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공이 해야만 하는 일(3) >
자칭 ‘절망의 악마’라는 요물을 베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것을 소멸시킨 백소휘는 즉각 혼절검과 함께 들어있던 무공비급서와 환단을 확인하였다.
「악령멸절검법(惡靈滅絶劍法)」
그 이름도 직관적이었는데, 말 그대로 악한 영혼을 멸하는 검법이 쓰여있었다. 인간을 상대하는 검법이 아닌, ‘인외’의 존재를 상대하기 위함이라 그런지 초식이나 허초 등 잡스러운 동작은 모두 제거된 채 효율적으로 강력하게 대상을 타격하는 데에 모든 기술이 치중되어 있었다.
「영환단(靈還丹)」
갈색의 환단은 그 이름도 간단하게도 영환단이라는 이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내공의 증진에는 별 효과가 없었으나 복용자의 영혼을 조금 더 튼튼하게 만들어준다는 효과가 적혀있었다. 백소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하였으나, 이는 ‘악마 사냥’에 있어서는 아주 굉장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환단이라······.’
소환단은 소림사의 전유물이었으므로 천마였던 백소휘와는 딱히 접점이 없는지라 상당히 낯선 물건이었다. 그러나 내공 증진에 별 효과가 없다니, 크게 관심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래선 안 돼! 어서 환단을 섭취하고 무공을 익히라구!
“······? 넌 누구냐.”
-나야 나! 네 손에!
“지금 검이 말을 하는가?”
-응응! 내 이름은 량혼! 앞으로 잘 부탁해!
백소휘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말을 하는 검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원래 차갑지만 (가슴은 따뜻한) 주인공 곁에는 나처럼 귀여운 마스코트가 한 명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헛소리를 하는구나.”
-헛소리라니 너무한걸! 「자, 이제부터 무공비급서를 펼쳐봐! 내가 특별히 검술 지도를 해주도록 하지!」
그 말에 백소휘는 저도 모르게 무공서를 펼칠 뻔했으나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도와주는 건 좋았으나 행동까지 강제하는 것은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다.
-어라? 그냥 가는 거야?
“······.”
량혼의 말을 무시한 채 백소휘는 무너진 동굴을 나섰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모든 구름을 그녀가 베어낸 탓이었다.
“···이 세상에는, 저런 ‘요물’들이 더 많다고 들었다.”
-악마를 말하는 거야? 맞아. 앞으로는 더 늘어날 거야. 이 세계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안 이상, 가만히 둘 리가 없거든. 그리고······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너, 단 한 명 뿐이야.
평생 이러한 의무감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백소휘는 이 길이 자신이 나아가야만 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미지의 운명’이 자신을 강제하여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가 저 악마라는 존재를 베어내야만 한다고,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였을 뿐이다.
“다른 악마의 기운은 어디에서 느껴지지?”
-어······. 일단은 동쪽에서 엄청 많이 느껴지는데.
동쪽이라.
곤륜산이 위치한 장소였다.
“확인해보러 가야겠군.”
-자, 잠깐! 거긴 어마어마한 수의 악마들이 느껴진다고? 지금의 네 힘으로는 부족해!
“상관없다.”
-으으··· 어째서 이번 대의 주인은 이렇게 제멋대로인거야?
량혼은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백소휘는 무시하고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혼이 깃든 검 한자루와 천마였던 무림인의 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
곤륜파의 곤륜산은 본디 천마신교의 천산산맥과 맞닿아있는 탓에, 그 둘은 평소에도 상당히 자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전대 천마였던 설중연이 군림하던 시절에도, 백소휘가 천마로서 군림하던 시절에도 곤륜파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거는 일이 대다수였지만.
그렇듯 곤륜파에는 썩 좋은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들은 어마어마한 세력을 일궈놓은 거대문파였으며 장문인 또한 자신보다 한 수 높은 강자였으니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곤륜산에 막상 도착했을 때 보인 처참한 광경에, 백소휘는 눈썹을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수많은 무림맹원들과 곤륜파 도사들의 시체가 산맥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지형지물이 아예 박살이 난 채로 뒤집어 엎어져 있었는데, 흡사 자연재해라도 일어난 듯한 모양새였다.
본래였다면 외지인의 접근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진과 기문장치도 모두 파괴되어 있었고, 순찰을 도는 병력도 없어서 백소휘는 어렵지 않게 곤륜산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옥산의 봉우리에 오르자.
