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공이 해야만 하는 일(1) >
백소휘를 떠나보내고, 천마신교를 해산한 뒤 서담 일행은 곧장 곤륜산으로 향했다.
세계의 지붕 청장고원을 바치는 기둥이자 예로부터 ‘만산의 조종’으로서 ‘용맥(龙脉)의 뿌리’라고도 불리는 곤륜산은 이 대륙에서 가장 맑고 신성한 장소였다.
해발 4000m. 세상에서 가장 거칠지만 아름다운 봉우리라 불리기도 하는 곤륜산의 ‘옥산(玉山)’에서.
“죽어라! 죽어!”
“더러운 사술 따위나 쓰는 곤륜놈들이 감히 무(武)를 논하는가!”
“하하! 네놈들 역시 이 비술을 노리고 찾아왔음을 우리가 모르는 줄 아느냐!”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인간들이 칼부림을 하며, 그 신성함을 더럽히고 있었다.
하늘조차 핏물에 젖어 붉게 물든 밤이었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무림인들은 서로의 사상과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모여들었으며, 한때 동료이자 친구였던 그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 휘둘렀다.
벌써 수백의 무림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그저, ‘사술’을 얻어 강해질 수만 있다면. 남들의 위에 서서, 최고가 될 수만 있다면 상대방이 얼마나 죽든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으니까.
무림이란 원래 이런 곳이다. 속내가 까발려지면 결국 사파나 정파나 다를 것 없이 추악한 내면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전쟁이 생각보다도 더 커졌네요.”
서담이 말하자 설중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일러는 영 보기 싫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고서는 말했다.
“원래, 무림의 전쟁이라는 게 다 저런 거야?”
“아니······. 그렇지는 않다.”
설중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무림도 무림 나름대로의 법도와 예절이 있는 법. 최소한, 강자를 만났을 때는 상대방을 존중하거늘······ 저들은 서로의 이름조차 묻지 않는구나.”
마치 ‘감정’이 지나치게 불타오르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서담은 미간을 찌푸렸다. 따지고 보면, 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그였으니까.
하지만 애당초 그의 목적은 자그마한 분쟁을 일으켜 서로를 견제하도록 한 뒤, 병력이 쏠린 틈을 타 마정구를 회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게다가 제아무리 무림이라도, 저렇게까지 격렬하게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결투를 벌인다면 모를까.
저토록 격렬하게 전쟁이 벌어진 이유는 역시······. 또다른 악마들이 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막을 필요는 없겠느냐?”
“네.”
그저 이 틈을 타서 곤륜산 내부로 진입해도, 아무런 상관은 없다.
“그렇구나.”
그러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설중연은 검을 뽑아 들고서 일어났다. 유서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테일러에게 말했다.
“야. 네가 연출 담당 좀 해줘.”
“뭔 소리야?”
부연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곧장, 상황이 터졌기 때문이다.
······쿠웅!!
단 한 명의 도약으로 인해, 마치 천둥벼락이 내려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모든 무림인이 싸움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곳으로 시선을 집중하였다.
그곳에는, 노을빛을 닮은 백금발을 휘날리며 웬 자그마한 체구의 여인이 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등장했는가. 도대체 저 존재감은 뭐란 말인가.
그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외쳤다.
“처, 천마지존··· 설중연···!”
현경의 경지에 오른 지존이자, 한때 천하를 제패하였던 여인.
최강이라는 호칭이 감히 부끄럽지 않은 그녀가, 이 자리에 등장한 것이다.
삽시간에 곤륜파와 무림맹을 포함하여 모든 무림인들의 검이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그러나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곤륜파 본산이 위치하고 있었다.
“길을 터라.”
그 단 한 마디에 수만 명의 무림인들이 동요하였다. 전쟁을 지속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러한 광경을 보며 유서담은 표정을 굳혔다.
‘만약 진짜로 싸웠다가는······ 큰일나겠지.’
