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한 세계에서 나 홀로(4) >
서담과 아라셀리가 문화백화점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났을 무렵이다. 무려 열흘간의 강행군.
“저기 보인다.”
세상이 떠내려갈 듯 쏟아지는 소나기 너머로, 건물의 잔해로 이루어진 벽이 6m 높이로 쌓여있었는데 그 너머로 단단히 틀어막힌 문화백화점이 보였다. 일정 거리마다 잔해로 이루어진 ‘초소’같은 것이 있었고, 그 안에는 총을 든 사람들이 2인 1조로 대기하고 있었다.
‘누구지?’
‘방랑자인 거 같은데.’
‘일단 대장님께 보고드려.’
치직, 멀찍이서 무전 소리가 들린다. S랭크의 신체능력을 가진 덕분에 가능한 청력이었다. 어느 정도 일반인들이 소리를 질러서 소통할 수 있는 거리로 접근하자 그들이 총을 겨누고서 외쳤다.
“정지! 신원을 밝혀라!”
서담과 아라셀리는 여느 때처럼 양손을 들어서 항복의사를 밝혔다.
“방랑자입니다. 잠시 머물다 떠날 예정인데, 들여보내주십쇼.”
그러자 저들끼리 또 속삭인다.
‘미친놈들인가?’
‘무장도 하지 않고서 오다니···.’
‘진짜 잠깐 머물다 가려는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배짱을 부리겠어? 급해보이는데······.’
멸망한 세계에서의 안전한 조우법의 제1 원칙.
결코 상대방을 믿지 말것.
조직과 조직, 혹은 개인과 개인이 마주칠 때에는 반드시 최소한의 무장을 해야만 한다. 극도로 예민해진 세계에서 비무장은 결코 득이 될만한 구실이 없었으니까. 자칫 납치되어 인질극이 벌어질 수도 있고, 혹은 노예가 되거나 식량으로 사육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아무런 무장조차 하지 않고서 찾아온 유서담과 아라셀리가 상당히 의아했던 모양.
이내, 대장에게 무전으로 보고를 올린 그들은 서담을 향해 외쳤다.
“가까이 와라!”
천천히 다가선다.
“후드를 벗어!”
그러자, 강행군으로 인해 상당히 피곤한 그들의 민낯이 드러났다. 여태 간단한 스프로 끼니를 때웠기에 그다지 혈색이 좋지도 않았다. 대충 식인종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이내 아라셀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자애라니. 대장님이 싫어하시겠는걸.”
싫어한다? 총을 든 사내의 혼잣말에 의문을 표할 무렵, 저 멀찍이서 검은색 우의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누군가가 호위 세 명을 데리고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대뜸, 6m라는 높이를 가뿐히 점프로 뛰어넘는다.
퉁!
‘여자?’
바로 앞에 착지한 그 대장으로 보였던 자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자였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발톱 모양의 흉터 세 개와,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180cm를 넘는 덩치와 야생적인 실전 근육. 사납고 매서운 얼굴을 가진 그녀는 철저하게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을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였다.
그녀는 유서담과 아라셀리를 한참이나 번갈아보더니, 눈썹을 꿈틀거렸다.
“방랑자라고?”
“그렇습니다.”
“···여길 찾아왔다는 건, 나에 대해 잘 안다는 말일 텐데.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유서담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설명해주었다.
“나는 두 부류의 사람을 싫어한다. 첫째로, 종교쟁이. 그리고 둘째로···.”
그녀는 아라셀리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굳이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고추달린 놈들.”
“······.”
그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유서담 또한 아포칼립스 관련 장르를 몇 번 찾아보았기에 알고는 있다. 여자가 멸망한 세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있는지를.
“전투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여자를··· 남자가 굳이 데리고 다닐 이유가 뭘까?”
유서담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갔다. 여기서 싸워봐야 좋을 건 없다. 변명거리를 찾아야 했다. 가족? 동생? 그런데, 무슨 변명을 한들 통하긴 할까?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는데, 갑작스레 아라셀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소음기 달린 권총이었다.
흠칫! 대장을 비롯하여 경비초소에서 대기중이던 호위와 유서담까지 당황하는 그 순간, 그녀는 바로 옆쪽으로 권총을 겨누어 푝푝푝! 연달아 세 번 쏘았다.
그러자, 건물의 상층에 숨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던 괴수 세 마리가 바닥으로 추락하였다.
퉁, 투퉁!
그런 괴물의 사체를 빤히 보던 아라셀리는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대장과 눈을 마주하였다.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단 사실을 깨달은 대장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허···. 미안하다. 내가 불쾌한 소리를 했군.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 정도면 뒤에서 손가락이나 쪽쪽 빨고있는 저 자식들보다 나은 수준이야.”
