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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39화 (139/251)

<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야(4) >

숙련된 사냥꾼은 한 마리의 괴수를 사냥하기 위해 최소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적을 관찰하며, 준비를 한다.

숙련된 킬러는 한 명의 대상을 죽이기 위해 최소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대상을 관찰하며, 준비를 한다.

유서담은 숙련된 사냥꾼이자 킬러였고, 김하수를 한 달이나 관찰한 결과 어떻게 하면 완벽히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계획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것들은 꽤 더럽고 비겁한 방법이었다.

김하수의 정의로운 감정을 이용하여 인질을 잡아도 좋았고, 요새 내에서 싸움을 벌여 시설을 파괴하는 것으로 정신을 흩트려놓는 방법도 있었으며, 외부로 사냥을 나갔을 때 함정에 빠트리는 법도 있었다.

방법은 다양하고 많았으며, 대부분의 사냥 성공 확률은 유서담이 생각하기에 ‘상점창’이라는 변수가 있지 않는 이상 100%에 가까웠다.

그러나, 유서담은 사냥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김하수의 존재는 분명 이 세상에 해악이 된다. 그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괴수가 탄생할 것이며, 상점창을 이용할 때마다 서서히 그 멸망이 가속화된다.

분명 안타까운 이야기였으나 그건 유서담에게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김하수가 가진 ‘신념’이 중요했다.

유서담 역시 햇수로 따져서 16, 아니 17년을 사냥꾼으로 살아왔다. 괴물이 득시글한 전장을 전전하며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해 잃어야만 했다.

약해서 패배해야만 했고, 약해서 사랑하는 이를 잃어야만 했던 그 고통을 김하수도 똑같이 앓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서담은, 그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유서담, 그가 강해지려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헬 게이트.’

다시 한 번 그곳으로 향해서, 약한 탓에 한 번 잃어버렸던 이를 힘으로서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힘을 단단히 갖추고 향한다면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그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쓰레기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악행과는 관계없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러나······.

자신과 똑같은 신념을 짊어진 자가, 모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두 눈으로 봐버렸는데, 다짜고짜 머리에 총알 자국을 내어놓고 마음 편히 돌아갈 수는 없었다.

“죽일 거야. ···그의 신념을, 내가 대신 이뤄놓고서. 죽일 거야.”

<······.>

의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유서담은 기계처럼 그런 소리를 반복적으로 하였다.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놓지 않기 위해서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주인공의 최종목표’가 없어지면, 더 나은 방법으로 일이 해결 될 수도 있잖아?”

<그건······.>

불가능하다. 의뢰인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유서담의 눈빛이 더 없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들 의미는 없어보였다.

“보인다.”

그날. 그러니까 김하수가 이성수를 살리기 위해 나노강화제를 구입한 당일, 유서담은 탈영을 하였다. 그러고선 그대로 북부 평원으로 향하였다.

꾸드득, 뚜드득!

쏴아아···!

지평선을 뒤흔들며, 문어의 촉수같은 것들이 가득 달린 얼굴이 고개를 돌렸다. 그 옛날 괴수에게 습격당해 쓰러져버린 63빌딩보다도 거대한 얼굴이었다. 푸른 안광을 흘리는 문어 머리 괴수, 군집체.

코란 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괴수들의 어머니라 불리는 저것을 사냥하기 위하여, 마침내 이곳에 도달하였다.

실패할 확률이 더욱 높을 것이다. 애초에, 주인공이 주인공 보정을 대량으로 사용해야만 사냥할 수 있는 대상을 주인공도 아니고 개연성도 없는 유서담이 사냥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자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역겨운 이유였다.

여태껏 잘 죽여놓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죽이기를 주저하다니.

그래서, 유서담은 살해 대상을 위해 군집체를 사냥할 계획이었다.

살해 대상이 죽더라도 마음 편히 죽을 수 있도록.

···혹은, 주인공의 최종 목표를 제거하여, 어쩌면 희망적일 수도 있는 ‘또다른’ 어떤 방법을 구상해내기 위하여.

마음 편히 살해 대상을 살해하기 위해 더 어려운 대상을 사냥한다?

정말로 멍청하고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유서담은 웃었다.

