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지존의 귀환(3) >
그리하여, 일단 우리 일행은 북서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천마신교가 터를 잡은 ‘신강’까지의 거리는 넉넉잡아도 최소 몇 주는 걸릴 터였지만, 뛰어난 보법을 가진 누님과 발바닥에서 빛의 에너지를 폭발시켜 지상은 물론 공중에서도 자유롭게 기동하는 테일러 등 굉장히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의견에 따라, 우리는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누님과 테일러는 고맙게도 내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여 별다른 이유를 묻지 않고서도 따라주었다. 아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대한 ‘좋은 결말’로 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시간을 조금 투자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다.
“지구는 어떻게 됐으려나.”
“음···.”
오솔길을 걸으며, 나뭇잎 비스무리한 것을 어디에선가 구해와 입에 문 테일러가 물었다.
“글쎄. 아마 지구는 무림보다 감정을 끌어내기 쉬울 테니, 악마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힘을 얻겠지.”
하지만 제아무리 악마라도 제멋대로 설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쯤 예카테리나가 악마에게 빙의 된 빙의체, 즉 ‘숙주’를 찾아내고 있을 테니까.
“그 빙의체라는 놈인지 년인지 하는 자식을 찾기가 그렇게 쉬운 거냐?”
“가능할 거야.”
아마 나나 테일러가 직접 찾았다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70억 인구 중에서 누가 빙의체인지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하지만 다방면에 능통한 예카테리나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 꼬맹이를 많이 믿고있나 보네?”
“당연하지. 우리는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거든.”
내가 내뱉은 이 말이 영 불편했던 것인지 테일러와 설중연 누님은 헛기침으로 불편함을 표시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여자들과 같이 있으면 단어 선택 하나하나를 조심해야되는 느낌이다.
“근데, 넌 입에 풀떼기를 왜 물고있는 거냐?”
“엉? 무협 분위기 좀 내보려고.”
“···그건 일본 장르 아니야?”
“헉, 진짜? 몰랐는데.”
“사실 나도 몰라. 대만 장르일 수도 있어.”
“그건 진짜 아닌 거 같은데······?”
그 이후로도 우리는 잡담을 나누며 걸었다. 생각해보면, 최근 나는 그녀들과 함께 있을 때면 항상 ‘중요한 이야기’만을 나누었던 것 같다. 내 고민을 상담하며, 그녀들의 상담을 들어주면서.
그러나 이렇게 시답잖은 농담따먹기를 하며, 심지어 설중연 누님조차 가벼운 농담(대부분은 아저씨 개그였다)을 하니 어쩐지 이 여유로운 시간이 즐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사흘남짓을 이동했고, 천마신교가 위치한 신강 지역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신두봉이라는 어느 거대한 산맥의 드높은 봉우리에 발을 디딘 순간 사방에서 인기척이 우리를 에워쌌다.
나와 테일러가 누님을 쳐다보자, 고개를 저었다.
“천마신교의 기척은 아니구나.”
그들은 우리에게 적의를 보이지는 않겠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습을 보인 백인과 흑인, 황인이 다양하게 섞인 사내 다섯 명은 각각 다른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 외에도 사방에 오십 명 가까이의 인원이 몸을 숨기고 있었으나, 그들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무림맹입니까.”
내가 작게 말하자, 백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천마신교의 전 교주, 설중연이여. 본인은 곤륜진인(崑崙眞人) 알렉스 풍(Alex 風)이라고 하오.”
그 외에 다른 이들 역시 무당, 아미, 종남 등 각각 자기 소개를 했으나 그들의 이름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님은 무림맹이 처음 등장한 그때부터, 오로지 알렉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님이 침묵하고 있자, 내가 물었다.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천마지존이 진짜로 돌아왔는지, 확인해보기 위함이었소.”
“허.”
나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림맹이 우리를 찾아오리란 사실을 대충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곤륜파의 도사까지 끼어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장르가 흔들리고 있다 할지라도, 이곳은 무림의 세계. 강자존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는 이곳에서, 천마신교를 적대하는 곤륜파의 무인이 감히 지존에게 말을 건 대가는 아주 클 것이다.
“···확인? 확인이라.”
