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야(3) >
쏴아아아···!
쿠르릉···번쩍!
여느 때처럼 소나기 쏟아지고, 천둥벼락이 울리는 밤.
멸망해버린 지 십 년이 넘어, 이제는 그 누구도 쓰지 않는 빌딩 숲의 고층 건물 옥사에 자리를 잡은 나는 몸을 위장막으로 덮은 채 윈체스터의 9배율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윈체스터 777은 이 세계 기준으로 한참 미래의 무기이다. 풍향과 세기, 소나기의 흐름과 강수량, 행성 자전의 움직임은 물론 거리에 따라서 영점 조절까지 알아서 조절된다. 이제는 저격수가 세부적인 조작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여전히 구시대적으로 총알을 깎고, 낙차를 위해 총구를 올리고, 영점을 끼릭끼릭 끼워 맞춰야만 했기에 순식간에 저격 포인트를 잡는 내 모습은 이곳 각성자와 괴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상당히 신기할 것이다.
“C7 사이트 저격 준비 완료.”
-벌써? 이야, 역시 빠르단 말이야. 난 아직 도착도 못 했다고!
-서둘러 이성수. 네가 유서담보다 선임 저격수면서 느려터져 가지고는.
-아니, 대장님. 유서담이 너무 빠른 거라니까요?
방금 이름이 불린 ‘이성수’라는 인물은 이 세계에서 저격수의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는 사내였다. 총기와 멸망한 세계라는 컨셉에 걸맞게, 이성수의 사격 솜씨는 상당히 일품이었다. 솔직히 나보다 잘 쏜다. 재능으로 따지면 S급 그 이상이겠지. 심지어 그는 특수 능력 ‘감정 공감’을 활용해 대상의 다음 움직임까지 파악하여 완벽한 예측샷을 보여주고는 했다.
다행스럽게도 나 또한 21세기 중반의 에테르 과학장비와 S랭크 신체의 도움 덕분에 이성수와 비슷한 수준으로 활약할 수는 있었다. 나로서는 다행인 점이다.
-준비됐냐?
-옙.
-그럼 시작하자.
김하수의 제이사로 들어온 지도 어언 한 달째.
나는 그와 함께 멸망한 세계를 떠돌며, 괴수들을 사냥하였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코인’을 벌어오기 위해.
-사격 개시!
지시가 떨어지자,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자 빌딩 사이를 헤집으며 달려오던 거대한 거인의 이마에 구멍이 꿰뚫렸다.
···퍼어엉!!
총알이 거인의 이마 내부에서부터 폭발한다. 한 번이 아니었다. 저 멀리, 이성수가 발사한 대괴수 대물저격총에 의해 연속으로 머리가 터져나가는 것이다. 이성수의 총알 또한 내가 마법으로 인챈트해준 것으로, 그 효과는 아주 굉장했다.
-좋았어!
-지금 공격해!
대부분의 생태계에서 괴수의 약점은 머리 혹은 심장이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했지만, 간혹 그러지 않은 괴수들이 있었다. 머리가 잘려나가도, 심장이 떨어져 나가도 움직인다.
그러나 당황할 필요는 없다. 그건 그저, 심장과 머리가 약점이 아닐 뿐 다른 어딘가에 약점이 있다는 의미니까. 차근차근, 차분하게 찾아서 공략하면 된다.
각성자 부대원들이 건물 외벽 사이를 뛰어다니며 불꽃을 발사하거나, 전격을 방출해댄다. 누군가는 전격이 흐르는 로프로 거인의 몸을 속박하였으며, 누군가는 괴수의 가슴팍에 대고 총질을 해댔고, 누군가는 대포를 쏜다.
에테르 코팅이 없는 괴수들이라지만, S랭크 정도 되는 괴수는 피갑이 단단해서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다. 이렇게 합동 공격을 해야만 간신히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쿵, 쿠웅···!
거인이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부대원들이 신나서 총을 더욱 갈겨대었다.
-아라셀리! 한 방 먹여줘!
잠시 뒤, 상공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레이저가 거인의 두개골을 관통하였다. 방어가 취약해진 틈을 타, 아예 무력화를 노린 것! 비록 거인의 약점이 머리가 아니었기에 즉사는 하지 않았으나 머리통이 아예 불타버린 거인은 이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거인은 계속해서 몸을 웅크리기는커녕 전방을 가로막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뭔가 이상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윈체스터를 거두자, 이윽고 거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쿠웅···!!
