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지존의 귀환(2) >
무림맹.
최고의 명문이라 불리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이 각자의 세력을 차출하여 만든 조직으로서 그들의 목적은 무림의 평화와 안녕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러한 목적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중원(中原) 도가무학(道家武學)의 시초(始初)라고도 할 수 있는 곤륜파(崑崙派)의 세력이 거대해지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무림맹 본부, 한조각(寒鳥閣).
무림맹주(武臨盟主)가 회의를 소집하자 장로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맹주 남궁민(南宮珉)은 침음을 흘리고서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같은 소식을 듣고서 찾아온 것인지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쓰는 게 훤하다. 아마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자신과 같다면 ‘희열’이 아닐까.
천천히 돌아보던 남궁민은 마지막으로, 가장 구석에 앉아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맹주는 남궁세가(南宮世家)가 맡고 있으나 사실상 이 자리에서 가장 권력이 강하다고도 할 수 있는 문파, 곤륜의 청설(淸說)이었다.
‘망할 곤륜의 가식적인 영감······.’
한때, 천마신교와 곤륜파의 세력이 비등하여 모두가 평화로웠던 시절이 있었다. 가히 최고의 문파라고 불리던 곤륜파의 위세가 현대에 이르러 서서히 잦아들고, ‘이계’에서 건너온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을 흡수하여 치고 올라오는 다른 문파들에게 밀린 탓이었다.
곤륜파는 전통(傳統)을 고수해야만 한다. 그러한 의지 하나로, 그들은 이계인들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덕분에 무림맹에서의 입지는 점점 더 줄어들었고, 당시에는 그것을 크게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 곤륜파의 도사들은 천마신교를 더욱 거세게 자극하였다.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곤륜파에서 지나치게 천마신교의 백성들의 ‘공포’를 자극했다는 점 외에는.
무림맹은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비무대회가 열렸을 때.
무림은 깨달았다.
‘곤륜파의 무공이 더욱 강성해졌다!’
어째서일까. 무공에 관해서는 타고난 무골과 재능을 타고난 지구 출신의 무림인들조차 곤륜파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곤륜파의 무공은 압도적인 속도로 발전하였다.
그 끝을 모르고 발전하던 곤륜파는 마침내 천마신교를 구석까지 몰아세우게 되었고, 무림맹의 모두가 좋지 않은 직감을 하던 와중.
설중연, 단 한 명의 여인이 등장함으로써 전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그녀는 가히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지존(至尊)이라 불릴만 했다.
연꽃을 닮은 천마지존의 검무를 목격한 이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감히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고서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천마지존은 자신의 백성을 건드린 자들에게 단 일말의 자비심조차 베풀지 않았다. 무림맹은 곤륜의 요청에 따라 다급히 세력을 파견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천마신교가 십만대산(十萬大山)을 넘어 무림에 넘어왔을 때, 세상 모두가 그녀의 발아래에 조아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던 순간.
달마지존이 나타났다.
‘······좋지 않은 과거가 떠올랐군.’
남궁민은 표정을 찌푸렸다. ‘정의’를 집행한답시고, 천마신교를 ‘악(惡)’으로 단정 지어 모조리 쓸어버렸던 사내. 과연 그가 뒷사정을 알기나 했을까. 천마신교라는 존재가, 무림을 독차지하려고 온갖 수작질을 부리던 곤륜파를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는 사실을.
천마지존은 천마신교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그 이후로는 다시 기세등등하여 무림맹을 자신들의 색으로 물들이려는 곤륜파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동등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무림맹의 무림인들은 곤륜의 도사들과 눈만 마주쳐도 알 수 없는 공포심에 몸이 사로잡혀 운신(運身)이 힘겨웠으며, 자꾸만 감정이 엇나가서 냉정하게 검을 겨룰 수 없었다. 그들의 무공에는 마치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신비로운 힘이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저항할 수 없는 그들의 힘에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 그나마 최근 천마신교가 누군가에 의해 부활하여, 곤륜에 맞서고 있는 덕분에 속도가 많이 늦춰지기는 했으나, 서서히, 서서히, 무림이 곤륜에게 물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곤륜파에 의해 무림맹이 잠식되어가는 와중, 들려오는 소식.
‘천마지존, 설중연이 재림하였다.’
그것은 썩, 무림맹원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소식이었다.
“······지금부터, 천마지존의 부활에 대한 진위 여부를 따져보겠소.”
