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공이 해야만 하는 일(2) >
천마신교의 상징색(色)은 시대마다 항상 달랐다. 먼 과거에는 주로 붉은색이 쓰였으나, 전전대 천마 갈혁준은 자신의 상징으로 흑색을 사용했으며 전대 천마 설중연은 붉은색을 선호했으나 천마를 그만두면서 붉은색 무복을 집어던지고 분홍색으로 돌아갔다.
백소휘 역시 마찬가지로 설중연을 따라서 붉은색을 사용했으나, 천마를 그만두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그 색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물론 이게 특별한 전통이나 규율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심리적인 문제라고 보는 게 더 크겠다.
그리하여 백소휘는 자신의 상징색으로 백색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갖다 대자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일까.
그녀의 인생은 언제나 흑색의 얼룩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지금 백소휘는 인생의 그 어떤 때보다도 가장 외롭고, 괴로웠다.
심지어 그 모든 것들이 본인 스스로가 자처한 사실이라는 사실을 냉정히 자각한 이후부터는 더욱 더.
대체 어떻게 해야만 사죄할 수 있는 걸까. 과연 사죄가 가능키나 한 걸까. 나라면, 설중연을 해하려 한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설중연이 자신에게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고 그저 파문하여 내쫓는 정도로 용서한 것조차도 기적에 가까웠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결코 용서치 않고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들개의 먹이로 던져버렸으리라.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스승님께 배려를 받다 떠나는구나······.’
그녀에게 받기만 하고, 돌려준 건 아무것도 없이, 심지어 그 은혜를 되려 원수로 갚으려고 했다는 사실에, 문득 너무 서러워졌다.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났는가. 이따위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났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적막한 숲속을 거닐며 그런 부정적인 생각 따위나 하는 그녀의 몰골은 좋게 보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퀭한 다크서클에 삐죽 튀어나온 머리칼, 풀어 헤쳐진 옷가지 등. 그러나 백소휘의 뒤쪽으로는 서넛 정도나 되는 일가족이 따라가고 있었다.
비록 몰골은 거지꼴이지만,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를 몸소 느낀 이들이 안전을 위해 적당히 거리를 두고서 쫓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그러든 말든 상관없었던 백소휘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고.
간혹, 임산부 한 명이 힘겨워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게 포착되면 백소휘는 길가에 앉아서 쉬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쉬고 싶어서 쉬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 역시 스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휴식을 취한다.
“저어··· 이거 드세요······.”
꼬마 한 명이 조심스레 다가와 나뭇잎에 쌓인 떡과 물을 건넨다. 백소휘가 말없이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꼬마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서는 성큼 다가왔다. 그러자 즉시, 부모가 뛰쳐나와 꼬마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죄, 죄송합니다!”
“······.”
그러기를 사흘.
쏴아아-!
난데없는 소나기에 백소휘는 길가에 놓인 정자에 몸을 기대었다. 지붕이 있어서 소나기를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일가족들은 다가올 수 없는지라 소나기를 맞으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구석진 위치로 이동했다.
“···드, 들어갑시다. 가가는 몸조리를 잘해야 하니까······.”
아무리 무림인이 무섭더라도, 임산부가 감기에 걸렸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었으므로 그들 역시 정자로 들어왔다.
그러기를 한 시진.
일가족은 말없이 백소휘의 눈치만을 살피며 휴식을 취했고, 이 침묵이 답답해진 나이 많은 사내는 큰 결심을 한 듯 먼저 운을 떼었다.
“···저, 실례지만. 무림인이 맞으신지요?”
그에 백소휘는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하였다. 그러고선,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여, 역시! 어쩐지 무술 실력이 장난 아니시던데!”
그런 아부는 별로 듣기 좋지도 못했으므로, 백소휘는 대답하지 않고서 도리어 질문을 하였다.
“······이 길목은 산적들이 진을 치고 있어 위험하다. 너희는 무슨 연유로 이곳을 가로지르는가?”
“그, 그게···.”
사내는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저희 마을이 아예 산적들의 습격을 받는 바람에······ 갈 곳을 잃었습니다.”
과연. 한 가구도 아니고 서너 가구가 위험한 숲을 지나고 있는 이유도 납득이 되었다.
‘나는 과거에 어땠는가.’
백소휘는 은은하게 기억날 듯 말듯 하는 부모님을 떠올렸다. 아마, 저들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둥벼락이 치던 날 밤. 아버지는 급히 나를 깨우셨고, 서둘러 뒷문으로 나가서 서쪽으로 뛰어가라고 필사적으로 외치셨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그 길로 달렸고······, 불타는 마을을 목도하고 말았다.
