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림의 악마들(2) >
진법(陳法)이 무엇이던가. 특정한 물건이나 표식을 특정한 자리에 새기거나, 특정한 숫자의 인물이 특정한 위치에 모여 특정한 동작을 행하여 ‘어떠한 신비로운 자연 현상’을 일으키는 행위를 말한다.
물론 진법은 완벽하지 않다.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의 배치가 조금이라도 바뀌거나, 특정한 길을 따라서 걷거나, 혹은 눈을 감거나 귀를 막는 등 대처법은 얼마든지 있다. 단지, 진법에 따라서 대처법이 다르며 더욱 진보된 진법일수록 대처하는 게 어려울 뿐.
이런 식으로 물건과 사람의 배치를 이용해 자연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은, ‘마법’이라는 학문의 시초와 굉장히 흡사하였다. 원시적인 마법은 마나의 배열을 수식화하여 자연의 이치를 그대로 이용하는 게 아닌, 어떤 생물의 신체 부위나 식물 등을 조합하는 식으로 발동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진법과 마법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결국 진법은 무공에서 파생되었고, 마법은 신비에서 파생되었으니까.
하지만 그 둘이 유사하다는 점을 생각한 서담은 천마각에 머물면서 설중연에게 진법과 기관, 용맥은 물론 ‘천마신교’가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에 대해 물어보았고 그에 대한 대처법을 연구하였다.
그러면서 무려 2주 동안 매일 쉬지 않고 모든 마력을 짜내어 봉우리에 마법진을 설치한 결과, 그는 이곳에 ‘물리 엔진 결계’를 설계할 수 있었다. 결계 내부에서는 시전자의 임의대로 ‘현실의 법칙’을 일부 조작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결계.
무려 [백색 마녀의 도서관]에서도 C랭크에 해당하는, 그것도 가장 고난도의 결계였다. 서담은 아직도 D랭크의 서고조차 제대로 출입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새삼 화분의 마법적 능력이 굉장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마녀야···.
“알아. 고생했어. 이번 일만 끝나면 죽을 때까지 소주 마시게 해줄게.”
-히히···조아.
반짝, 그의 어깨 위에서 빛무리가 터지더니 손바닥보다 조금 더 커다란 정령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이제는 꽃잎에서 아주 조금 벗어날 수 있게 된 화분이었다. 그녀가 서담 주변을 빙글빙글 선회하기 시작하자, 그 또한 검을 뽑아들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진법에 당해보는 건 처음이신가?”
백소휘의 표정이 굳었다. 안 그래도 사나운 고양이상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녀는 화경의 고수로서, 레벨만 따지면 200이었기에 서담보다 수준이 월등히 높았다. 그럼에도 ‘마법사의 공간’이라고도 불리는 결계 안으로 들어온 순간, 그녀는 서담을 죽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백소휘는 고작 초절정고수가 혼자서 사용한 진법따위에 겁을 먹지 않았다. 그저 조금 귀찮아졌겠거니 싶을 뿐.
슬쩍, 백소휘가 발을 내딛자.
우우웅······!! 마치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것처럼 그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10m나 벌어졌다.
‘이게 무슨···!’
이런 진법을 살아생전 처음 본다. 공간 그 자체를 조작하는 진법이라니? 물론 지면을 조금씩 이동시키며 감각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찌만, 무려 2주 동안이나 설계된 마법사의 결계는 무림인조차 감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당황하지 말고, 천마섬멸진(天魔殲滅陳)을 펼쳐라!”
첨마섬멸진은 그들이 가진 또다른 진법의 하나로서, 17인이 교묘하게 포지션을 잡고 정확한 타이밍에 공격함으로서 상대방에게서 완전히 기회와 리듬을 빼앗아오는 기술이었다.
그때, 드디어 유서담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복장을 한 채였다. 새하얀 무복을 벗어던진 채, 중세 유럽의 기사처럼 갑주를 착용하고서 서양식의 검을 뽑아든 것.
이윽고 쩌저저적, 소리와 함께 그가 딛고 있는 발을 중심으로 하여 검붉은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바닥이 갈라지며 뾰족한 바위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무슨······!!”
제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귀살대와 백소휘로서도 난생 처음 보는 기술, 마법. 도사들이 사용하는 도술조차 이렇게 공격적이고 해괴하지는 않았다.
귀살대가 던지는 암기는 공간이 살짝 비틀리는가 싶더니, 자연스럽게 유서담의 목을 스치는 듯하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버린다. 검을 찔러 넣고 보니, 유서담이 생각한 것보다 한뼘이나 더 멀리 있어서 닿지 않았다. 그에 비해 유서담은 귀살대의 공격을 튕겨내고,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귀살대에게 충분히 유효타를 먹일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을 섞으면서, 서담은 깨달았다.
