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가워요! 나는 튜토리얼의 요정!(3) >
200인의 무소속 도전자들이 먼저 던전에 입장한 뒤, 천상의 날개 길드원 40인이 따라서 입장하였다. 던전 내부를 걷는 내내 천상의 날개 길드원을 제외하고서는 아무런 대화조차 없었다. 이제 곧 자신의 옆자리, 혹은 앞이나 뒤에 서서 걷고있는 이들 중 대부분이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대화는 의미가 없다.
말레아 역시 축 가라앉은 표정으로, 하지만 냉철히 주변을 파악하며 걸었다.
‘원거리 클래스 20인에 탱커 7인, 나머지는 서포터인가······.’
장비의 상태로 추정컨대, 최소 30층대의 도전자로서 3레벨 장비를 장착한 것으로 보인다. 0레벨대 장비밖에 없는 말레아로서는 결코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게다가 3레벨의 부츠에는 이동속도 증가 효과가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한다고 들었어.’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튜토리얼의 거탑에서 얻을 수 있는 장비는 레벨이 올라갈수록 장비의 효과가 극단적으로 좋아진다. 고글이나 안경은 시력과 반응속도, 부츠는 민첩성과 스피드, 갑주는 방어력과 인내력, 무기류는 공격력을 압도적으로 올려준다.
또한 0레벨의 장비가 0~9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고 치면, 1레벨은 10~19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어 피해를 입히는 건 거의 불가능. 하물며 3레벨에게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다.
‘저항도 불가능.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 정말 정답은 진실의 문을 찾는 것밖에는 없는 걸까······.’
자신이 자초한 일이니까,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자자~ 지금부터 게임 시작입니다~! 두구두구두구!
던전의 내부는 거대한 신전이라고 보면 좋을 정도로 넓었으며 이백여 개의 문이 존재하였다.
조금, 아니 굉장히 많이 독특한 공간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바닥은 ‘아래’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는 바닥이 ‘상하좌우’ 모든 곳에 존재했다. 계단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서면 그곳이 곧 바닥이 되었고, 벽면에도 다리와 발판이 존재하였다.
현실에서는 굉장히 보기 드문 공간이지만, 이곳 거탑에서는 흔하다.
‘공간 평면의 유클리드적 위상공간.’
아스라는 이름의 특이한 행성에서 발견된 개념체로서, 그 세계에서는 이것을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데에 실패했다지만 거탑에서는 이것을 마침내 현실로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경이로운가? 아름다운가? 말레아 또한 학자로서 공간 자체가 뒤틀린 이 세계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저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보이십니까~?! 저 수많은 거짓된 문이! 그러나, 진실된 문은 단 하나! 만약 거짓의 문을 고르면~ 어떻게 될~까요~?
“크윽······.”
“망할 요정놈···.”
어떻게 되긴. 뻔하다. 아마, 즉사하겠지. 거탑은 던전에서 발생하는 ‘함정’에 대해 굉장히 가차없기로 유명했으니까.
-그럼~ 게임, 시~작!
토끼 요정이 신나게 외친다. 저 요정은 아마 어느 문이 진실의 문인지 알고 있으니 더욱 즐거울 터.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이동하며, 문을 열도록 해라.”
“젠장!”
“썩을 새끼들···.”
“운이 좋다면 아무도 안 죽고 끝낼 수도 있겠지.”
무소속 도전자들은 이를 까드득 갈면서도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결국 천천히 문으로 다가섰다. 가장 처음으로 문을 열게 된 도전자들은 창백한 인상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직후.
하나의 문을 제외한 두 개의 문이 거대한 입으로 돌변하더니 쩌억, 벌어졌다. 그 찰나의 순간, 수백 개의 이빨을 드러낸 문은 총 일곱 명의 도전자를 집어삼켜버렸다.
까드득, 꾸두득!!
“······!!”
살점이 부서지고, 뒤섞이고, 소화되는 그 끔찍한 소리에 모두 말문을 잃고 말았다.
모두가 경악하였고, 심지어 몇몇은 바닥에 주저앉아 구역질을 하였다. 비명조차 새어 나오지 못했다. 천상의 날개 길드원 중 몇몇 또한 그 광경을 보고서 표정을 굳혔지만, 30층 이상의 도전자들은 별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에 별다른 가치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처음부터 진짜 문이 나오는 건 기대조차 안 했다. 다들 뭣들 하나. 계속 이동해.”
원정대의 리더는 4레벨의 장비로 온몸을 도배한 사내였는데, 10층의 도전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까마득히 높은 경지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7명이 죽고서 193명이 남은 무소속 도전자들은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말레아는 입술을 꾹 나물고서 두뇌를 굴렸다.
