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36화 (136/251)

<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야(1) >

문화백화점은 여타의 생존자 그룹에 비해 여러모로 갖춘 것이 많았다. 비상 사이렌을 비롯하여 괴수들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설치된 태양열 조명, 각 초소의 무전기 등등. 더 이상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현대 문물은 여전히 아포칼립스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그들은 9.5t의 트럭을 개조하여 거의 전투차량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표면에 전기가 흐르는 가시철조망을 구비하였고 뒤쪽에는 강철을 몇 겹이나 덧대어 어지간한 괴수가 와서 침입할 수 없는 두터운 벽이 있었다.

나와 아라셀리는 통칭 청룡이라 불리는 그 푸른색의 기다란 트럭을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가는 길에 괴수를 몇 번 마주치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트럭 위쪽에 달린 기관총이 쏴서 죽였고 조금 큰 괴수가 나오면 미사일을 펑펑 날려대었다. 어차피 이 근방의 길은 죄다 닦아놓아서 속도를 낼 수 있으니, 소음을 내도 된다나 뭐라나.

“이런 건 다 어디서 구했습니까?”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장르를 보면, 대부분은 멸망이 벌어진 이후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늘상 궁금했던 점이었는데······.

“거래를 했지. ‘제이’사와.”

“제이?”

“그래. 김하수의 요새를 통칭하는 단어야.”

“오······.”

하긴, 김하수는 ‘상점창’이라는 이능력을 이용하여 뭐든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외부와 거래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와 안면이 있는 박한서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 말고도, 제이사는 외부와 거래를 자주 하는 편이야. 각성자와 병력의 지원도 자주 나가고. ‘코란 반도’의 북부에 높이 10m의 거대한 벽을 세워서 괴수의 침입을 거의 틀어막은 것도 제이사가 도와준 덕분에 가능했다. 그놈들이 아니었으면 진작 코란국은 멸망했겠지.”

“······.”

들으면 들을수록, 김하수라는 인물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생각이 들게 하였다.

김하수의 요새가 세워져 있다는 ‘예런도’라는 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차량을 탑승하니 괴수에게 막힐 일도 거의 없는 데다가 속도도 빠르니,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었다.

“저기가······.”

쏟아지는 소나기 너머로, 거대한 섬이 보였다.

높이 12m의 콘트리트벽으로 둘러싸인 그 섬은 레이더 사이트 시설로 인해 철저하게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곳곳에는 파라볼라 안테나가 지어져 있었으며, 벽에 뚫린 벙커로는 수많은 병력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지어진 터렛에는 대공 미사일 발사장치가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저것으로 하늘에서 날아오는 A랭크 괴수떼의 습격을 막아낸 전적이 있다고 한다.

지형으로 보건대 예런도라는 섬은 지구 서울의 여의도와 비슷한 모양. 다만, 이곳의 여의도는 위치가 인천이었으며 섬이 두 개나 있었다.

“본래는 예런도로 통하는 다리가 일곱 개나 있었는데 여섯 개를 제이사에서 폭파시켰다. 이제는 예런대교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

당연하지만, 그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예런대교는 최첨단 방범 시스템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있다고 한다. 빗물로 인해 시야가 흐린 다리를 한참이나 청룡을 타고서 달리자, 멀찍이서 확성기가 울려퍼졌다.

-정지! 신원을 밝혀라!

정차한 뒤, 박한서가 가장 먼저 우의를 뒤집어 쓰고서 하차했다. 나와 아라셀리 또한 검은색 우의를 입고서 뒤따르자, 철저하게 무장된 군인 다섯 명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미친···. 장비 장난 아닌데.’

내가 사는 시대인 2050년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떨어지지만, 저들의 장비는 현대과학의 총산물이라고 봐도 좋았다. 온몸을 감싼 사슬갑옷과 상체를 덮는 방탄복, 온갖 광학 장비는 물론이요 레이저 도트 사이트가 달린 최신식 돌격소총까지.

에테르 보호막이 없는 이 세계의 괴수들은 저런 군인 한 중대만 나서도 어지간해서는 썰려나갈 것이며, 저 튼튼한 사슬갑옷을 단번에 찢어버릴 수 있는 괴수는 극히 드물 것이다.

‘사슬 갑옷이라.’

지구에서도 에테르 슈트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대괴수용으로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사용했던 사슬 갑옷을 채택했다고 했던가. 어느 세계든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지구와 유사한 문화와 과학이 발달했겠지.

“박한서다. 김하수 회장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다.”

“···대장님께 보고드려. 박한서가 왔다고 하시면 금방 답하실 거다.”

그들의 허리춤에 달린 세열수류탄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에테르 장비가 아닌 이상 내 장비에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까지 생각하고서 안심했다. 아라셀리야 뭐, 마력은 5%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도 저 정도는 눈 하나 깜짝 안할 것이다.

‘광휘의 갑주 수복률은?’

[현재 71% 진행중입니다.]

방호윈에게 크게 당해, 갑주가 파손되어 지금은 코트 안쪽에 1등급의 얇은 경량형 에테르 슈트를 입고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히어로 등급의 아이템에는 [자동 장착] 기능은 물론, [자동 수복] 기능까지 있어서 인벤토리에 넣어두기만 해도 서서히 복구가 되었다.