-악마의 시체야······. 비록 소멸시키는 게 불가능해서 완전히 죽이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기 직전’까지 패놓은 모양이야.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인의 사체가 팔각정이었던 어떤 건축물을 깔아뭉갠 채 죽어있었다.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악한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과연 이 악마를 상대했던 자는 ‘혼을 절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듯싶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까지 악마를 몰아세웠다니, 대체 어떤 사람이······?
량혼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악마의 머리 부근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에 백소휘는 미간을 찌푸리고서는 입을 열었다.
“유서담······.”
“오, 저번처럼 바로 검을 뽑지는 않네?”
“······.”
당연하다.
비록 저 남자가 여전히 싫은 건 똑같지만, 그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새삼 미안하다고 빌거나 용서해달라며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널 기다리고 있었어. 여기로 올 걸 알고 있었거든.”
“뭐···?”
“아마 지금쯤 뭐, ‘기연’을 만났겠지? 커다란 구렁이한테 잡아먹힐 뻔한 것을 역으로 집어 삼켰더니 알고보니 구백 년 묵은 구렁이여서 내공이 왕창 늘었다던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동굴에 몸을 숨겼더니 몇천 년간 내공을 흡수하였던 이끼가 가득하여 그것들을 긁어먹어 성장했다던가, 숲속으로 몸을 숨겼더니 천하제일이었던 은거 기인이 가르침을 주었다던가······.”
대부분이 흔하디 흔한 ‘클리셰’였고, 모든 무협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상당히 다수의 무협에서 자주 쓰였던 기연이었다.
비슷한 게 하나 얻어걸렸는지 백소휘의 눈이 동그래지자 유서담이 씨익 웃었다.
“······어떻게 알았는가?”
“다 알지. 나는 굉장히 똑똑하거든.”
그리고, 백소휘가 이곳에 찾아와 유서담 자신을 만난 일 또한 아주 강력한 ‘기연’으로 작용할 터였다.
“너는 앞으로도 수많은 기연을 만날 거야.”
우연히 도와줬던 소녀가 개방(丐幇) 용두방주(龍頭幫主)의 딸래미여서 정보집단을 손에 쥐게 된다던가. 소림사(少林寺)에 들렀더니 난데없이 ‘자네,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이라며 이유도 없이 도와주겠답시고 소환단을 나눠준다던가. 구음절맥(九陰絶脈)에 걸린 북해빙궁주(北海氷宮主)의 외동딸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백소휘밖에 없다던가······.
“그러나 넌 그것들을 모두 거절해야 해. 그 이유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건, ‘세계’가 나를 돕기 때문인가?”
그녀가 말을 자르고서 그리 말하자, 유서담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주인공 중에서도 자신이 주인공임을 자각한 이는 여태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나마 깨우쳤던 멸망한 세계의 섹시가이조차 아라셀리가 설명해줘서 바듯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맞아. 하지만 그걸 받아서는 안 돼. 오히려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가는 지름길이야. 그 도움을 받으면 악마를 상대하기는 쉽겠지만······ 모든 악마를 멸한 뒤, 네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면 세계도 너와 함께 꺼지게 돼.”
예전이었다면, 그 말을 결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소휘는 자꾸만 자신의 주변을 감도는 운명적인 기운을 느끼고 있던 차. 유서담의 말은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보다도 믿기 싫었지만······ 어느 정도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악마를 멸하면 세상이 멸망한다.
그렇다고 악마를 멸하지 않으면, 악마가 세상을 멸한다.
“그래서 ‘기연’을 거부하라는 거야. 그것들을 네가 쥘 때마다, 세상이 조금씩 멸망으로 흐르게 되는 거니까.”
물론, 단순히 기연을 거부한다고 해서 세상을 멸망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주인공으로서의 ‘개연성’을 아낄 수는 있었다.
“······그렇게 아끼고 또 아낀 기연은, 마지막에 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사용해야만 해.”
그리 말하며 유서담은 백소휘에게 검붉은색의 구슬 하나를 던져주었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천칠백 리 정도 직진하면, 어떤 동굴이 나올 거야. 훗날, 모든 악마를 멸하면 그 동굴에서 구슬을 사용하도록 해.”
일전에 현대에 등장했던 ‘던전’의 주인공이었던 이연준과는 약간 다른 케이스였다. 던전의 입장과 퇴장에는 그 어떤 개연성도 소모되지 않아, 지구로 돌아왔을 때도 그 주인공으로서의 힘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와 무림은 부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있다. 던전처럼 쉽게 출입하는 게 불가능.
