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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62화 (162/251)

< 아무튼, 무협은 맞는 듯(2) >

대전쟁 이후, 세계가 급격히 변화되고 초인들이 우수수 나타난 현대에서 ‘사막’이란 어쩌면 손쉽게 정복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공기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특이한 에너지가 발생하게 되면서,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오지는 이제 인간에게 더욱 가혹한 공간이 되었다.

지구의 각 사막에는 특징이 하나씩 생겨났고, 칼라하리 사막의 특징은 ‘초인조차 쪄죽이는 무더위’와 ‘발목을 옭아매는 모래’였다. 가장 끔찍하다고 알려진 두 개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셈.

물론, 그것도 SS랭크와 SSS랭크쯤 되면 별로 상관이 없는지 설중연 누님과 테일러 나인은 평이한 표정으로 잘만 앞서나갔다. 심지어 누님은 발이 모래에 빠지지도 않고, 표면만 살짝 훑으며 걷는 신묘한 보법을 선보였는데 저것만으로도 아마 체력을 엄청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새삼 둘 다 대단하네······.’

사막 한복판에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아하게 걷는 그녀들과는 달리, 나는 어기적어기적 발을 모래에 빠뜨리며 걸었다. 그나마 화분의 도움으로 더위는 거의 타지 않는다지만···.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손실이 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멍하니 사막을 헤쳐나가는 그때, 퍼석! 모래 아래에서 거대한 집게발이 튀어나왔다. B랭크의 괴수 ‘샌드 킹크랩’으로서, 모래 속에 숨어있다가 기습을 하는지라 상당히 골치가 아픈 놈이지만.

서걱!

설중연 누님의 손이 펄럭인다 싶더니, 집게발이 깔끔하게 동강이 나버렸다.

“와······.”

저 정도면 정말 예술의 수준이다. 경이로운 수준을 넘어서,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안 나왔다.

그 외에도 괴수가 나타나는 족족 테일러와 누님이 알아서 처리하였다. 레인 스캐빈져나 가시괴조 등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멀리서 귀찮게 뭔가를 발사하는 놈들은 테일러가 처리하였고 모래 지옥, 샌드 킹크랩 등 바닥에서 기습하는 놈들은 설중연 누님이 처리한다.

나는 뭘 했냐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걷기만 했다. 저 둘이서 알아서 다 해주는지라, 내가 진짜 뭐 할 게 없다.

······지금 나 보호받는 건가?

“야. 뭘 멍하니 있어? 다 오긴 한 거야?”

“응? 아, 잠깐만.”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의뢰인의 힘이 내게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근처에 ‘통로’가 있는 듯싶군요.>

‘그러게.’

차원의 뒤틀림이 나에게도 선명히 느껴진다. 이건 내가 차원이동을 반복한 탓인 걸까. 이제는 본능적으로,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저기. 슬슬 보인다.”

“어? 진짜? 어디?”

테일러가 주머니에서 썬글라스를 꺼내 쓴다. 그러면 더 잘 보이나······?

“보이는구나.”

반면에 누님은 얌전히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서 내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하였다. 그곳에는 검은색 비석 하나가 정말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도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가까이 접근해서 보니 더욱 이상했다.

“수상한데. 내 탐정으로서의 직감이 말하고 있어.”

“그러냐······.”

“이 안에 무림이 있느냐?”

“그건 아닐 거예요. 일단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우선···.”

추정상, 이 비석은 ‘기형던전’의 입구로서 ‘잠금 해제’ 종류의 간단한 마법만 익히고 있으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혹은 입구를 열 수 있는 도술이나, 잠금 해제와 관련된 초능력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가능했겠지.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이 비석의 기운을 느끼고 찾아오는 행위 자체였으니까. 나는 차원의 뒤틀림을 느끼고 찾아왔지만······ 이곳을 열고 들어간 누군가는 악마의 기운 그 자체를 느꼈을 것이다.

기기기기깅······!!

검은 비석이 열리자, 던전으로 통하는 공간이 일렁였다. 헌터짓을 하다 보면 일 년에도 수십 번씩 보는 광경이었지만, 기형던전만큼은 여전히 낯설었다.

내부의 상태는, 솔직히 말해서 평범 그 자체였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색의 공간. 인간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뾰족한 절벽과 산맥. 그러나, 그 어떤 생명체도 이 공간에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뭐······.”

