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한 세계에서 나 홀로(5) >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라는 표현은 소나기가 멈추질 않는 이 멸망한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눈을 뜨고나서 시스템으로 현지 시각을 확인해보니 오전 7시. 나 치고는 상당한 늦잠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라셀리가 창가에 앉아서 화분을 품에 꼭 껴안은 채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곳은 온통 강가인데다가 심지어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서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
‘그나저나, 저 소나기는 대체 뭔데 안 그치는 거지?’
이쯤되면 뭔가가 수상하다. 진작 침수가 됐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강수량이었으니까.
“일어나셨어요?”
“어. 걔는?”
“아, 은빛이는 졸고있어요. 피곤한가봐요.”
“피곤? 졸아? 정령이?”
하긴, 요새 상태가 좀 이상했던가. 그나저나 누구 마음대로 은빛이야. 걔 이름은 화분이다.
가까이 가서 화분을 보니, 뭔가, 뭔가가 달라졌다. ···근데 뭐가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조금 자란 것 같기도 하고?
“내려가자.”
“네.”
적당히 단장을 한 뒤, 1층으로 내려가자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박한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유난히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나는 아라셀리를 이끌고서 별 대수롭지 않게 박한서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가리켰다.
이곳은 2층이었지만, ‘그것’은 여기서도 훤히 잘 보였다. 덩치가 워낙에 컸기에.
“저건······ ‘얼굴 괴물’?”
이곳에 온 첫날밤에 보았던 건물의 위에 축 늘러붙은 그 거대한 괴물과 똑같은 것이, 바로 지척의 건물에 자리를 잡은 채였다.
사람의 얼굴 형상을 띄고 있어 너무나도 끔찍하고 불쾌한 그 괴물은 거대하고 공허한, 그러나 인간을 닮은 검은색 눈동자로 이곳을 빤히 쳐다보았다.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아라셀리가 놀란 눈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저번의, 그건가요···?”
“···그건 아니야. 다른 개체같은데 이 근방에 여러 마리 있나보네.”
몇 주간 도심지를 헤매이면서 얼굴 괴물은커녕 그림자조차 구경도 못해봤는데, 이 백화점은 더럽게도 운이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주인공 김하수의 에피소드 ‘대괴수 특수전투팀을 편성하다(1)’이 시작되었습니다.]
에피소드.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여, 세상이 흘러가는 바로 그 이야기.
그곳에 이 문화백화점이 끼어있었다.
어째서? 라는 생각에 나는 무심코 박한서를 쳐다보았다.
주인공 김하수는 그녀를 원했다. 쓸모가 있어서일 수도 있고, 단순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박한서는 김하수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문화백화점에 동료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데 만약, 문화백화점이 무너진다면?’
홀로 살아남아, 절망에 빠진 박한서가 김하수의 밑으로 들어가 복수를 다짐하는··· 그런 조연 캐릭터의 사이드 에피소드 하나가 뚝딱 완성된다.
‘하지만··· 이 정도 병력이라면 전멸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백화점이 무너지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S랭크의 괴수는 각성자의 평균 수준이 낮은 이 세계에서 상대하기가 벅차 보였으니까. 하지만 개인화기로 무장한 자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이 집단이라면, 최소 절반 이상은 살아남아 거주지를 옮길 수도 있을 터. 어째서 전멸을······.
“당장 전투태세로 들어간다! 서둘러!”
박한서가 명령을 떨어뜨리자 전투 요원들이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어서, 나는 문화백화점이 어째서 전멸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모두 총을 내려놓으시지요! 이 모든 건 전부 신의 뜻입니다.”
바로 사이비 광신도녀였다.
패닉에 빠져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주목하자, 입을 천천히 떼어서 말했다.
“신의 뜻에 저항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 또한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그게 무슨······ 신이 우리를 죽이려고 든단 말입니까?”
“예.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 옛날, 최초의 신자 타틀란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한쪽 팔을 떼어 제물로 바쳤습니다. 우리도 제물을 바쳐, 그 믿음을 증명하면 됩니다!”
“그럴 수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게 진짜라고 믿었다.
정말 놀랍게도 말이다.
희번뜩 떠진 광기어린 시선이 사방으로 향한다. 주춤, 총을 든 사내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총을 눈앞에 두고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 광신도들이 흐느적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당장 총 내려!”
“성녀님의 말씀 못 들었어?! 총이라도 쐈다가 신께서 노하시면 어쩌려고 그러나!”
“모두 무장을 해제하라!”
“총을 내려놓고, 다 같이 기도합시다.”