가장 먼저, 테일러 나인이 떠올랐다. ‘미친 새끼야. 또라이같은 짓 처하고 자빠졌네.’ 걸걸한 욕설로 나무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했다.

아라셀리에게도 미안했다. 그녀에게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이곳으로 왔다. 그녀를, 지구로 데려가야 하는데. 그 아이는 자신 하나만을 바라보고서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든 길을 걸어와서, 꼭 행복하게 해줘야만 하는데.

그리고, 설중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녀가 지어주었던 따스한 미소가, 아직도 떠올리고자 하면 선명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오로지 자신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여자.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녀에게 그런 약속을 해버렸는데, 이런 병신같은 짓이나 하고있단 사실을 알면 누님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화낼까? 잘했다고 칭찬할까? 잘 모르겠다.

<터무니 없습니다. 유서담······.>

“알아. 근데 뭐, 죽기야 하겠어? 지옥의 구렁텅이에서도 살아나왔는데.”

철컥! 윈체스터를 장전한 뒤 등에 멘 다음 ‘빛을 잃은 샛별’을 꺼내들었다. 빗물을 머금어, 오늘따라 붉은 글씨가 더욱 선명했다. 화분은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심장의 마력이 꿈틀대는 것으로 보아, 그 자그마한 아이조차 진심으로 준비를 하고있단 게 느껴졌다.

쿠오오오······!!

싸움은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태초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거대한 문어 머리가 바닥을 들썩이자, 갑작스레 소나기를 헤집고서 빌딩의 기둥만한 촉수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유서담의 몸을 꿰뚫기 위함이었겠지만 그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러자 또다른 촉수가 그의 몸을 낚아채기 위해 휘둘러진다. 공중에서는 방향 전환을 할 수 없기에, 반드시 적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유서담의 방향이 기적처럼 꺾이더니 그대로 땅으로 쏘아졌다.

[아이템 스킬 ‘바람의 도약’을 사용하였습니다.]

퉁···!!

허공에 1회 바람의 발판을 생성하여, 딛고 도약할 수 있는 아이템 스킬. 수리가 완료된 광휘의 갑주와 바람의 발걸음을 전부 착용한 덕에 다시금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신체 능력 자체는 이제 S랭크에 막 도달했을 뿐이지만, 마법의 보조와 아이템의 강화 덕분에 어지간히 숙련된 S+랭크의 초능력자 뺨치는 능력치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상성이 좋을 경우, SS랭크 수준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 딱 그러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달마풍천신법’의 효과가 강화되고, 상대방의 공간 면적이 넓어서 때릴 곳이 많으며, 스피드에 자신이 있어 묵직하고 강력하지만 느려터진 공격에 대항하기 수월하였다.

저 거대한 촉수를 과연 전차나 전투기가 피할 수 있을까. 유연한 기동이 불가능하기에,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유서담은 저 모든 촉수를 피해내며, 심지어 타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콰콰콰쾅···!!

유서담이 발을 디딘 촉수가 폭발하며, 잘려나간다. 그에 유서담 또한 살짝이지만 놀라고 말았다. 그저 발바닥을 잠깐 디뎠을 뿐인데, 그 사이에 마법을 걸어버리다니. 화분의 능력이 확실하게 강화된 것이 느껴졌다.

‘좋아. 이대로 가면 돼.’

평원 전체를 둘러쌀 정도로 거대한 촉수 괴수였다. 머리 위에 매달린, 가장 크고 굵직한 촉수가 하늘 높이 뻗어있다. 저것이 아마도 이 비구름을 생성해내는 원인일 터. 저것만 제거하면, 끝이다.

쿠직, 쿠직, 쿠직!

촉수가 유서담의 측면, 후면, 그리고 정면을 연속으로 내려찍었으나 공격이 땅에 박혔을 무렵에는 이미 그는 다른 곳에 이동해 있었다. 재빠르게 군집체의 얼굴에 달라붙어 검을 크게 휘두르자, 5m가량의 기다란 상흔이 남는다.

쿠오오오···!!