아예 독안개로 가득한 던전이나, 심지어 던전 내부가 심해였던 적도 있는 나로서는 조금 식상할 정도였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원체 기형던전이 기본의 던전에서 통하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지만, 아예 괴수가 하나도 없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몬스터 ‘젠’ 현상도 없고, 던전 특유의 이상현상도 없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신전이 나타났다. 조금 커다랗다는 점 빼고는 아무런 특색도 개성도 없는, 정말 책에서 흔히 보던 그런 신전.

······그러다 문득, ‘책에서 흔히 보던’이라는 항목이 거슬렸다.

<어느 세계에서든, 악마는 결국 비슷한 형상을 하니까요.>

‘그런가.’

신전 내부로 들어서자, 차원의 뒤틀림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부에는 아주 커다란 공동이 있었고, 10층 높이의 제단이 눈에 띄었다.

“······지금부터 시작할 거야.”

제단에 올라선 뒤, 설중연 누님과 테일러는 보호복으로 환복했다. 검은색의 타이트한 슈트를 입고서 헬멧까지 쓴 그들은 썩 밤의 도로를 질주하는 폭주족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차원문은 반쯤 닫혀있는 상태다. 육체는 오갈 수 없고, 오로지 영혼만이 왕복할 수 있는 상태. 심지어 영혼조차 자유로이 왕래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말 그대로, 뒤틀려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걸 안정화 시키는 건 간단하다. 제단에 손을 얹고서, 내 수명을 일부 소모한다.

사아아······!!

이윽고 황금색 빛무리가 터져 나오더니, 제단 위에 물컹한 젤리같은 구체가 생겼다.

“이게··· 이계로 가는 문?”

던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테일러가 감탄했다. 나도 이런 건 처음 보지만 많이 봤던 척 어깨를 으쓱 올렸다.

“······후우.”

옆에서는 설중연 누님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나와 테일러보다, 가슴에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계실 테다. 그러나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건방지게 위로할 수는 없다.

“갑시다.”

나는 그녀들의 손을 한쪽씩 잡았다. 아무리 수명을 소모해서 형상화를 시켰다고는 해도, 따로따로 떨어지게 되면 위치와 시간대가 섞여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치지직, 치지지직-!!

이윽고, 차원문에 부딪치자 세상이 울렁이며 앞과 뒤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으며 위와 아래가 하나가 되었고 시간이 엇갈리더니, ···화아악!! 바람이 뺨을 스쳤다.

“허억!”

이런 낯선 형태로의 차원이동은 처음이었기에 나조차도 현기증에 몸이 떨려왔다.

‘테일러랑 누님은?’

걱정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황급히 앞을 쳐다보았다.

그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바뀐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에테르 슈트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반파(半破)되어 사실상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가······ 무림(武林)···.”

도착한 장소는 어느 울창한 산림(山林). 멍하니 나무를 향해 다가가려는 테일러를 잽싸게 제지하였다.

“야야, 몸 좀 가려.”

“응? 그러넹.”

그리 말하면서도 테일러는 몸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인벤토리에 보관해두었던 자신의 옷을 달라는 의미였다. 한숨을 내쉬며 무림에서 입기로 한 금색의 용이 똬리를 틀고있는 은색 무복을 건네준 뒤, 뒤를 돌아보자 누님 역시 부끄럽지도 않은지 멀거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좀, 가리세요··· 제발······.”

이 여자들은 왜 이렇게 무감(無感)한지 모르겠다. 정녕 부끄러운 건 내 몫이란 말인가.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누님이 원래 자주 입던 새하얀 바탕에 연분홍 자수(刺繡)가 새겨진 무복을 건네준 뒤 나 또한 환복을 하였다.

적당히 양복을 닮은 흑의(黑衣), 그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짙은 검정색의 도포(道袍)를 걸친다. 현실에서 입던 것과 크게 차이도 안 나는 이 단촐한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허리띠를 꽉 조여맨 뒤 테일러를 바라보니.

“···야. 이거 어케 입냐?”

“이 미친······.”

가만히 무복을 껴안고서 배시시 웃고있다.

“입혀줘.”

“후우···. 이번만이다. 외워둬.”

“좋아좋아.”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무복을 입혀준 뒤, 뒤늦게 누님이 떠올랐다. 이거 그냥 누님이 입혀줬으면 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에 누님을 쳐다보자, 어쩐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요?”

괜히 죄 지은 것 같아서 묻자 누님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제 슬슬 가자꾸나. 어서 마을을 보고 싶다.”

“넵······.”

그렇게, 우리의 무림초출(武林初出)이 시작되었다.

