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42화 (142/251)

< 나는 쓰레기다(1) >

사실대로 말하자면.

헬 게이트에 대해 과학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였던 유하람이 정말로 유서담보다 더 전문가일 수도 있다. 최근 유서담은 헬 게이트에 대해 거의 연구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유하람이 더 전문가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유서담은 헬 게이트에서 3년이나 생존했던 헌터라는 사실은 최근 인터넷을 통해 네티즌들에게 공개되어, 모두가 알고있었다. 거기에 그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균열의 내부에서도 이렇게 당당히 생환했으며, 또한 차원을 일부 다룰 수 있는 능력이 확인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 자리에서 누구의 말을 믿어야 옳은 것일까?

마이크를 잡은 유서담은 이렇게 말했다.

“오는 동안 당신의 자료를 살펴보았습니다. 예, 뭐. 꽤 그럴듯 합니다. 저도 조약돌 동아리 시절에는 다이아몬드가 제일 비싼 조약돌인 줄 알았으니까요.”

어딘가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래서 제가 준비해온 자료를 보여드리고 싶군요. 이거, 제가 유플릭스로 영화 볼때 쓰는 태블릿인데······. 상관없죠? 그냥 연결하겠습니다.”

그러고서는, 화면에 ‘이면 세계’에 대한 자료가 떠올랐다. 그것은 최근 무림인들이 전 세계를 활보하면서 처리하고 다니는, 던전이나 균열과는 또다른 어떤 이상현상이었다.

사실, 이 자료는 헬 게이트와 그다지 접점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유하람이 자료를 제시했을 때, 헬 게이트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던 것과 비슷한 원리로 사람들은 유서담에게 설득당했다.

“헬 게이트 내부에서 에너지가 비약적으로 터져나오는 이유는, 이렇듯 헬 게이트의 일부가 현실에 동기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걱정마십쇼. 유하람 ‘전문가’님께서 열심히 제가 가져온 물질로 연구하는 동안, 무림맹에서 해당 이상현상을 모조리 해결하고 있으니까요.”

화면 속에는 헬 게이트와 쏙 빼닮은, 이면 세계의 사진이 여러 장 나타났다. 대부분은 너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것들로 가득해서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지만, 헬 게이트 내부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 몇몇 헌터들은 정말로 이면 세계가 그곳과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지. 애초에 헬 게이트로 인해 파생된 세계는 맞으니까······.’

유서담도 사실은 왜 헬 게이트의 에너지가 팽창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차원학에 능통한 의뢰인이 항상 곁에 붙어있었다.

<원인을 파악 중입니다만, ···크게 위험한 건 없어 보이니 안심하십시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유서담이 ‘헬 게이트 원정은 무의미한 짓이다’라고 못을 단단히 박으며, ‘설령 원정을 하더라도 고작 소수 정예로는 어림도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거기에 누가 반박을 하려고 들면 유서담이 술자리에 모인 군필자가 군대썰 풀어놓는 마냥 헬 게이트에서 있던 일을 유쾌하게 풀어놓는데, 어찌 반박할 수 있겠는가.

“······헬 게이트 원정이 기각되었습니다.”

이윽고 사회자 태오의 입에서 결론이 떨어지자, 유하람은 자리를 박차고 토론회를 빠져나갔다.

회의가 종료되었다. 하나둘, 카메라가 꺼지면서 생방송의 아웃트로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서자.

와락, 설중연이 안겨들었다.

유서담은 당황하여 말했다.

“저, 저, 누님, 체면을 지키셔야······.”

보는 눈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중연은 그런 시선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서 뒤꿈치를 들더니 유서담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에 기분 좋은 느낌이 들기도 전에, 그는 서둘러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직 꺼지지 않은 카메라가 이곳을 비추다가 이제 막 꺼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큰일났다.’

이내 사람들이 토론회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유서담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 그녀를 내려보았다. 고작 유서담의 가슴팍에 간신히 닿을 정도로 키가 작은 그녀였다. 평소에는 그렇게 커보이는데, 사실은 이렇게나 작았다니.

그녀는 어쩐지 아련하게 젖은 눈동자로 유서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늦게 왔구나.”

“···죄송해요. 시간 배율이 뒤틀려버렸을 줄은 저도 몰랐거든요.”

본디 이계로 향하는 경우 시간배율이 최소 2배속에서 길게는 15배속까지 느려진다.

하지만 균열 내부에서 이계로 떠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멸망한 세계가 지구와 평행 세계였던 때문일까. 시간배속 기능에 오류가 나타났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지구에서도 고스란히 흘러버린 것이다.

덕분에 지구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얼마나 애가 탔는지, 유서담은 모를 것이다.

“그래···. 괜찮다. 이렇게, 다시 돌아왔으니까.”

사실, 유서담이 처음 등장한 그 순간부터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다. 오랜만에 그의 체취를, 그의 눈동자를, 그의 감촉을 음미하고 싶었다. 그러나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꾹꾹 충동적인 마음을 애써 눌러 참았다.

그러나, 그런 덕분에.

리미트가 풀리자마자 설중연 스스로가 그토록이나 챙기던 체면까지 잊어버린 채, 급히 달려들어버린 것이다.

여태껏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던가. 도저히, 1초라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그런 설중연의 뒷머리를 조심히 쓰다듬던 유서담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설중연 말고도 이 자리에서 꼭 만나보고 싶었던 여인이 한 명 더 있었으니까.

‘분명, 테일러가 여기 있을 텐···어라?’

그런데, 토론회장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

내가 귀국했을 때는, 한국 시간으로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누님은 나와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어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장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다. 두 달이 넘도록 공석을 유지했으니 말이다.

-다음에 다시 오면, 네게 줄 것이 있다.