-유후!
-드디어 잡았군!
-저 지긋지긋한 괴물놈! 이 도시를 아예 헤집어놨어.
거인이 쓰러지자 부대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저 S랭크의 괴물 하나를 잡기 위해 이곳에서 미리 자리를 잡고 준비하여 유인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만 거의 사흘이었으니까.
그런데, 뭔가가 찝찝하다.
“잠깐만요. 아직 끝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뭐가?
-여긴 저놈의 영역이라 다른 괴수는 없어. 이제 안심해도 될 걸?
“아니, 그게 아니라. 마지막에 저 거인이 보인 행동패턴이······ 꼭 뭔가를 지키려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근처에, 새끼가 있을 것 같-”
그 순간.
-끄, 끄아아아악···!!!
멀찍이서 비명이 들려왔다.
저격수 이성수의 목소리였다.
-이성수! 이성수! 무슨 일이냐! 대답해!
김하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을 타고 울렸지만 이성수는 비명을 지를 뿐 대답하지 못했다. 다급히 계단을 타고 내려가 이성수가 포지션을 잡고 있던 위치로 이동한다. 이미 김하수는 건물 상층부를 초인적인 도약력으로 뛰어서, 그에게 도착한 뒤였다.
잠시 뒤 모든 부대원들이 모였을 때, 그들은 참담한 표정을 금치 못하였다.
거인의 새끼로 추정되는 크기 3m의 거인 시체와··· 몸의 절반이 잘려나간 이성수가 보였기 때문이다. 김하수는 다급한 표정으로 이성수를 끌어안았다. 허벅지 아래는 무언가에 뜯겨나간 듯 휑하였고, 그 자리에서 피가 콸콸 쏟아진다.
“아, 윽, 아으···!”
이성수는 본디 왼손잡이였기에, 눈을 부릅 뜨고서 김하수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으나··· 이내 자신의 왼팔이 사라졌음을 깨닫고서는 이를 악물었다.
“이성수. 이성수! 정신차려라, 이성수. 정신 바짝 붙들란 말이야!”
“저, 저는, 괜찮···울컥!”
부대원들이 바닥에 응급 치료 키트를 깔아두고서 모르핀을 세 방이나 이성수에게 맞춘 뒤 지혈을 시작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것으로 보였다.
“······대장님.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출혈이 너무 심해요.”
“젠장, 그럴 수는 없어. 여기서, 이렇게 잃을 수는 없다고···.”
그는 무언가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이성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흐려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장. 이건 숭고한 희생입니다. ···이성수의 희생을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앞으로-”
“닥쳐! 더 이상의 희생은 없다. 나는, 결코 누구도 잃지 않을 거다. 내 목표를 위해 너희들이 희생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어.”
그러더니, 갑작스레 김하수가 허공에 손짓을 하였다. 황금색의 찬란한 반투명한 무언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나자, 부대원들이 경악하였다.
“대, 대장! 설마, ‘나노회복제’를 살 생각은······. 안 됩니다! 여태 모은 코인이 모두 날아간단 말입니다!”
“······그럼, 이성수의 목숨이 이깟 코인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그건 아니지만, 우리의 꿈을 위해 코인을 모으기로 한 게 아니었습니까! 코인은 우리의 목숨을 바쳐서 만들었습니다! 그건, 대장님의 것이지만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단 말입니다!”
그러자 김하수의 손이 잠시 멈칫했으나, 그는 이내 이를 악물고서 말했다.
“모두들 미안하게 됐다. 대장으로서 독단적 판단을 하도록 하지. 우리 모두 함께 모은 이 코인은, 지금부터 이성수의 목숨을 살리는 데에 사용한다.”
그 이후로는 망설일 것도 없이, 이성수는 나노회복제를 구입하였고 그대로 주사를 투입하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성수의 팔다리가 서서히 재생되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물론 부대원들 역시 깜짝 놀라서 입을 쩌억 벌리더니, 모두 무릎을 꿇었다.
“쿨럭···!”
“이성수! 정신이 들었나!”
“이성수 중위!”