‘얘네 검술로 싸웠다가는 큰일나겠는데······.’
귀살대의 검술은 절정고수라 할지라도 순수 테크닉 자체는 유서담과 맞먹거나 뛰어난 수준이었으며 초절정고수의 검술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순식간에 목이 달아날 정도로 날카로웠다. 하여, 그는 검을 소극적으로 사용하며 오히려 마법을 더욱 적극적으로 채용하였다.
한층 더 강해진 화분의 도움으로, 그는 완전히 마법사처럼 행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콰르르릉!!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치는가 하면 바닥이 두쪽으로 갈라져 발을 헛디디게 만들었고 새하얀 눈보라가 난데없이 몰아치더니 곧 사방에서 불꽃의 기둥이 폭발하며 귀살대를 날려버렸다.
“크윽······.”
“도저히 접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하다. 이 봉우리에는 결계를 제외하고서도 미리 설치해둔 마법만 수십 가지다. 설계된 마법사의 영역에서 마법사는 평소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터에 유서담은 현재 18인의 무림인을 상대로도 여유롭게 버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법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그것은 크나큰 패착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서담이 그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수십 가지의 마법을 설계해두었고, 무려 백색 마녀의 서고에서도 C랭크에 해당하는 결계를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살대는 틀림없이 강력했다.
현실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결계 내에서도 그들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건 꿈도 못꿀 일이었으며 혹여나 세 명 이상 접근이라도 하면 유서담은 잽싸게 줄행랑을 쳐야만 했다.
인정해야만 했다. 그들은 강하다.
하지만, 귀살대 입장에서는 유서담이 강함을 인정하든 어쨌든 그저 열불이 터질 뿐이었다.
귀살대 열일곱이 모이면 용(龍)조차도 때려잡을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거늘, 그들의 장점인 숫자로 인한 진법이 이 공간 내에서는 무력화 되었고 고작 단 한명이 사용하는 신비로운 사술 때문에 제대로 된 공격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또한 남자는 조금만 붙으면 겁쟁이마냥 도망치는 주제에 어찌나 빠른지 귀살대의 초절정고수 다섯조차 그를 따라잡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하! 사내로 태어나서 도망치기나 하고, 추하구나!”
“그러는 너희는 열여덟이 모여서 한명 다굴치는 주제에 잡지도 못하고 추하구나.”
“······으득.”
게다가 도중도중 도발을 던져보아도 말빨로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 반격을 해오니, 점점 더 분노 게이지가 쌓여만 갔다.
하여, 마침내 분노한 백소휘는 진신내공(眞身內功)을 폭발시켰다.
쿠웅-!!
삽시간에 공기의 흐름이 가라앉는다. 결계의 기운이 일부 상쇄되며, 동시에 귀살대가 현기증을 호소하였다. 지금까지는 아군을 생각하여 기운을 감춰두고 있었거늘, 더 이상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저 놈은······ 나 혼자서 잡는다!’
그녀의 몸에서 천마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흉흉한 붉은색의 마기(魔氣)가 뿜어나왔다. 설중연의 경우에는 붉은 기운을 다스리고 또 다스려, 마침내는 아름다운 분홍빛으로 승화시켰지만 백소휘는 그 패도적인 기운을 더욱 거칠게 다루어 오히려 더욱 붉어진 것이다!
온 세상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듯 하였고, 하늘마저도 천마의 내공발산에 의해 붉게 물들었다.
“감히 네놈이······ 천마신교를 능멸하려 들어?”
걸음걸음바다 바닥에 설치되어있던 수많은 마법이 파훼된다. 그녀를 향해 쇄도하는 마법은 그저 간단한 손짓으로 깨어졌고, 조금 오랫동안 준비했다 싶은 마법도 검을 휘두르자 반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결국, 무공 또한 공기중의 마력(에센스)를 사용하는 것이었기에 서로간의 상쇄가 가능한 것.
이쯤 되자 유서담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진짜 사람 잡겠는데.’
천마의 기운이 짓누르는 범위 내에서, 유서담조차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는 아직까지 고작 150레벨가량의 힘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고 200레벨의 수준인 화경과의 격차는 그저 멀기만 하다. 지금은 결계 내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할 뿐이지만······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상관없다. 유서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백소휘가 공격해와도, 당해주지 않고 발을 붙잡아두는 것’이었으니까.
“······무슨 짓이지?”
난데없이 유서담이 전투 태세를 해제하고서 검을 늘어뜨리자, 백소휘가 눈썹을 꿈틀 올리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백소휘도 무언가를 깨닫고서 기운을 거두었다. 그러고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절벽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착잡한 표정으로 설중연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새하얀 검을 뽑아든 채로. 이 해괴망측한 결계를 평범하게 뚫고서 들어온 것은 놀라우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스승님.”