미쳐버린 사람들의 세계였다.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였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뭐, 뭐야···.”
“진짜 미, 미친 거냐? 쏘기 전에 가까이 오지마! 가까이 오지 말라고!”
총을 들었음에도, 광신도들의 그 순수한 광기는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였다. 그건, 꽤, 무서웠을 것이다.
병력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자 사이비녀가 더욱 더 소리를 질러댄다. 신을 모독하지 말라느니, 그래서는 안 된다느니.
그에 동조하는 광신도들에 의해 혼란이 가중되자, 결국 참다못한 박한서가 하늘을 향해 권총을 쐈다.
탕···!!
우뚝, 소란이 멈췄다. 박한서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다 같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대체 그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침묵.
모든 이들이 그녀를 바라본다.
이 백화점이 무너지면,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식량도, 안전하게 밤을 지샐 수 있는 건물도 없이 저 야생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모두 정신 차리십시오! 살아남기 위해, 모두 무기를 들고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카리스마가 담겨, 백화점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과연, 저 정도라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것 같은······.
“타락했다!! 사탄에게 물든 게 틀림없다!”
······역시, 그럴 리는 없었다.
오히려 광신도녀는 더욱 흥분한 목소리로 박한서를 나무라더니, 마침 바로 옆에 서 있던 아라셀리를 가리켰다.
“그래, 저 여자가 문제다! 어젯밤, 저 여자가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단 말이다! 사탄이 괴물을 이끌고 온 게 틀림없다! 아아, 우리를 심연보다도 더욱 짙은 어둠으로 밀어 넣기 위해···! 신이시여, 이것이 저희에게 내리는 시련이란 말입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아라셀리에게 집중되었다.
“저 유난히도 깨끗한 피부에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외모까지······ 저게 사탄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옳소!”
“사탄을 쫓아내라!”
“쫓아내라!”
상황에 따라서, 가끔은 너무 예쁜 것도 문제가 되는 모양이다.
광신도녀는 박스를 밟고 올라서더니, 아라셀리와 나에게 삿대질하며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속죄해야 합니다. 저들을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서 속죄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속죄! 속죄하라!”
“당장 사탄들을 제물로 바쳐!”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라셀리는 당황하기보단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 아무리 그래도 악마 사냥꾼 출신인데······ 지금 악마 취급받는 건가요?”
···듣고 보니 상황이 상당히 웃기긴 했다.
박한서는 다급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 하룻밤 머물게 해줬으니, 어서 뒷문으로 나가도록 해. 거기는 괴물이 거의 없으니까 안전하게 요새까지 갈 수 있을 거다. 손님에게는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아무튼, 내가 최대한 막을 테니까 서둘러!”
이 와중에도 우리를 어떻게든 살려주려는 그녀의 정의감이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분명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날 텐데, 처음 본 우리들을 챙겨주려 하다니.
이대로 나가도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저런 괴물 정도로는 위기감이 딱히 느껴지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이 상황, 써먹을 수도 있겠는데.’
무심코 빛을 잃은 샛별을 꺼내 들려던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불만 가득한 아라셀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사이비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그간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웬 미친 여자가 시비를 걸어대니 짜증이 확 날 것이다.
“아라셀리. 마력은 어느 정도 있어?”
“네? 아··· 9%정도 있어요.”
“간만에, 스트레스 좀 풀래?”
그러자, 그녀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직후, 아라셀리의 몸에서 빛무리가 터져 나온다.
“당장 저 사탄을······ 어, 어어?”
무어라 외쳐대던 광신도녀는 갑작스레 자신이 사탄이라고 주장하던 소녀가 허공에 둥실 떠오르자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한 채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너무 간단하게도.
“여···신님···?”
“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강림하셨다···!”
9서클 마법사의 마법으로 인해 발생하는 그 찬란한 광휘는, 사이비 신도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신’적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이윽고 아라셀리가 빛살 같은 속도로 백화점에서 빠져나가, 화려한 마법을 난사하여 얼굴 괴물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광신도들이 모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절하였다. 그녀를 나무랐던 이들은 아예 바닥에 머리를 찧어가며 피를 흘리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도 사이비녀는 어버버하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사이비는 악마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게 역으로 되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세상에 누가 알았겠는가? 악마라고 몰아세우던 여자가, 사실은 이곳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여자였다니.
상황을 지켜보던 박한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크게 외쳤다. 광신도녀가 했던 것보다도 더욱 더 크게.
“우리의 구원자를 과연 누가 데려왔는가!”
그러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광신도녀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박한서를 쳐다보았다.