-치직, 아아. 들리나?

무전기, 가 아닌 쌍방향 통신기로 추정되는 무언가에서 김하수의 시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잘 들린다.”

-하하! 박한서! 오랜만이군! 여전히 섹시하고 쿨한 얼굴이야!

“칭찬으로 듣지.”

-드디어 우리 회사에 들어올 생각인 건가?

“얼마든지. 내 부하들을 받아준다면.”

그러자 김하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말했을텐데. 우리는 ‘식인’ 경험이 있는 자들은 결코 받지 않아. 인간의 맛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강렬해서, 한번 맛본 이들은 영원히 그 맛을 잊지 못해. 설령 네 동생들이라 할지라도 그건··· 어쩔 수 없어.

“······.”

박한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건가······.’

일전에 지하철 생존자들 역시 김하수의 밑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제 알겠다. 김하수에게는 식인 경험이 있는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철저하게 검증을 하여 내부로 사람을 들이는 것이다.

“뭐··· 됐다. 그보다, 손님을 데려왔다. 너에게 딱 쓸모있는 놈들이야.”

-손님?

“그래. 전투요원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 대신 이 친구들을 데려가.”

-흐음···. 나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은 받지 않는데. 실력에는 자신 있나? 한쪽은 어린 여자아이에, 한쪽은 20대 초반의 청년. 영 불안한데 말이지.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뭐! 그래도 우리 박한서가 데려온 친구들이니까, 실력을 증명할 기회 정도는 줘도 되겠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라셀리가 허공으로 살짝 발을 떼었다. 군인들이 놀라서 주춤, 뒤로 물러선다. 몸에서 희미한 광채를 내며, 다리의 끝으로 날아서 이동한 그녀는 난간에 발끝을 걸친 뒤 손가락을 총알 모양으로 만들어 한쪽 눈을 감아 어딘가를 조준하였다.

목표는 바다 위를 둥실 떠다니는 거대한 거북이 형태의 괴수.

손끝에 마법진이 맺히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조준, 사거리 포착의 주문을 생략해서 마력을 아꼈어. 그리고 스스로 조준하는 건가?’

이계를 여행하며 마력이 부족해진 아라셀리만의 마법 사용 방식. 완성된 주문에서 글자 하나만 틀리더라도 그대로 ‘리바운드 현상’이 발생할 텐데, 몇 개나 되는 주문을 가볍게 생략하다니.

-오··· 각성자인가?

“보면 안다.”

이내, 아라셀리는 허공을 향해 손가락으로 총을 발사하는 시늉을 하였고.

노란빛의 레이저가 투슝, 발사되더니 거북이의 머리통이 정확히 꿰뚫리며 사망하였다.

-······이건, 좀, 놀라운데. 내가 귀빈을 홀대했군.

“저게 끝이 아니다. 어젯밤 저 아이는 S랭크의 괴수를 단독으로 사냥해서, 우리 백화점을 구출해주었어.”

-S랭크를 단독으로? 믿을 수 없군, 믿을 수 없어···.

아라셀리의 임팩트가 워낙 강력했는지, 김하수는 내쪽을 신경쓰지도 않았다.

“저쪽 청년도 상당한 실력자다.”

“네! 제 교수님이세요!”

-오오, 정말이냐? 이거 정말 섹시한 하루가 되겠는데!

“······.”

아라셀리의 말을 듣고서 나를 무슨 스승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혀 아니다. 그래도 뭐, 원래의 아라셀리에게는 발끝에도 못미칠지 몰라도 약해진 그녀의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다.

지금의 내가 공개할 수 있는 패는 총 두 개다.

S랭크의 신체 능력과 다양한 기동성, 윈체스터와 화분의 도움을 받은 C~B랭크 수준의 마법. 이 세계에서 S랭크의 능력치는 지나치게 눈에 띌 가능성이 있고, 김하수를 언제 상대하게 될지 모르는 마당에 내 모든 것을 공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나는 미리 등에 매고있던 윈체스터를 들었다.

-총이라.

각성자 또한 개인화기를 자주 채용하기는 하지만, 맨손으로 장거리의 괴수를 처치했던 아라셀리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해보일 것이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눈에 띌 생각은 없었으니까.

윈체스터를 일부러 멋드러지게 한바퀴 빙그르르 돌려서 장전한 나는 반대쪽 다리의 펜스로 다가가 한쪽 발을 걸치고서 헤엄치는 괴수를 조준하였다.

그리고, 격발.

타앙···!

총성과 동시에, 멀리서 고개를 삐죽 드러내었던 기린의 목에 단숨에 박힌다. 하지만 그 괴수는 목과 머리가 약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서 두터운 가죽을 뒤덮는 방향으로 진화했기에 즉사시킬 수는 없었다.

-흠······.

살짝 실망한 듯한 김하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파지지지직!!!

괴수의 온몸에 전격이 흐르더니, 그대로 즉사해 버렸다.