설중연은 현경이라는 지고의 경지에 올랐으나, 적은 수만 명이다. 화경급의 강자가 섞여있는 그들을 상대로 혼자 버티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단 말이다. 그래서, 어떠한 ‘임팩트’가 필요했다.
어디에선가, 하늘 높이에서부터.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린다.
쿵!!
“윽?!”
“뭐, 뭐야!”
그 빛의 기둥은 한 개가 아니었다. 사람이 뭉쳐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빛의 기둥이 떨어져서 그들을 갈라놓았다. 설중연은 그 빛의 기둥 사이를 말없이 저벅저벅 걸었고, 무림인들은 기겁하여 저도 모르게 길을 트고 말았다.
이것은, 피해자들의 어떠한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총알이 단 7발밖에 없는 테러리스트가 있다고 치자. 인질로 잡힌 성인 남성은 30명. 그들이 다같이 테러리스트에게 덤빈다면, 최소한 23명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질은 그러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먼저 나섰다가는, 자신이 먼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압도적인 임팩트와 심리적인 공포가 더해져 무림인들은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갈라놓았고, 천마지존은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서 곤륜파 본산을 향했다.
그들 중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천마지존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공포’였다. 악마 따위가 임의로 만들어낸 분노조차도 찍어누르는······ 진짜 고수의 공포.
무림인들의 전쟁은 잠시 동안 멈춘 것처럼 보였고, 유서담과 테일러는 그 틈에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옥산의 봉우리에 오르자 보이는 거대한 팔각정. 회색 바위로 조각된 신선상의 바로 아래에서 누군가가 유서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란스럽게도 등장하시는구려, 천마지존이여.”
곤륜파 장문인 도철호. 그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설중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 또한 그 뻔뻔한 낯짝을 잘도 내놓고 다니는구나.”
희게 센 백발을 휘날리며 도철호는 끌끌 웃었다.
“무량수불. 번뇌를 버리니 세상이 한없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
“그래서 악마와 손을 잡았나?”
“······!”
도철호가 눈을 희번뜩 떴다. 그러고선, 미소를 지었다. 유서담은 그의 미소에서 어떠한······ 이질감을 느꼈다.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그 미소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 그림자는 너무나도 거대하여, 마치 거인의 형상을 닮은 듯하였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거인의 그림자가 도철호의 발끝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면 과연 믿겠는가.
‘이쪽 세계의 빙의체인가.’
악마는 하나의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신이 필요하다. 아마도, 도철호가 그 악마에게 몸을 내어준 모양. 힘에 취해버린 도사는 과연 저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는 것인가.
“···이제보니, 알겠군. 너희는 그쪽 세계, ‘지구’에서 찾아왔구나.”
말투와 분위기가 바뀌었다. 서담은 그것을 인식하고서 답했다.
“그래.”
“굳이 나를 찾아왔다는 건······ 내가 ‘문’을 열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왔는가. 끌끌. 재미있구나. 하지만 소용없어.”
“···무슨 소리지?”
도철호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지구는 깨끗하다. 말고, 깨끗해.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드는 세계야. ‘악마’의 침공을 받은 적이 거의 없는 세계. 아주 먼 과거, 악마가 힘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던 시절······ 그때 너희 세계 사람들은 악마를 모두 몰아냈던 듯싶구나.”
몰랐던 이야기였고, 또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었기에 유서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로부터 수천 년. 지구는 악마의 발길이 닿지 못한 채,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지. ···허나, 이제는 틀렸다. 악마가, 이 내가. 지구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는가?”
도철호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지금 네가 여기에서 이 몸뚱이의 심장을 후벼파고, 마정구를 부순다고 하여도, 결국 무림의 악마들은 너희 지구를 찾아갈 것이다! 악마의 냄새는 지독히도 독하니, 질투심 강한 저놈들이 내가 다녀간 세계를 가만둘 리 없겠지!”
그러면서 도철호는 유서담 일행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쿠오오···!!
