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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43화 (143/251)

< 나는 쓰레기다(2) >

“데이트하자.”

그것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유서담이 들은 첫마디였다. 비몽사몽 눈을 간신히 뜨자, 그의 시야 한가득 새하얀 살색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찰랑이는 은색의 머리카락.

갑자기 정신이 확 들어서 눈을 번쩍 뜨니, 홀딱 벗은 테일러가 자신의 복부 위에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검색하고 있는 것을 봐버렸다. 순간 할말을 잃은 서담이었으나 질문은 꼭 해야만 했다.

“···너, 왜 벗고 있냐?”

그러자 테일러는 자신의 몸 상태를 뒤늦게 확인하더니 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몰라. 너랑 자면 나도 모르게 벗더라. 버릇인 듯.”

유서담은 혹시 몰라서 상체를 만져보았다. 밤중에 입고 있던 와이셔츠가 사라져 있다.

“그럼 내건?”

“그것도 버릇.”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뻔뻔하게 답하니 오히려 서담 쪽에서 할 말이 없었다. 황당한 마음도 잠시, 그는 자신의 하체를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 올려서 그녀의 몸에 휙 감싼 뒤 옆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덮치게?”

“지랄하지 말고 일어나.”

이제 와서 내외하려는 것도 아니고, 새삼 이런 상황이 어색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조금 피곤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인도네시아로 날아가 토론회에 급히 참석하느라 진이 다 빠졌으니까.

피곤해서 그런지 취기 오른 테일러를 품에 껴안고서 새벽 내내 한참이나 많은 생각이 들어 잠들지 못하다가,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그렇게 일어나니 오전 10시.

출근 시간을 이미 한참이나 넘어섰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데이트?”

“요새 너 인마, 나랑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없잖아. 그래서 이 누님이 시간 좀 내보려고 그러는 거지. 요즘 영화 재밌는 거 많은데, 가끔은 여유 좀 내고 살아야지! 안 그래?”

“넌 맨날 여유 내는 거 같은데.”

“무슨 소릴! 누님이 얼마나 바쁘게 지내는 줄 알아?”

“그러냐···.”

여유라.

생각해 보면, 유서담이라는 인간은 17년 전 헌터로 데뷔하고서 2년 전 심장에 병을 앓기 시작할 때까지 여유 없이 달려오기는 했다. 그건 최근 주인공 사냥꾼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2년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F랭크 헌터로 지내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바빴다.

명확한 목표를 위해 살인 청부를 받으며 힘을 조금씩 쌓고, 자신만의 길드를 성장해나가야만 했으니까. 그는 아직 젊었고, 목표까지는 너무나도 멀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 많았기에 정신없이 달려나갈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뭐. 그래. 여유 좀 내도 되겠지.”

“이 새끼 갑자기 고분고분해졌네? 고지식한 유서담이 웬일이래?”

어차피 테일러 나인이 아니라면 그런 여유를 같이 누릴 상대도 없다.

“그럼 영화나 한 편 보자고.”

“로맨스?”

“아니. 다 때려 부수는 영화.”

그에 테일러가 씨익 웃었다. 영화를 같이 본 적은 없지만, 서로의 취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취향과 성격이 거의 비슷해서 지금까지 잘 어울렸던 것이기도 했다.

테일러가 모바일로 영화를 예매하기 시작하자, 유서담은 퍼뜩 예카테리나가 떠올랐다. 머릿속으로 울리는 영혼의 교감이 선명하다.

지금 예카테리나는 피곤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빨리 가서 돌봐줘야겠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적당히 옷을 입은 뒤 테일러에게 속옷과 짧은 팬츠 등을 던져주었다. 때마침, 의뢰인이 말을 걸어왔다.

<서담. 시간배속에 오류가 났던 이유를 파악했습니다.>

‘그래? 왜 그랬는데.’

<아무래도 지구가 아닌, 지구와 연결되어있던 균열에서의 차원 이동을 하는 바람에 시간배속이 엉켜버린 듯싶습니다. ···제 잘못이 크군요. 항상 지구를 중심으로 두고 있었고 이계에서 다시 차원을 이동한 것은 거의 처음이라······.>

‘아냐. 뭐, 그럴 수 있지.’

의뢰인은 단순히 그렇게 말했지만, 유서담은 그 말 한마디로 꽤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의뢰인도 지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군.’

점점 더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

“······죽겠어요.”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앉아, 그 아름다운 외모가 퇴폐적으로 변해버린 예카테리나가 책상에 얼굴을 파묻은 채 내게 말했다.

