 도전자가 사실은 길드장의 친한 동생이었다나 뭐라나.

지금도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사람 10명 중 2명 이상은 반드시 천상의 날개 길드 마크를 달고 있을 정도로 그들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는데, 그런 길드에게 찍혀서 상당히 골치가 아프게 되었다.

10층에서부터 19층까지는 정말 순조롭게 올라왔다. 단 한 번도 무언가에 막힌 적이 없었는데, 20층에서 세력에 의해 가로막히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말레아는 이만저만 고민이 많았다.

“으음··· 어떻게 해야 할까?”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힐끗 저 멀리 수십 개의 아치로 이어져있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56층의 랭커가 길드장으로 있는 천상의 날개였기에, 그 어떤 도전자도 그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나마 희미하게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길드장조차 찍어누를 수 있는 고위 랭커가 와야만 한다는 것인데······ 57층 이상을 도전하는 이들은 흔히 ‘로열 랭커’라고 불리며 아래층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무조건 고층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관심이 많았기에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으음···.”

언제나 뭐든 척척 알아내던 아라셀리에게도 이런 상황은 예상에 없었는지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정면돌파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겠는데요.”

고민끝에 아라셀리는 그리 말했다. 자신의 원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투명화’라던지, 혹은 특기나 다름없는 ‘공간전이’ 등을 이용하여 아주 손쉽게 저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마나 자연 회복력이 거의 없다시피한 아라셀리였기에, 20층까지 올라오면서 사용한 마력이 거의 회복되지도 않았고 지금 당장은 간신히 생체활동을 유지하는 수준의 마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스테이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다른 도전자가 간섭할 수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게다가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뒤 20층에 간다고 해도, 거기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다른 도전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도착 포인트가 열 곳이 넘었으며, 그 장소에서조차 임의로 위치를 변경할 수 있다.

즉, 접전이 벌어지더라도 스테이지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건데······.

“···그게 과연 쉬울까?”

“괜찮아요. 방법이 있어요. 우선, 저들은 우리가 몇 층을 도전하는지 모르잖아요?”

“응.”

“그러니, 아래로 내려가는 거예요. 16층 역시 여기보다는 아니지만, 단 세 개의 통로밖에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서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는 거죠.”

“아아···. 그래서 그쪽의 경계를 강화하고, 여기는 조금 느슨하게 한다는 거지?”

“네. 그리고 며칠 지켜봤는데, 새벽에는 역시나 경계가 약화되더라구요. 설마 한 달만에 여기까지 왔을까 싶었겠죠.”

그리고 그들의 ‘설마’에 확신을 심어준다. 보통이라면 한 달만에 20층에 도달했을 거란 생각조차 못할 테니까.

“······그럼, 지금 당장 가자.”

*

어떻게 보면 양동작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16층에 그놈들이 나타났다!’

천상의 날개 길드원들 사이에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다른 층과의 연락을 위해서는 직접 얼굴을 맞대는 수밖에 없었음에도 그들의 정보력은 상당하였고, 순식간에 16층의 보스 스테이지 근처에 천상의 날개 길드원들이 가득 들어차게 되었다.

그와 별개로, 20층의 보스 스테이지로 향하는 길목은 오히려 한산해졌다. 애초에 말레아와 아라셀리를 잡기 위해 세워둔 경비였기에 저층에서 그들이 발견된 이상 더 이상 고층에는 있을 이유가 없던 것.

“음? 너 뭐···컥?!”

“켁!”

그런 이유로, 아라셀리와 말레아는 오밤중에 몰래 아치형 통로로 잠입하여 그들을 기절시키며 전진하였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때의 아라셀리는 놀랍게도 도끼(그것도 아주 커다란)를 사용하였는데, 대체 괴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것을 한손으로 붕붕 휘두르며 적을 죄다 썰어버렸다.

비록 무의미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는 신념(유서담의 신념을 따라한 것이다) 때문에 사람을 상대할 땐 옆면으로 쳐서 기절시키는 수준이었지만, 아마 그마저도 뇌진탕은 가뿐하게 올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음에도 결국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누구냐!”

“읏, 젠장. 빨리 뛰자, 아라셀리!”

“네!”

뒤쪽에서 빛의 화살이 작렬하여 바닥에 내리꽂힌다. 궁수 클래스가 있던 모양. 그들은 원거리의 적을 집요하게 뒤쫓는 데에 유능했지만, 말레아의 장벽 마법에 대부분이 가로막혀서 무효화 되었다.