그에 분노하여 땅에서 또다른 촉수를 꺼내보지만, 유서담은 그의 오른쪽 뺨으로 이동해 칼을 푹 박아넣고서 이마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짜악-!! 힘껏 자신의 뺨을 쳐보지만, 그는 잽싸게 검을 뽑아 굴러서 뒤편으로 넘어가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오른뺨, 코, 왼쪽 턱, 이마, 뒤통수, 정수리, 목, 다시 어깨로 내려와 촉수를 가르며 정신없이 질주하는 유서담은 마치 바람을 형상화한 것만 같았다.

질풍처럼 빠르게 질주하며, 날카로운 삭풍처럼 가차없이 적을 베어낸다.

성공적으로 피해를 입히고는 있었으나··· 그러다 결국, 군집체의 이성이 끊어지고 말았다.

팡······!!!

온 사방에,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커헉···!”

한참이나 튕겨나가 바닥을 구르던 유서담은 덜덜 떨리는 오른팔로 검을 꽉 쥐었다.

‘뭔 놈의 가죽이 강철보다 질긴 것 같냐······!’

군집체를 한 번 베어낼 때마다 팔 근육이 찢어질 정도로 힘을 줘야만 했다. 그럼에도 모자라 안 그래도 부족한 마력마저도 죄다 끌어서 써야만 했다.

“쿨럭···.”

숨을 쉬기가 힘들다. 충격파에 얻어맞아, 한쪽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고작 한 번의 공격을 허용했을 뿐인데 광휘의 갑주의 방어력이 절반이나 깎여버렸다.

비틀, 다시금 일어서서 달리려는데 중심을 잃고 한쪽 다리가 풀렸다.

퍼억!!

그 순간 날아드는 촉수.

그대로 가슴팍이 적중당한 유서담은 또다시 바닥에 튕겨져, 거의 30m를 구르다가 간신히 정지하였다.

“젠, 장······.”

그러나, 이 정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끈질기게 일어나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팔에 주사하였다. 출혈이 빠르게 멎으며, 활력이 도는게 느껴졌다. 판타지 장르의 포션과는 달리 현대 지구에서 만든 포션에는 아주 극소량의 마약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자주 사용할 수는 없었다.

“흡!”

힘껏 발에 힘을 주고서 도약하자, 로켓처럼 유서담의 몸이 군집체를 향해 쏘아졌다. 수십 가닥의 촉수가 날아들었지만 그는 아예 촉수를 밟고 질주하며 휘둘러지는 촉수를 갈아타고, 갈아타는 식으로 회피 기동을 하였다.

펑, 퍼펑!!

그의 발바닥이 닿는 곳마다 촉수가 폭발하거나 벼락이 지져져서 사방으로 스파크가 튀었고, 죄다 얼어붙어버렸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촉수가 많았다.

‘대체 몇 개냐고!’

또다시 촉수를 갈라내고서, 유연하게 윈체스터를 꺼내들어 군집체의 주둥이에 한 발.

파파파팡!! 에너지 폭탄이 터지며 마법의 폭풍이 생성되어 날카로운 칼날이 군집체의 입 안을 헤집어놓았다.

베어내고, 터트리고, 찢어발기고, 부순다.

유서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군집체를 상대하였다. 그의 칼날에는 수많은 이세계 검술의 묘리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분홍색의, 그러니까, 마치 연꽃을 닮은 무언가가 더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작 육개월이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설중연와 떨어지지 않은 채 수련에 매진하였고, 그것을 [백색 검법]이 받아들이고 흡수한 것이다.

그의 검술은 설중연의 것을 닮았으며, 호흡하는 법은 하선영의 것을 닮았고, 심장박동은 아라셀리의 것과 똑같았으며, 폭력적이고 저돌적으로 상대방을 몰아치는 사냥꾼의 기술은 테일러 나인의 것이었고, 마법을 전략적이지만 돌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마치 예카테리나의 방식을 닮아있었다.

혼자 싸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서담은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주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숨을 내쉰다. 청각이 멀어져서, 숨 쉬는 감각조차 아득했다.

기계적으로 윈체스터를 들어서, 격발. 빙그르르 돌려 장전함과 동시에 다시금 등에 매단 뒤, 빛을 잃은 샛별을 휘둘렀다. 촉수가 깎여나가며, 군집체의 눈알에 꽂혔다.

투쾅, 눈알이 터져나간다. 검끝으로 마력이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아, 화분이 최후의 마법을 사용했던 모양이다.

