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61화 (161/251)

< 아무튼, 무협은 맞는 듯(1) >

신 무림맹, 기울어진 도깨비들의 도원.

항상 부서져 가는 햇살로 만들어진 주홍빛 노을로 가득한 이곳, 오로지 무림맹주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원(莊園)에서 설중연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극히 귀하다는 무림의 술, 청하주(淸夏酒)가 놓여있었다. 천마신교의 태상교주로서 군림하던 시절, 줄곧 마시던 술이다.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새로운 고수가 드디어 천마신교의 가족이 되어 함께하기로 했을 때, 충직한 부하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혹은 누군가의 생일이었을 때.

천마신교라는 아름다운 울타리 안에서, 모두가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항상 청하주가 함께했다.

그래서, 천마신교를 잃고 지구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청하주를 마시지 않았다. 이것을 입에 대면, 그때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떠오를까 봐. 자꾸만 그 시절이 생각나서 가슴이 무뎌질까 봐.

설중연은 새하얀 손을 뻗어, 청하주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투명하고 맑은 청하주가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를 비추었다.

지금은 연하게 녹아든 저 분홍색 눈동자는, 한때 그 무엇보다 붉게 물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붉은색의 눈동자는 천마(天魔)의 이름으로 천지를 개벽하였다.

천하를 천마신교(天磨神敎)의 이름 아래에 두었다.

바야흐로 마도천하의 시대.

그때의 그녀는 두려울 게 하나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든든했던, 그 무엇보다도 끈끈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했던 것들이 바로 품 안에 있었으니까.

아직도,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술잔에 그들의 미소가 언뜻, 비쳐 보이는 듯하다.

천천대제(天千大帝) 장서영.

흑선마(黑璇磨) 구윤악.

광혈마제(狂血磨帝) 한도운.

끊임없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나열되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단 한 명도 잊지 않았다.

어떻게 잊겠는가.

그들의 위에서 군림하던 주제에, 무덤 하나 제대로 만들어주지 못한 못난 군주거늘.

그래서 가슴에 품고 살았다. 유서담을 만나, 새로운 삶을 얻었음에도, 천마신교는 여전히 설중연의 심장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털어놓을 때가 되었구나.”

설중연은 청하주를 들어, 한 번에 목으로 넘겼다. 그 시원하면서도 씁쓰름한 맛은 기억 그대로였다.

탁! 술잔을 내려놓고서, 그녀는 분홍색의 눈동자를 빛냈다.

다시 한번 무림으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줄 것이다.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

*

우선, 무림으로 통하는 통로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건 생각보다 간단한 과정이었다.

“여기, 보세요.”

예카테리나가 모니터를 가리키자 나와 테일러, 하선영과 정령왕, 그리고 아닌 척 암영미소까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작은 모니터로는 도저히 모두 보여줄 수 없겠다 싶었는지 예카테리나가 웃음을 흘리며 창문을 툭툭 쳤다.

“오오!”

“헉!”

그러자, 창문이 순식간에 새카매지더니 바깥의 풍경이 완전히 가려졌다. 거기에 나타나는 커다란 모니터. 나는 슬쩍 암영미소를 쳐다보았다. 아닌 척하더니, 자기가 제일 놀란다.

“크흠.”

헛기침과 함께 사라지는 암영미소를 슬쩍 보고서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니, 영상이 재생되었다.

“···프리토리아에 악마가 나타났던 때네.”

“네. 방향을 보시면, 프리토리아의 정확히 서쪽에서 처음 악마가 등장했거든요. 그래서 요원 몇 명을 파견하여 흔적을 살펴보라고 지시했는데, 서쪽 방면으로 길에 악마의 마력이 감지되었어요.”

악마의 마력.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혼령술을 다루게 된 어나더 리그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특정 대상을 명확히 지정하는 수준까지도 못 되지만, 악마의 마력은 원체 거대하지 않던가?

“서쪽이라······.”

“여기서 중요한 건, 단 한 번도 방향을 틀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악마의 흔적은 오로지 직진만을 했어요. 도로나 지형지물을 모두 무시하고서.”

그렇게 직진에 직진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프리토리아를 만나 본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

그녀는 프리토리아에서부터 흔적을 죽, 길게 늘였다.

“러스텐버그(Rustenburg)를 지나쳐, 여기 보츠와나의 국경까지 이어져 있는데······ 이후로는 흔적이 완전히 끊겼어요. 아마도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악마의 힘이 활성화가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어요. 저희는 일단 보츠와나의 남쪽을 위주로 조사를 하고 있는데······.”

하지만 남아공의 서쪽으로 길게 이어졌으며, 보츠와나의 남쪽에서 ‘통로’가 생성될만한 장소라고 하면, 결국.