*

깊은 산중,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절벽과 세상이 무너져라 쏟아지는 폭포를 건너 하루이틀사흘나흘을 그렇게 달리자 간신히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야··· 진짜 중국이랑 문화는 비슷한데? 그짝에서 바락바락 우겨댄 것도 이해는 가.”

하지만 비슷하기만 할 뿐, 만약 중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지식이 해박(該博)한 사람이 보았다면 미세하게 다른 점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은발은 너무 눈에 띄지 않나?’

누님은 노을빛이 섞인 백금발, 테일러는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은발 머리칼을 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눈동자도 독특하다. 마법으로 미리 염색을 해둘 걸 그랬나. 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죄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의외로 검은 머리가 아닌 자들이 엄청 많았다.

갈색이나 금색의 머리칼은 물론 벽안이나 녹안의 눈동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피부색 또한 굉장히 다양하여 흑색과 황색의 피부를 가진 색목인(色目人) 무림인들이 객잔에서 술을 따르며 떠드는 모습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음···. 지금까지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단순히 외모가 너무 눈에 띄어서 그런 듯싶다. 나중에 얼굴을 가리라고 해야겠다. 나는 그럴 필요 없겠지. 평범하니까.

“누님. 원래 여기 무림은 다 이렇습니까?”

“지구인들이 무림에 도착한 뒤, 많은 것이 바뀌기는 했다. 나도 잘은 모른다만, 지구인들의 영향으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 것이겠지.”

“아······.”

하긴, 국적과 인종이 굉장히 다양한 지구인들이 무림에 대뜸 떨어져서 그 압도적인 성장력으로 무림을 집어삼켰다고 들었는데 이러한 문화도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봐야지. 악마의 본체가 있는 곳이라면 분명 특징이 있을 거야. 그에 대한 수소문도 해야 하고······.”

슬쩍 누님을 쳐다본다.

“중요한 일 하나를 더 해야되거든.”

“흐응···. 그럼 일단, 숙소부터 잡는 게 어때? 밥도 좀 먹고.”

“숙소?”

“왜, 거 있잖아. 무협지 보면 맨날 객잔(客棧)에서 정보 얻고, 그런 건 거의 클리셰 아냐?”

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 당장 잘 곳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녀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근처에 있는 객잔으로 이동하였다. 객잔은 대부분 숙식이 되는 여관의 형태를 하였고, 식사 또한 제공이 된다. 마침 출출했기에 1충의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테일러가 대뜸 손을 번쩍 들고서 외쳤다.

“점소이, 여기 메뉴판(Menu板) 하나만 가져와보게!”

그에 나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부끄러워서.

“이 미친년아, 여기에 메뉴판이 어디 있······.”

“Yes~ 금방 가요~!”

“······엉?”

그러자 영어로 대답이 돌아온다. 테일러 또한 장난으로 했던 것이기에,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점소이가 정말로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고, 우리는 반신반의하면서 그것을 확인하였다.

닭산적, 매운닭발, 돼지삼겹, 치즈완자꼬치, 은행꼬치, (스페셜!)아스파라거스삼겹말이, 볶음우동, HOT탕수육, 판타스틱삼겹말이······.

“자, 잠깐. 메뉴가 왜 이래. 점소이! 여기 오리구이나 소면, 죽엽청같은 건 없어?”

무릇 무협지의 객잔이라 함은, 소면과 죽엽청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니 애초에 그것들 이외의 메뉴는 사실상 전무(全無)하다고 봐야 옳단 말이다.

그러자 점소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늙은 아저씨를 보는 한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걸 팔아요? 트렌디(Trendy)하지 못하시네요.”

“······.”

“저희 가게는 많은 무림인들이 즐겨찾는 셀링 포인트(Selling point)를 콕콕 찝어서 요리를 개발했다구요! 제일 앞에, 펼쳐보실래요? 천상천하(天上天下) 셀프 컴플레이신스(Self-complacency)! 단 하나뿐인,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가슴을 가졌던 흑우(黑牛)의 갈비를 공수(空輸)해왔다! ‘자동성(紫洞城) 립 스테이크(Rib steak)’를 주문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그녀의 능수능란한 어휘 실력에 나를 포함하여 누님과 테일러 역시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여기는 우리가 알던 그 무협지(武俠誌)의 세계(世界)가 아니었다.

달리 말하자면, 이곳은 무협지(Chivalrous novel)의 세계(World)였다.

< 아무튼, 무협은 맞는 듯(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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