군사가 운을 떼자,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잘 알고있다. 천마지존의 부활은 진실이다.
그리고, 무림맹은 천마지존의 행보를 막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천마지존이 실컷 날뛰다가 곤륜파와 함께 자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다.
*
“너무 위험했어요.”
나는 진심으로 걱정을 담아 설중연 누님에게 말했다. 무림의 모든 세력의 눈과 귀가 있는 장소에서, 스스로를 밝히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마교(魔敎) 출신이다. 현재는 세력도 거의 없는 마당에, 무림공적으로 찍히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러나 내 말에 누님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무림맹은 나를 막지 않을 것이다.”
“···이유가 있습니까?”
제아무리 누님이 현경의 고수라지만, 무림맹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는 족속들은 아니다.
“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겠느냐?”
“흐으으음.”
정치적이라. 그렇게 말하니 무협지의 클리셰가 떠올랐다.
무림맹. 정파의 구파일방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평화를 위한 경찰 조직 같은 곳이나······ 허구헌날 모여서 맨날 ‘요즘 젊은 것들은···쯧쯧.’하며 혀를 차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정치질에 협잡질에 말빨 좀 딸린다 싶으면 대뜸 대련신청을 하질 않나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긁히면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빽빽 질러대질 않나······.
하여튼 이게 내가 아는 무협지의 무림맹이었다.
게다가 사실 대부분의 무협지에서, 무림맹은 사실 별 볼 일 없는 집단이다. 저들끼리 허구헌날 지랄해도 결국 최강자 한 명에 의해 입 꾹 닫게 되는 그런 놈들.
“아마 놈들은 내가 곤륜파를 막아주길 바라고 있을게다.”
누님의 짧은 설명이 이어졌고,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마지존, 이거 생각보다 더한 놈이었네.’
아마 『아빠가 알고보니 달마지존』이라는 세계관에 ‘독자’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그들은 전혀 알 수도 없고 영원히 알지도 못했을 그런 뒷설정. 마교가 사실은 나쁜 놈들이 아니었다. 사실은 곤륜파가 먼저 시비 걸었는데 아무튼 마교라는 이유로 숙청당했다.
그런, 내용이었다.
“흐음······ 들으면 들을수록, 악마의 힘이 곤륜에 간섭하고 있는 게 확실하네요.”
“어휴. 무협지에 무슨 악마야? 퓨전 무협도 아니고, 그냥 짬뽕 무협이네.”
“네가 지금 처먹고 있는 스테이크도 무협지에서는 말이 안 되거든?”
테일러는 으쓱 어깨를 올리더니 포크로 스테이크 한 덩이를 통째로 찍어서 우물우물 뜯어먹었다. 기품이나 예절 따위,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땐 딱히 지킬 생각이 없는 듯싶다.
“지구나 무림에서의 정황상, 곤륜파에 숨어있는 악마는 인간의 ‘공포’나 ‘분노’ 등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 같네요. 곤륜파는 무공에 악마의 힘을 섞어서, 강력한 힘을 보유하게 된 것이고.”
아마 이번 악마가 가진 힘은 ‘스스로의 분노를 이끌어내어 힘을 증폭하며’ ‘상대방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힘을 약화시킨다’가 아닐까 싶다.
단순하지만, 감정에 지배받는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대응하기 어려운 능력이었다.
“어쨌든··· 아무리 누님이라도, 곤륜파를 저희 셋이서 상대할 수는 없어요.”
설중연 누님의 경지는 ‘현경’으로서, 무림 역사상 몇십 명 나오지도 않았다는 전무후무한 최고의 경지였다. 비록 달마지존 이동준이 무림 역사상 다시 없을 최초이자 최후의 경지 ‘신화경’을 달성하였으나······ 그건 그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일반적으로, 무림의 세계는 공기중의 ‘마나(에센스)’ 함유량이 극히 희박하다. 일반인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뼈를 깎는 수행을 하여, 1갑자의 내공을 체내에 쌓기 위해서는 장장 6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할 정도로. 예외격인 ‘지구 출신 무림인’을 제외하고서, 일반인이 절정 고수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의 2~30년 이상을 수련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단순 능력치가 A랭크 초능력자 수준에 불과할지라도, 결코 그 경험과 컨트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성장력은 굉장히 느릴지라도, 그들의 검술은 자신들보다 더 높은 에너지를 보유한 초능력자를 능히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구에서 첼레스테가 증명해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런 절정 고수가 곤륜파에는 수백명이 넘도록 있을 것이며, 초절정 고수 또한 백여 명은 넘을 터. 거기에 장문인이 화경의 고수인 데다가 무림에는 ‘진법(陳法)’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다수가 힘을 합쳤을 때 그 합격기로 인한 시너지가 몇 배는 더 뻥튀기된다.