“대, 대장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대장님이십니다!”
아라셀리의 손에서 발사된 새하얀 빛무리가 얼굴 괴물을 비롯하여, 근처에 있던 모든 괴수들을 태워버렸다. ···저러면 여태 모았던 마력이 반토막 나버릴 텐데.
아무래도 힘도 못쓰고 꽁꽁 숨어서 다니느라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았는지, 굉장히 폭력적으로 스트레스를 표출하고 있었다.
덕분에 박한서의 말에는 더욱 큰 힘이 들어갈 수 있게 되어서 나쁠 건 없었다.
모두가 자신들의 대장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가 더욱 크게 외쳤다.
“저 여자는 감히 신의 뜻을 거짓으로 전달하여, 우리 모두를 선동하려 했다! 누가 사탄이란 말인가! 대답하라!”
“그, 그건···!”
“대답하지 못하는가!”
“이, 이하웅입니다!!”
사이비녀의 이름이 아무래도 이하웅인 모양인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친다. 여론 참 쉽게 변한다. 하긴, 신의 이름으로 힘을 얻었는데 진짜 더 신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 버렸으니 그 권력은 거품처럼 쉽게 터지고 마는 것이다.
“내 앞으로 끌어내도록. 너희들이, 직접.”
“자, 잠깐! 이건 모함이다! 신의 뜻이 아니야! 이건, 이건 뭔가가···!”
“닥쳐라!”
단순하고, 폭력적이고, 직선적인 세계였다. 멸망한 세계의 인간이란 깊은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신처럼 모시던 여자를 질질 끌고 와, 오금을 걷어차서 무릎 꿇리는 짓을 할 수 있겠지.
“당장 오늘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내일도 살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이 시대에···. 사람들을 선동하여 죽음으로 이끌려 한 죄는 크다. 너는 네 죄를 알고 있나?”
“나는, 나는 죄가 없다. 이건 모두 신의 뜻이다···! 너희들, 신의 천벌이 두렵지도 않은-”
뻐억···!!
“끄, 우아아아악!!”
박한서가 이하웅의 무릎을 걷어찼다. 가벼운 발길질이었지만, 무릎이 뒤쪽으로 접혀버렸다. 이하웅이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꽥꽥 질러대자 박한서는 그녀의 머리 옆으로 총알을 한 발 갈겼다. 그러자, 끅끅대면서도 이하웅의 비명이 조금 잦아들었다.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아, 끌어올린 뒤 박한서는 눈을 마주하였다. 그러고서는 이하웅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신의 천벌? 이미 신은 우리를 버렸다. 지금 이 꼴을 보고도 모르겠어?”
“가, 감히 신을 모욕···.”
“신이 있었다면, 애초에 세상이 이따위로 멸망하지는 않았겠지. 인간을 버린 신이라면, 더 이상 모실 가치가 없어.”
“천벌, 받을 것이야. 너는 천벌을 받을··· 거다···!”
“그래? 어디 열심히 기도해봐. 제발 나에게 천벌을 내려달라고.”
그리 말한 뒤, 박한서는 이하웅의 한쪽 귀를 그대로 뜯어내었다.
“끄, 끄아아아아아···!!”
생존자 집단의 리더는, 자신의 그룹에서 확실히 주도권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생사가 걸린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의 집단을 살리느냐 죽이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리더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만약, 리더가 어설프게 행동할 경우.
권력욕이 있는, 이를테면 이하웅같은 여자가 종교를 이용해 집단을 선동하는 지금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끌고 가. 지하에 가둬놔. 절대 죽이지 말고.”
박한서는 스산한 표정을 지었고, 이하웅은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두고두고, ‘천벌’을 내가 직접 보여줄 예정이니까.”
“으, 으아아아···!!”
그렇게 이하웅은 끌려가면서 발버둥을 치다가 부하에게 얻어맞아 기절하였고,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아라셀리를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와중,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군. 정말로 위험할 뻔했다. 그래도,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들이라 총으로 위협할 수도 없고 골치가 아팠는데······.”
저 말을 들으니 확실히 알겠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없었더라면, 한 명이라도 더 살리겠다며 발악을 하다가 결국 자신의 소중한 아우들마저 모조리 잃어버릴 예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제는 발생하지 않은 일이니까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그래, 원하는 게 있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원합니다.”
“······.”
그에, 박한서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시원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큰 도움을 받아버렸는데, 거절해서 쓰겠나. 어젯밤의 그 부탁, 들어주도록 하겠다.”
< 멸망한 세계에서 나 홀로(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