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45화 (145/251)

< 나는 쓰레기다(4) [설중연 삽화] >

첼레스테와의 대련이 끝난 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유서담은 길드 아지트를 빠져나왔다. 그의 평상복이라고 해봐야 흑색 슬랙스에 베이지색 부츠, 거기에 흰색 와이셔츠가 전부였다. 회사에서 입는 옷과 별다를 것도 없었다.

그러나 테일러 나인의 평상복은 다르다. 그녀는 잡지를 챙겨보며 다양한 패션을 연구하는가 하면, 아주 가끔 스스로가 모델이 되어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간혹 [테일러 나인 공항 패션···]하고 인터넷 뉴스에 뜨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유서담의 옷을 보자마자 테일러 나인의 표정이 와락 썩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구려.”

“뭐가.”

“옷이 구리다고. 너는 염병할 나랑 데이트하러 가는데도 그딴 옷 처입을래?”

그녀 역시도 오늘은 제대로 차려입은 편은 아니었다. 너무 힘을 빡 줘서 입고 나오면, 뭔가······ 혼자 신경쓰는 것 같다는 이유에서 3시간 동안 고민한 결과 평범하게 청색 핫팬츠에 청자켓으로 결정한 것.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 옷이 뭐 어때서 나름 신경쓴건데······.”

“너는 진짜···. 어디 갈지는 정했어?”

“영화본다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그럼 밥?”

“그 다음.”

“던전?”

“미쳤냐?”

“아니 왜. 네가 좋아하는 곳이잖아. ···그럼 총기 박람회?”

“돌았냐고.”

“그, 그럼 사격장······.”

“너 이 새끼 진짜 죽여버릴거야.”

유서담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테일러는 입을 다물었다. 퍼뜩, 좋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차라리, 옷이나 사러가자. 누님이 사줄게.”

*

어나더 리그는 회사가 아닌, 길드다. 길드는 회사처럼 정해진 시간에 근무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퇴근 시간 또한 정해져있지 않아서, 유서담이 퇴근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사실 지금 당장 던전으로 기어가도 이상할 것도 없는 시간. 유서담과 테일러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것도 사람이 굉장히 많은 백화점.

“너 명품 백화점만 가는 줄 알았더니?”

“내 옷 살땐 그렇지. 5달러짜리 티셔츠랑 5만달러짜리 티셔츠도 구분 못하는 새끼한테 좋은 걸 사주겠냐?”

그러면서 테일러가 골라주고 있는 옷의 가격표는 대부분이 5천달러 이상하는 것들로, 그냥 가볍게 사주기에는 너무 비싼 것들이었다. 정말 입과 행동이 따로노는 여자였다.

“이건 어때?”

“미친년아 내가 꽃무늬 티셔츠를 왜 입어···?”

“요즘 이런 게 패션이야 인마.”

“진짜로?”

“내가 이런 걸로 구라치겠냐? 티 한장에 얼만 줄은 알아?”

워낙 진지하게 말해서 거짓말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테일러는 유서담의 몸에 옷을 대보거나 입혀보는 등 그와 함께 다니며 옷을 쇼핑하였는데, 오늘따라 그 모습이 퍽 다정하였다. 아니, 예뻐보였다고 해야할까. 유서담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사실 거기에는 테일러의 표정이 한몫했다.

평소 인상을 항상 와락 구기고 다니던 테일러는 오늘따라 조금 온화하고 화사한 미소를 지었고 덕분에 굉장히 행복해 보였으며 동시에 예뻐 보였는데, 그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에 굉장한 역할을 했다.

“저 사람 테일러 나인 아냐?”

“와··· 진짜 예쁘다.”

연예인이 떴다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스마트폰을 들어서 사진 버튼을 누르기 마련. 거기에 그 사람이 SNS을 한다면? 반드시 인터넷에 퍼지게 되어있다. 즉, 테일러와 유서담이 화목하게 다니는 장면은 테일러가 얼굴을 감추지 않는 이상 곧 수많은 전 세계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의미.

그녀는 관심받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자신이 유명하다는 점을 이용해먹을 줄은 아는 여자였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유서담. 그는 고작 하룻밤 새 유명인이 되었다. 원래도 유명한 편이었지만, 온갖 이슈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건, 균열에서 실종되었다가 복귀를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토론회에서 유하람의 의견을 묵살 시켜서도 아닐 것이다.

[어나더 리그 유서담과 무림맹 설중연의 키스 스캔들.]

[둘의 관계는?]