“···칼라하리 사막?”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미친. 추정되는 거리만 해도 거의 400마일이 넘어간다.

“프리토리아를 기준으로 정확히 서쪽, ···그러니까, 악마의 발원지를 기준으로 ‘동쪽’을 향해 단 한 번도 방향을 틀지 않고 700km를 걸었어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평범하게 생각하자면, 그냥 인간의 흔적이 가장 많은 대도시를 찾아가서 힘을 발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직선’으로 방향조차 꺾지 않고 이동했다는 점이 영 마음에 걸렸다. 혹시, 저 거리와 방향이 악마의 힘을 최초로 발현하기 위한 조건 같은 거라면?

“아무튼, 칼라하리 사막으로 가봐야겠어. 그동안 너는 혼령술을 최대한 연구하면서, 누가 악마의 빙의체인지 알아봐 줘.”

“네. 안 그래도 지금 전 세계 공항을 달달 볶으면서 칼라하리 사막으로 누가 출입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있어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칼라하리 사막은 여러 국가에 발을 걸치고 있어, 하루에도 수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입국을 했을 텐데 그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전부 조사한단 말인가?

당장의 힌트로는 ‘마녀’가 유력했으며, 또한 일반인은 던전은커녕 칼라하리 사막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할 테니 초인을 기준으로 조사를 한다면 분명 언젠가는 해답이 나올 것이다.

“그럼··· 서담님은 그, 던전, 그러니까, 무림으로 가시는 건가요?”

그에 하선영의 표정이 살짝이지만 굳었다.

무림회향회라는 단체가 생길 정도로, 무림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무림인들은 많다. 그래서 나는 무림회향회를 이 기회에 전부 무림으로 돌려놓을까 했지만······.

“아마도, 매개체가 없는 통로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SS랭크 이상의 능력치가 되어야만 해. 어지간한 무림인은 돌아갈 수도 없을 거야.”

심지어 SS랭크 이상의 수준이라고 해도, 그냥 통과했다가는 몸이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설중연 누님을 안전하게 데려가기 위해서는 보호복이 필요했다.

*

보호복이라고 해봐야, ‘공간 파장 방어 마법’이 강력하게 인챈트 된 과 에테르 코팅 슈트였다. 물론 공간 파장이라는, 현대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마법을 방어하기 위해 특수 보호복을 만드는 건 그야말로 금전 낭비라고밖엔 할 수 없겠으나 어나더 리그의 자본력은 이제 꽤 든든해진 상태이고, 여러 업체에서 제작 재료를 지원받았기 때문에 거의 공짜로 만드는 게 가능했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공간 계열 마법을 실험하기 위한 특수한 보호복을 만들겠다는데. 전 세계가 마법에 대해 무지한 지금은 이렇게 횡령도 할 수 있고 아주 좋다. 대한민국이 원래 횡령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나라니까.

어나더 리그, 실험실.

지하 7층에 위치한 거대한 공동에서 거의 제작이 완성된 검은색의 슈트 두 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다가와 깍듯하게 슈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방어력이 가장 중요한 만큼 섬세하게 신경을 쓰고있는 모양

“이 정도면 되겠는데.”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뒤쪽에서 자동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테일러 나인이었다.

“야, 나도 갈래.”

“어? 갑자기?”

그녀는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인상을 와락 구기고 있었다.

“거기 그 여자랑 둘이서 간다며?”

“어··· 일단은 그렇지.”

“그니까 나도 갈래. 나도 이계 구경해보고 싶어. 나도 SS랭크니까 갈 수 있는 거 아냐?”

그렇기는 하다.

“어, 그렇긴 한데···. 너도 가고 싶어? 무림인데?”

“뭐 어때? 나 무협지 졸라 좋아하는데?”

그러더니 씨익 웃으며 말한다.

“글고, 너랑 같이 가면 뭐든 재미있지 않겠냐?”

그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테일러는 극히 드물다는 원거리 계열의 클래스였고, 앞으로 어떠한 위협이 닥쳤을 때 나나 누님보다도 더 신속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다수를 조용히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빛을 다양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게 된 그녀의 유틸리티는 굉장히 쓸모가 많을 터.

살짝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누님이랑 테일러······ 사이가 좋았던가?’

둘이 만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거절을 할 이유 또한 없었다.

나는 이제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을 테니까.

“그래. 같이 가자.”

“좋아쓰. 언제 출발하는데?”

“바로는 못 가지. 네가 가는 거면, 보호복 더 만들어야 해.”

“왜? 넌 필요 없다면서. 여기 두 벌 있잖아.”