으드드득!

발목의 뼈가 나가버렸는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런 유서담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하였다.

군집체 역시, 눈빛을 잃고 뒤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하, 하하······.”

웃고 있음에도, 과연 자신이 웃는게 맞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보니 어깨가 탈골된 것 같다. 머리에서 끈적한 무언가가 흐르길래, 빗물인 줄 알았더니 피가 흐르는 것이었다. 대체 언제 머리를 타격당했던 걸까. 뇌진탕이라도 온 것인지 자꾸만 시야가 흐릿했다.

그래도 괜찮다.

정말로, 그 군집체를 쓰러뜨렸으니까.

이제는 아주 약간이지만 희망적인 상황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김하수의 죽음은 피해갈 수 없겠지만, 최소한 조금의 시간은 더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운이 좋으면, 예카테리나처럼 목숨을 부지한 채 주인공의 힘을 잃는 방법이 기적처럼 나타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때.

쿠드드드드드드득···!!!

지면 전체가 들썩이더니,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다.

“······아.”

그렇다. 여태 유서담이 상대했던 적은 군집체였다.

그러니까, 군집체의 극히 일부 말이다.

“미친···.”

뭐라고 비유해야만 할까. 63빌딩만한 크기라고 생각했던, 방금 전의 군집체가 그저 주먹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것은 거대하고 또 압도적이었다. 하늘 전체가 군집체의 본체에 의해 가려져버려, 순간 소나기가 멈춘 줄 착각하고 말았다.

그것이 푸른 안광을 데구르르 굴려, 유서담을 바라보았다.

최소, SSS랭크.

결코 혼자서 상대할 수 없다.

“하, 젠장······.”

어쩐지 너무 쉽다 싶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한 세계 주인공의 최종보스라고 할만하지. 유서담은 이를 악물고서 일어났다. 상대가 얼마나 더 커졌든, 얼마나 강력하든 상관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 유서담은 반드시 여기서 살아 돌아갈 생각이었다. 남을 배려하겠답시고 죽는 것만큼이나 미련한 짓은 없으니까.

그의 직감과 육감과 기민함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그래서 삐꺽거리는 오른발과 어깨, 그리고 울렁이는 머리를 부여잡고서 검을 쥐려는데.

쇄애애아아아-쿠구구구!!

멀리서, 하늘을 찢어발기려는 듯한 소음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왔다.

유서담은 그것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기종은 모르지만, 현대에서 익히 봐왔던 것이기에.

‘제트···기···?’

어째서 여기에? 라고 생각한 순간.

제트기에서 무언가가 뛰어내렸다. 어지간한 인간은 허공에서 터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짓이었으나, 이 세계에서 단 한명 인간을 초월한 누군가는 가능했다.

주인공, 김하수.

그가 나타났다.

쿠궁!!

이윽고, 유서담의 전방에 무릎을 꿇으며 착지한 김하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선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시원스레도 웃는다.

“유서담 소위, 고생했다. ‘본체’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자네의 고생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되었어. 희생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겠군.”

소나기가 쏟아져 내린다.

군집체가 분노하여 촉수로 하늘을 헤집어놓고, 그 뒤로 따라드는 수십 대의 전투기가 하늘을 찢어놓았지만, 그 모든 소음이 잠잠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 뒤는 내가 해결할 테니.”

뭐? 유서담이 의문을 표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수송선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온 부대원들이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상태였다.

그들은 평소의 유쾌한 미소는 온데간데 없이, 그 무엇보다도 뻣뻣하고 경직된 표정으로 유서담을 향해 말하였다.

“···돌아가자. 대장님의 명령이다.”

“잠깐, 그럴 수는 없-”

“유서담 소위.”

누군가가 말을 끊었다. 이성수였다.

“우리는 네가 누군지 잘 몰라. 그러나 네가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은 알지. 마음만 먹으면, 네가 우리 모두를 때려눕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베레모에 가려, 눈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소나기가 그의 눈가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소나기였다.

“그래도······. 대장의 명령, 아니. 마지막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겠나?”

그에 유서담은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끄덕였고, 억지로 붙들리다시피 수송선에 탑승한 순간.

김하수가 등에 메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지대공소멸탄?’