[CNS, “설중연이 스캔들에 침묵하는 이유는 긍정의 뉘앙스?”]

[설중연, 유서담과의 열애설··· 무림맹 “확인 중”]

설중연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수많은 뉴스들. 테일러는 그것들을 생각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어째서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키스를 해버렸는지는 유서담조차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중연은 현경의 고수였으며, 그렇다는 건 무력이 단순히 강하다는 문제를 넘어서 욕구에 대한 자제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그녀가, 갑작스레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제력을 잃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전부 계획된 일이라는 의미였다. 유서담은 그 일과 관련하여 테일러에게 그저 ‘어떻게든 되겠지. 해명문 대충 올리면 돼. 나나 누님이나 연예인도 아니고, 이런 걸로 주가 깎일 일은 없으니까.’라고 말했지만 단순히 그렇게 취급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이런 스캔들은 사실 헌터로서의 활동에 아무런 지장도 없다. 무림맹주로서 설중연이 쌓아온 이미지가 살짝 깎여나가겠지만 그것 또한 크게 부정적인 영향은 없을 터.

벌써부터 SNS에 초마다 수십, 수백 개씩 올라오는 악플이 두려울 뿐이었지만 막상 설중연을 향한 욕은 거의 없었으므로 별문제는 없다. 유서담은 욕먹는 게 익숙했으니까.

그래서 유서담은 이번 설중연의 행동에 대해 그렇게도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틀려.’

테일러 나인에게는 전혀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번 사건의 내막을 더욱 자세히 파악하고 또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그러니까 유서담이 설중연의 사건에 대해 설명할 때 테일러는 가만히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었다. 그때 눈빛에는 피곤함을 넘어서··· 곤란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너는, 여전히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생각은 없어 보이네.’

분명 유서담 또한 여인에게 마음을 두었던 적은 있을 것이다. 혹은 현재진행형으로 어떤 여인을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았다. 유서담 또한 인간이기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애정을 어느 정도 받아주었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다가오려 하면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테일러 나인은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설중연 또한······ 이 이상으로 더 다가가려고 하면 유서담이 밀어낼 가능성이 높다.

그건 그가 고자이거나 연애 혹은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유서담은 그저,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7년 전 그날···, 처음으로 헌터가 되었던 그때처럼.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를 살면서······. 왜 아직도 그런 마인드로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테일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이계로 파견을 가서 목숨을 건 위험한 여행을 한다는 것도 밤중에 같은 침대를 쓰며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위험하다면 이계 파견을 포기하면 되지 않겠는가?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대체 왜 그러는 거냔 말이다.

테일러는 다시 스마트폰으로 슬쩍 얼굴을 돌렸다.

난데없는 유서담과 설중연의 스캔들.

예상하건대, 설중연 또한 지금 굉장히 초조했을 것이다.

테일러가 설중연을 경계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테일러를 인식하고 경계하였다. 테일러는 설중연과 단 한 번밖에 만나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도 지금 급한 거야. 그러니까 이런 짓을 벌이지.’

그래서 테일러는 유서담보고 데이트를 하자고 하였다. 그건, 정말로 별것도 아닌 행위이지만 아주 큰 의미가 담겨있었다.

왜냐, 설중연은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내가 언제까지고 기다릴 줄 알고?’

테일러는 화면 속 설중연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유서담의 팔짱을 끼었다. 찰칵,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카메라에 활짝 웃는 테일러의 표정이 담겼다. 그것은 곧 예쁘게 포장되어 SNS에 올라갈 것이고, 조만간 인터넷 기사도 우수수 달릴 것이다.

‘그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니, 나도 가만히 당해줄 생각은 없어.’

*

설중연은 지금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다.

신혜지는 그것을 파악하는 눈썰미가 탁월했으나,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맹주님. 저녁 드실 시간인데······.”

“되었다. 오늘은 생각이 없으니 요리는 하지 않아도 좋다고 전해라.”

“건강은 챙기셔야죠.”

“되었대도.”

설중연의 목소리는 항상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기에, 살짝 감정이 담긴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중연의 기분이 좋지 않아도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로 평소에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설중연의 외모는 너무 어리고 앳된데다가 입꼬리를 정말 살짝만 올려도 순수한 시골 처녀처럼 보여졌기에, 애써 표정과 감정을 속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천마지존으로서, 무림맹주로서의 위엄이 순식간에 벗겨져버릴 테니까.

그건 평소에는 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본인의 감정을 절대 주변인들에게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무림맹의 맹주로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글쎄. 상당히 곤란하게 다가온다.