···거기까지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런데, 갑작스레 스파크가 하늘 높이 5m정도 벼락처럼 높게 치솟더니, 사방으로 번개가 튀어 반경 10m 이내에 있던 모든 괴수가 기절해 버렸다.

‘뭐지?’

내 마법 탄환에 저 정도의 힘은 담겨있지 않다. 뭔가, 이상하리만치 힘이 강력해진 느낌이었다.

‘화분. 네가 했어?’

마법이 강해졌다면, 내 마법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화분의 영향을 받았을 터. 그녀를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오···? 뭐야, 대체 무슨 탄환을 쓴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김하수가 관심을 표하는 것으로 목표는 완수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거짓말을 했다.

“제 능력은 총알에 속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데···. 그런 총알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할 수도 있나?

“가능은 합니다만, 많이는 힘듭니다.”

-좋아. 아주 섹시해!

아라셀리가 개인의 전투력으로서 자신을 증명했다면, 나는 보조로서 내 능력을 증명했다. 탄환에 속성을 부여한다는 능력은 혼자서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지 몰라도, 여러 사람에게 탄환을 공유한다면 확실히 빛을 발할 수 있을 테니까.

-안 되겠군. 내가 직접 마중나가도록 하지. 그 자리에서 섹시하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아, 예···.”

뚝, 교신이 끊긴다. 적응 안 되는 그 말투를 듣고서 내가 멍하니 서있자, 박한서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건투를 빌지. 나중에 살아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리 말한 뒤 박한서는 왔던 길 그대로 떠나갔고, 나와 아라셀리는 무려 장갑차를 타고서 마중나온 김하수와 함께 제이사의 요새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요새는 생각보다도 더 삼엄했고, 현대적이었다. 온갖 레이더 장비가 영해와 영공을 24시간 탐지하고 있었으며 수십 개의 초소에서는 침입자를 감지하는 초병까지 서있었다. 이건,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그룹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군사기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지어져 비슷한 모양새를 한 건물들 사이를 지나치며, 내 옆자리에 착석한 김하수가 말했다.

“자네, 직접 보니까 더욱 섹시한 눈빛을 하고있는데. 마음에 아주 들어!”

“예······.”

그는 30대 중후반의 동양인이었다. 코란 반도가 지구의 한반도라면, 아마도 한국인일 것이다. 이름부터가 일단 한국인이니까 아마도 맞겠지.

“우리 귀여운 박한서에게 얘기는 들었겠지?”

“특수부대를 편성하려고 하신다면서요.”

“그래. 원래는··· 더 많은 인원을 들일 수가 없는데, 자네들은 내 꿈을 이뤄줄 수 있을 테니까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이 말이지!”

“꿈?”

지나치는 길목마다 막사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거리에는 병사들이 뛰어다니며 체력을 단련하고 있었다.

‘저건 기계 공장이고. 저건··· 정육점? 고기 보관소인가? 곡물 창고에 작은 탄광···. 발전소에 기지국까지. 대체 없는 게 뭐야?’

직접 들어와서 보니, 예런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전된 공간이었다. 현대의 모든 시설들이 총집합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이렇게, 완벽한 환경에서 대체 무슨 꿈을 꾸고 계신 겁니까?”

“저길 봐.”

김하수는 창밖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예런도의 옆쪽에 이어져 있는, 또다른 섬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은 조금 더 컸고, 방벽도 두터웠지만 설비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다만······.

‘···아파트라고?’

수십 채의 아파트. 거기에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민간인들이다. 한 명, 한 명. 나는 그들 모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

“모두가 착하지는 않아. 그래도 인간성을 버리지는 않은, 아주 섹시한 분들이지!”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김하수를 쳐다보았다.

머리 위에는 선명하게 그가 주인공임을 알려주는 각인이 박혀있었다. 즉, 그의 존재는 이 세상을 멸망으로 빠르게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내 꿈은 간단하다. 북부 평야에 들어선 ‘초대괴수’를 물리고, 그 땅을 차지하는 거야.”

“그게··· 대체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이 땅은 너무 비좁아. 내 상점창만으로는··· 저들을 모두 먹여살릴 수 없어. 땅이 필요하다. 농사를 지을 땅이. 그것을 초석으로 해서, 다시 ‘국가’를 세우는 거야. 어때, 아주 섹시하고 센스있는 계획이지 않나? 하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

그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계획이 터무니없어서가 아니었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김하수라는 주인공의 존재는······ 이 세계에서 너무나도 필수적인 존재였으니까.

상점창. 멸망과 동시에 잃어버린 모든 현대 문물을 되찾을 수 있는 그 능력은 멸망한 세계를 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교수님···.”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아라셀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아왔다. 그러건 말건 김하수는 먼곳, 내가 바라보는 곳보다도 훨씬 더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며 그리 웃었다.

“그러니까, 자네도 그 섹시한 능력으로 나를 꼭 도와주었으면 좋겠군!”

“······.”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그리고, 그날 저녁.

[에피소드가 스킵됩니다.]

[세계의 개연성이 대폭 소모되었습니다.]

[세계가 ‘엔딩’을 향해 빠르게 나아갑니다!]

서서히 멸망한 세계에 끝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 우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대야(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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