“진짜로 미안···. 이게, 내가 늦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없으면 예카테리나는 죽는다. 시간배속의 오류 때문에 늦어졌으므로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돌아오셨으니까요. 빨리, 이리로 오세요.”

나는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 착석한 뒤, 무릎에 예카테리나를 앉혔다. 원래는 간이 침대같은 곳에 누워서 신체의 접촉을 최대한으로 하여 정기를 충전해줄 생각이었으나 밀린 업무가 많다며 그녀가 거절하였다.

찌릿!

“읏!”

예상한 대로, 신체에 닿는 순간 예카테리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면 이 정기를 충전하는 행위가 상당히 따갑고 아프다고 했던가? 체내에 정기가 어느 정도 남아있을 경우에는 상관없지만, 지금처럼 바닥을 드러낸 상태에서는 유독 영혼 교감 행위가 예민하다고 하였다.

“······!”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몸을 웅크렸다. 접촉을 최대한으로 해도 모자랄 판에, 자꾸만 멀어지려고 해서 아예 가슴팍으로 당겼다.

“악, 으···!”

“그렇게 아파?”

“아, 아뇨···!”

심호흡을 하며, 예카테리나가 이성을 붙잡으려는 듯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기를 잠시 안정이 된 듯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 예카테리나는 마음이 놓였는지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가끔은······, 저도 신경 좀 써주세요.”

“···미안.”

“다른 분의 존재감이 너무 큰 것도 아는데···. 저는 서담 님이 없으면 못 사는 몸이에요···.”

“······.”

잠에 취한 목소리로, 예카테리나는 그렇게 속삭이듯이 속마음 몇 마디를 내 가슴에 찔러넣었고.

···이내, 움직임이 멎었다.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물었다.

“야. 살아있냐?”

“······.”

대답이 없다. 코에 손을 가져다 대니, 희미하게 숨이 느껴졌다. 정말 놀랍게도 그 잠깐 사이에 잠들어버린 것이다.

“허, 참···. 일한다고 할 땐 언제고.”

그렇다고 해서 깨우기도 뭣하고, 움직이기도 애매해서 가만히 앉아있자니 사무실이 열리며 정령왕이 들어왔다. 검은색 갑주에 완벽히 빙의한 정령왕은 투구까지 쓰고 있어서, 언뜻 보면 평범하게 덩치가 큰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은 저런 갑옷을 안 입겠지만.

-큰형님! 돌아오셨군요!

“어···, 그래. 오랜만이다.”

-저는 형님이 돌아가신 줄 알고 이미 마음속에서 멀리 떠나보냈는데, 다시 붙잡아야겠군요! 하하!

“이 새끼가?”

-괜찮습니다! 제 가슴은 아직 뜨겁게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죠.

화르륵! 정령왕의 가슴에서 푸른 불꽃이 진짜로 타올랐다.

"너 때문에 내 속이 탄다."

-음! 형님과 재회의 시간도 즐거운 일이지만, 저에게는 아주 중대한 임무가 있으므로 이만 가봐야겠군요.

"제발 빨리 꺼져."

-사실 우동 먹으러 갑니다.

"안 궁금하다고."

- 그럼 이만!

그리 말한 뒤 정령왕은 창문을 깨고서 밖으로 뛰어내렸다. 미친놈인걸까.

쿠웅!! 바닥에 정령왕이 착지하는 소리를 들으며, 엄한 놈한테 육체를 부여했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차라리 다른 얌전한 정령들에게 줄 걸 그랬다.

뒤늦게 사무실로 예사혜가 들어온다. 그녀는 깨진 창문을 보고서도 별로 놀라지 않았는지 익숙하게 말했다.

“일상이에요.”

“그러냐···.”

그러더니, 오히려 잠든 예카테리나를 보고서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와아··· 잠드신 건가요?”

“어. 왜?”

“아뇨, 최근에 사장님 불면증이 조금 심하셨거든요. 불면증이라고 해야 하려나. 아니지, 차라리 강박증이라고 할만한 게 조금 심하셨거든요. 이 시간에 일을 하면 더 좋을 것 같다면서······.”

미친. 대체 얼마나 일중독인 거야?

“사흘 동안 세 시간을 간신히 잘 정도로 잠을 안 주무셔서 저희가 억지로 재우려고도 해봤거든요. 근데, 길마님 있으니까 바로 잠드네요.”

“······.”

아까 사과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카테리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 극한의 피로와 맞서 싸우면서도, 내 길드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너무 못 챙겨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짜 쓰레기인가······.’

