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림의 악마들(1) >
청해성 곤륜산.
마치 옥을 빚어놓은 듯하다고 하여, 옥산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거대한 산령은 너무나도 높고 구름조차 닿을 수 없어 감히 우러러보는 것조차 일반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꼭대기에는 강호의 도교무학을 대표하는 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곤륜파(崑崙派), 장문인 도철호는 장로들을 긴급소집하여 한자리에 불러놓아 표정을 잔뜩 일그린 채였는데 그 모습이 흡사 악귀의 그것과도 비슷하여 도저히 도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썩을 무림맹 놈들이 ‘사술’에 대해 밝히라며, 자꾸 마정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은 이 ‘사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을 터이다. 아니, 애초에 알았다고 하더라도 ‘마정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또, 자신들의 무공에 ‘사술’이 섞여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무량수불. 답을 거절하라.”
“하지만······! 계속 답을 미루니, 무림맹에서 아예 병력을 동원하였습니다! 이러다 진짜 무림맹이 등을 돌리면 큰일입니다!”
“그럼 마정구를 준다는 말이더냐! 그것이야말로 자살행위! 차라리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병력을 강화하는 게 옳다! 설령 전면전이 일어나더라도, 곤륜이라면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장문인의 그 말에, 몇몇 장로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째서 곤륜이 이렇게 타락하였을까.
한때 양풍(涼風)의 봉우리에 오르면 죽지 않게 되고, 현포(玄圃)에 오르면 영(靈)이 될 수 있으며, 상천(上天)에 다다르면 신(神)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도를 닦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지나치게 곤륜파를 보수적으로 만들었고, 망할 도사놈들은 외부 문물의 유입을 거부하였다.
차라리 지구인을 받아들였다면, 아니 하다못해 색목인을 받아들였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여타의 문파는 변화를 받아들이고서 흑인이든 백인이든 관계없이 문파에 모두 수용하였고, 그로 인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고 한다. 하지만 곤륜파는 그것을 거절하였고, 세력은 눈에 띄게 약화 되었다.
그래놓고서는 뒤늦게 세력 강화를 위해 ‘악마의 사술’을 받아들인다면, 대체 그동안 곤륜의 전통을 고수한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이냐?
사실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장문인 도철호가 그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으니까.
“······하는 수 없지. 다시 한번 마정구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하지만 이 마정구의 힘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자신들을 잠식해나간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결국 곤륜의 보존을 위해 더욱 강력한 힘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철호가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가 나와서 마정구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검붉게 빛나는 이 마정구는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빴지만, 곤륜파를 현 최강의 문파로 자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신물이기도 하다.
“무량수불. 시작하도록 하지.”
*
사실, 유서담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몰랐다.
백소휘는 남자를 증오하였고,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문파를 만들었다. 남자인 유서담이 찾아가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부담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그는 ‘저는 슬쩍 빠질까요?’라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설중연이 괜찮다며 만류하였다.
오히려 그녀는 이것이 기회라고 하였다.
그녀 또한 남자에 의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으나, 다시 한번 어떤 남자에 의해 다시금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살아갈 희망을 찾았으며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었으니, 자신의 제자인 백소휘 또한 설득한다면 그것을 알아 봐주리라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맞는 말이었다. 백소휘가 여전히 설중연을 존경한다면, 그녀의 말에 여전히 마음이 움직인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소휘는 겁쟁이였다. 어렸을 적의 트라우마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 마침내는 마음을 좀먹는 종양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설중연의 설득을 그저 ‘스승님조차 잘못되었구나. 내가 고쳐줘야만 한다.’라는 생각으로 흘려듣게 만들었다.
그러나 설중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설중연의 기억 속 백소휘는 작고 겁이 많은 아이였다. 남자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살생마저도 저질러버린 아이.
이유 없는 살생은 용납할 수 없었고, 당시의 설중연은 백소휘에게 큰 징벌을 내리고서 파문(破門)하긴 했으나, 그녀가 트라우마를 극복하여 돌아올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결국 헛된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유서담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슬쩍 열려있는 문창살 밖을 내다보니, 테일러가 다른 신도들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대련이라고 해봐야 야구 방망이 들고 휙휙 휘두르면 레이저가 사방으로 뿜어나가서 무림인들이 도망치는 구도였지만 말이다.
설중연의 ‘작별인사’를 위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지도 어언 일주일.
이제 작별인사는 마무리되어, 설중연은 전 천마신교주로서 문파 내 영토를 둘러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현명했기에 비록 이 자리를 장기간 비워두었다고는 하지만 백소휘보다 더 맑은 생각으로 문파를 여러가지 개선하였다.
그동안, 서담은 찬밥신세였다.
테일러 나인은 화경의 고수와 맞먹을 수 있는 수준의 힘을 지니고 있어, 문파 내의 고수들에게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유서담 또한 초절정의 수준이었음에도 남자라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다. 그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가 먼저 말을 걸어도 차갑게 대하였다.
아마도, 추측이겠지만 모두 교주 백소휘가 지시한 일이겠지. 아니, 천마신도들의 눈빛을 보면 아예 남자에 대한 이미지를 강력하게 세뇌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차라리 잘 됐다. 설중연의 설득이 전혀 소용없을 정도로 자신의 어떠한 트라우마로 인한 신념에 물들어 있는 여자. 그리고 그런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자신의 제자들에게 퍼뜨릴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면······.
‘······어차피, 머지않아 큰 사고를 쳤겠어.’
하필이면 그 대상이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이 유서담은 상당히 착잡하였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온 가장 큰 목적은 달성하였고······. 지금도 암영단의 ‘전서구’에 따르면 무림맹이 슬슬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니까.