그녀는 그리 말한 뒤 무림 도원으로 돌아갔다. 다음에 줄 거란 게 대체 뭔지 예상할 수 없었으나 하여튼 뭔가 찜찜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표정이 영···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애매해 보였기 때문이다.

집에 오는 내내 나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 순위를 확인하였다.

예상대로 생방송 카메라가 꺼지기 직전, 그러니까 아웃트로가 나오는 타이밍에 설중연 누님이 내게 안겼던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서 송출되었다. 그녀가 발꿈치를 들고, 나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 장면까지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도저히 그것을 두 눈 뜨고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뭔가 들켜서 안 되는걸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 순위에는 항상 ‘설중연’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는데, 대부분이 내 이름과 연관된 스캔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무림맹주에게 스캔들이라······.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다. 나는 서둘러 누님에게 해명하자고 말했으나, 그녀가 거절하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내버려 두거라.’

어쩐지 기분까지 좋아보이는 그녀가 그리 말하는데, 더 이상 해명을 요구할 수는 없어서 그만두었다.

“에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다.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던 나는 어기적어기적 현관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부엌의 불이 켜져있었다. 내가 켰던가? 라는 의문이 채 들기도 전에, 식탁에 앉아 맥주를 까고있던 테일러 나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뺨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상당히 취기가 오른 것으로 보였다.

어쩐지, 기분이 멍해진다.

오늘따라 그녀의 분위기가 묘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를 못본 지 두 달이나 되기는 했지만, 정말로, 뭔가가 묘했다.

“어, 너···. 왜 먼저 간 거야? 같은 비행기 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자 테일러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뚝, 떨어뜨렸다. 반쯤 기울어진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쩐지 이상했다.

“유서담.”

“···어.”

“유서담.”

“듣고 있어.”

“유서다암···.”

그녀는 힘이 풀린 듯한 목소리로, 맥주캔을 구겨서 밀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유서담, 너 정말 갖기 힘든 남자다. 그치.”

“······.”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너, 취했-”

“맞아! 취했어.”

갑작스레 테일러가 살짝 소리를 질렀다가, 이내 목소리를 낮췄다.

“···취했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음주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아마도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위해, 그녀 또한 오늘은 특별히 용기를 내기 위해서. 잘 취하지도 않는 주제에 고작 맥주 몇 캔 까고서 나는 용기를 내고있으니,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줘라. 그렇게 시위를 하고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테일러가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 내게 다가와 넥타이를 잡아채더니 그대로 돌려서 안쪽으로 밀어버렸다. 툭, 가슴팍이 그녀의 자그마한 손으로 인해 밀리며 엉덩이가 소파에 닿았다.

“그거 알아? 나는··· 17년 동안 오로지 너만 바라보고 살아왔어.”

그녀가 나와 눈동자를 마주하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전혀 취기 오른 눈빛이 아니었다. 그녀는 취하지 않았다. 멀쩡한 정신으로 나를 바라보며, 멀쩡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였고, 멀쩡한 입술로 내 이름을 담았다.

“이젠 나도 알아. 나 혼자 독차지할 수는 없다는 걸. 그건 욕심이겠지. 나 혼자 갖기에, 너는 너무 크거든. 너 존나 크다고. 개새끼야···.”

테일러의 눈가가 살짝 촉촉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달빛을 받아, 눈동자가 반짝이는 탓에 그렇게 보인 걸지도 모르겠다.

“···서담아. 우리 이렇게 지낸지 엄청 오래됐지.”

17년이다. 사춘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생을 함께 해왔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나에 대해서 잘 알았고, 나 또한 그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잘 모르겠다. 알 수가 없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서담아. 난 너에 대해 뭐든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나도 모르겠어.”

그건, 애가 타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가 DT라고 했을 때도 그러려니 했어. 네가 그토록 원하던 초능력을 가졌을 때도, 마법인지 무공인지 뭔지를 다룰 때에도 수긍했어. 나는 다 이해해. 네가 갑자기 외계인이라고 해도······. 나는 네 새로운 비밀을 알았다며 좋아할 거야. 그냥, 그럴 거야.”

옛날의 테일러가 떠올랐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스레 하며 상대방에 대해 알아갈 때마다 신나서 기분 좋게 웃음꽃을 활짝 피웠던 그 소심하고 어렸던 철부지 소녀.

테일러 나인이라는 소녀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 관계에 대해 조심스러웠고, 경계심이 강했으나, 동시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면 아예 전부 열어버리는 스타일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면.

바로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활짝 열었던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무언가 목표가 정해지면, 테일러는 앞뒤 가리지 않고서 그것에 매달리고 또 집착한다.

“너말야······. 혹시 지금, 마음 두고있는 사람··· 있어?”

입술을 떼려는데, 테일러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어쩐지 불안한 눈으로 고개를 푹 떨군다.

“아냐. 됐어. ···그냥, 말하지마.”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이내 활짝 웃었다.

“없어도, 있어도. 상관없어.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난 포기 못할 거 같아. 이제 와서 굴러들어온 다른 년한테 너를 전부 빼앗기기는 싫어. 내가 가져올 수 있는 게 조금이라도 남아있기만 하면 돼. 네 일부라도 좋으니까······ 내가 가질 거야.”

그녀는 버릇처럼 한 손으로 내 상의 단추를 풀려다가 말고, 조용히 새하얀 다리를 내 허벅지 양쪽에 겹치도록 올려두고선 나를 껴안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포근하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온다.

“오늘 밤은··· 그냥 같이 있자. 그냥, 같이 이렇게 있으면서, 오늘만큼은 나만을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부탁이야.”

그러면서 어쩐지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를 전해왔다.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만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띠고서는 잠들었다.

밤이 깊어졌으나, 나는 잠들 수 없었다.

< 나는 쓰레기다(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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