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쓰레기다(5) >
드물게도, 설중연의 표정에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미안함’이었다. 죄를 지은 표정으로 그녀는 내게 말했다.
“정말 미안하구나. 너에게 큰 폐를 끼친 것 같아서······.”
지금도 쉴새 없이 스마트폰이 울려댄다. 설중연 누님의 팬층은 이미 두터워서, 나를 욕하는 사람도 상당했다. 하지만 그런 건 사실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기자들의 연락도 무시하면 그만이고. 다만, 나는 오히려 누님이 더욱 걱정되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누님이야말로 괜찮은 겁니까?”
사실, 이번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신혜지였으므로 그녀가 막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신혜지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러나, 누님은 신혜지를 저지하지 않았다. 즉 공식 입장을 세상에 공표하는 것을 은연중에 허락했다는 의미.
“남자야 뭐, 이런 거 한두 번 터져도 금방 잊히는데 여자 유명인들은······ 족쇄처럼 계속 따라다니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가 어떻다는 말이더냐.”
“음··· 혹시나 나중에 다른 남자를 만나고자 할때 불편하지 않을까-”
말을 하던 도중의 나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누님의 표정이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갔다. 더 이상 미안한 감정은 없었다. 그건······ 아주 조용하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나중에, ‘헬 게이트’로 진입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저라도 그곳에서 살아나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도 몰라요.”
그것이, 내가 누님이나 테일러와의 관계를 더욱 진전시키지 않는 이유였다. 한때 나는 시한부 인생이었고, 미래는커녕 당장 내일의 해를 바라면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힘을 얻었고, 강해질 방법을 얻었다. 이 능력이 있다면, 이 능력으로 헬 게이트의 비밀을 파헤칠 수만 있다면.
“굳이··· 그곳으로 향해야만 하는가?”
“네. 제 부모님과 같은 여자가 거기에 갇혀있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친부모님은 얼굴도 모른다. 나를 키워주신 보육원의 양부모님은 내가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의 너무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내가 꼭 유년 시절을 부모 없이 보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레이나 주. 그녀는 나와 동갑내기의 소녀였으면서, 내 부모 역할을 해주었던 위대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어른스러웠고, 듬직했으며,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사망률이 90%에 육박한다는 소년 헌터로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도, 레이나 주 덕분이라고 봐야만 했다. 소년 헌터들이 죽는 대부분의 이유는 괴수와의 사투 이전에, 정신력의 고갈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레이나 주는 그런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어주었다.
참으로 특이한 여자였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운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치 세상을 읽는 듯한 신비로운 눈빛으로 레이나 주는 나를 이끌며 말하곤 했다.
‘괜찮아요. 아직 젊잖아요. 오늘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를 버텼다.
오늘 죽지 않음에 감사했다.
어느덧 내일의 해를 바라게 되었다.
살아있음에, 행복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녀를 잃었을 때.
나는 한 번, 삶을 포기하려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살아있던 이유는, 테일러 나인 덕분이었다. 그녀는 내 뺨을 때리며 울었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테일러의 표정이 생생히 그려진다. 제발 너만큼은 살라며 주저앉아서 펑펑 눈물을 흘리던 테일러 나인은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해 보였다.
그래서,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레이나 주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만날 방법을 찾았습니다. 저는 포기할 수 없어요. 이건, 제 인생을 나락에서 건져 올려준 레이나 주에 대한 예의입니다.”
“······.”
누님이 나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만약, 정말로 만약··· 네가 죽는다면.”
“······.”
“네가 네 부모를 따라가려고 했던 것처럼, 나 또한 너를 따라갈지도 모른다.”
“그건-”
“그러니까.”
그녀는 살짝 가라앉은 분홍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또렷하고 선명하여, 감히 그 시선을 받는 것조차 내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죽는다는 말을, 그리 쉽게 하지 말거라. 이미 네 인생은 너만의 것이 아니니까.”
그러더니 누님은 조용히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하겠습니다.”
“다행이구나.”
누님은 진심으로 안도한 듯한 목소리로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표정을 내보일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
오늘 무림맹으로 찾아온 이유는, 사실 무림맹주가 어나더 리그의 길드 마스터와의 열애설에 대해 긍정한 것 때문은 아니었다.
“저한테 주실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누님은 그리 답하고서도 뚱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뻘쭘해진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옆에서 신혜지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설마 준다고 하신 게 인생을 전부 주겠다는······.”
“너는 조용히 있거라.”
“넵.”
신혜지를 입다물게 만든 누님은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일전에, 거대균열에서 무림회향회와 적대를 하지 않았더냐.”
“그렇죠.”
“그때 무림회향회를 배신하고 우리를 도와주었던 이가 있었다.”
“······그랬습니까?”