“한 사람당 두 벌이야. 한 번 차원문을 통과할 때마다, 아마 보호복이 완전히 박살 날거거든. 보호복이 없어지면 본인의 방어력만으로 버텨야 해. 그래서 SS랭크 이상의 초인만 가능하다고 한 거고.”

“흐응······?”

능력의 대부분이 공격에 치중되어있는 테일러였기에 내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

“바, 방어야 뭐···. 나도 이제 잘하거든?”

“그럼 다행이네.”

그녀는 보호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온통 검은색으로 되어있으며, 디자인도 뭣도 없는 완전한 민무늬의 타이트한 슈트. 금속 재질보다는 유동적인 활동이 가능한 특수 처리가 되어있는 슈트인지라, 순수한 방어력 자체만 보자면 굉장히 낮을 것이다.

오로지 공간이 찢어지는 것에 대처하기 위한 슈트였으니, 뭐.

“그럼, 아무튼······ 나도 가는 거다?”

그렇게 말하는 테일러 나인은 묘하게 기뻐 보였다.

*

사흘 뒤.

어나더 리그의 마스터, 유서담이 칼라하리 사막에 가기 위해 보츠와나를 경유한다는 소식이 전 세계 뉴스로 퍼져나갔다.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유일하게 악마를 상대하는 법을 알고있는 그가 악마가 처음 나타난 지역의 바로 근처로 테일러 나인이라는 거대 전력을 이끌고 파견을 나갔으니까.

아무 채널이나 틀어보면,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에 위치한 써 세리츠 카마 국제공항을 걷는 유서담과 테일러 나인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썬글라스까지 착용한 채로 당당히 걷는 그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가 수도 없이 울려댔으며, 심지어 보츠와나의 대통령까지 직접 찾아와 악수를 청할 정도였다.

예카테리나는 뉴스를 힐끗거리며 혼령술 연구서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영혼이라는 미지의 영역은 마법과 과학, 무공을 모두 섭렵한 어나더 리그에서조차 상당히 난해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었다. 애초에 영혼이라는 게 실존하는지조차 제대로 밝혀진 게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만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영혼은 형태가 없다. 생명의 본질, 즉 감정과 생각의 집합체라고 보는 게 옳다.’

‘육체가 없어도 영혼은 활동할 수 있다.’

‘영혼에 간섭하는 건, 물질계에 속해있는 생명체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단! 예외적으로 영혼을 다스리는 힘, 영력이 체내에 있다면 무관한 이야기다.’

즉, 여기서 아무리 연구를 지속해도 악마를 퇴치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이야기. 악마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의 혼란 정도는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해결은 유서담이 다 알아서 해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마도 자신은 모르는, 어딘가 다른 세계로 가서 악마의 본질을 파괴하고 돌아오겠지.

하지만 그 전에 지구에 남아서 악마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적어도, 최소한 의심가는 사람한테 의식을 걸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의 몸에는 반드시 단 하나의 영혼만이 존재한다. 여기서, 예카테리나가 행하려는 의식은 상대방에게 ‘몇 개의 영혼이 존재하는가’를 판별하는 아주 기초적인 의식으로서, 당연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1개의 영혼이 존재한다’라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만약 2개의 영혼이 존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악마의 빙의체라는 의미.

‘······그러기 위해서는, 이 의식을 전 세계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어.’

정보는 하나하나가 곧 금전으로 연결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길드 하나 잘 살아보겠다고 욕심을 부릴 성격이 안 되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이깟 지식 따위 얼마든지 떠벌리고 다닐 수 있다.

그리고 마침 어나더 리그에는 구독자 수가 벌써 수천만 명을 넘어, 억대를 바라보고 있는 와이튜브 채널이 있다.

‘최소한, 서담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범인을 색출해내고 말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TV로 시선을 돌리니, 어째서인지 소음이 잦아들어 있었다. 이내 예카테리나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또각, 또각. 구두굽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찬란한 백금발을 휘날리며, 새하얀 무복을 입은 여인이 국제공항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조차 까먹었는지 빛이 잦아들었고, 아나운서조차 말을 잃고서 어버버거린다.

대형 방송사고나 다름 없었지만······ 아마 아무도 그를 질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을 시청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같은 여자가 보아도 영혼을 쏙 빼앗길 것만 같은 그 매혹적인 외모에 예카테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중연은 도도하지만 우아하게, 천천히 걸어서 가만히 서있는 유서담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테일러 나인과 눈싸움을 한다.

“······.”

순간 어이가 없어진 예카테리나는 할말을 잃고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저분들······.’

남들이 보기엔 아름다운 두 여인이 그저 두 눈을 맞추고 있는 장면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예카테리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저기까지 가서, 기싸움 하는 거야?’

믿을 수 없었으나, 사실이었다.

< 아무튼, 무협은 맞는 듯(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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