즉,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의 승산은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누님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셋만 있는 게 아니잖느냐.”
누님은 그리 말하며 암영단에게서 받아온 봉투를 품에서 꺼냈다. 그곳에는 ‘천마신교’의 정보가 담겨있었다. 아무리 암영단이 정보의 거래를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해도 간혹 고객들이 원하는 정보를 비공개로 주고받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어떠한 정보를 거래했다는 사실만이 알려지고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한다.
천마신교와 관련된 정보 또한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누님은 천마신교에 대한 정보를 노골적으로 정파놈들에게 들려주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지구의 정파 무림인에게는 별 감정은 없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무림의 정파와는 상당히 껄끄러운 듯싶다.
“그들의 정보에 따르면, 역시나 나의 제자였던 그 아이가 천마신교를 재설립했더구나.”
제자였던 그 소녀의 이름은 ‘백소휘’. 누님과는 다르게 굉장히 거칠고 패도적인 검술을 사용하는 여인이었다. 검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 불과 20대의 나이에 불과한 지금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무림 전체를 놀라게 만들었으며, 현재는 신도들을 그러모아 지금은 이천 명 가까이나 되는 신도를 보유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천마신교의 모든 신도가 전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파 내에는 벌써 50명의 절정 고수와 10명의 초절정 고수가 있다고 하니, 그녀가 얼마나 빠르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천마신교의 세력을 구축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누님은 그저 ‘열심히 사는 구나.’라며 뿌듯해 했지만, 나는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아이 또한, 나를 반겨줄 것이다.”
“당연한 거 아녀? 무림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는 핏줄보다 더 진하다고!”
누님과 테일러는 죽이 잘 맞는지 맞장구를 치며 빠르게 떠날 채비를 하였다. 테일러는 미디어에서 그 유명하다는 천마신교를 처음 본다는 생각에, 누님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상당히 들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머리를 착 가라앉히고서, 누님과 마찬가지로 암영단에게서 받아온 ‘무림맹에 대하여’라는 서신을 만지작거렸다. 공개적인 정보 거래였으므로 예민하거나 민감한 사안은 전혀 없었고, 그저 무림맹이 어떤 꼴로 돌아가는지 간략하게 적혀있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세계의 세력과 이야기가 흘러가는 구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것은 얼마든지 내가 써먹을 수 있는 정보였으니까.
“음···. 누님.”
“말해보거라.”
“누님은 천마신교의 힘을 등에 업어서 곤륜파와 전쟁을 치르실 생각이시죠?”
“그렇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누님. 무림맹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속마음을 솔직히 내뱉었다.
“멍청한 늙은이들이지. 비급 하나, 금덩이 하나 손에 넣겠다고 온갖 더러운 짓을 마다하지 않는 것들이야.”
저 말 하나로 누님이 무림맹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 무림맹은 본디 구파일방이 모여서 만든 ‘연합’이었고, 겉으로는 무림의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실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더러운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족속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여, 어쩌면 누님과 테일러의 손에 굳이 피를 많이 묻히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쉽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건 평소처럼, 꽤 더럽고 치졸한 방법이었으나 꽤 손쉽고 높은 확률로 ‘마정구’를 손에 넣을 수도 있는 방법이었다.
“어서 가자꾸나. 그 아이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기대가 되는구나.”
그러나 누님의 그 즐거운 듯한 미소에, 결국 나는 입을 꾹 다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떠올린 계획은 오로지 우리 셋의 안전만이 보장되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누님을 위해서라도 당장은 천마신교의 현 교주 ‘백소휘’라는 여자를 만나보아야만 했다.
‘근데 왠지 모르게, 그 여자 만나면 등에 칼 꼽힐 거 같단 말이지···.’
별 근거는 없는 생각이었으나, 내 경험에서 나오는 ‘직감’이 나에게 그런 경고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직감은 나를 헬 게이트라는 지옥에서도 3년이나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준 아주 고마운 재능이었기에, 나는 그 생각을 섣불리 넘길 수 없었다.
< 천마지존의 귀환(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