그러고 보면, 무림회향회에서 난데없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모든 헌터와 무림맹의 적대를 한꺼번에 받기는 했다. 그때는 단순히 멍청이들이 급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싸움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누군가가 의도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영미소’라는 이름의 사내다. 다섯 명의 수하를 이끄는 ‘암영단’의 수장이지. 초절정의 고수이고, 은신술의 달인이다.”
“네.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너에게 주고 싶다는 게, 바로 그 암영단이다.”
“예?”
“네가 없는 동안 내가 긴히 지켜보았다. 유능한 자들이다. 어둠 속으로 파고드는 능력은 네 눈과 귀가 되어줄 것이고, 네가 원하는 이를 호위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표정을 찡그렸다. 색마 방호윈에게 공격받았던 그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찔했으니까.
“나는, 그놈들을 믿을 수가 없구나.”
그렇다. 무림회향회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믿을 수가 없다. 만약 내가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겠다’라는 말로 현혹하지 않았더라면 무림맹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며, 어쩌면 누님 또한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 또한 무림회향회에 속해있던 놈들을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고 결정하도록 하죠.”
나는 내게 쓸모있는 말이 굴러 들어온다는데, 사적인 감정을 이유로 걷어차는 성격은 아니었다.
*
누님을 따라서 도깨비들의 도원을 걸었다.
여전히 분홍색 꽃잎과 주황색 하늘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이곳은 평생 노을이 질 테니, 해가 쨍쨍하게 뜨는 건 바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 점은 생명력이 돌기 시작하면서 공중정원과는 달리 먹구름도 끼고, 비도 내린다는 점. 계절의 변화는 이곳을 더욱 생기있게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험하고 깊은 산중으로 경공을 하여 들어선 뒤로도 세 시간은 족히 달려야만 간신히 ‘지하옥’이라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무림인들의 내공을 속박하고 가두는 공간.
최첨단 철통보안 시큐리티로 빈틈없이 24시간 감시를 하고 있으며, 특별한 ‘진법’을 설치해두어 내부에서 빠져나가려고 시도할 경우 영원한 미로에 갇히거나 공격을 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거기에 무림인들이 번갈아가며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데다가, 애초에 이곳에서 빠져나간다 한들 현실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니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감옥이라고 하였다.
지하옥의 지하 20층에 도달하자, 무림회향회에 소속되어있던 무림인들이 감옥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파직, 파지직! 마법과 도술로 이루어진 파장이 그들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서담!”
“유서담이 왔다!”
“우릴 내보내줘!”
“약속대로, 우리를 무림으로 돌려보내달란 말이다!”
사방에서 손이 뻗어나온다. 무림인 간수들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의 팔을 베어냈지만, 피를 흘리면서도 그들은 무림을 외쳐댔다.
그토록 무림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화를 내지도, 답을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들을 속였다.
매번 주인공들을 죽여왔던 것처럼, 그들이 악당이었든 선인이었든 무림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을 내 이득을 위해 이용하였다. 비록 무림회향회가 내 입장에서는 악이라고 할 수 있을지라도, 결국 그들의 꿈을 이용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벌써 세 달째 감옥에서 기다리고 있다!”
“약속을 이행하라!”
“약속을!”
“유서담!”
온통 미친놈들이 가득한 감옥이었다. 이런 곳에 있다가는, 정말로 정신병에 걸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미친놈들이 가득한 지하감옥의 가장 끝에,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암영단. 총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아주 작은 초정예 엘리트 조직.
그들은 머리를 땅에 박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옥의 앞에 도달한 나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
그러자 암영단은 말없이 내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하였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현명한 판단력이 내게는 없다. 하지만 아마 누님에게는 뭔가가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굳이 묻지 않았다. 내가 내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다른 사람의 판단력에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았으니까.
“너희들이 내 밑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한 것을 들었다.”
“예. 유서담 군사. 할 수만 있다면, 이 쓸모없는 심장을 당신만을 위해 사용하고 싶습니다.”
암영단은 전원 남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죄다 흑발에 흑색 눈동자였으나, 인종은 다양했다. 흑인 둘에 백인 하나, 황인종 셋. 암영미소는 백인으로서 서양 남성이었다.
“내가 무엇을 믿고 너희를 받아들이지?”
“당신에게는 다른 이의 내공을 강제하는 특별한 비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신혜지를 바라보았다. 설중연 또한 불편한 눈동자였다. 정작 신혜지 본인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싶지만.
신혜지. 그녀는 내게 말했다. 혹시나 자신이 양아버지처럼 엇나가게 될 수도 있으므로, 자신의 목숨을 강제해달라고. 아주 만약에라도, 일그러진 정의감에 물들어 살생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을 끊어달라고.