다짜고짜 희생자를 늘려가는 이 무식한 방법으로만 문을 찾아야만 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튜토리얼의 거탑은 ‘도전’을 지향하는 신비로운 세계였고, 분명 무언가 해답이 있을 터다. 비록 천공의 날개 길드에서는 그 방법을 찾지 못하여 이런 무식한 방법을 사용하는 모양이었지만.
“······잠깐만요.”
그래서, 말레아는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해보려고 했다.
“뭐지? 시간낭비할 생각 없다.”
“아니요.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효율적으로 가는 게 어떨까 해서요. 혹시 모르잖아요? 누군가가 여기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차라리 따로따로 원하는 문을 선택하는 게 어떨까요?”
“···내가 그걸 들어줘야할 이유는?”
그에 말레아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서 말했다.
“어차피 죽을 가능성이 더 높은데, 최소한 자기 무덤 정도는 찾고 싶은 사람의 발악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저희가 도망칠 가능성이 희박하단 건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저희가 어떻게 ‘랭커’들에게서 벗어나겠어요?”
실상 ‘랭커’라는 말은 50층 이상까지 올라간 위대한 도전자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고작 30층 주제에 그 호칭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몇몇 길드원들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원정대장 또한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동정표에서였는지 그녀의 말을 허락해주었다.
“그래. 알아서 하도록. 하지만 은근슬쩍 시간을 뻐길 생각이라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런 놈이 있다면 가장 먼저 내가 목을 쳐주지.”
“아무렴요.”
한숨 돌렸다. 이제, 그나마 원하는 문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만들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문을 찾지?’
이제부터 고민해봐야 될 문제였으나 무려 56층까지 정복한 천상의 날개 길드장조차도 찾지 못했던 해답을 고작 10층 거주민인 자신이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생각해내야만 해. 다짜고짜 희생자만 늘리는 던전은 없어. 비록 거탑이 도전자에게 불친절할지라도, 반드시 어떤 방법이······.’
“저쪽이에요.”
“······!”
그때, 자신의 귓가에 누군가가 작게 속삭이자 말레아는 몸을 움찔 떨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담한 체구의 그 어여쁜 소녀가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라구요···?”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계단 위에 있는 다리 건너서 세 번째 기둥이요. 저기 써있잖아요.”
“···예?”
아라셀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어딘가를 조심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은 문도 복도도 아닌, 기둥 건너편의 어떤 거울이었다. 거울 속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정확히 말레아가 딛고 서있는 위치에서만 기묘한 각도로 반사되어 거꾸로 뒤집힌 글자가 똑바로 보이는 구도였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서 저 거울을 보리란 사실을 아는 것처럼.
[이쪽으로 ㄱㄱ]
하지만, 글씨체가 너무 날림이었고 심지어 내용은 장난스러웠다. 저걸 대체 누가 새겼는가? 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이전.
현실적인 문제가 튀어나왔다.
“······저런 장난스러운 글귀를 믿으라구요?”
“네. 저건 교수님 필체거든요.”
“그건 또 무슨···.”
믿을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저런 장난 따위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를 않았다.
그러나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아라셀리의 팔을 잡아 이끌고서 표식이 적혀있는 장소로 이동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 글자가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특별한 건 확실했으니까.
[왜 이렇게 행동이 굼떠? 오른쪽 아래를 쳐다봐.]
“······뭐야.”
마치 자신의 행동을 어디에선가 지켜보는 듯한 말투에 순간 말레아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설마설마 싶어서 오른쪽 아래를 쳐다보니.
[뛰어내려!]
그런 글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해지는 바람에 말레아가 당황하자, 원정대장이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나! 어서 움직여!”
직후 고개를 들었다가 내려보니, 각도가 미묘하게 바뀌어 이번에는 또다른 글자가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저 멍청한 원정대장놈 말은 무시하고, 빨리 뛰어 말레아!]
“미친, 미쳤어, 이건 진짜 미쳤어···!”
결국 눈을 질끈 감은 말레아는 그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언뜻 높이만 해도 11m는 거뜬히 넘어서 지레 겁을 먹었으나, 놀랍게도 중력이 상하반전이 되더니 아주 천천히 그곳에 착지할 수 있었다.
“하아, 하···으······.”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옆을 돌아보니, 아라셀리가 우아한 동작으로 사뿐히 착지하였다. 그러고선 살풋 미소지었다.
“힘내서 가요. 이런 데서 죽기는 싫잖아요?”
“···네, 네.”
말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잽싸게 아까 전의 그 글자에게 슬쩍 다가가 마법을 사용하여 스캔해보았다.