남은 건, 무림맹이 혼란에 휩싸였을 때 천마신교가 제때 등장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리 생각하며 그는 최대한 이 여유를 만끽하려는데, 창문에 무언가가 툭 날아들었다. 손을 뻗으니 화분이 마법을 걸어두어 가속과 은신에 특화된 마법의 전서구가 잡혔다. 발목에 묶여있는 조그마한 편지를 풀어서 확인해본다.
“······음?”
여태까지의 정황은 그럭저럭 비슷했다. 결국 경고에도 불구하고 곤륜파는 마정구를 내놓지 않았고, 결국 무림맹이 연합하여 곤륜파와 작은 충돌을 일으켰는데······.
“곤륜파의 무공이 조금 더 강대해진 것 같다. 흠······.”
아마 이대로 가다가는 질 것 같다는 생각에, ‘악마’의 힘을 더 빌린 모양이다.
그런데, 그 아래로 추가된 문장에 유서담은 눈살을 찌푸렸다.
‘악마의 사술로 추정되는 힘이, 또 발견되었다고?’
그것도 같은 무림맹에 속한 문파에서 발견된 것이란다.
그 사술은 상대방에게 강력한 탈진감과 무력감을 주어 전투 도중 주저앉게 만드는 등의 아주 특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존의 악마가 가진 ‘공포’와 ‘분노’와는 전혀 다른 힘이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또다른 악마가 등장했다는 소리란 건데······.
‘하긴···. 여기는 이미 악마의 세계와 통하는 게이트가 열려있으니.’
색마 방호윈의 ‘성욕’과 이번 악마의 ‘공포와 분노’, 그리고 또다른 ‘나태’의 악마. 벌써 발견된 악마만 해도 셋.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악마가 이 무림에 숨어있을까.
······그러나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지구를 위하여, 무림과 통하는 차원문을 완전히 닫는 수밖에.
*
교주 직속부대 귀살대(鬼殺隊)는 초절정고수 5인과 절정고수 12인으로 구성된 소수 부대로서, 고수 한 명을 암살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천마귀살진(天魔鬼殺陳) 온갖 귀신의 환영을 소환하여 사방을 어둠으로 물들여 고수의 감각을 원천차단하였고, 또한 방향감각과 공간감각을 뒤틀어 자신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번 일에는 교주 백소휘가 참여하였다.
유서담. 그자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본디 암살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특징과 버릇을 잘 파악해둬야만 한다.
설중연 일행이 천마각에 머무른 시간은 이제 벌써 거의 2주일이 다 되어갔고, 귀살대는 유서담의 버릇 하나를 파악하였다.
저녁이 되면, 노을이 지는 것을 보기 위해 항상 유서담이 혼자서 봉우리를 오른다는 것. 어째서인지 등산을 다녀올 때면 항상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지만······ 그 또한 ‘테일러’라는 여인처럼 능력 자체는 강하나 체력은 일반인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곧 죽음으로 향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리라.
오늘 저녁도 어김없이 유서담은 봉우리를 올랐다. 지는 노을을 보기 위하여. 백소휘는 그런 그가 퍽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매일 보는 광경을, 왜 매일 본단 말인가.
그는 짐짓 멋있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뒷짐까지 지고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17인의 귀살대와 교주는 그런 그를 몰래 뒤쫓았고, 마침내 봉우리에 도착했을 때는 숨겨두었던 인기척을 풀었다.
스스스스······. 바람이 불어와 풀숲을 흔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열여덟의 여인이 자신의 사각을 모두 잡고 있었음에도, 유서담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숫자는 그게 끝인가?”
······그러면서, 언젠가 ‘무협 영화’에서 보았던 고수의 멋진 대사도 한 번 쳐준다. 그런데 유서담이 하니까 별로 안 멋있었다.
“네놈 정도의 하찮은 목숨을 끊기에는 과분하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확신이었다. 유서담은 고작해야 초절정고수의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이 자리에는 다섯의 초절정고수가 있음은 물론 백소휘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화경의 경지에 다다랐으니까.
심지어 귀살대가 펼치는 천마귀살진은 제아무리 화경의 고수라고 할지라도 견딜 수 없을 터. 고작 유서담 하나를 죽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병력을 끌고 왔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유서담은 웃었다. 짐짓 여유를 부리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사실 그는 여유를 가장한 채 [정신집중]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흔들리는, 마나의 끈을 붙잡기 위해.
“······!!”
귀살대원들이 눈을 크게 뜨고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교, 주님······.”
백소휘 또한 무언가를 느끼고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천마귀살진은 열일곱의 귀살대가 모두 모여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분명히 발동되었다. 온 사방에 수많은 장치와 자연물을 설치해두었고, 이미 초자연적인 현상은 발생하고 있었을 터.
하지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들조차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 진법(陳法)이라는 존재를, 유서담은 이미 ‘마법’이라는 학문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이 발생하는 데에는 전부 이치가 있었고, 원리가 있었으며, 수학적인 공식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
유서담은 단지 [백색 마녀의 도서관]과 화분의 도움으로 그것들을 끊어냈을 뿐.
“···진법이 무효화 되었으나, 상관 없다. 어차피 우리의 힘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그리 말하려는 순간, 백소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갑자기, 노을이 떠오른다. 해가 지다 말고 다시 떠오르는 것조차 이상한데 아까까지만 해도 천천히 흐르던 구름이 빠르게, 너무나도,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이 멎었다. 해는 떠오르는데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제야 유서담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전신에 만연한 축축한 식은땀을 애써 가리며, 허세를 부리듯 웃었다.
“그 진법이, 언제부터 너희만 쓰는 거였지?”
< 무림의 악마들(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