사람을 재미로 죽이는 작자들이었다.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던 이들.
추억과 꿈이 담겨있던 마을은 불타버렸다. 아직도 그 광경이 잊히지를 않는다.
비적(匪賊)들이 여인들을 중앙에 모아놓고서는 칼로 쑤시자, 머리가 짓밟힌 채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들이 괴로운 듯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은 그 비명을 안줏거리 삼아 술을 퍼마시며 처녀들을 능욕하니, 이 어찌 지옥도가 아닐 수 있겠는가.
나는 입을 달달 떨면서도 그곳을 기었고, 재수 없게도 붙잡힌 다른 어린아이들과 아낙네들 덕분에 성공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는가.
알고는 있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을의 이름을 대거라.”
“예? 예··· 그, ‘녹산림’이라고······.”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저런 흔한 지명을 사용하는 마을은 널리고 널렸고, 지도에도 적혀있지 않을 테니까.
“위치를 말하라.”
“서쪽으로 일주일 정도 걸어서 커다란 봉우리 세 개를 넘고, 하청 하나를 건너면 나오는 마을입니다. 근데, 그건 왜······.”
대답을 들었으니,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다.
앞으로 백소휘가 행할 일은 정말로 무의미할 것이다. 아무런 보람도 없고, 그저 단순히 화풀이를 하는 정도에 그치는.
벌레를 아무리 잡아 쑤시고 불태워도 모조리 없애버릴 수 없는 것처럼, 세상에 별 도움도 되지 않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겠군.’
그래서.
백소휘는 늘 하던 대로, 검을 뽑기로 했다.
*
“제, 제발 살려주십쇼! 저희가 감히 무림인을 못알아뵙고······!”
대부분의 산적들은 할 줄 아는 말이 비슷했다. 고급진 어휘를 구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백소휘는 그 사실이 퍽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너희 도적들은 자존심도 없구나. 우두머리가 있는 곳을 말하라.”
“그, 그럼······!”
“안 아프게 죽여주지.”
당연한 말이지만, 비슷한 말에는 비슷한 대답만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벌써 수십 번도 더 한 것만 같은 대화에 데자뷰를 느낄 무렵, 백소휘는 산적들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덜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잠시 기다리자 쿵쿵! 소리와 함께 숲이 갈라지며 백여 명의 산적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중에서도 덩치가 거의 3m에 달하는 거한이 한 명 있었는데, 일반 성인 서넛이 달려들어도 들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도끼를 어깨에 걸친 그는 묵직한 걸음으로 백소휘의 앞에 섰다.
“네가 이 더러운 잡적들의 대가리인가?”
“···건방진 년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군. 본좌는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의 총표파자(總飄把子) 태산절월(泰山切鉞) 도종혁이다.”
“본좌, 본좌라······.”
백소휘는 슬며시 웃었다. 감히, 전 천마신교주의 앞에서 ‘본좌’라는 지칭을 스스로 사용하다니. 게다가 칭호조차 건방지지 않은가?
태산을 잘라내는 가장 위대한 도끼라니.
그 자존심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녹림에서도 정예라 불리는 녹림칠십이채에 속한 산채는 무려 일류 무인까지 털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무예가 고강(高強)하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하물며 그들의 우두머리는 어떻겠는가? 최소한 절정고수에서 초절정은 될 터.
드넓은 중원 무림에 이름을 널리 알릴 정도는 안 되겠지만······ 어지간해서는 호적수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핑계 따위.
서걱!
“커, 커헉!”
강자존의 중원 무림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강자가 곧 법이었으며, 약자주제에 강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주 크나큰 죄가 되었다.
“끄어어어······.”
어깨죽지부터 오른팔이 순식간에 깔끔히 베여버리자, 도종혁은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백소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새하얀 검은 평범하기 그지없어, 자신의 도끼로 간단하게 찍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뭐가 저리 단단한 거냐······!’
이 묵직한 도끼는 성문조차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데, 저 얇디 얇은 검을 내려쳤을 땐 무슨 금강석을 찍은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괴력과 검의 강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종혁은 그제야 눈앞의 저 여인이 자신보다 고수라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이럴 수가······.’
강호는 넓었고, 고수는 많다지만 어찌 20대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저 여자가 자신보다 고수란 말인가? 믿을 수 없었으나, 현실이었다.