‘글귀를 적는데 사용한 건 매직마커인가··· 액체의 마르기로 봤을 땐······.’
······추정 날짜, 6개월 전.
즉, 이곳에 써있는 글자는 6개월 전에 이미 써있던 것이란 의미.
그런데 어째서, 지금 자신의 상황을 알고있는 것처럼 적혀있단 말인가?
‘대체 무슨······.’
“자자, 빨리 이동해요. 이럴 시간 없어요.”
“네? 네, 네.”
아라셀리는 말레아를 잡아 이끌었다.
“끄아아악!”
“사, 살려줘!”
어디에선가 계속해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이 진실의 문이라는 이름의 던전 내부에는 ‘문’을 제외한 수많은 함정이 존재하였는데, 그것들에게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지금은 저런 거에 신경쓸 틈 없어. 현재에 집중해야-’
그때.
“숙여요!”
“컥!”
아라셀리가 뒤에서 무릎으로 말레아의 오금을 툭 걷어차자, 자연스레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기요틴.
“미, 미친······!”
놀랄 틈도 없이, 아라셀리가 말했다.
“포복 전진으로 일곱 걸음. 어서요!”
“···넵!”
그녀의 말을 따라서 허겁지겁 포복 전진을 하자, 아라셀리가 외쳤다.
“오른쪽으로 세번 굴러요!”
판단을 할 여력은 없다. 그저 구르고, 구르고, 또 구르자.
놀랍게도 말레아가 누워있던 자리에 기둥이 세 번 연달아 떨어졌다.
“히익······?”
“이제 일어서서 걸어요. 열두 걸음 걸은 뒤, 한 바퀴 턴!”
열두 걸음 직후, 눈을 마주치면 그대로 신체를 얼려버리는 메두사 석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턴을 한 덕분에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좋아요. 오른쪽으로 쭉 가요. 세 번째 블럭에서 잠시 벽에 붙었다가 직진.”
“······.”
“여기서 하나, 둘, 셋 세고서 달려요! 그리고 첫 번째 기둥에서 점프!”
“으아앗! 바, 발목에 뭐가 스쳐 지나간······!”
대체 뭘까 이 여자. 어떻게 이런 걸 전부 아는 거지? 말레아는 서둘러 가는 와중에도 아라셀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찢어진 종이같은 것을 읽으면서 걷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마치 일기같은 무언가가······.
“안 돼요.”
“네?”
“당신은 아직 이걸 보면 안 돼요. ···뭐라더라 ‘개연성’이 엄청나게 소모된다고 했거든요. 잘못하면 교수님이 위험하니까, 절대 보시면 안 돼요. 알겠죠?”
“아, 네······.”
“흐음. 그나저나 일기 엄청 꼼꼼하게 쓰시는 타입이시네요. 껌을 예순한 번 씹었다가 뱉은 건 왜 쓰셨어요?”
“제가 원래 좀 꼼꼼···아니,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당신, 대체 뭐하는 여자-”
“아, 그건 됐고. 숙여요!”
“컰!”
쾅! 바닥에 그대로 머리를 박은 말레아는 그대로 쌍코피를 터뜨렸다. 도대체, 뭘 물어보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젠가는 꼭 알아낸다! 진짜로!’
그리 다짐하며, 말레아는 살아남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어째서인지 믿음이 가는 저 신비로운 소녀를 따라서.
*
60층, 메트로 시티 3193년.
유서담은 선글라스를 낀 채 어느 건물의 옥상에 앉아, 네온사인 가득한 야경을 바라보았다. 거탑에는 기본적으로 ‘NPC’라 불리는 시스템 인공지능과 도전자를 제외하고서는 생명체가 전무하였기에, 이 거대한 미래도시에는 그 어떤 생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밤하늘에는 전함이 날아다니고, 허공에는 투명한 도로를 따라서 수많은 자가부양자동차가 질주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배경’일 뿐 저곳에 누군가가 타고있지는 않았다.
하녀복은 입은 회색 피부의 안드로이드가 다가와 유서담에게 쟁반을 내밀었다.
-도전자 유, 유서담. 떠, 떡국 주스를 가져왔, 왔습니다.
“어. 고마운데 말 좀 그만 더듬어.”
-그, 그건, 프로그램 되어있지, 않, 않은.
“그냥 다운받으라고.”
-뭐, 뭐든 다운로드로 해, 해결하려는 버릇은 나, 나쁜.