남은 이들은 도적 계열 클래스였는데, 그들은 아주 재빠르고 날렵하여 적을 추격하는 데에 능했기에 상대하기가 제일 까다로웠다. 그림자에서 나타나 독이 발려진 단검을 휘두르거나, 먹칠이 되어 잘 보이지도 않는 암기가 날아오는 등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큰일이야. 추격이 더 많아지고 있어.”

“그 사이에 다른 층의 길드원들에게 연락이 닿은 것 같네요.”

“젠장···.”

대체 무슨 수로 다른 층의 길드원들에게 그렇게 빨리 연락하나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궁금증을 해소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보스 스테이지까지는 삼백여미터가 남아있었고, 그 앞에는 벌써 수십 명의 길드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본격적으로 30층 이상의 고층의 도전자들이었기에 상대하는 건 결코 불가능하다.

‘나랑 아라셀리도 2레벨의 무기를 얻기는 했지만······ 맞서 싸우면 필패야. 절대 발목을 붙잡혀서는 안 돼!’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비치는 무언가.

삐뚤삐뚤 적혀있었고, 엉성하게 글자의 덩어리가 조합되어있었을 뿐이지만······ 그건 분명히 [슬라이딩!]이라는 단어였다.

그에 말레아는 저도 모르고 슬라이딩을 했고, 때마침 그림자에서 솟아오르던 암살자의 면상에 살인 태클을 먹일 수 있었다.

“컥!”

“······!”

저가 해놓고도 스스로 놀란 말레아가 고개를 돌리자, 아라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다시 정면을 응시하였다. 정말 의미도 없고, 그냥 아무데나 시선을 두기 위한 행동이었음에도 ‘그 사람’은 자신이 어디를 쳐다볼지 미리 알고있었다는 것처럼 그곳에 큼지막한 글귀를 새겨놓았다.

[앞으로 세 번 구르고 위로 크게 뛰어!]

말레아는 망설임없이 구르고, 구르고, 또 구른 다음 크게 도약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등을 노리고 쏘아진 ‘일발필중 저격화살’이 모조리 바닥에 꽂혔다. 고작 0.1초의 차이로, 반드시 적을 추격해 맞추는 궁수 클래스의 필살기가 모조리 빗나간 것이다.

“뭐, 뭐라고···?”

“무슨 움직임이······!”

할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차올랐다. 정체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며,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이 또다시 나를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존재감이 자신에게 닿을 때면, 어떤 위기라도 극복해낼 수 있었다.

‘나는, 갈 수 있어!’

말레아는 그리 생각하며 힘껏 나아갔고, 이 상황은 훗날 그녀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히게 된다.

[······긴박한 상황에서, 나는 저 멀리 절벽을 보았다. 새벽녘의 습기가 내려앉은 절벽은 정확히 새벽 4시 18분에 아주 잠깐, 그러니까 10초 동안 반짝이는 별빛이 반사되는데, 그 순간 야광물질로 써진 글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니까, 내가 그 문장을 그 순간에 볼 수 있던 이유는 정말로 ‘우연’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절벽에 적혀있던 대로 세 번 구르고 하늘 위로 높이 뛰었다. 그러자 연달아 화살 세 발을 피했고, 발목을 노리고 다가오던 암살자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그리고 내 운명을 알고있는 누군가가 먼 미래에서부터 나를 지켜주기 위해······(후략)]

······그리고.

대략 5개월 전.

20층의 유서담.

“아, 이 개같은 일기장······.”

퍽! 퍽!

망치로 정을 내려치며 유서담은 신세를 한탄하였다. 이 멀찍한 곳에 우뚝 솟아있는 절벽은 말 그대로 ‘배경’이었다. 배경, 백그라운드. 그러니까,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도 오지도 않는 그런 장소란 말이다.

퍽퍽! 퍽!

<서담. 글자가 비틀렸잖습니까>

“몰라···. 대충 알아처먹으라 그래······”

퍽!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굳이 정을 내려치는 이유는 단 하나. 미래에 튜토리얼을 도전할 말레아를 돕기 위하여. 그리고, ‘개연성’이 비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썩을 내 인생······.”

퍼어억!

있는 힘껏 망치를 내려찍으며, 유서담은 신세한탄을 하였다. 오늘따라 퍽 서러운 하루였다.

< 튜토리얼의 거탑(20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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