그제야 뭔가를 퍼뜩 깨달았지만, 늦었다. 뒤늦게 손을 뻗어보려고 했지만, 무언가가 갑작스레 품에 안겨들어왔다. 아라셀리였다.

“교수님, 제발요···.”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유서담을 바라보던 그녀는 혹여나 그가 어디론가 새어버릴까 싶어, 양손으로 꽉 껴안았다. 그래봐야 10대 소녀의 완력 정도는 가볍게 풀어낼 수 있겠지만, 그는 결코 아라셀리를 뿌리칠 수 없었다.

결국, 유서담은 그저, 바닥에 홀로 남겨진 김하수를 허망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자네들!”

김하수의 그 목소리는, 상공을 활강하는 모든 부대원들에게 들릴 정도로 온 세상 저 멀리 쩌렁쩌렁 울렸다.

“왜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 줄 아나!”

이윽고, 수송선과 전투기가 모두 일정 거리 이상 멀어졌을 때 김하수는 등을 보인 채 엄지를 하늘 높이 척! 세웠다.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또렷하여,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영원히 잊을 수 없도록 기억 속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그건 섹시하지 않기 때문이지.”

······이윽고.

새하얀 광채가 세상을 뒤덮었고.

단 하루도 빠짐없이 멸망한 세계를 적셔왔던 소나기가 멎으며, 눈부신 빛이 구름의 틈새 사이로 스며들어왔다.

멸망한 세계를 비추는 첫 햇살이었다.

<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야(4) > 끝

< 신세계로 향하는 사람들 [아라셀리 삽화 Mk.2] >

눈을 뜨자, 따사로운 햇살이 유서담의 각막을 공격해왔다. S랭크 초인의 각막은 일반인보다 튼튼하여 이 정도로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침부터 햇빛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그 누구라도 기분이 나쁠 것이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상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제대로 된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맞이하는 구름 한 점 없이 갠 날씨는 인간을 본능적으로 기분 좋게 만들었다.

‘여긴, 개인 의무실인가?’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에 팔을 들어올리려고 했지만, 품에 무거운 무언가가 안겨있었다. 예상대로 아라셀리였다. 그녀는 푸른색 눈동자를 뜨고서 빤히 유서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싱글벙글 미소가 만연한 채였다.

“깨셨네요.”

“···응. 사람들은?”

“모두 무사해요. ···그리고, 방금 막 장례식을 끝낸 참이에요.”

아라셀리는 유서담이 잠들어있는 동안 요새에서 벌어진 현황을 짧게 이야기해주었다.

김하수의 장례식을 치렀다. 괴수와의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소나기가 그쳤으나 기뻐하는 사람보다 슬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 말에 유서담 또한 공감하였다.

그의 죽음은, 이 세계의 역사 자체를 바꿔놓았다. 애초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에피소드’ 자체가 김하수의 탓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멸망을 향해 달려나가는 세계를 멈추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하였고, 그것은 결코 그 누구도 모욕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었다.

그의 죽음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유서담은 표정을 굳혔다.

주인공이라는 존재는, 과연 주인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고 가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던가?

여태까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의문이었고, 어째서 주인공이라는 존재가 탄생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본 적 없다.

왜냐.

여태껏 유서담이 만나왔던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결국 이기적이었으며 세상에 별 도움이 안 되는 해악이었으니까.

하지만 처음으로 그렇지 않은 주인공을 만났다. 그는 정말로 ‘주인공’다운 주인공이었다. 만약 실제로 그가 소설 속, 영화 속 영웅이었다면, 그렇게 죽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어쩌면 살아남아서 더 멋진 세상을 꿈꿨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상점창이라는 해괴한 능력에 기대지 않고서, 그저 스스로의 힘과 의지만으로, 멸망한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웠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의뢰인.’

<네.>

‘주인공은 어째서 발생하는 거야?’

<···세상이 흘러가기 위함입니다.>

‘주인공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멸망하는데···, 어째서 주인공같은 게 존재하냐고.’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꼭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이후로 의뢰인은 침묵하였고, 유서담은 더 질문할 수 없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괜찮으세요?”

유서담이 멍하니 있자, 아라셀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웃으며 답했다.

“이젠 괜찮아. 하던 얘기 마저 해줘.”