“···컴퓨터가 할 소리냐?”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난 유서담은 스테이지 포인트를 활성화하였다. 같은 층이라면 지정된 장소로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는 기술로서, ‘인간과 기계의 시간 전쟁’이 컨셉인 만큼 포인트마다 시간대가 전부 달랐다.
[메트로 시티, 공허의 전함 2979년으로 이동합니다.]
눈을 감았다 뜨니, 분명 방금과 똑같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온통 불바다에 죄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클리어 된 스테이지였기에 몬스터는 없다.
다만 하늘의 절반을 차지한 채로 추락하고 있는 거대한 전함 한 척이 거슬릴 뿐. 저 전함은 인간의 패배를 상징하는 것이며, 동시에 기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기에 이번 스토리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쪽쪽-
그래봐야 유서담에게는 떡국 주스의 안주거리밖에 안 되었지만.
“아라셀리는 잘 하고 있으려나······.”
이전까지는 아래층과 교류를 하면서 아라셀리에게 ‘일기장’의 몇 페이지를 나누어 주기도 하고, 또 본래의 목적이었던 ‘마법 교재’를 제작하며 여유로운 시작을 보냈다. 항상 먼저 이계에 도착해있던 예전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유서담보다 늦게 도착한 그녀는 아직 10층에서 머물고 있었기에 이른바 ‘버스’를 태워주기도 했으나···.
60층부터는 그게 힘들어졌다.
여기서부터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전까지는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게 제한되기 때문. 그렇다고 스테이지 진행도를 포기하고 내려가자니, 주인공 ‘위젠’의 독보적인 성장세를 견제해야만 해서 불가능했다.
‘계속 버티면서 기다려야 해. 위젠을 사냥하려면, 말레아의 도움이 꼭 필요하니까. ···여태 거탑을 올라오면서 일기장에 있던 표시를 모두 해두었으니, 금방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기다리자, 저 멀리서 다섯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생명체가 단 하나도 없는 이곳이니 누가 왔을지는 뻔하다.
주인공 위젠. 그리고 그의 동료들.
“······유서담. 또 너냐.”
“어. 오랜만이지? 3시간만에 보니까 아주 반갑다야.”
“비켜라.”
“그럴라고. 근데 너 친구 한 명 어디갔냐? 원래 여섯이었잖아.”
“기계군단에게 납치당해서 버렸다. 걸림돌을 구제할 필요도 이유도 없지. 다른 대답이 필요한가?”
기대도 안했건만, 역시는 역시였다.
위젠은 싸이코였다. 그리고, 극한의 ‘사이다’를 추구하였다.
방해가 되는 동료가 있다? 버린다.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다는 귀찮은 동료가 있다? 죽인다.
그러나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위젠은 ‘튜토리얼의 요정’, 즉 이 거탑을 만든 전지전능한 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기적인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고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었으니.
미래의 기록을 가진 유서담조차 감히 정보력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말레아의 튜토리얼 일기’에는 자신에게 발생한 일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 전체적으로 어디에서 무슨 던전이나 사건이 발생한다는 내용은 기록되어있지 않기 때문. 게다가 설령 미래의 지식을 알고있다 하더라도, 유서담은 그것을 이용하는 것도 힘들었다.
미래 지식을 선점하는 행위는 ‘개연성’에 심하게 위반되었기 때문.
“······유서담. 너도 그만하고 내 그룹으로 들어와라. 넌 다른 쓸모없는 놈들과는 다르게, 가치가 있거든.”
“어허, 이 형님한테 큰절 올리고 모셔가겠다고 해도 모자랄판에 네 아래로 기어 들어가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를.”
“너도 알 텐데. 60층을 돌파하려면 반드시 서로의 협력이 필요하다.”
“난 60층 안 돌파해도 되는데? 너 방해하는 게 제일 재밌는데?”
“대화가 안 통하는군······.”
위젠이 열을 올리며 흑색의 검을 빼어든다. 본격적으로 싸울 생각이었으나.
위잉! 위잉! 위잉!
갑작스레 밤하늘의 절반을 차지하던 공허의 전함에서 사이렌이 울리더니, 온 세상에 메시지가 송출되었다.
-기계의 밤이 도래하였다.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을 멸절하라.
-멸절하라!
순식간에 푸른빛의 스캐닝이 대지를 뒤덮는다. 앞으로, 생명 신호가 감지되는 순간 곧바로 레이저 포격이 날아올 터. 서둘러 다른 스테이지 포인트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제야 유서담이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자신이 던전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위젠은 표정을 와락 구기며 그를 노려보려고 했지만, 진작 서담은 목표를 달성하고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썩을 자식.”
여러모로 마지막까지 얄미운 사내다.
< 반가워요! 나는 튜토리얼의 요정!(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