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튼, 무협은 맞는 듯(3) >
그렇게 점소이의 강력 추천에 따라 스페셜(特別) 코스 요리(Course料理)를 석식(Dinner)으로 먹은 우리는 디저트(後食)와 값비싼 약주(Alcoholic drink)를 주문하였다.
······뭔가, 갈수록 굉장히 혼란스러워서 이 무협 세계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슬쩍 설중연 누님을 보니 역시나 적응하지 못한 듯 그 자그마한 분홍색 입술을 손가락으로 조물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테일러는 ‘신기한 세계네?’라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야야. 무협지 보면 객잔에서 귀중한 정보 새어 나오고 그러잖아. 여기도 그러겠지?”
“어. 그리고 네가 하는 말도 다 다른 놈들이 엿듣고 있으니까 조심히 말해.”
다른 말이 아니라 무협 세계관에는 엿듣기 전문가라고도 할 수 있는 거지들의 집단, 개방(丐幇)이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지들이 상당히 수상하다. 이거 웹소설 중독인가?
그리 말한 뒤 나는 잠시 정신을 집중하였다.
차원을 이동할 때마다 항상 쫓아오던 그녀, 아라셀리 라인칼의 기운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그녀와 나는 이제 서로 영혼에 표식을 해두었고, 어떤 차원에 있든 찾아올 수 있는 아라셀리에 비해 내 실력은 형편없지만 최소한 같은 차원에 있다면 그녀를 느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라셀리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협은 지구와 가장 가까운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차원 역시, 그녀가 찾아오기에는 너무나도 먼 차원입니다.>
‘그런가······.’
어쩐지 내가 차원이동을 했단 사실을 알면서도 쫓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아라셀리가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다음에 가면 진짜 잘 해줘야지······.
우리는 조용히 안줏거리에 술을 따라서 마셨다.
“아니 글쎄, 진짜라니까. 그놈이 자칭 은강불괴(銀剛不壞)라고 그랬다고!”
“미친 것아. 은강불괴가 이 세상에 어디 있어! 자네 속은 거야!”
“어허, 그런감? 모국어로 영어를 배워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가만히 집중하니, 뭔가 굉장히 혼란스럽다.
“내가 신묘한 보법(步法)을 섞어가며 레프트 더킹(Left ducking)으로 공격을 피한 뒤 펀치(Punch)를 갈기니, 한 방에 그놈들이 죄다 나가리됐다 이 말 아니여!”
“역시 큰형님! 대단하십니다! 이번에 그놈들 소탕한 기념으로, 한 잔 걸치시지요!”
“그래! 치얼스!”
“치얼스!”
당연하지만, 우리가 누구를 죽이려는 것도 아니고 찾으려는 것도 아닌데 객잔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 이곳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묘하게 중국어와 더불어 영어를 사용하는 비중이 높았는데, 그 비율이 거의 반반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글인 척 죄다 영어로 글을 늘어놓는 느낌으로.
“미국인이 무림맹주라도 했었나? 왜 그러지?”
내가 조용히 그런 의문을 내뱉자, 옆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누님이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건,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내가 영어를 줄곧 사용했다.”
“네? 아······.”
그러고 보니, 누님은 천마신교(天磨神敎)의 교주로서 한때 무림일통(武林一統)을 거의 이루었다고 했던가. 그 이름도 천하에 다시없을 극마(極魔)의 경지에 다다른 지존(至尊)이었으니 말이다. ···비록 달마지존에게 패한 뒤, 모든 것을 잃으셨지만.
“누님. 신교의 위치는 어디에 있죠?”
“여기에서는 북서 방향으로, 신강이다.”
명칭도 중국이랑 비슷한 듯싶다. 그러나 쓰이는 한자의 철자나 스펠링(?)이 미세하기 다른 모양.
“지도를 하나 구비 해야겠네요.”
“야 근데 우리 돈은 있냐?”
그런 게 있을 리가. 대금 지불은 대충 금덩어리로 할 생각이었다. 어느 세계에서든 금(金)이 화폐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설명하려고 입을 여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턱! 짚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덩치의 사내들이 슬금슬금 모여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흐흐, 이 친구야. 혼자 미인을 두 명이나 끼고 있으면 쓰나. 형님들한테 양보도 좀 하고 그래야지? 안 그래?”