이후로 아라셀리는 요새의 근황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었다.

제이사의 새로운 리더를 뽑아야 하는데, 김하수의 유언에 따라 문화백화점의 리더 박한서를 데려오기로 했단다. 그녀는 몇 년 전 요새가 처음 지어졌을 때 잠깐 이곳에 머물며 김하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경험이 있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 이유가 컸던 모양.

“···그리고, 여기 생각보다 교육기관의 활성화가 제대로 되어있었어요. 기술자들, 그리고 학자들의 비중이 꽤 많았어요. 아마, 다른 땅으로 옮겨가게 되면 그분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울 생각인 것 같아요.”

김하수는 언젠가 자신이 없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남은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고 한다.

이제, 상점창은 없다. 무기와 식량을 허공에서 마구잡이로 뽑아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하수는 무기 만드는 법, 식량 구하는 법을 비롯하여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를 철저하게 교육해두었고 그와 관련된 시설이 요새에 몇 개나 세워져 있었다.

<이 세계에 남은 개연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할만큼 적지만···, 아주 극소량이라도 개연성이 남아있으니 언젠가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멸망한 이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꿈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유서담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주인공을 사냥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경우를 사냥에 ‘성공’했다고 말해도 좋은 걸까. 사냥감을 사냥하고자 하지 않았던 사냥꾼과,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냥감이라니. 이처럼 웃긴 의뢰도 없을 것이다.

<보상이 자동으로 지급되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받은 보상을 무르지는 않았다.

‘보여줘.’

[수명을 2010일 얻었습니다.]

[당신의 수명: 3901일 19시간 31분]

[레벨이 5단계 상승합니다.]

[재능 ‘사격(A+)’를 획득하였습니다.]

[기존의 재능 ‘사격(C)’와 합쳐져 ‘사격(S)’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뭐?’

<유서담>

[도합 레벨: 157]

*능력치

[근력 153] [체력 171] [민첩 155]

[기력 1] [마력 259]

*재능

[검술 S] [사냥 D+] [사격 S]

[요리 D-] [직감 A] [기민 A]

[통찰 B] [원기 SS+][기타···.]

*스킬

[주인공 사냥꾼 Lv. 4]

[백색검법(S)] [육감(B)]

[인벤토리(S)] [달마풍천신법(SS+)]

[정신 집중(SS)] [신성 변환(F)]

[아라-선영 식 마나 써클링(SS+)]

[백색 마녀의 도서관(C)]

유서담이 유일하게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사격의 재능이 상승하였다. 그간 스킬과 스킬, 혹은 재능과 재능이 합쳐진 경우는 많았지만······ 이렇게 같은 종류의 재능이 나왔던 적은 없었기에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격의 재능이라······.’

그러고 보면, 김하수 또한 개인화기를 즐겨 다루는 편이었다. 비록 현대의 괴수를 상대로는 사격이 거의 쓸모가 없을지 몰라도······ 그의 사격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과연 좋아해야 하는 걸까,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유서담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저도 모르게 아라셀리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벌써 일종의 버릇이 되었다. 그녀의 체온을 가만히 느끼고 있으면, 어쩐지 가슴이 안정되었다.

아라셀리는 그 손길을 느긋하게 느끼다가, 입술을 떼었다.

“교수님. 아침인데···, 이마에 키스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돼요?”

“···어째, 너 점점 요구가 대담해진다?”

“한 번만요.”

“안돼.”

실제의 나이가 어떻든, 지금의 아라셀리는 너무 외모가 어려보였다. 그 점이 자꾸 마음에 걸려왔던 유서담이 딱 잘라서 거절하자 그녀가 입술을 작게 오므리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시무룩해진 것을 보자니 살짝 양심이 쿡쿡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번 두번 부탁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점점 더 그 수위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유서담은 예전에 경험해봐서 잘 알고있다.

그래서, 그냥, 그녀의 머리와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라셀리가 살짝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띠고서 고개를 유서담의 가슴팍으로 파묻었다.

두근두근두근.

아라셀리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이 순간을 즐겼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러다, 유서담의 품에서 어떤 이질적인 향기가 새어나오자 그녀는 이마를 살짝 구겼다. 누군가는 향기롭다고 할 수도 있는 냄새였으나, 아라셀리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불쾌했다.