갑작스레, 설중연 누님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으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려보내자 무림인들이 긴장한 듯 표정을 굳혔다. 그것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살의’가 담긴 미소였기에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나조차도 놀라서 하마터면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기다리시오!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으윽?!”
쿠웅······!!
중력의 농도가, 갑작스레 짙어졌다. 공기의 흐름이 육중해졌으며, 구름이 흩어졌고, 흩날리는 나뭇잎이 모조리 가루가 되어 사라졌으며, 바닥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감히, 천마지존의 앞에서 건방지게 고개를 치켜든 것에 모자라, 본좌의 존재를 의심한다······. 네놈들이 정녕 죽고 싶은게로구나.”
“큭, 우욱!”
나무의 위나 흙무더기의 아래 등, 사방에 숨어있던 무림인들이 갑작스레 숨통을 부여잡고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다섯의 무인은 꽤 실력이 있는 듯, 면상을 시뻘겋게 물들이고서는 버텨내었다.
누님은 슬쩍 내게 무언가를 묻는 듯한 눈짓을 하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곤륜파는 필요가 없다.
무림맹은 아마도 천마지존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을 터. 그러나 곤륜파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방해를 위해 알렉스를 섞어서 보낸 것이다.
“기, 기다리시오······! 우리는, 당신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서 온 것 뿐이오!”
“내가, 벌레와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던가?”
누님이 검을 뽑아들자,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알렉스가 외쳤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천마지존과의 대화는 아무 소용 없다고 말하지 않았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소! 모두 협공해서 천마지존을 저지하는 수밖에!”
그러나.
나머지 네 명의 무인은 오히려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날 뿐, 무기를 뽑지 않았다. 그에 알렉스는 크게 당황하여 외쳤다.
“이, 이보게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저벅, 누님이 한 발자국씩 다가가기 시작하자 알렉스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익···! 알고 보니, 네놈들도 한패였구나···! 이렇게 낭패일 수가!”
결국 무림맹을 설득하길 포기한 알렉스 풍은 이를 악물고서 양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고오오오······!! 그의 몸에서 내공이 휘몰아친다. 누님의 내공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안에는 상당한 파괴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용심연권(龍伈抁拳)
얼티메이트 절기(Ultimate 絶技)
진심 펀치(嗔心 Punch)
그의 내공은, 아주 독특했다. 무공은 무공이되, 그 안에 ‘감정의 움직임’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분노를 끌어올려, 상대방을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힘. 색마 방호윈 이후로 처음 겪어보는, 악마의 사술이 섞인 그 진신절기(眞身絶技)가 알렉스 풍의 주먹에서 펼쳐졌다.
콰콰콰콰······!!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권풍(拳風)은 나무를 쓰러뜨리고, 바위를 박살내고, 땅을 헤집으며 천마지존에게 당도하였다. 직후, 감정의 동요가 시작될 터. 그 어떤 무림인도 막을 수 없는 그 순수한 감정의 움직임은 여태껏 알렉스 풍이 자신보다 더욱 강한 강자를 무리없이 상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하고, 심지어 무공에 더럽고 추잡한 ‘사술’이 섞여있구나.”
“······!”
누님이 느릿한 움직임으로 검을 휘두르자.
휙, 거칠게 패도하던 풍압이 그 가벼운 검에 베여 사라졌다.
“아···?”
삽시간에 고요가 내려앉자, 알렉스가 멍청한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푸욱! 설중연 누님이 알렉스에게 순식간에 접근하여 왼쪽 가슴에 검을 꽂은 것.
“······!”
알렉스는 두 눈을 부릅 뜨고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찔렸으나 고통도 없었으며 출혈도 전혀 없었다. 핏줄 사이를 정확히 파고든, 그야말로 신묘한 경지에 이른 검술.
그는 뒤늦게 깨달았을 것이다. 천마지존이 검으로 가슴을 찌른 게 아니라, 심장의 장태혈(將台穴)을 점혈(點穴)한 것이란 사실을.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정교한 찌르기였다.
“억···.”
