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야(2) >
오전 6시 30분.
빰빰♪울리는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눈에 뜨인다. 잠을 푹 자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다. 상체를 일으켜 모포를 갠 뒤 군화를 신고서 평상에 발을 내리자, ‘선임’들 역시 잠에서 깨어난다.
그렇다. 선임들이다. 나보다 먼저 제이사에 들어와 ‘대괴수 특수전투부대원’이 된 선임들.
“신병. 일찍 일어나네?”
“예.”
“야야, 신병. 너 그 여자랑 어디서 어쩌다 만났냐? 멸망 전에도 아는 사이였어?”
“예.”
“크으으, 진짜 예쁘던데······.”
“김중위님 나이를 생각하셔야지 말입니다. 완전 범죄······.”
“뭐 이 새끼야? 그냥 예쁘다고!”
참고로 김중위의 나이는 스물 후반이다. 나보다 어린 건 물론, 아라셀리보다도 어리다.
“그래서, 어쩌다 만났냐고?”
“그냥 만났습니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대답하기도 귀찮다. 어차피 깊은 관계를 유지할 사람들도 아니니까. 김하수의 밑으로 들어올 때부터 생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군인 신분이 되면 여러모로 귀찮은 점이 많이 생길 테니 최대한 인간관계를 줄이는 편이 옳다.
“아무 관계도 아니긴!”
옆에서 선임 한 명이 소리를 버럭 지른다. 내가 다이아몬드 하나가 달린 베레모를 쓰며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어제 내가 아라셀리 소위한테 물어봤는데, 둘이 사귀는 사이라며?”
“···예?”
“그러니까 자기한테 추파 좀 던지지 말라고 선 긋더라. ······솔직히, 좀 마음 상했어.”
“아니, 사귄다니. 그게 무슨-”
“야. 근데 신병이 하면 범죄 아니고 내가 하면 범죄 아냐?”
“신병은 딱 봐도 스물하나에서 둘 정도로 보이지 말입니다. 어차피 아라셀리 소위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딱 마지노선으로 보입니다.”
“끄응···. 하긴, 세상이 멸망한 마당에 범죄가 어딨냐. 거 뭐냐, 바다 건너에서는 대규모 생존자 집단 리더가 아예 하렘을 만들었다더군. 어린애나 노인이나 가릴 것 없이. 미친놈이지 완전.”
“근데 난 하렘보다 신병이 더 부러워. 크으, 아라셀리는 멸망 전에 태어났으면 이미 슈퍼스타가 됐을 텐데······.”
내 주위를 둘러싸고서 아침부터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이 얼빠진 선임들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라셀리. 대체 무슨 소릴 하고 다니는 거냐······.’
하긴, 제이사의 군부대에서도 여자는 꽤 희귀했고, 심지어 굉장한 미인인 아라셀리가 들어왔으니 군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군인들의 관심사라고 해봐야 오늘 저녁 메뉴에 해물비빔소스가 나오느냐에 대한 여부와 예쁜 여자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자꾸만 추파를 던지는 군인들에게 고작 하룻밤만에 싫증이 난 것이고, 아예 애인이 있다고 거짓말을 쳐버린 것이다.
그래도,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점으로 다가왔다. 하루하루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내일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데에 급급한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가 없으니까.
잡담과 농담, 그러니까 지금처럼 농담따먹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김하수의 테두리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어느 정도 멸망한 이 세계에서도 안락한 삶을 살 수가 있다는 의미다.
대충 환복을 끝마친 뒤 일어선다. 군복은 새까만 색이었는데, 지구 한국군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었다.
‘이런 놈들이 정말 특수부대?’
내가 아는 특수부대는 철저하게 각 잡힌 언동과 행동을 하며, 눈빛만으로도 생사람을 기절시키는 그런 무시무시한 놈들인데, 이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특수부대로 보이지 않았다.
‘···능력은 진짜인 것 같지만.’
