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67화 (167/251)

< 천마지존의 귀환(4) >

현 천마신교에는 무려 2~3천에 달하는 무림인이 속해있으나, 이는 과거의 영광에 비하자면 보잘것없는 세력에 불과했다. 그러나 천마신교가 완전히 멸문(滅門)당한 뒤 몇 년 흐르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까지 이루어낸 교주의 능력은 상당히 대단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천마지존께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마교 서열 7위 철혈검마(鐵血劍魔) 한소란의 말에 교주(敎主) 백소휘가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랴, 십만대산에서도 가장 가파르고 날카롭게 깎인 천마절벽(天魔絕壁)에 모인 장로 이상급의 모든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의 표정이었다.

전(前) 천마신교주(天魔神敎主) 설중연.

그녀는 모든 여성 무림인들의 우상이자, 신적인 존재로서 무림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니 말이다. 역사상 수많은 여고수가 탄생했다고는 하지만, 그 숫자가 매우 적었으며 현세대에 이르러서는 화경급의 여고수를 찾는 것조차 힘든 마당에 그녀는 무려 현경의 경지를 달성했으며, 또한 천하(天下)를 일통(一統)하기 직전까지 갔던 역사 속 유일한 여성 무림인이었다.

“그래······. 지금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하시더군.”

검은 머리칼에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사나운 표정을 가진 여인 백소휘가 그리 말하자 장로들이 모두 눈동자를 떨었다. 그녀들이 천마신교에 입문했을 적에는 이미 설중연이라는 존재 자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서 결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전설이 직접 자신들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행복에 겨워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백소휘 역시 들뜬 가슴을 애써 가라앉혔다. 비록 설중연에 의해 천마신교에서 쫓겨났으나, 그 역시 백소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결코 모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렁뱅이였던 자신을 구원해주고 무공을 가르쳐주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해주었으며 이렇듯 꿈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었으니 이 한목숨 바치는 것으로도 감히 은혜를 모두 갚을 수는 없을 것이다.

‘···드디어, 다시 만나는군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천마신교를 떠난 직후, 천마신교가 멸문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절망하였던가. 비록 대부분의 신도가 남자였던지라 친하게 지낸 이들은 하나 없었지만······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가장 사랑했던 여인마저도 흔적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에는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무공을 전수받은 그 순간부터, 백소휘의 목표는 오로지 자신이 존경해 마다않는 스승 설중연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옆에 서서, 당당히 한 명의 무림인으로서 자리를 잡는 것. 그러나 그 꿈은 이루어지기도 전에 바스라졌고, 백소휘의 목표는 ‘복수’가 되었으나······.

복수할 대상마저도, 이 무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자신들의 고향, ‘지구’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목표를 잃어버린 백소휘였으나 자신을 놓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천마신교를 다시 세워서 설중연의 뜻을 잇자.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혀왔던 곤륜파에게, 그리고 무림맹에게 다시 한번 대적하고 천하에 빈틈없이 천마신교의 깃발을 꽂자.

그리하여 백소휘는 끊임없이 정진하였으며, 쉴 새 없이 천마신교를 발전시켰다.

······거기에, 오로지 ‘여성’으로만 구성된 천마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릴 적 남자에게 겁간당할 뻔한 경험이 있는 백소휘는 남자라는 족속을 끊임없이 증오하였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남자가 두려웠다. 너무나도 무섭고 혐오스러워서, 그들을 받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스승님께서는 이해해주실 거야.’

다시 눈을 뜨자,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기운이 선명하게 백소휘를 감싸왔다. 그녀는 아찔한 짜릿함을 느끼며, 시야를 천천히 내렸다.

그곳에는.

노을빛에 비친 설산을 닮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게 핀 연꽃과도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오로지 그녀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이 하찮은 목숨을 연명해왔다.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하고 꿈꿔왔던 나날들이 선명하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절벽의 끝을 위태롭게 걸어오는 그녀는 옛날 그대로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백소휘는 체면조차 잊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

“······스승님.”

자신의 부름에, 설중연은 부드러이 미소를 지으며 응답해주었다.

“많이 자랐구나. 그때보다도 더.”

“스승님, 덕분에요.”

160이 간신히 될까 말까한 설중연과는 달리, 백소휘의 키는 170이 넘어서 이제는 그녀를 내려다 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자신이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아야만 하는 존재. 그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백소휘는 천천히 설중연에게 다가가 포옹을 하였다.

아, 따뜻하고 포근한 이 온기. 이 순간이 영원히 정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소휘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 했으나.

‘······어?’

설중연의 뒤로 쫓아온 두 인영(人影)을 뒤늦게 발견하고야 말았다.

한쪽은 짧은 은색 머리칼을 동그랗게 땋아 올린 여우상의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다른 한쪽은, 남자였다.

남자.

그 존재가 천마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백소휘는 설중연의 품에서 물러나, 검을 뽑고야 말았다.

“······네놈은 누군데 감히 본교의 영역에 발을 들였느냐!”

그러자 남자는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한숨을 푹 내쉬며 뒤로 그저 물러설 뿐이었다. 오히려 백소휘의 냉대에 당황한 사람은 설중연이었다.

“진정하거라, 소휘야. 저 남자는, 내가 목숨바쳐 사랑하는 남자이니라. 믿어도 좋으니, 적대할 필요 없다.”