“거창한 호칭을 달고 다니는 것 치고는 도끼의 무게가 형편없구나. 태산조차 자른다는 그 도끼는 어디로 갔지?”
“네년이 감히······.”
그렇다고는 치더라도, 뭔가 이상했다.
‘···어째서 비술(祕術)이 먹히질 않지?’
자신의 내공에는 특별한 신물을 통해 얻은 특이한 힘이 하나 담겨있었다.
상대방에게서 부정한 감정, 그중에서도 절망을 이끌어내는 아주 막강한 힘.
이 힘으로 여태 그 어떤 강자를 만나왔더라도 이겨낼 수 있었다. 고수조차 절망에 휩싸이는 순간 본신의 힘을 낼 수 없었고, 그 육중한 도끼를 막아내기란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나 그 의문을 풀어줄 생각조차 없다는 듯 백소휘는 도종혁을 몰아세웠다. 무릎을 잘라내고, 귀를 뜯었으며, 눈알을 후볐다. 마치 ‘네가 당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참혹한 광경에 부하들은 진작 도망치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끄륵, 끅······.”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도종혁을 보며 백소휘는 무심한 눈으로 검을 세웠다.
이 일에 뜻을 둘 필요는 없다. 의미도 없다. 어차피, 두목의 공백 따위 일주일이면 메워질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도종혁의 목을 내려친 그 순간.
꽈우우욱!!
도종혁의 살점과 피부가 뒤틀리더니, 이내 ‘입’이 생성되어 백소휘의 검을 덥썩 물었다.
‘······뭐지?’
불안한 느낌에 검을 잽싸게 빼내자, 도종혁의 몸이 점토처럼 마구잡이로 뭉치기 시작했다.
“끄, 끄아아악! 아, 안 돼! 그만둬! 아아아아악!!”
내장이 튀어나와 피부를 덮었고, 뼈가 조각나더니 또다른 형상을 이룬다. 이윽고 그것은 마치 ‘무언가의 얼굴’과도 비슷한 형상이 되었다. 살점과 찢어진 내장으로 만들어진 그 얼굴은 비위가 좋은 백소휘조차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혐오스럽게 생겼는데, 그것의 ‘입’으로 추정되는 부위가 열리며 목소리를 내었다.
“신기한 인간이로군! 너는 감정도 없는 것이냐!”
“······정체가 뭐냐.”
“내가 먼저 물었다! 답해라!”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군.”
백소휘는 재차 검에 내공을 두른 뒤, 힘껏 그것을 베어내었다. 인간의 연약한 피부는 그녀의 검을 감히 받아낼 수 없어, 부드럽게 두쪽으로 갈라졌지만······. 3초도 채 되지 않아 재생되어버렸다.
“무식한 인간이로군! 너는 위험하다!”
그러더니, 그것은 꾸물꾸물거리며 서서히 자신의 몸집을 부풀렸다. 3m··· 5m··· 종국에는 20m 가까이 커다래진 그것은 백소휘를 내려보았다.
이제 보니, 저것은 단 한 사람의 시체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수십, 어쩌면 수백 명의 시체가 저 안에 잠들어 있었다.
“······정체는 모르겠다만,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이한 요물이로구나. 지금 죽여 없애놓는 게 낫겠지.”
“하! 하하! 그건 불가능하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나는 너희 인간들의 감정으로 만들어진 존재! 너는 감정을 죽이는 게 가능한가!”
요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니, 나무의 뿌리가 죄다 뽑혀서 날아가버렸다. 산이 벗겨지고 바위에 금이 갔지만 그 가운데서 백소휘만큼은 홀로 태평하였다.
“죽일 수 없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천마신공(天魔神公)
천마진혼멸검(天魔震魂滅劍)
백매화(白梅花)
한때, 하늘을 두쪽으로 갈라놓았다는 벼락이 지금 이 순간 백소휘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파지직! 구름조차 태워버리며 나아가는 그 벼락줄기는 꽃처럼 피어올랐는데, 마치 새하얀 매화를 연상케 하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에 전율을 일게 만드는 기술이었으나······. 「지금껏 이 기술을 보고서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뭐지?’
순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신을 향해 어떠한··· 미지의 기운이 둘러싸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식을 사용하느라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파지지지직!!! 온 세상을 새하얀 색으로 뒤덮으며, 백매화가 요물을 산산조각 찢어놓자 백소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강렬한 위화감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일 수 없대도!”
······심지어, 백매화에 직격당한 요물조차도 되살아난 것인지 아까와 별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꾸득꾸득 재생되기 시작하였다.