“이게 무슨 짓이지? 설명하라, 백소휘.”
스스스···설중연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나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붉은색의 기운으로 사방을 뒤덮었던 백소휘와는 달리, 그녀는 기운을 내뿜는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형무색(無形無色)의 기운. 현경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상대에게 기운의 발산을 들키지 않으며, 기운을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백소휘는 입술을 떼었다.
“스승님은 지금 저 남자에게 오염되고 있습니다. 이건 모두 스승님을 위한 일.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실 수도 있으나, 훗날이 되면 저에게 오히려 감사하실-”
“그 입 다물거라.”
설중연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서, 마침내 그녀 특유의 연분홍빛 기운을 사방으로 만개하였다. 온통 새하얗던 백련(白蓮)이 분홍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며, 붉은 하늘을 마침내 가득 채웠다.
마치 세상의 멸망이 도래한 듯 흉흉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버리고, 벚꽃지는 봄의 계절이 찾아온 것만 같은 화사한 분위기에 유서담은 짧게 감탄하였다.
“너는 지금 도를 넘어섰다, 백소휘.”
“스승님. 스승님은 지금 뭔가 잘못되셨습니다. 역사상 다시없을 위대한 현경의 경지에 오른 스승님이 저깟 남자에게······.”
“위대한 경지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너는 지금 무언가 잘못된 사상에 빠져있구나. 허면, 현경의 경지에 오른 나는 사랑조차 하면 안 된다는 말이느냐? 사랑에 빠지는 건 그 어떤 여인에게라도 허락된 일인데, 감히 내 마음조차 네 뜻대로 결정하려는 것이냐?”
“스승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답답하다는 듯, 백소휘가 소리를 쳤으나.
설중연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검을 겨누었다.
“이성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는 건, 인간이 탄생한 이후 수만 년 동안이나 당연히 행해왔던 일이다. ···잘못된 건, 네 사상이다. 남자에 의해 고통받아왔던 네 심정은 잘 안다. 하지만, 네 사상과 신념으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순간부터는······ 그건 보다듬어줘야만 하는 상처가 아니라 그저 역병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으득, 인정할 수 없다며 백소휘가 눈가에 핏줄을 세웠지만 설중연은 멈추지 않고서 백소휘에게 다가갔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네. 이 세상 모든 것을 바쳐도 좋을 만큼.”
“고맙구나. 너는 내가 죽는다면, 어떤 심정일 것 같으냐?”
“······절망하여, 자결하거나 세상 모든 것을 부술 것입니다.”
“내가 지금 딱 그러한 심정이다.”
“예······?”
설마하는 표정으로 백소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네가 아니라, 저 남자를 그만큼 사랑한다. 한데, 세상 모두를 다 바칠만큼 사랑하는 이를 죽인 뒤······ ‘당신을 위하여 그랬다’라고 답한들 내가 그렇다고 수긍했을까?”
설중연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네가 유서담에게 해를 끼쳤다면······ 나는 단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네 목을 쳤을 것이다. 변명따위를 짓걸일 여지조차 없이.”
“아, 아······.”
어느덧, 백소휘에게 접근한 설중연은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토록 아름답다고 여겨왔으며, 그토록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검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오늘만큼은 너무나도 차갑고 날카로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백소휘. 네가 앓고 있는 상처는 잘 알고있다. 하지만 그 상처를 애정으로 보듬어주면, 치료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녀는 천천히 귀살대를 돌아보았다. 이미, 천마신교는 예전의 그 천마신교가 아니었다. 상처받은 여인으로 인해 천마신교는 그 상처를 모두가 앓게 되었다. 그건, 정말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만약 현대였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았다면 유서담 또한 그녀를 진심으로 치료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의 상처는 ‘천마신교’와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이 추구해야만 하는 것은 순수한 ‘힘’과 ‘강함’이지, ‘상처’ 따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백소휘.”
“자, 잠깐만요. 스승님, 그건 안 돼요···. 시, 싫어요. 차라리, 차라리 죽여주세요. 죽는 게 나아요. 스승님에게 버림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발, 제발······!”
그러나 설중연 또한 자신의 손으로 키운, 한때는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웠던 제자를 제 손으로 베어낼 수는 없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력한 형벌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너를 오늘부로 천마신교(天磨神敎)에서 파문(破門)하겠다. 이대로 떠나서, 영원히 내 눈에 띄지 말고 살아가거라.”
“아······.”
그 통보에, 백소휘가 힘없이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 무림의 악마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