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림의 악마들(3) >
백소휘를 떠나보낸 뒤, 누님은 내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하구나. 나도 저 아이가 저토록 남자를 증오할 줄은 몰랐다.”
나 또한 입맛이 씁쓸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백소휘는 마음에 상처가 나 있었을 뿐이니까.
떠나가는 백소휘의 뒷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였다.
과연 그녀는 사랑하고 또 존경하는 스승님에게 같은 이유로 두 번이나 파문을 당했는데, 어떻게 될까. 뻔하디뻔한 클리셰대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다가 나, 혹은 누님에게 도리어 복수를 하려고 들까?
글쎄. 솔직히 그 점이 굉장히 걱정되기는 했다. 이 세상에는 ‘악마’라는 존재까지 판치고 있는 마당에, 감정이 연약해진 강자를 악마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조건이다. 무조건 악마는 백소휘에게 접근할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백소휘는 당장 죽여놓는 게 옳을 것이다. 나는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식이기도 했고.
하지만, 떠나기 직전 백소휘의 눈빛을 보고서 그러한 생각을 접어두었다.
그녀는 나와 설중연 누님에 대한 원망조차 모두 접어놓고서 저항할 의지조차 완전히 상실하여 그저 깊은 슬픔에 사무쳐 조용히 떠나갔다.
“···제가 더 죄송하죠. 저 때문에 소중한 제자를 떠나보내게 되었는데.”
“그 또한 내가 자처한 일이다. 그 아이의 상처를 알고 있으면서도, 치유할 수 있다고 섣불리 판단하였으니······.”
여러모로 뒤끝이 좋지 않은 결과가 남았다.
“···천마신교의 역사가 오늘로 이렇게 끝나는구나.”
현 천마신교는 백소휘의 사상과 신념을 중심으로 하여 세워졌으니, 중심축이 말없이 떠나버린 이상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아직까지 자리에 남아있던 귀살대원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소휘가 떠난 이후, 아직까지도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는 듯한 눈치였다. 또한, 강력한 기운의 충돌을 느낀 것인지 이곳을 향해 천마신교의 신도들이 속속 모여들고서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여 절망어린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저희들의 새로운 기둥이 되어주시는 겁니까?”
만약 누님이 새 시대의 천마신교주가 된다면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의해 많은 신도들이 남고, 또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 남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어설프게 그들을 쥐고 흔들어서는 안 되었다.
저들은 애초에 백소휘가 한 명, 한 명 데리고 와서 상처를 보듬고 달래주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던 이들이다. 만약, 아주 만약에 천마 설중연이라는 존재가 다시금 천마지존으로서 군림한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과연 진심으로 따를까? 그저 껍데기만 남았을 뿐인, 어설픈 천마신교만이 남을 것이다.
누님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기에, 작지만 이 봉우리 전체에 울리도록 은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신교는 오늘부로 해산이다. 다시는 하늘 아래에서 그 누구도 천마(天魔)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며, 그 누구도 천마신교의 교리를 떠들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 모든 교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너희 또한 떠나라. 너희가 가장 원하는 곳으로.”
그 말이 떨어진 즉시, 이제는 더 이상 천마신교가 아니게 된 무림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과연 천마신교의 끝을 말하는 누님의 심정은 지금 어떠할까. 나는 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애초에, 제대로 된 천마신교가 아니었다.”
십만대산을 등진 채 떠나며, 누님이 그리 말했다.
“천마신교가 추구했던 신념은 그 아이에 의해 변질되었다. 그 아이는 천마신교의 교리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을 뿐더러, 천마신교의 뜻을 세상에 펼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든 신도를 여성으로 채웠겠지.”
애초에 천마신교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강함’이다. 그런데, 백소휘가 세운 천마신교가 추구하는 것은 ‘남자보다 강해져,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다. 정말 나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솔직히 말해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견고하게 세우는 그러한 신념은 굉장히 좋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건 천마신교가 아니었다. 천마신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신념이었다. 천마신교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천마신교는 해산되었다.
무림의 세계에서, 설중연이라는 무림인이 성장기를 보내왔고 꿈을 꾸었던 그 모든 것이 정말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애초에 끝은 예상하고 있던 바. 차라리 이렇게, 내가 끝을 내버리니 차라리 마음이 놓이는구나.”