곤란하다. 백매화는 내공을 급격히 태우는 기술인지라 이것을 한번 사용하고 나면 백소휘조차 탈진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기술에 적중당하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다니.
“···정체가 뭐냐.”
“절망!”
“절망이라고?”
“그렇다! 나는 너희들의 절망! 너는 절망을 베어본 적이 있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 말하며 요물이 주먹을 내리쳤다.
쿠쿵!!! 고작 한 번의 주먹질에 지반이 무너져 내렸다. 직경 50m에 달하는 크레이터가 생성되며, 커다란 산사태가 발생하더니 산봉우리 아래에 있던 산채가 휩쓸려서 사라져버렸다.
백소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길 수 없다.’
설중연이 아닌 상대에게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 어떤 상대라도 반드시 약점과 빈틈은 존재하기 마련. 하지만, ‘감정’에는 빈틈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백소휘는 잽싸게 보법을 펼쳐서 거리를 벌렸으나, 요물은 마치 원숭이처럼 대지를 접어서 단 한 번의 도약으로도 수십미터를 단번에 따라잡았다.
쿵! 쿠쿵!
절벽을 뜯어서 칼처럼 휘두르고, 봉우리를 뽑아서 투창으로 만들어서 집어 던지고, 나무를 화살처럼 쏘아대는 놈에게는 이길 방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도망치고, 또 도망치는 것 외에는.
툭!
“으윽!”
그러다 발을 디딘 곳이 무너져 내리고, 백소휘는 어느 거대한 동굴로 추락하였다. 그 위에 선 요물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만 포기해라! 「어차피 네가 대항해봐야, 이 세계는 이미 나와 같은 ‘악마’가 수십 명이나 더 있다! 이 세상은 이제 우리 악마들이 차지한다!」”
“뭐···라고···?”
저 하나로도 화경의 고수인 자신이 이렇게나 밀리는데, 수십 마리나 더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백소휘는 절망하지 않고서 이를 꽉 깨물었다.
“흠! 「그런데 너는 특이하군! 어째서 나를 보고서도 절망하지 않는 거지?」 아, 다른 악마들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슬슬 시작되는구나!”
요물은 그런 말을 내뱉었다. 정작 말을 한 본인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싶었지만, 백소휘는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지독한 위화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인위적으로 누군가가 조작하는 것처럼, 세상이 그러기를 바라는 것처럼.
어떠한 ‘운명’이, 자꾸만 이 현실을 마음대로 써나가고 있었다.
‘대체······!’
툭! 그러다 손을 내뻗은 자리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잡혔다. 슬쩍 들춰보니, 웬 상자가 하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서둘러 열어보니 그 안에는 「낡디 낡은 검 한 자루와 웬 무공비급서, 마지막으로 갈색의 환단 하나가 들어있었다. 즉, ‘기연’이었다.」
그제야 백소휘는 이 위화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무언가’는 자신을 돕고있다. 그 사실이 굉장히 자존심 상하고 분하여, 그녀는 눈가에 실핏줄을 세웠다.
나는 이따위 도움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외치고 싶었으나, 눈앞에 있는 저 요물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심지어 저런 존재가 수십 마리나 더 있다면······.
무림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백소휘는 빠드득 이를 갈며 검을 뽑아들었다. 즉시 요물에게서 반응이 돌아왔다.
“「아, 아니···?! 그, 그건 영혼을 베어내는 혼절검(魂絶劍)···? 어떻게 그걸······.」”
이게 뭔가 특별한 물건이 맞는 모양이다. 요물이 대놓고 표정으로 티를 낼 정도니까.
“「하, 하지만 그건 스스로의 감정을 완전히 버린 자가 아니라면 결코 쓸 수 없다!」”
“과연. 사용 조건은 그러한가. 딱 나에게 맞는 물건이군.”
쿠오오오······!!
그때, 저 멀리 ‘악마’들의 형상이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그것들은 흑색의 용을 닮기도 했고, 세상에 얼룩진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거대한 거인도 있었고, 눈알이 수십 개 달린 요물도 있었으며, 눈알 달린 구름과 별에 매달려있는 도깨비도 있었다.
눈앞의 저 건방진 요물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저놈 뿐만이 아니라 수십 마리의 요물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검을 움켜쥐었다. 감정을 버린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혼절검. 과연 이것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건 누구의 의도인가. 그는 어째서 나를 돕는가.
지금 당장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저, 지금 당장 베어낼 것들이 생겼으니.
베어낼 뿐이다.
< 주인공이 해야만 하는 일(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