저 멀리, 산맥 너머에서, 그림자를 닮은 거대한 형상이 일어났다. 마치 산봉우리 하나가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그것은······ 별빛을 머금은 이빨을 날카롭게 드러내어 무림인들을 베어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저, 영혼이 날카롭게 베여서 쓰러졌을 뿐.
또다른 곳에서는 거대한 종아리가 산을 쿵, 내려찍었다. 오로지 발바닥밖에 보이지 않는 그 악마는 지형 전체를 뒤집어 엎어버린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거대한 눈동자가 나타나더니 눈을 감아버렸으며, 악귀를 닮은 형상의 얼굴이 구름 사이에서 튀어나와 세상을 바라보며 낄낄대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다. 이미 이 세계는 지구인들이 발을 들이기도 전······ 어쩌면 수십년 전부터 ‘악마’라는 존재에 의해 오염되어있던 것. 언제든 세계를 집어삼키기 위해 기회를 노리던 그들은, 마침내 곤륜산의 악마가 전쟁을 일으키자 마침내 본신을 드러낸 것이다.
그 압도적이고 절망적인 모습에, 무림인들이 절망하여 무릎꿇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설중연의 눈동자에 담겼다. 유서담은 말없이 그 광경을 보다가 다시 도철호와 눈을 마주하였다.
“그래. 너희는 어째서인지 내 힘에 저항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고 마정구를 파괴하는 것도 아주 손쉽게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라고 덧붙이며 도철호는 씨익 웃었다.
“너희 인간들은 결국 악마를 막을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 속에서 태어나, 영혼을 갉아먹으며 자라나는 우리들은 결코 너희 인간의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악마는 상대법이라는 게 아예 없는 존재였으니까. ······‘악마 사냥꾼’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하지만 어디 악마 사냥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던가.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이 나서서 해결하는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주인공은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다. 악마에 의해 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주인공의 손에 의해 세계는 곧바로 멸망하게 된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아주 간혹, 아라셀리처럼 스스로가 위대한 운명을 타고나는 경우에는 주인공이 되지 않고서도 악마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니까.
과연, 이 세계에 그런 존재가 있을까?
알 수 없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눈앞의 악마를 치워버리고서 마정구를 부수는 것 뿐.
하지만 만약 저 악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지금 당장 임시방편으로 차원문을 닫아놓는다 해도 또다른 악마들이 또다른 세계에서 찾아오게 된다면, 그때는 과연 어떻게 해야하는가.
유서담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보며 도철호는 웃었다.
“이제 알겠느냐? 그러니, 무의미한 짓은 그만두고 돌아가거라!”
도철호가 그렇게 외치는 그 순간.
갑작스레, 세계의 흐름이 어디론가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
그것은 아무나 느낄 수 없는, 어떠한 ‘이야기의 개연성’이었기에 이 자리에서 놀란 이는 단 둘 뿐이었다.
도철호와 유서담.
그러나 둘이 같은 기운을 느끼고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유서담은 ‘이야기의 탄생’을 감지하였고, 도철호는 ‘악마의 죽음’을 감지하였다.
“···이게, 무슨······?”
악마는 결코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불사(不死)는 아니다. 인간에게 악마를 죽일 방법이 존재하지 않을 뿐,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악마조차 알지 못하는 ‘죽음’에 대한 방법을, 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도철호가 당황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자 유서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네가 떠들어댄 뒷일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
그의 눈앞에 떠오른 어떤 메시지 하나.
[219레벨의 주인공 ‘백소휘’가 해당 세계 ‘강호 월드(江湖 World)’의 주인공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해당 세계에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내 검끝은 악마의 심장을 꿰뚫고』
#퓨전무협 #피폐 #정신적성장
#어둠 #영웅 #잔혹
그리고 그 메시지를 본 즉시 유서담에게는 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쩌면 무림이 멸망으로 향하는 길을 막을 수도 있는, 그런 아이디어였다.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죽어라.”
도철호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 주인공이 해야만 하는 일(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