‘흐으으으음······.’

신혜지는 설중연의 곁에서, 그녀를 꽤 열심히 지켜보았다. 그녀에 대해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럭저럭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정도는 어렴풋이 짐작할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였다.

‘이 경우에는 역시, 유서담 헌터님 때문이겠지.’

그녀도 설중연이 불과 며칠 전 저질렀던 짓을 알고있다. 난데없이 세계 각지의 헌터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키스를 했다? 그건 ‘영역 표시’라고 불러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남자는 나의 것이니, 누구도 건들지 말라.’

그런데, 하루 전. 인터넷이 또다시 유서담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언급의 대상이 설중연이 아닌, 테일러 나인이라는 점. 즉, 표시를 해두었던 영역에 다른 여자가 침범하여 또다시 영역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신혜지의 입장에서는 전쟁을 하자는 뜻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미치겠네······.’

도대체 여자들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본인도 여자였지만 사랑을 해본 적이 없기에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거기에 첼레스테라는 어나더 리그 소속의 헌터와 관련된 언급까지 계속 떠오르고 있어서, 잠깐 시간이 날 때마다 취미로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는 설중연의 미간이 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하필이면 취미가 인터넷 뉴스라니.’

무림맹주 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하고, 또 지나치게 특이한 취미였다. 그나마 SNS를 안 하는 건 천만다행이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저 건전한 취미활동이 영 좋아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한참이나 고민하던 신혜지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맹주님.”

“왜 그러느냐.”

“지금 기분 안 좋으시죠?”

“···그렇지 않다.”

“유서담 헌터 때문이죠?”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걱정 말거라.”

“아뇨. 딱히 신경쓰이는 건 아닌데···.”

신혜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설중연에게 다가갔다. 예상대로, 그녀는 노트북으로 인터넷 기사를 보고 있었다.

“······저거, 맹주님한테 싸움거는 거예요.”

“생사결?”

“아니, 아니아니아니요! 생사결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 심리전을 거는 거라구요.”

테일러 나인은 인터넷 여론을 움직이는 데에 능숙하다.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인터넷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프로 중의 프로. 심지어 다른 여자와의 기싸움에서 반드시 이기는 법을 알고있다.

실제로 설중연은 테일러 나인이 걸어온 기싸움에 완전히 말려들어서 온종일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잖는가. 본인이 그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말이다.

아주 정말로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프로급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 바닥에 대한 눈칫밥이 있는 신혜지 본인이 설중연의 직속 비서라는 점이다.

“얼마전에 떠돌던 열애설, 아직 무림맹에서는 언급 안 했죠?”

“일단은, 그렇지.”

“긍정해버려요.”

“···뭐?”

설중연이 당황한 듯 되묻자 신혜지가 말했다.

“그 남자밖에 없죠? 일편단심이죠? 그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와야죠. 지금 기자한테 연락할게요. 박성호 비서실장님 아직 퇴근 안 하셨을 테니까···. 도와달라고 해야겠네요.”

“아니, 잠깐,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럼 서담이 곤란-”

“어허! 원래 생선 한 마리 두고 고양이 둘이 싸울 땐 생선이 상하는 게 필연적이거든요? 지금은 생선이 상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생선을 어떻게 차지하느냐가 문제니까 그런 건 신경쓰실 필요 없어요.”

그러면서 신혜지는 대뜸 박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박성호 비서실장님. 네네, 아뇨. 별건 아니고. 기자들한테 연락 좀 돌리려구요. 네? 당연히 중요한 일이죠. 그, 얼마전에 떴던 열애설 아시죠? 아뇨, 부인하는 게 아니라 긍정하려구요. 많이 당황하셨죠? 괜찮아요. 저랑 맹주님 술 안 마셨다니까요? 아휴, 별 소리를 다 하시네.”

“잠깐, 잠깐······!”

그리하여, 속전속결로 무림맹의 공식 입장이 발표되었고.

그날밤.

최근 얻은 재능인 [사격 S]를 시험해보기 위해 사격장에 들러서 하루 종일 총기를 만지작대던 유서담은 피곤함에 찌들어 침대에 드러누웠다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울리는 스마트폰을 확인하였다.

[속보!]

그리고 떠있는 뉴스를 보고서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의뢰인.”

<의뢰를 준비할까요?>

“······아니야. 됐어.”

진심으로, 이계로 도망치고 싶어졌으나 애써 꾹 참았다.

< 나는 쓰레기다(4) [설중연 삽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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