‘······다른 여자들의 향기.’

9써클의 대마법사가 된 아라셀리는 타인의 기운에 민감했는데, 특히 유서담의 기운에 더 예민하였다. 그녀는 지구에서의 유서담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여자 관계는 어느 정도 짐작하는 게 가능했다.

‘최소 둘··· 아니, 셋인걸까.’

이 정도로 깊게 향기가 배어있다는 건, 꽤 자주 육체를 섞는 관계를 유지해온다는 것. 그런 여자가 셋이나 있다는 사실에 아라셀리의 가슴이 초조해졌다.

교수님과 도저히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들에게 교수님의 마음이 돌아갈까봐 불안했다.

지구로 갈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아라셀리의 상념이 깨어났다. 유서담이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누굽니까.”

-나다, 신병. 이성수다.

“아 네. 들어오십쇼.”

문을 열고서 들어온 이성수는 유서담에게 착 달라붙어있는 아라셀리를 보더니 표정을 와락 구겼다.

“젠장할. 꽁냥대는 꼴 보려고 병문안 온 건 아니었는데.”

“딱히 꽁냥댄 적은 없습니다만······.”

“닥쳐. 기분 나빠졌으니까.”

이성수는 그리 쏘아붙인 뒤 아라셀리를 바라보았다.

‘어라?’

그의 특수 능력은 ‘감정 공감’. 괴수나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여, 마치 자신의 감정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덕분에 그는 저격의 달인이 되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아라셀리의 감정은 공감할 수 없었다. 마치 어떤 거대한 장벽이 쳐있는 것처럼.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아라셀리의 감정 장벽이 약해져 있었다. 기분 좋은 듯 헤실거리며 유서담을 빤히 바라보는 꼴이, 어쩐지 예상이 갔다.

‘방심하고 있군.’

장난스러운 생각이 문득 치솟아, 이성수는 그녀의 감정에 공감하기 시작하였다. 속마음을 읽는 것도 아니고, 감정 공유쯤이야 사실 별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줄 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능력을 발동한 순간.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면서, 뺨이 붉어지고, 하반신이 뜨거워지며,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눈에 자석이 달린 것처럼 자꾸만 시선이 유서담에게 향하였다.

‘뭐, 뭐, 뭐야······?!’

그의 입술이 탐스러운 과실처럼 느껴졌다. 저대로 한입 베어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시선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랬다.

유서담, 유서담.

유서담유서담유서담유서담.

“뭡니까?”

“···!!”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사이엔가 자신이 유서담을 향해 홀린 듯이 다가가며, 손을 뻗고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까지 뛰고 있던 심장박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

자신이 느끼던 감정이 아니었다. 감정 공감이다. 그걸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만큼이나, 너무나도 강렬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평소에, 이런 감정을 달고 산단 말이야?’

이성수는 저도 모르게 아라셀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중요치 않았다.

‘어떻게 이런 감정을 가지고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거지?’

그녀의 감정 속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동적이었고, 탐욕스러웠으나······ 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나도 커다랬기에, 아라셀리는 유서담이 원치 않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놀라웠다.

한 명의 인간이 다른 이에게 이토록이나 뜨거운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그리고 그런 감정을 가지고서도 멀쩡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아라셀리가 유서담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사랑이 되돌아오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먹먹해질 정도로, 가슴 아픈 사랑.

이성수는 저도 모르게 아라셀리를 향해 말했다.

“···아라셀리 소위. 당신과 이야기는 별로 안 나눠본 것 같지만, 그래도······ 당신을 응원합니다. 꼭 잘 되셨으면 좋겠네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네? 아···.”

이내,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응원 고마워요.”

*

그날 오후, 나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제이사 요새는 새로운 리더를 뽑아야 하고, 군집체가 사라진 북부 평원을 토벌하러 갈 사냥꾼을 편성해야 했으며, 김하수라는 존재 없이 자원을 공급하고 또 생산해야만 하는지라 꽤 혼란스럽게 북적였다.

상당히 바빠보였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모두가 활기를 띤 채로 지난날의 슬픔을 잊고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야.”

줄곧 김하수 대장이 하던 말버릇이었다.