고랭크 각성자가 희귀한 이 멸망한 세계에서, 저들은 하나하나가 최소 B랭크 이상의 초능력자였다. 지구에서도 그렇게 귀하다는 B랭크 각성자가 여기에는 무려 서른 명이 넘게 있는 것이다. 김하수는 정말로 뛰어난 개인을 모아 집단을 형성하여 괴수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고있던 것.
애초에, 이곳의 괴수들에게는 에테르 보호막이 없어서 열병기에도 취약하다지만 어찌 되었든 각성자들이 총 들고 싸우면 훨씬 더 강력하지 않겠는가?
잡담 떨기를 잠시, 시간이 되자 부대원들은 순식간에 막사에서 빠져나가 실내 연병장으로 집합하였다. 그 널찍한 공간에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 이미 집합해 있었고, 김하수가 아침 점호 보고를 받고 있었다.
아침 점호야 뻔하니 뭐, 패스하고 넘어간다 치자.
이후로 아침 체련단련이랍시고 다같이 뜀걸음을 시작하였는데, 가장 선두에 김하수가 서있었다.
“뜀걸음간에! 군가를! 실시한다! 군가는! 달려라! 허니!”
““달려라! 허니!””
“요령은! 쿨하고! 섹시하게! 군가 시작! 하낫 둘 셋 넷!”
나는 그 뒤를 따라서 뛰며,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을 하였다.
고작 하루밖에 그를 보지는 못했지만, 김하수는 이 요새의 사람들에게 진심이었다.
누군가가 땅을 파고 있으면 김하수 또한 같이 땅을 팠으며, 누군가가 고기를 다지고 있으면 김하수도 그것을 도와주었고, 채굴장에서는 드릴질을 해댔고 짐을 옮길 땐 본인이 앞장서서 가장 많이 들고 옮긴다.
병력을 다스릴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카리스마있게, 그러나 병사들에게 친근하게.
누구도 김하수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누구나 김하수를 존경하였고, 진심으로 김하수를 뒤따랐다. 군인들을 비롯하여 제이사 요새 안에 있는 모두가 그를 웃으며 따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김하수는 정말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고,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오후가 되었다.
훈련을 끝낸, 서른 명의 대괴수 특수부대원들은 김하수의 호출을 받아 조용한 공간에 집합하게 되었다.
“점심 먹어서 졸리지 말입니다.”
“시끄럽다 인마.”
“저녁으로 해물비빔소스 또 안 나옵니까?”
“이, 이 미친놈이···. 그걸 진짜 맛있다고 처먹냐?”
“예? 맛있지 않습니까?”
“입맛이 완전히 뒤틀렸군.”
김하수는 장난을 치며 특수부대원들을 탄약고로 이끌었다. 인화물질을 모조리 반납한 뒤 탄약고에 들어서자 탄약을 관리하는 수많은 병사들이 경례를 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존경심이 한가득했다.
“딱구야! 바쁜데 미안하군.”
“어, 대장님 오셨습니까? 그리고 저 지금은 탄약반장입니다.”
“오늘도 탄약고에서는 섹시하지 못한 냄새가 나는군.”
“그냥 화약냄새 개같다고 하십쇼.”
“됐고, 딱구야. H-r2 탄약보관함 대충 쿨하고 섹시하게 꺼내와 봐.”
“아니, 대장님. 그거 하나 꺼내려면 저거 다 뒤집어 까야 되는데요.”
“까라면 까.”
“아, 예···.”
···정말 군기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군대였다.
잠시 후, 탄약반장이 H-r2라고 불린 보관함을 꺼내서 가져오자 김하수가 그것을 열어 총알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걸 본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저건··· 에테르 코팅 탄환? 아니, 다른 기술인가?’
에테르 코팅 탄환과 비슷하지만 살짝 다른, 하여튼 지금 이 시대에는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기술이 김하수의 손에 들려있었다. 물론 지구와 비슷하다지만 다른 세계이기에 가능할 수도 있으나······.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게 뭔 줄 아나?”
“예. 그거 대장님만 쓰시는 총 ‘WH-102’에 들어가는 총알 아닙니까?”
“맞네. 저거에 닿으면 중형괴수 놈들도 펑펑 터지고 그랬지.”