이윽고,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왔는지 알렉스는 눈을 까뒤집고서 그대로 쓰러졌다. 검을 가볍게 뽑아낸 누님은 칼끝을 바라보았다. 피가 정말로 단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마치, 쓰레기의 피를 자신의 소중한 검에 묻히기 싫다는 듯한 그 모습에 모든 무림인이 전율하였다.
곤륜진인 알렉스는 무려 절기를 사용하였는데, 천마지존은 그저 가벼운 칼질로 그것을 베었으며 평범한 찌르기로 초절정에 오른 고수를 즉사시켰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강함이, 그리고 그녀가 천마지존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증명되었을 것이다.
검을 수납한 천마지존이 좌중을 둘러보자, 시선에 닿은 무림인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누님의 역할은 여기까지였으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자, 그럼 무림맹 여러분. 저희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였죠?”
누군가가 뻣뻣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 만족하고서 씨익 웃었다.
“사실 저희도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 나는 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곤륜파가 무공에 ‘사술’을 섞어쓴단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사술(邪術). 무협 장르에서 참으로 예민한 단어이며, 자고로 협객(俠客)이라면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기술이었다. 무협의 주인공이 사용하는 특이한 기술에 당한 무림인들이 뭐만 하면 ‘놈! 사술을 쓰다니!’라며 정신승리를 하는 장면 또한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술이, 단 하나의 ‘신물(神物)’에서부터 시초(始初)되었다는 사실 또한, 알고 계십니까?”
즉,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아주 은밀한, 그러나 무림맹 모두가 탐낼만한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
무림맹과의 대화가 끝난 뒤, 봉우리에서 빠져나오자 테일러가 물었다.
“야. 쟤들 만나려고 여태 일부러 천천히 가고 있던 거?”
“맞아.”
“굳이 왜?”
“무림맹이 우릴 왜 찾아왔겠어. 지금 곤륜파가 무림맹 내에서 너무 압도적인 권력을 쥐고있단 건 알지?”
“그치.”
“그리고 천마신교도 사실,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일 거고.”
“음···. 그렇지?”
“무림맹 최강의 문파 곤륜이나, 단일 최강의 세력 천마신교나. 무림맹에게는 골칫덩이였으니 그 두 세력을 어떻게든 이간질하여 서로의 세력을 깎아내리려고 한 거지.”
“···허, 참.”
무림맹은 애초에 하나처럼 보여도, 하나가 아니다. 언뜻 경찰 행세를 하는 듯 보여도, 결국 내부에서의 정쟁은 끊이질 않는다. 자신들의 서열을 높이기 위해, 조금 더 많은 입김을 불기 위해, 어깨를 조금 더 펴고 다니기 위해, 그들은 같은 무림맹 내의 세력을 얼마든지 깎아내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근데 그런 걸 그 친구들만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
나는 곤륜파가 분노와 공포를 동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시로 들어, 놈들이 사술을 사용한다는 증거를 대보였다. 아마 지금 당장은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미 ‘마정구’의 존재는 암영단이 알고 있을 정도로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터.
조만간 무림맹은 곤륜파에게 신물 마정구에 대해 추궁할 것이고, 곤륜이 답을 거절한다면 그건 결국 내 말을 긍정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렇다. 곤륜파를 제외한 무림맹이 어찌저찌 합심하여, 곤륜과 천마신교 둘 다 보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만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오히려 나는 무림맹에게서 곤륜파가 똑 떨어져 나온 것을 시작으로, 무림맹 내부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여태까지 곤륜파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단도 방법도 없었던 무림맹이었지만, 만약 신물과 사술과의 관계가 드러나게 되면 정치적으로 얼마든지 타격할 수 있을 터. 그들은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곤륜파를 긁을 것이고, 아마 ‘하루라도 빨리 사악한 술수를 사용하는 신물을 회수한다’라는 명분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마정구를 회수하기만 할까? 그럴 리가. 그것을 사용하면 무공이 강대해진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는데,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아마 대부분의 문파가 그것을 차지하여 몰래 사용할 속셈일 터. 곤륜파를 긁어내던 그들은, 마침내 서로를 갉아먹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어, 뭔가. 좋은 계획 같긴 한데······ 존나 나빴다 너.”
테일러의 극찬(?)에 나는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 천마지존의 귀환(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