그가 눈을 뜨자, 김하수가 다급히 그를 보챘다. 그러자 이성수가 자라난 왼팔을 이용해, 김하수의 얼굴을 밀어내었다.
“대장··· 부담스러우니까 좀 떨어지십쇼······.”
그러면서, 그의 시선이 김하수의 손으로 향했다.
나노회복제. 저것이 뭔지는 이성수도 안다. 힘들게 모은 코인을 대량으로 사용했다는 사실까지도, 잘 안다. 그 소중한 코인을, 모두 함께 모았던 그 코인을, 고작 자신의 목숨 하나를 살리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을 이성수도 잘 안단 말이다.
피가 완전히 멎었다. 고통이 사라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 생각이 들자 이성수는 문득 눈물을 왈칵 흘렸다.
“젠장, 젠장할··· 죄송합니다, 대장. 죄송합니다. 죄송한데··· 염병,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로······ 정말 고맙습니다···.”
이성수는 한동안 오열하였고,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적정 개연성을 초과하였습니다.]
[완결 에피소드 ‘세상은 두 번 멸망할 수 있는가(1)’가 시작됩니다.]
*
그날 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나기 내리는, 그런 평범한 저녁.
제이사 요새의 하늘에 악마떼가 나타났다.
아니, 그저 평범하게 날개가 달린 괴수였을 뿐이지만······. 그 압도적인 위용은 가히 악마라고 착각할만 했다.
“공습이다!!”
“화스트페이스!”
“산업시설 전부 전시체제로 전환! 비상계엄령 발동!”
“주민들 전부 지하 대피소로 대피시켜!”
위이이잉-!
사이렌이 울리며 제이사의 병력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요새는 비행형 괴수에 대한 대책까지도 어느 정도 되어있어, 어지간한 괴수는 이 근처로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덕분에 비행종을 상대할 일이 거의 없었거늘.
“······너무, 많은 거 아냐?”
하늘을 새카맣게 덮은 먹구름이 전부 괴물이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분명, 비행종에 대한 대응책은 어느 정도 마련이 되어있다. 그러나 저렇게까지 많은 괴수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믿을 수, 없군.”
김하수는 막막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은······ 정말로 세상을 버리려 하시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절망을 세상이 인간들에게 하사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요격 미사일! 발사!
투슈우웅···쿠콰콰쾅!!
하늘에서 불꽃이 번쩍이며 수백, 수천 마리의 악마 시체가 추락한다. 하지만 1초도 채 되지 않아, 그 빈자리를 또다른 악마가 메꾸었다. 끝이 없는 괴수의 탄생. 그들은 이 근방에서 인간이 가장 많이 밀집해있는 제이사를 명백히 노리고 있었다.
‘끝이다.’
김하수의 속마음이었다.
‘이길 수 없다.’
그래, 이 정도의 병력과 무기 기술로는 결코 저것들을 상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눈앞에, 황금색 반투명한 창문이 나타났다.
황금마차.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문명적 유산을 구입할 수 있는 각성 능력.
“지금부터, 나는······.”
그리고 그가 상점창에서 무언가를 구입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김하수의 손을 낚아채며 저지하였다.
“안 돼요!”
“······! 무슨 짓이냐!”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아라셀리. 그녀는 우의도 쓰지 않고서 급히 달려오느라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어깨와 목에 어지러이 달라붙어 있었다.
“상점창을, 더 이상 사용하면 안 돼요! 멸망이 가속화될 뿐이라구요!”
“그게 무슨··· 헛소리는 지금 들어줄 수 없다. 꺼져라. 오늘따라 섹시하지 못하구나, 아라셀리 소위.”
“아, 안···!”
마법으로라도, 막아보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김하수가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데에는 그저 간단한 손동작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화아악! 번쩍!
요새의 외벽에 갑작스레 기형적인 궤도를 가진 포신이 소환되었다.
입자가속포(粒子加速砲).
미래 과학기술의 총집합체.
“발사하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홀린 듯이 미래 무기의 사용법을 본능적으로 깨우치고서는 입자가속포를 조작하였다.
······번쩍!!
방금까지 보여주었던 화력은 장난이었다는 듯, 새하얀 섬광 다섯 줄기가 하늘을 갈라놓았다. 그것이 지나간 길은 모조리 재가 되어 사라졌다.