“저희도 그거 주면 안 됩니까?”
부대원들이 알아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김하수가 자주 사용했던 모양. 그러나 어째서인지 보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곧바로 드러났다.
“그건 불가능해. 이건, ‘미래의 기술’로 만들어진 총알이다..”
“······!!”
삽시간에, 부대원들이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모두 입을 다물었다. 슬슬 농담을 칠 시기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각성 능력, ‘상점창’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얼마 전부터는 미래의 기술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개발했었을 수도 있는 기술이었겠지. 그건 중요치 않아. 비싼 코인을 내기만 한다면, 내가 미래의 기술을 구매할 수도 있다는 사실 하나만 중요했어.”
그는 총알을 내려놓고서, 안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탄약반장. 지하창고 키 가져와.”
“······예.”
김하수와 특수부대원들을 따라서 이리저리 꼬인 미로같은 공간의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가자, 희미한 불빛 하나만으로 반짝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자물쇠는 물론 최첨단 잠금장치까지 지문 인식을 통해 해제한 뒤 들어서니 아무것도 없이 텅빈 공간에 유리보호관 하나가 대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성인 남성의 얼굴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를 가진 ‘미사일’이 있었다.
“······저게, 대체 뭡니까?”
뭔가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김하수는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통칭 ‘지대공소멸탄’이다. 터뜨리면 그대로 깔끔하게 반경 1km정도가 싸그리 증발해버려. 그 어떤 보호막도, 그 어떤 두터운 장갑도 저걸 막을 수는 없다. 더 좋은 점은, 일반 화약탄이나 원자 폭탄과는 달리 후폭풍이 거의 없어. 미사일을 사용한 직후에도 씨앗을 심기만 하면 새싹이 돋아난단 말이다.”
“예···?”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굳이 여기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어젯밤, 특수부대가 거의 완성되었다. 아라셀리 소위와 유서담 소위. 그들의 능력은 아주 특별하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자네들 못지않게 대단해. 앞으로 큰 도움이 되어줄 터다. ···즉, 슬슬 ‘우리의 염원’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단 거지.”
김하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어떤 뜨거운 열정이 담겨있었다.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그런 열정이.
그는 대뜸 우리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다.”
에코붐 세대, 베이비붐 세대, 밀레니얼 세대 등등. 그동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세대들의 특징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많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종말 세대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종말 세대의 특징은, 바로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는 아련한 눈으로 미사일을 둘러싼 투명한 관을 쓰다듬었다.
“이 미사일, 그래. 미래의 기술이야. 상점창에서 구매한 것이지. ···덕분에, 꾸역꾸역 힘들게 모았던 ‘코인’을 모조리 소모해버렸어.”
······어젯밤 떠올랐던 ‘과도한 개연성의 소모’는 아무래도 김하수가 미래의 기술을 구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자네들은 초대괴수라는 존재를 익히 알고 있을 터다. 우리가 ‘군집체’라고 부르는 그것.”
“예. 알고 있습니다.”
“그건, ‘괴수의 어머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구상에 몇 마리나 더 존재하는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우리 코란 반도의 모든 괴수를 북부 평원의 군집체가 생산하고 있는 건 틀림없다. 섹시하지 못한 일이지.”
그건 전혀 몰랐었다. 하긴, 내가 이 세계에 대해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는가.
“질리게 쏟아지는 이 소나기가 바로 ‘군집체의 씨앗’이다.”
바깥에는 여전히, 여전히, 계속해서, 몇 년 전부터 끊이지 않고.
소나기가 내렸다.
“이 씨앗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이 소나기를 맞으면 통상 몇만 배의 속도로 진화를 시작한다. 그래. 벌레든, 동물이든, 괴수든, 아니면 흙바닥이든 콘크리트벽이든 지나가던 깡통이든. 뭐든 괴수로 변할 수 있어. 아무리 괴물을 섹시하게 때려 잡아봐야, 결국 저 소나기를 멈추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는단 이야기지.”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북부 평원으로 갈 것이다. 군집체를 죽여서 이 소나기를 멈춤과 동시에, 우리의 땅을 되찾는 거야. 땅을 개척하고, 농사를 짓고, 국가를 세우기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그래서 나는 이 미래의 기술을 빌리기로 한 거지.”