“오.”
무협지에서 미인들과 함께 다니면 무협지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클리셰! 객잔의 양아치들.
슬쩍 테일러를 쳐다보니 굉장히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이었다. 평상시 같았다면 이런 취급받는 거 굉장히 싫어했을 텐데, 아무래도 무협지를 진짜로 좋아하는 듯 이런 전개 자체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즉,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이런 거다.
“여기 있네. 우리 지갑.”
*
객잔은 달리 말해서 호스텔(Hostel)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1인실은 당연하지만 없다. 그래서 2인실을 두 개 잡아서 여자 두 명을 방 하나에 집어넣고, 나 혼자 하나 쓰려고 했는데 둘이 극구 만류하여 하는 수 없이 4인실을 잡게 되었다. 3인실이 없다나 뭐라나.
그녀들이 샤워를 하러 간 사이 대형 침대에 몸을 걸친 나는 품에서 편지 몇 장을 꺼냈다. 무림에 간다고 했을 때, 암영미소가 전달해준 것으로 ‘암영단(暗影團)’과 접견할 수 있는 편지라고 했다.
개방과는 달리, 암살자 집단이었지만 그들 역시 정보에는 능통할 터. 한때 암영단의 수장이었던 그의 편지라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찌익! 편지를 찢자, 어두운 기운이 슬금슬금 새어나와 그림자로 이루어진 지도와 주소가 되었다. 그것을 머리에 새겨넣자 금세 소멸하고 만다. 이런 식으로 보안을 유지하는 건가. 무협도 여러모로 신기한 점이 많은 거 같다.
벌컥!
문이 열리며 홍조가 살짝 피어오른 누님과 테일러가 들어왔다. 헤어 드라이기같은 편안한 기술은 없기에 머리칼이 촉촉하게 젖어있다. 그러고 보니 물기에 젖은 여자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근거 없는 루머를 어디에선가 본거 같다. ···아니, 생각해보니 저 둘의 수준이면 기운을 끌어올려서 머리카락을 말릴 수 있는 거 아냐? 왜 안 말렸지?
그리 생각하며 그녀들을 쳐다보았지만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이상한 걸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말았다.
“야. 나 옷 좀 다시 정리해줘.”
테일러는 여전히 무복을 제대로 못 입는 듯 차림새가 삐뚤삐뚤하다. 하여 그녀에게 다가가 옷무새를 정리정돈해주고 있자니, 자꾸만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애써 신경 쓰지 않고서 무복을 다듬어준 뒤 테이블 앞에 앉아, 지도를 펼쳤다.
“일단 우리가 처음 발을 디딘 숲은 여기야.”
백산림(白山林). 서쪽 지방에 위치해있는 커다란 숲이었으며, 녹림(綠林)의 산채가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상세한 부분은 우리에게 별 쓸모가 없어서 넘어갔다.
“그리고, 여기에서 동쪽으로 700km정도를 가면······ ‘청해’가 나와. 곤륜파의 영역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지금도 그럴지는 모르지. 누님. 이곳의 곤륜파는 어떤 곳이죠?”
짧게 고민하던 누님은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를 증오하던 집단이었지.”
하긴, 그럴만 하다. 천마신교가 위치한 신강과 청해는 거의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니까. 제아무리 십만대산(十萬大山) 천산산맥(天山山脈)이 그들을 지켜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천마신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도(道)를 닦는 도사들이 많았으나, 도사라고 하기에는 불량배가 많았다. 가만히 있는 우리 식솔들에게 먼저 시비를 걸던 놈들이었지.”
“음.”
그건 좀 이상하긴 해도, 마교와 허구헌날 싸우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머릿속 곤륜파의 이미지는 예의범절 바른 귀족이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으나, 우리 마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곤륜에서 자꾸만 쳐들어와서, 전쟁을 시작한 거지.”
“······예?”
“처음에는 우리도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나는 전쟁이나 점령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곤륜파에서 무림연합을 득세하여 우리를 자꾸만 건들기 전까지는.”