그때, 나는 그리하겠노라 말했다.
그러나 사실 나한테 그런 대단한 비술이나 마법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시의 나는 화분의 도움 없이는 간단한 물덩어리 하나도 간신히 만드는 수준의 초보 마법사였으며 심지어 도술은 아예 공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신혜지는 자신의 목이 언제든 내 명령에 따라 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있다. 설중연 또한, 그 사실을 믿는다. 암영단 또한······. 믿는다.
왜냐하면, 내가 여태 보여주었던 것들이 너무나도 크고 거대했으니까. 사실 나라는 놈은 까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저희에게도······ 그것을 걸어주십시오. 일평생 당신만을 위해 충성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
갑자기 저들이 왜 내 밑으로 들어오려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된 비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혜지야. 문 열어줘.”
“네.”
신혜지가 감옥의 문을 열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부로 들어섰다. 어차피 내공이 속박되어있어, 내게 해를 가할 수도 없다. 인벤토리에서 빛을 잃은 샛별을 뽑아, 그들에게 겨누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 내공을 흘려보낼거다.”
그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 내밀어.”
암영단 전원이 팔을 내밀자, 나는 힘껏 그들의 손등을 검으로 찔렀다. 신경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그리고 과한 출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
그저 내공을 흘려 보내는 ‘연출’을 하였다. 이것은 아라셀리에게서 배운 기술이었으나······. 정작 상대방의 심장이나 단전에 내공을 쌓을 수는 없었다. 단순히 흘려보내고, 흘려나갈 뿐이다.
하지만 그 행위만으로도 충분했다.
허공에서 신비로운 검을 뽑아들고, 마법이라는 이계의 기술을 사용하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분명히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여섯 명의 암영단 전원의 손등을 찌른 뒤, 인벤토리에서 단검 여섯 개를 꺼내어 그들에게 던지며 말했다.
“너희들의 몸에 폭탄을 설치했다. 앞으로 3분 뒤, 심장을 박살내겠지.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너희는 즉사할 거다.”
“······!”
“잠깐, 서담···!”
뒤에서 누님마저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으나, 신혜지가 저지하였다.
“하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 있다. 서로 죽여라. 살아남은 세 명은 내게 충성을 바쳤다는 증거. 동료를 죽인 자는, 받아주겠다.”
“무슨······!”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찾아왔는데···!”
“차라리 심장에 속박을 걸어달란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감옥 밖으로 나와, 문을 닫은 채였다.
“목숨에 제약을 걸고서 받는 충성은 진심어린 충성이 아니지.”
“우린, 서로를 배신할 수 없······.”
“왜. 한 번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할 게 있을까?”
“······!!”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마 그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애초에 유서담이라는 작자는 자신들을 믿을 생각이 없었구나. 애초에, 이럴 생각으로 찾아왔던 것이로구나.
암영미소는 흑요석을 닮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새하얀 이가 빠드득, 갈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애써 그 분노를 참아내었다.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이대로 죽겠습니다. 방호윈을 배신했으나, 동료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그러한 말에, 나는 말없이 암영미소의 뒤편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그러자 암영미소 또한 뒤를 돌아보았다가, 이를 꽉 깨물었다.
암영단. 자신을 믿고 따르던 다섯 명의 사내들이 이미 각자 하나씩 단검을 쥐고서 서로에게 겨누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대로 주, 죽을 수는 없다고!”
“젠장. 애초에 무림이고 뭐고, 왜 이딴 꼴을 당해야 되는 건데!”
“내공에 제약 좀 걸리더라도 유서담 밑에 들어가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암영단 전원이 단검을 들고서 자세를 취하자 암영미소가 다급히 그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만, 그만둬라!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기로 하지 않았더냐!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없다!”
“싸울 필요가 없다고! 지랄하지마! 내가 진심으로 너같은 놈한테 충성하는 줄 알았어? 그래, 그때 길거리에서 뒹굴던 나를 거두어주고 암영단으로 키워준 건 고마워. 하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지! 비키지 않으면 찌르겠다!”
“초절정 고수? 내공도 못쓰는 네놈이 지금의 우리와 다를 게 뭐지!”
“아니지, 차라리 네가 먼저 죽어라!”
극한의 상황에 몰린 인간은 극단적으로 변한다.
나는 17년 동안 헌터짓을 하면서 그러한 인간 군상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물론, 언제나 이렇지는 않았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 동료를 위해 희생하려는 자, 그도 아니면 모든 공적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리에 있는 전원을 죽이려는 자.
암영단은, 후자에 가까웠다.
“죽어!”
푸욱! 황인 암영단이 찔러넣은 단검이 암영미소의 오른팔뚝에 박혔다. 푹, 푸욱! 허벅지, 등, 어깨를 찔리면서도 암영미소는 반격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단검을 들지도 않았다.