그러면서 그는 미사일이 들어있는 유리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모든 꿈이 담긴 미사일이야. ···정말, 섹시하게 생기지 않았나?”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김하수는 멸망한 세계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능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능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세계의 멸망이 가속화된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이 미사일까지만 사용해서, 군집체를 사냥하는 데서 그친다면······.
“그런데, 이 미사일을 상점창에서 구매했을 때 중요한 사실을 놓쳤더군.”
김하수는 쓰게 웃었다.
“지대공소멸탄은 미래의 기술이야. 당연히 미래의 미사일 발사장치가 필요하지. 지금의 우리는 이걸 쓸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코인을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모은다면······. 우리의 꿈을 드디어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이 미사일을 쿨하게 날려서 군집체를 없애버리고, 그 땅을 섹시하게 차지해서 깃발을 센스있게 꽂는 거야.”
김하수의 진심어린 말에 군인들이 모두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쓸데없이 폼잡고 그런 거 부탁하지 마십쇼. 그럴 필요도 없이 애초부터 저희는 죽을 때까지 대장님을 따라가기로 했으니까!”
“그깟 괴수 따위 백만 마리든 천만 마리든 잡아서 코인! 벌어오겠습니다!”
“우리의 땅,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이 한목숨 바쳐서 그 지대공 발사장치인지 뭔지 구입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부대원들의 눈 사위가 붉어진다.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이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리더가 우리 모두를, 그리고 세상을 위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또 고맙겠는가.
그러나.
결국, 상점창을 사용한다는 건 이 세계의 개연성을 소모한다는 의미. 만약 김하수가 이 이상 상점창을 사용한다면, 심지어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미래의 기술’을 구입한다면······.
<이 세상이 완전히 끝이 날 겁니다. 서담.>
이곳은 더 이상 그 어떤 생명도 태어나지 않고, 그 어떤 생명도 살아갈 수 없는 세계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상점창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설령, 인류의 부흥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내일을 위해, 오늘 푹 쉬어두도록.”
이내 김하수가 부대원들을 이끌고 나가자, 나 또한 뒤따랐다.
<서담···.>
‘알아. 죽일 거야.’
이건 단순히 주인공이 착하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나는 주인공이 세상에 해악을 끼친다는 이유로 살인 청부를 받기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까.
처음에는, 내가 살고 싶어서.
그 다음에는 강해져서 내 꿈을 이루고 싶어서.
그래서 주인공을 죽여왔다.
나는 이기적인 쓰레기다. 주인공들과 다를 것도 없다. 상대방이 착하든, 나쁘든 그냥 죽여왔다. 그런데 갑자기 청부 대상이 착하다고 해서, 정의롭다고 해서.
죽이기를 주저한다?
그건 내가 여태 죽여왔던 모든 생명을, 그리고 내 신념 그 자체를 모욕하는 짓이다.
나는 이기적인 쓰레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인간성이 완전히 결여되었냐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나만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모든 인간성을 억지로 거세하려고 했을 뿐.
그래, 아주 약간의 인간성 정도는 나에게도 남아있었다.
당장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어간다면 구해줄 것이고, 굶은 아이를 끌어안은 어미가 내게 손을 뻗으면 빵 한 조각 정도는 나눠줄지도 모른다.
‘죽이긴, 죽일 거야. 죽일 건데······.’
멸망한 세계에 너무 오래 있었다.
나는 이 분위기에 동화되고 말았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를 살아가며 인간이기를 포기해야만 했던 이들이 서서히 광기에 젖어 들어가는 광경을 보았으며,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저지르는지를 보았고, 그곳에서 작은 희망 하나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최소한 김하수가 원했던, 멸망한 세계에서 인간들의 문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더 나은 방법으로 죽일 방법을 궁리해볼 생각일 뿐이야.’
<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야(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