그곳을 지나치기 위해 유서담은 개연성에 비롯된 ‘수명’을 사용해야만 했으며, 마찬가지로 개연성을 가진 주인공이라면 자신의 개연성을 모조리 소모하여 지구로 넘어갈 수 있을 터다.
그러나. 결국 그 말은, 무림에서 일궈놓은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뜻이었으므로 백소휘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유서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악마를 사냥한 뒤 그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고, 그 즉시 떠나야만 한다면······. 과연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최소한 유서담 자신은 결코 보답없는 사냥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서담은 주인공이 아닌 그저 이기적인 한 명의 사냥꾼일 뿐이었고, 진짜 ‘주인공’이었던 백소휘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네 충고는······ 일단은 들어두겠다. 내가 직접 겪어보면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깨달을 수 있겠지. ···최소한, 스승님과 함께 있던 자이니 허튼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 믿겠다.”
그리 말하며 백소휘는 검을 뽑았다.
아직까지도 악마의 사체는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는데, 유서담이 억지로 붙잡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백소휘도 알 수 있었다.
“네가 날 기다린 이유는, 그 악마의 ‘완전한 죽음’인가?”
“맞아.”
“날 도와준 대가로는 싼값이군.”
그리 말하며 백소휘는 힘이 떨어진 악마의 목을 간단히 쳐냈고, 이내 사체는 완전히 소멸하여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서담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명심해. 결코 주변에서 다가오는 기연을 믿지 마. 오로지 너 스스로의 힘과, 네가 스스로 만든 인연만을 믿어.”
그리 말한 뒤 유서담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한동안 백소휘는 말없이 그가 떠난 자취를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스스로의 힘과 인연이라······.’
언제는 그렇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마지막 첨언은 백소휘에게는 퍽 쓸모없는 조언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야옹, 웬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익숙한 고양이다.
“흑주희······?”
그 익숙한 이름을 저도 모르게 부르자, 숲이 갈라지며 흑색 머리칼을 가진 무표정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고양이를 자신의 품에 껴안았다.
천마신교를 다시 세웠을 때부터 줄곧 자신을 따라주었던 충신, 흑주희. 그리고 그녀의 애완고양이.
“네가 여긴 어쩐 일로······.”
그러자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연히 당신을 찾아야 하니까 찾아왔지요.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천마신교주가 아니다.”
“맞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천마신교주가 아니지요. 그 어울리지도 않던 붉은색 무복도 벗어 던지셨잖습니까.”
그 말에 백소휘는 가슴에서 어떠한 감정이 북돋았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나 같은 건 이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없다. 남의 소중한 사람을 빼앗으려 했던 주제에, 나에게 소중한 누군가를 느끼고 기뻐한다는 건 죄악이다. 그리 생각하며 떨쳐내려 했지만 흑주희가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천마신교주가 아니라 백소휘, 당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찾아왔노라. 흑주희가 그리 말하며 가까이 다가오자 백소휘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안 된다. 여기에 넘어가는 건, 설중연의 마지막 배려를 배신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서 속세를 떠나 악마를 사냥하는 것으로, 죄업을 갚아야만 한다. 그래야, 하는데.
“전 천마신교주께서 말씀하셨는걸요. 천마신교는 해산되었고, 각자의 길로 떠나라고.”
“그래서 각자의 길을 찾아온 거죠.”
“······!”
뒤에서 들려오는 또다른 목소리들.
“레나, 청랑······.”
“네. 교주님. 저흽니다. 저희 버리고 튀니까 좋으셨나 봐요? 으, 더럽게 멀리도 오셨네. 이 난리통에 저희가 안 찾아오고 배깁니까?”
한두 명이 아니었다.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까지 생각하면, 수십에서 수백명의 신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곤륜파에서 일어난 어떠한 소동과 백소휘의 발자취. 그 두 가지를 뒤쫓아서, 그들이 찾아오고 있던 것이다!
백소휘는 떨리는 가슴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창피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전대 천마신교주께서 문파를 해산하여 저희를 굳이 풀어놓으신 이유가 뭘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교주님.”
그녀들의 말에, 백소휘는 결국 입술을 꽉 깨물고서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제야 유서담의 마지막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유서담의 말이 아니었다.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기로 했으면서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몹쓸 짓을 저지른 자신을 여전히 관대히 용서해주시고, 보듬어주고 계시는.
설중연의 뜻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스승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남은 삶도, 이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살아가리라.
< 주인공이 해야만 하는 일(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