설중연은 백소휘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남자를 무서워하는 백소휘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라면 어느 정도 마음을 열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실수였다.

“······사랑하는, 남자라고···하셨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설중연은 뒤에서 듣고있을 테일러를 힐끗 쳐다본 뒤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 내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쳐 그를 사랑한다.”

백소휘가 입을 꾹 다물자, 설중연은 그녀를 조심스레 보듬어주었다.

“나도 너처럼, 한때 어떤 남자에 의해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매일매일이 지옥이었고,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지. 하지만, 극복할 수 있다. 너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난다면,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이를 만난다면 틀림없이 가슴 속에 응어리진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설중연은 다시 한번 천마교주를 안아주었고, 백소휘는 그녀의 따스한 품 속에서도 그것을 즐길 새도 없이 유서담을 노려보았다. 이미 그녀는 설중연의 말을 단 하나도 듣지 않고 있었다.

*

천마신교의 본토에 도착한 이후, 설중연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재건축된 천마각(天魔閣)도 그 어디도 아닌 ‘무덤’이었다. 본래 그녀가 하려고 했던, 신도들의 묘비를 세워주는 일은 백소휘가 도맡아서 미리 해두었다고 한다.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다다를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는 묘비를 보며 설중연은 얼굴에 암영을 드리웠다. 그러나, 애써 그 슬픔을 털어내었다. 이곳은 슬퍼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가슴에 품어두었던 그들의 넋을 떠나보내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내가 돌아왔는데, 너희들은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는구나.”

그리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설중연은 묘비를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안타깝게도, 시체를 회수할 당시 누가 누구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었던 백소휘는 그들의 묘비에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시체에 놓여있던 무구와 무복 등을 묘비 옆에 쌓아두었다고 부끄러운 듯이 말하자 설중연은 고생했다며 백소휘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괜찮다. 내가, 저 아이들을 모두 기억한다.”

그리 말하더니 자그마한 단검을 꺼내들어 바로 앞에있던 묘비에 다가갔다. 다 녹슬고 부러진 검자루 하나만이 간신히 놓여있을 뿐이지만, 설중연은 저것이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천천대제(天千大帝) 장서영.

순식간에 묘비에 이름이 새겨지자 뒤에서 지켜보던 장로들이 눈을 크게 떴다. 단순히 글자를 쓴 것처럼 보였지만, 그 단검술에는 현경의 경지에 도달한 검술의 묘리(妙理)가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설중연은 쉬지 않고 묘비에 이름을 새겨넣었다. 한 명, 한 명,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그곳에서는 행복하기를, 못난 교주를 만나 못다 누린 행복을 그곳에서라도 만끽하기를.

백소휘는 뒤에서 그런 설중연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천마신교를 사랑했기에, 도대체 얼마나 그들을 가슴 깊이 품고 있기에,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은, 과연 스승님처럼 위대한 교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회의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백소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보다 설중연의 모든 면이 더 완벽했기 때문이다.

설중연의 ‘작별 인사’는 장장 사흘이나 걸렸으며, 그 동안 그녀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장로와 백소휘 역시 마찬가지로 뒤에서 설중연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동이 터오르는 시간.

마지막 묘비에 인사를 건넨 뒤, 설중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눈은 피로해 보였으나, 가슴에 쌓여있던 무거운 짐을 모조리 내려놓은 듯 한결 밝아진 얼굴이었다.

“······스승님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래. 미처 못다한 작별 인사라도 건넬 수 있어서······ 그래서, 행복하구나.”

“그렇다면···.”

백소휘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 결연한 눈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천마신교주가 되어 저희들을 이끌어주십시오. 저희 천마신교에는, 스승님이 꼭 필요합니다.”

휘잉···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설중연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백소휘와 한동안 눈을 마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구나.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째서.

백소휘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천마신교의 모든 교인들을 하나하나 챙기며, 그렇게나 행복했던 설중연이 왜 천마신교를 거부한단 말인가. 다시 그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또다시 잘못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서?

“···아니. 아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란다.”

“그럼 대체······.”

왜, 라고 물으려던 그 순간. 백소휘는 퍼뜩 사흘 전에 마주하였던 어떤 사내를 떠올렸다. 별 볼 일 없는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던, 하찮기 그지없던 평범한 사내. 설중연은 그를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서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구인이다.

이곳에 온 목적이 모두 끝난다면 틀림없이 그는 지구로 돌아갈 터. 스승님은··· 그 남자와 결코 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으드득! 설중연에게 들리지 않도록, 백소휘는 이를 갈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실핏줄이 울긋불긋 돋았다.

‘감히, 스승님을 더럽힌 남자······.’

새하얀 도화지처럼, 그 누구도 밟지 않은 설산처럼 새하앴던 설중연을 물들여버린 남자. 그를 떠올리며, 백소휘는 눈동자에 분노와 증오, 그리고 절망이 모조리 담아내었다.

‘이미 먹물에 젖어버린 스승님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어······.’

그렇다면, 최소한 그녀가 더 이상 물들지 않도록.

그리고 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고서 다시 천마신교에 정착할 수 있도록.

‘······그 남자를 죽이는 수밖에.’

< 천마지존의 귀환(4)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