어젯밤의 테일러 나인과 이계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아라셀리, 그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예카테리나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째 최근 쓰레기보다도 못한 짓을 벌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그럼, 테리나 자는 동안 업무는 내가 봐야겠네.”

그녀를 편한 자세로 바꾼 뒤, 컴퓨터를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표정을 와락 구긴다.

“이게 다 뭐야?”

온통 내가 모르는 것들 투성이었다.

[제1회 마법 세미나 개최 계획 보고서······]

[3년 뒤 매직 심포지엄에 대한······]

[에센스 디스펜서의 효용성에 대해 엽수업체의 협력이······]

[검희 하선영의 대괴수전 무공을 ‘유렵무공(遊獵懋功)’으로 분류, 교과서 출판을 위해······]

컴퓨터를 확인해보니,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마법사’라는 직업이 정식으로 인정받았다는 것. 그리고 마법사 양성을 위한 대학, 일명 ‘예카테리나 마탑’의 설립 계획이 벌써 초안까지 완성되었다는 것. 또한, 마법사들을 위한 에센스 디스펜서를 ‘마법 지팡이(Wand)’라고 통칭하기로 했단다.

거기에 더해서 하선영과 첼레스테가 합동으로 벌인 짓은 더욱 가관이었다.

기존의 무공은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쓸데없이 허수를 두거나 초식을 복잡하게 얽는 등, 괴수를 상대하기에는 불필요한 동작이 너무 많았는데 그것들을 죄다 쳐내버리고서는 아예 ‘선영검법’을 갈아엎었다는 것.

그리하여, 무림측에서는 선영검법을 두고 최초로 대괴수전용 무공으로서 ‘유렵무공(遊獵懋功)’이라는 새로운 계통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무공이 대단한 점은 무능력자 뿐만이 아니라, 강체 계열의 초능력자도 배울 수 있다는 점.

비록 원판이 되는 첼레스테의 자체적인 강체무공에 비하면 성능이 훨씬 달릴 수밖에 없었으나, 강체 능력자가 무공을 어느 정도지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별일이 다 있었네······.”

솔직히, 내가 여기서 뭘 더 손대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 느려서? 아니, 예카테리나가 너무 빨라서 이계에 갔다오는 그 짧막한 공백을 도저히 메울 수가 없었다.

나 또한 예카테리나가 오기 전까지는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한국 헌터 관련 법률은 물론, 나중에 내 길드원들이 국제적으로 활동할 때를 대비해서 폭넓은 지식을 쌓고 있었고 마법과 무공을 위해 초능력 지적 재산 소유권에 대해서도 변호사에게 직접 찾아가 몇 날 며칠 공부를 한 적도 있다.

그뿐이랴, 이후로도 엽수업체 및 투자자들에게서 투자를 받으며 갑질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 바닥에서 몇 년이나 굴러먹은 류진수에게 직접 찾아가 노하우를 전수받았었다.

그럼에도, 오로지 길드 하나만 바라보고 그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 예카테리나를 따라잡기란 요원해보였다.

“대단하네······. 이젠 솔직히, 내가 할 일도 없겠다.”

그리 말하자, 예사혜가 무슨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 일이 없긴 왜 없어요?”

“어? 아니 나는 그냥-”

“유렵무공이고, 마법이고 죄다 길마님이 가져온 기술로 만든 건 아시죠?”

“어···. 그렇긴 하지.”

“근데, 길마님 없이 저희끼리 그 기술 개발할 때 얼마나 애로사항을 먹었을까요?”

“······.”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나는 그런 거 하라고 지시한 적도 없다. 그냥 길드 내에서 밥 잘먹고 잘 크면서 열심히 헌팅이나 해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런데··· 현재 어나더 리그에서 제대로 헌팅을 나가는 사람이 있던가?

‘···여기가 대학이냐 도장이야 길드야?’

문득 황당하다는 생각이 치솟았을 무렵, 예사혜가 말했다.

“그러니까, 조금씩이라도 도와주시죠.”

“뭐를?”

“무공의 무궁무진한 발전과 가능성과 활용과 개편과 보편화를 위해, 한수 거들라는 거죠.”

그러면서 스마트폰을 들어서 내게 보여주었다.

실시간 인터넷 스트리밍, 첼레스테.

시청자 9만 명.

현재 강체술 강의 진행중.

“길마님 돌아오시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람 한 명 더 있는 거 아시죠?”

“···첼레스테가?”

“네. 근데 길마님 돌아오시자마자 바쁘게 돌아다니셔서 방해될까봐 찾아오지도 않고 있어요.”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그러니까, 직접 가보세요.”

< 나는 쓰레기다(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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