-좋아! 효과가 있습니다! 대···장, 님?
-···저게, 뭐야?
환호성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
먹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김하수는 알고있다. 저 먹구름은 전부 ‘군집체’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괴물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먹구름에서 내리는 괴물의 씨앗에 맞은 것들은 모두 괴물이 될 수 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여태 그러지 않았을 뿐.
-대장······ 먹구름이, 눈을 떴습니다.
비유가 아니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에서 붉은색 눈동자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괴수의 씨앗을 뿌리기 위한 주머니 그 자체가, 괴수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하수는 덜덜 떨리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문득 다시 바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황망한 눈으로 먹구름을 쳐다보는 아라셀리가 있었다. 그는 홀린듯이 아라셀리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너는······ 넌, 이 상황을, 이렇게 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나?”
예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었다.
자신이 상점창에서 무언가를 구입하면, 어째서인지 곧바로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건이 터지고야 마는 것이다.
미래형 화염방사기를 구입하면 다음날 불로 지져서 쓰러뜨릴 수 있는 괴수가 나타났고, 미래형 수압커터를 구입하면 다음날 수압커터로 쓰러뜨려야만 하는 괴수가 나타난다. 마치, 상점창과 괴수의 등장이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그는 모른다.
그것이 ‘개연성’이라는 사실을. 주인공이 능력을 얻으면, 반드시 다음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능력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어떤 세상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모르더라도.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자꾸만 같은 일이 반복되면···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지 않겠는가?
“말해줘. 제발. 부탁이야···.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곳에 온지 고작 한 달밖에 안 된 아라셀리에게 매달리는 게 바보같은 짓이란 것 정도는 김하수도 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뭔가를 알고있을 것만 같았다.
“···당신이, 이 세상의 ‘원천’을 모두 소모하고 있어요. 그 상점창이라는 능력으로.”
“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가 김하수의 내면을 꿰뚫었다.
“세상이 멸망하는 날, 이 세계의 모든 군대가 사라졌다고 들었어요. ···그들은 전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왜, 하필 멸망하는 날 군대가 사라짐과 동시에 당신에게 상점창이 나타났을까요?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당신에게 주어졌다는, 그런 생각 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그, 건······.”
“사실.”
아라셀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아니 저희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어요. 당신이 이 세상의 원천을 남용하게 될 경우, 결국 세상에 끝이 다가오기 때문이죠. ······지금처럼요.”
“무슨 소리야···. 세상은 이미 끝이 났···.”
“아뇨. 세상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어요. 문명이 멸망한 거지, 인류가 멸종한 건 아니잖아요. 인류는 망해버린 문명을 그리워하며, 결국 일어설 것이고, 언젠가는 다시 문명을 되찾을 거예요. 망해버린 세상을 되살릴 기회가 있다는 거죠.”
하지만.
“완전한 의미의 ‘멸망’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괴수도, 인간도, 그리고 세상도.”
그녀는 꽤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모조리 사라져요.”
털썩.
김하수가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일어서서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는 아라셀리에게, 한 남자가 매달리는 구도가 된 것이다.
“그럼···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지? 이, 이제부터라도 상점창을 쓰지 않는다면······.”
“이미 늦었어요. ···정말로 죄송해요. 당신이라는 존재는,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원천을 깎아 먹어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죽어야 세상이 살아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겠는가.
여태껏, 그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만으로 살아왔는데 말이다.
“···당신은 아마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거예요. 당신이 사랑했던 모두가 죽고, 쓰러지고,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도 세상은 당신의 죽음을 거부할 테니까.”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은 멸망한 세계에서 모두가 원하는 일이겠지만······. 모두를 구원하길 바라는 김하수에게는 더 없는 끔찍한 저주일 것이다.
“네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여전히 그녀의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 저런 한 마디 들었다고, 대뜸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상점창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세상이 끔찍하게 돌변해버리는 건··· 여태껏 겪어왔고, 지금도 이렇게 겪고 있으니, 확신할 수밖에 없겠어.”
더 이상 상점창을 사용할 수 없다. 무언가를 꺼내는 순간, 또다른 악마가 나타날 것이니까.
그렇다면, 하늘마저도 인류를 적대하는 지금 이 순간. 김하수가 사랑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섹시한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없어 보이는군.”
<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야(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