상처입은 표정이었다. 단검에 찔려서? 아니다. 그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얼굴이다.
“너희들, 그럼 평소에도······.”
“그래 이 새끼야! 그냥 얌전히 지낼 것이지! 색마를 암살하겠답시고 그놈 밑으로 기어들어간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어!”
나는 쓰레기다.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렇게 하였다.
아마, 마찰이 없었더라면 이들은 평생 서로를 속이고 또 속이면서 겉으로는 가깝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한 번 배신을 했던 경력이 있고, 누님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던 무림회향회에 소속되어있던 놈들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내게 충성할 자를 원했다.
“그만···.”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단검이 번쩍인다. 핏방울이 튀었다. 단 한 사람의 피였다. 암영미소. 그가 모든 단검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만두라고···.”
이를 악물고서, 급소를 피해낸 암영미소가 왼손으로 흑인 암영단의 멱살을 잡아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퉁!! 흑인 암영단의 그 거대한 몸집이 날아가 백인 암영단과 부딪히며, 그대로 벽으로 고꾸라졌다. 내공을 전혀 사용할 수 없다고는 믿을 수 없는 괴력! 암영미소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암영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내공이 부족한 탓에, 단 한 방으로 기절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내공이라는 제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암영단은 다섯으로도 암영미소 한 명을 이길 수 없었다. 벽에 처박히고, 고꾸라지고, 넘어지면서까지, 암영미소는 암영단 전원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 누구도 죽지 않았고, 기절하지 않았다.
“15초 남았다.”
“······!”
내 말이 떨어지자, 암영단 전원이 욕설을 내뱉으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 암영미소를 노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다른 동료라도 죽이려는 것이다.
“나는, 난 살아야···!”
뻐억!
다른 이에게 단검을 찌르려던 암영단의 머리가 크게 돌아갔다. 동료를 향해 단검을 휘두르던 이의 팔목이 부러졌으며, 발목뼈가 꺾여버렸고, 허벅지를 타격당해 쓰러졌다.
끝까지, 암영미소가 방해를 하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암영단은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도 원망스러운 눈으로 암영미소를 쳐다보았다.
“암영미소, 이 개새끼야!”
“뒈질 거라면 너 혼자 뒈지라고!”
“살 사람은 살아야할 것 아니냐!”
그러자, 암영미소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동료를 배신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러면서 바닥에 쓰러져 있으나, 단 한 명도 죽지 않은 암영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봐라. 우리는 아무도 죽지 않았어. 결국 누구도 배신을 하지 않은 거야.”
그 말을 끝마친 뒤, 그는 웃었다. 암영단의 눈에는 그것이 썩 광인의 미소로 보였는지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내게는 신념을 지켜낸 자의 미소처럼만 보였다.
“3분 끝났다.”
내가 통보하자, 암영단과 암영미소는 죽음을 직감한 듯 눈을 질끈 감았고.
나는 영화 속에서, 소설 속에서 흔히 쓰이던 뻔하디 뻔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폭탄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
암영단 전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나는 암영미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합격이다. 너는 이제부터 내게 충성을 맹세할 것인지, 아니면 너를 배신한 동료들과 남을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내 밑으로 들어올 때, 네 동료를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다. 네가 원하는대로 선택할 수 있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너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 거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암영단 전원이 암영미소에게 무릎을 꿇었다.
“자, 잠깐. 단장님. 이게 다, 그게···.”
“저희도, 사, 살고 싶어서···!”
“제발···. 우, 우리도 데려가줘. 부탁이야.”
이 지하감옥에서 썩고 싶은 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명성을 아는 자들이라면 내 밑에서 일하는 게 무림인으로서 명예롭고 행복한 일이란 것을 잘 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신성력 변환]으로 암영미소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애초부터, 아무도 죽지 않도록 신성력을 준비해두고는 있었으나 설마 암영미소가 죄다 공격을 받아버릴 줄은 몰랐다.
그는 내 신성력을 받으면서, 지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나를 향한 표정이 아니었다.
“······우리, 암영단은 한때 무림맹에게 충성을 맹세했었다. 무림에 있던 시절의 일이었지.”
암영미소가 말을 시작하자 암영단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나는 말했다. 설령 목에 칼을 들이밀더라도 결코 모시는 자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고.”
여태 암영단은 그것을 썩 잘 지켜왔었다. 그건 그들의 충성심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여태 단 한 번도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암영미소는 깨달았다.
극한의 상황에서, 동료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부로 암영단은 해제한다.”
그러고서 암영미소는 홀로 내게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당신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는 오늘 모든 것을 잃었고, 내 신뢰를 얻었다.
< 나는 쓰레기다(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