생각해보니 그렇다. 왜 여태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누님의 성격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온화한 성품이었다. 저 가느다란 팔은 세계 최강의 검술을 휘두를 수 있음에도, 단 한 번도 먼저 누군가를 공격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설중연 누님의 꿈이 무림일통이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곤륜파는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우리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전대(前代) 교주 갈혁준께서도 신강에 자리를 잡은 뒤 움직인 적이 없으시고, 내가 알기로 지난 100년 간 천마신교는 단 한 차례도 중원무림을 타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무림에서 나의 백성과 식솔들을 건드리니······.”
그것을 막는 방법은 단 하나.
무림을 자신의 발 아래로 두는 것.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천하를 호령할 뻔했다는 말이 되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정리해보자면, 옛날부터 곤륜파는 자꾸만 천마신교를 치려고 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천마신교도 결국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삼아, 곤륜파는 무림맹의 지원을 받았다는 말이 되는데, 꼭 이걸 노린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행동거지가 불량배와 다름없는 곤륜파.
“···아주, 만약의 경우이긴 한데. 곤륜파에 악마가 숨어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에 테일러와 누님 모두 표정을 찡그렸다.
하필이면 곤륜파다. 마교와 하도 붙어먹어서 쌈박질도 잘하기고, 찾아가기도 더럽게 어렵고, 세력도 더럽게 큰 곳인데.
“사실, 여차하면 저희는 차원문을 닫고 튀면 되긴 해요.”
그리 말하며 나는 누님을 슬쩍 쳐다보았다. 내 입장에서야 모르는 세계니까 악마가 세계를 정복하든 짜장면을 끓여먹든 별 상관이 없었으나 누님의 입장에서는 이곳이 거의 고향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나 누님은 눈을 감은 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짧은 회의는 종료되었다.
*
다음날.
피곤한 눈을 부스스 뜨고서 일어났다. 성인 2명이 여유롭게 잘 수 있는 대형 침대가 무려 두 개나 있는데, 하나는 아예 쓰지도 않았다. 양옆을 보니 누님과 테일러가 내 양팔을 꽉 붙들고 있다.
“······망할. 어젯밤에 떼어낸 줄 알았는데.”
새벽 사이, 두 여인은 어린애도 아니고 유치하게도 침대를 가지고 싸웠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누님과 테일러를 옆쪽 대형 침대에 강제로 눕혀놓고, 나 혼자 침대 하나를 독차지했는데 그 새를 못참은 모양이다.
이윽고 누님과 테일러 역시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의 일은 기억도 안 나는지 둘 다 뻔뻔한 행색이었기에 나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아침이나 먹읍시다.”
1층으로 내려가자, 일찍부터 일어나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그중에서는 무사(武事)들도 몇몇 보였다.
‘나도 3급 무사는 따놓는 게 편하려나.’
아무래도 신분이 증명되어있으며 활동하기 좋을 테니까.
어제처럼 점소이를 불러 아침 특선 세트 메뉴···를 주문한 뒤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누님과 테일러는 온몸을 새하얀 로브같은 것으로 뒤집어 쓴 뒤, 심지어 얼굴도 검은색의 시스루 면사포로 반쯤 가리고 있었다. 영 불편한 얼굴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워낙 눈에 띄니까 말이다.
심지어 누님은 한때 천마신교의 교주였는데, 혹시라도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괜히 귀찮아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주변에서 소곤소곤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천마신교가 또 활동을 시작했다지?”
“그렇다니까. 전 교주가 실종되고, 천마신교가 아예 멸문당했는데 어떻게 활동하는지 원······.”
“사칭 아녀?”
“사칭이라기엔 현 교주라는 놈의 무공이 워낙에 막강하더라니까? 검 한 자루로 태산을 가른다는 소문이 있어!”
“에헤이. 그건 과장이지 이 친구야. 아직도 헛소문 믿고 다니나?”
천마신교.
그들이 부활했다.
하지만, 어떻게? 분명히 모두 죽었을 텐데.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와 테일러는 천천히 설중연 누님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평상시의 그 평온함을 완전히 잃은 채,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 아무튼, 무협은 맞는 듯(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