“미래에 물려줄 것이 하나 없던 우리의 세대는, 여기서 이제 끝났어.”

이성수를 포함해, 한 달 동안이나 동고동락해온 특수부대원들이 바쁜 와중에도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크으, 신병. 너도 남으면 상당히 도움이 될 텐데.”

“꼭 가야되냐? 네 여자친구도 남잖아.”

“저도 곧 따라갈거거든요?”

“야, 안 돼! 너 없으면 우리는 이제 무슨 낙으로 살라고!”

부대원들이 순식간에 치고받기 시작하자 이성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더 해줄 말은 없어. 우리의 만남은 순간이지만, 작별은 영원하니까. 너는 너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살아가겠지.”

꼭 절망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웃고 떠들 수 있었다. 더 이상 소나기가 내리지 않는, 더욱 밝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는 김하수 대장의 선에서 끝났으니 이제는······ 그래, 조금 멋있게 포장해서, ‘신세계 개척 세대’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우리의 땅을 다시 세우고, 새로운 땅을 밟으며 개척해나갈 테니까.”

“신세계 개척 세대라···. 괜찮은 것 같네요.”

나는 문득, 요새를 돌아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멸망한 세계를 거닐며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구와 너무나도 똑닮은 세계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괴수에 의해 무너져버린 세상이 얼마나 참혹하게 변하는지를 보았다.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게 돌변할 수 있는지 보았으며, 멸망한 세계에서 광기에 물든 인간이 어떤 미친짓을 하는지 보았고, 그럼에도 희망을 안고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와 아주 비슷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보았다.

“너도 네 목표가 있겠지. 네 여자친구가 가지말라고 하는데도 기어이 돌아가는 걸 보면.”

···여자친구 아닌데. 이제는 부정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가서, 꼭 그 목표를 이루길 바래.”

그리 말하며, 이성수는 힐끗 부대원들과 투닥대는 아라셀리를 보더니 내게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아라셀리 소위 좀 잘 챙겨줘. 일편단심으로 해바라기같은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

“가끔은··· 저 아이가 원하는 걸 한 번쯤은 들어줄 필요가 있어. 애정표현에 목마른 아이거든. 자꾸 거절했다가는···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걸?”

아무래도, 이성수가 아라셀리에게 그 특수 능력인 ‘감정 공감’을 사용했던 모양. 그녀에게서 무엇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진심으로 하는 충고인 것 같았기에 받아들였다.

이윽고 표정을 푼 이성수는 환히 웃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고, 다른 부대원들도 분위기를 잡았다.

떠날 때가 되었다.

내가 경례를 하자, 이성수를 비롯하여 부대원들이 경례를 받아주었다. 아무도 없이 황량한 곳에서, 조용히 하는 군인들의 작별인사였다. 별 다른 말은 필요도 없었다.

아라셀리는 그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교수님, 다음에 봬요.”

“그래. 너도 여기서 사고치지 말고 잘 지내고.”

이윽고 뒤돌아서 한 발자국 걸음을 떼자 세상이 어지러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0···9···8···.]

완전히, 검은색 공간 속으로 몸이 빨려들어가는 감각을 느끼는데.

[5···4···3···.]

의뢰인이 다급히 말했다.

<서담. 문제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무슨 문제?’

<지금 당장 발생한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게, '시간 배율'에 아무래도 문제가 생겼던 모양입니다.>

‘뭔 소리야 그게?’

[2···1···0···.]

잠시 후, 익숙한 행성의 향내음이 화악 풍겨오는 것과 동시에 의뢰인이 말을 끝마쳤다.

<그러니까, 당신이 저쪽 세상에서 여행하는 동안 적용되었어야만 하는 ‘시간 배속’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그렇다는 말은 즉, 멸망한 세계에서 머물렀던 석 달이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현대에서도 똑같이 흘렀다는 말이 되었다.

[원래의 세계로 귀환합니다.]

지구, 익숙한 집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나는 스마트폰을 켜서 서둘러 신문을 확인하였고.

[유서담 헌터 실종 78일째···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가?]

가장 먼저 내 실종 뉴스가 나를 반겨주었다.

< 신세계로 향하는 사람들 [아라셀리 삽화 Mk.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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