하지만 누님은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듯 짐짓 웃으며 그리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작별인사’를 끝낸 뒤 후련한 듯 보였으니까.
“그나저나, 너는 괜찮느냐?”
“네. 상관없어요.”
신강에 당장 온 목적 중 하나는 천마신교의 세력을 이용하여, 무림맹과 맞서 싸우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천마신교가 사라짐으로써 그 방법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누님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정말로 괜찮다.
어차피, 이제 천마신교의 도움이 없더라도 무림맹은 서로를 물어 뜯으며 서서히 무너져내릴 테니까.
지금도 암영단에 의해 무림맹의 ‘정파대전’의 근황이 계속해서 보고되고 있었다.
사술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라는, 그러면서 은근슬쩍 마정구를 요구하는 무림맹. 헛소리 말라며 저항하는 곤륜파.
아직까지는 곤륜파의 저항이 강력하여 별 소득이 없는 것으로 보였으나······. 얼마 전, 남궁세가에 의해 곤륜파의 성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즉,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
“그 둘의 싸움이 짙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그저 고수들이 싸우느라 혼란한 와중, 곤륜산을 쳐들어갈 예정이니까요.”
물론··· 전쟁이 생각보다 더 혼란스럽기는 했다. 속속 들어오는 정보에 의하면, ‘악마’의 사술로 추정되는 비술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악마들의 활동이 급격히 심해진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아마 ‘전쟁’이 있을 터. 그간 잠잠하게 있어야만 했던 악마들이 감정과 감정이 치열하게 오고가는 전쟁이 발발하자 제대로 된 활동을 개시한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무림의 악마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느냐?”
“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어요. 악마의 ‘신물’을 소유한 모든 문파를 궤멸시킨다면 모를까······.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이야 하겠지만, 너무 오래 걸려요.”
그건 어나더 리그의 길드 마스터인 나로서도, 현대의 신 무림맹주 설중연으로서도, SS랭크의 헌터이자 최근 헌터 협회와 미묘한 관계를 맺게 된 테일러 나인으로서도 곤란한 일이었다. 우리는 모두 현대에서 바쁜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구나.”
누님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못잇자, 나는 희망이라도 부여넣어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뭐······. 혹시 모르죠. 저와 누님이나 테일러가 아닌, 어떤 다른 누군가가 악마와 맞서 싸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찬란한 마도문명을 세운 비비안타 제국조차 악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무너져갈 때, 한 줄기 희망이 되어 나타난 아라셀리 라인칼이라는 소녀처럼.
어쩌면 이 무림에도, 그런 누군가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
전대 천마신교주이자, 한때 단 한 명뿐인 지존이라 불리웠던 여인 설중연.
그녀는 백소휘의 꿈이자 사랑이었고 희망이었으며 동시에 삶의 목표가 되어주었다.
하루 끼니를 시장바닥에 늘어진 나물조각따위로 떼웠으며, 잠을 청할 곳이 부족해 항상 비를 맞으며 밤을 지새웠으며, 종이쪼가리를 모아 차가운 몸을 덥혔고, 혹여나 길거리 부랑자들에게 잘못 걸릴까 두려움에 떨며 지내야만 했다.
산다는 건, 원래 다 그런 줄 알았다.
매일을 외로움과 슬픔 속에서 힘겹게 지새우는 게 당연한 일인 줄로만 알았다. 행복이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고, 아주 간혹 먹다 남은 음식이라도 발견하는 날에나 느끼는 게 기쁨인 줄로만 알았다.
설중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를 따라오거라.’
그녀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진 이후로, 삶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제는 더 이상 외로운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새옷을 입을 수 있었고, 비내리는 골목길이 아닌 천장이 똑바로 존재하는 방바닥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으며, 매일 음식이라는 것을 먹을 수 있었고, 심지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도록 강해질 수 있었다.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다. 행복이란 과연 이런 것이구나. 나는, 여태까지 행복을 전혀 모르고 살았구나.
행복을 처음 알았을 때 백소휘는 하루종일 펑펑 울었다. 평생을 불행하게 보내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러워서, 그러나 이제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설중연에게 너무 고마워서.
······비록, 그 행복이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백소휘는 남자가 두려웠다. 어렸을 때부터 또래든, 어른이든 남자들은 언제나 항상 자신보다 강했고, 그들을 피해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독해져야만 했다. 신경을 항상 날카롭게 세워야만 했으며, 잠조차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런 탓일까, 남자를 볼 때면 어렸을 적 부랑자들에게 덮쳐질 뻔 했던 트라우마가 심해졌다. 모든 남자가 다 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의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방어행동이 ‘집단’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백소휘는 자신을 거두었던, 자신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던 설중연에 의해 쫓겨났으나······. 여전히 스스로를 고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벌써 두 번째가 되었다.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설중연은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져있었고, 백소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녀는 설중연의 단 한 점 흔들림없는 눈빛을 보고 말았다.
예전보다도 더욱 현명해진 설중연은, 자신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백소휘는 깨닫는다.
현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른 설중연이 깨달은 ‘무언가’. 그것을 과연, 자신 따위가 옳지 않다고 폄하해도 좋은 것인가?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게 맞는 일인가?
설중연은 언제나 옳았다. 설중연의 말은 언제나 진리였고, 법이었으며, 곧 법칙이 되었다.
그런데······ 고작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만하여, 자신이 멋대로 스승님을 휘두르려고 했던 것이다.
백소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창피해서, 그리고 스승님의 사랑을 스스로 걷어차버린 스스로가 한심해서.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자신은 진심으로 죽이려고 들었기에.
이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은, 무림에서 오로지 하나. 스스로의 목숨을 바치는 것.
‘······차라리, 죽을까.’
어차피 설중연에 의해 연명하고 있던 삶, 속죄의 의미로 바친다면······ 그나마 더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백소휘는 힘없이 내리 걸었다.
쏴아아-!!
소나기가 쏟아진다. 백소휘는 비를 피하기 위해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걸었으나, 비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력을 끌어올려 피부에 둘렀는데, 어디에선가 소란이 들려왔다.
그저, 호기심에 시선을 돌린 그녀는 곧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이놈! 모두 썩 꺼지지 못하겠는가!”
무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열댓 명의 산적들이 어떤 일행을 습격한 것. 자세히 보니 그 일행은 네 명으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는데, 아내와 어린 딸 두 명은 서로를 끌어안고서 겁에 질린 채였으며 무공의 무(武)조차 모를 것 같은 집안의 가장은 굵은 나뭇가지를 치켜들고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의미하다.’
산적들은 이미 덩치부터가 우락부락했고, 날카롭진 않지만 거친 날붙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남자는 체격이 왜소했고, 무장의 수준 또한 초라했다. 싸워봤자, 어차피 진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 남자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어서 말했다.
“여보, 어서 도망쳐! 여기는 내가 알아서 다 해결할 테니까!”
남자도 알 것이다. 싸우는 순간,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너무 흔하고 뻔한 신파(新派)에 백소휘는 웃었다.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상처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하여, 만질 수도 없었고 연고를 바를 수도 없어서 계속해서 고름이 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깨달아버린 지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여전히 상처는 건재하였으나, 그 상처가 스스로에게 선명히 보여지게 된 것이다.
“두, 두목! 저기 웬 미친년이 오고 있습니다!”
“뭐야? 무림인의 복장인데······?”
“괜찮지 않겠습니까? 녹림도(綠林道)의 총표파자(總飄把子)께서 구해온 그 신물(神物)의 힘을 저희 또한 받았으니 말입니다! 이 힘은 무림인조차도 힘을 못씁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소휘가 지척에 도달하였으나 산적들은 겁먹지 않고서 도리어 눈을 부라렸다.
“썩 꺼져라. 제아무리 무림인이라지만, 네년도 인간이라면 절망 정도는 느끼겠지?”
그들이 받은 신물의 신묘한 사술은 바로, 상대방에게서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오는 것.
분노, 혼란, 절망, 공포, 고통······.
그것이 바로 ‘악마’라는 존재가 다루는 힘의 정체였다.
인간이란, 부정적인 감정에서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산적들에게서 흉흉한 보랏빛의 기운이 백소휘를 향해 쏘아졌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타격조차 주지 못했다.
“이건······.”
잠시 흥미로운 눈길로 그 힘의 정체를 감미하던 그녀는, 이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무림의 졸렬한 놈들이 사용하던 사술이로군.”
대충 그 정체를 파악해낸 백소휘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에게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예전부터 항상······ 절망 속에서 살아왔거든.”
이내, 그녀의 검이 뽑혔다.
< 무림의 악마들(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