아라셀리의 사격을 칭찬한 게 아니었다. 다짜고짜 그룹원을 상대로 총을 뽑아들어서, 괴물을 쏘는 것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그녀의 깡을 칭찬한 것이었다. 배짱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사실은, 그냥 안 죽을 자신이 있어서 이런 배짱을 부린 것이기도 했지만 굳이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좋아, 꼬맹이. 마음에 들었다. 내 이름은 박한서. 문화백화점 생존자 그룹의 리더를 맡고있지. 오늘 하루 정도는 내 재량으로 머물게 해주겠다. 따라와.”
그리 말하며 박한서는 뒤돌아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고, 아라셀리는 유서담을 쳐다보았다. 칭찬해달라는 얼굴이었다. 서담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어.”
*
백화점은 십수개의 초소를 비롯하여 사방에 세워져있는 조명들과 방벽이 가로막고 있어, 어지간한 괴수가 침입하기란 힘들어 보였다. 실제로 근방에 괴수가 출몰할 경우 죄다 총으로 쏴 재껴서 어지간한 괴물놈들은 이 근처로 얼씬도 안 한다고 했다.
“총알이 부족하지는 않을까요?”
“아직은 아닐거야.”
언젠가는 부족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총알은 금이나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중한 화폐 취급을 받거든. 식량이나 물을 거래할 때도 총알을 사용하는 편이지.”
“아하···?”
물론 그 총알을 쏴서 거래하는 경우도 있단 사실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백화점 내부로 들어서자, 확실히 체계화된 내부가 보였다. 쓸데없는 잡동사니는 싹 치우고서 모포따위를 이불삼아 각자 칸막이를 세워두고서 지낸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보았던 대피소와 비슷한 풍경이었으나, 사람들이 씻지도 못하 꾀죄죄하다는 사실이 많이 달랐다.
“기도합시다. 모두 무릎 꿇으세요.”
““기도합시다.””
멀찍이서, 어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100명가량의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설교를 늘어놓고 있었다. 손에 들려있는 건 다름 아닌 성경. 박한서는 그들을 보고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 정신나간 것들이, 또 시작이군······.”
그러나 막을 생각은 없었는지 무시하고서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삼아 오른다. 서담 또한 그들을 따르면서 성직자를 바라보았다.
막을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막을 수 없을 테지.
끔찍하게 변해버린 세상에서 종교는 아주 훌륭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었다.
이 지독한 절망감 속에서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자들은 마음에 아주 큰 구멍이 뚫려있기 마련. 종교는 그 빈틈을 효과적으로 파고들어, 순식간에 멀쩡한 사람조차 교화시켜버린다.
적당한 종교라면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기에 상당히 용이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게 ‘사이비 종교’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사이비 종교도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선 클리셰인데 말이지······.’
뭔가, 낌새가 좋지 않다. 아포칼립스 클리셰대로라면 사이비가 꼭 한 번씩 사고를 터뜨리기 마련이었으니까.
찝찝한 기분으로 박한서를 따라나서자, 그녀가 말했다.
“처음에는 미친 여자라며, 아무도 안 믿었다.”
“그렇겠죠.”
“그런데 나중에는 점차 하나둘 씩 넘어가서, 정신을 차리니 이 생존자 그룹의 대부분이 저 미친 여자의 헛소리를 믿고 있어. ‘신을 믿으라, 구원받을 것이다’ 이딴 소리만 하루종일 참새마냥 지저귀는데 저들은 또 그 말 한 마디를 듣고서 펑펑 울더군.”
박한서의 말이 끝난 뒤, 아라셀리는 무심코 아래층의 교도들을 내려보았다. 소름끼치게도, 그들은 이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저 사람들, 느낌이 이상해요.”
“저러지 않고서야 미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아라셀리는 그런 유서담의 말이 썩 이상하게만 들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미쳐버린 것처럼 보였기에.
‘아.’
그러던 와중, 사람들에게 설교를 늘어놓던 종교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는 굉장히 심상치 않은 눈으로 아라셀리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
어쩐지 기분나쁜 그 눈빛에 아라셀리는 표정을 와락 찡그렸으나 유서담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
“······김하수와 만나고 싶다고?”
“예.”
여느 리더가 그렇듯, 높으신 분들은 높은 장소를 추구하기 마련. 박한서 역시 가장 꼭대기층에 자신의 방을 만들어두었는데, 언뜻 무기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곳에서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뭐, 그래. 거기가 살기 좋은 곳이기는 한데······, 과연 너희를 받아줄까?”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그곳의 일원이 되려면, 뭘 해야됩니까?”
그러자 박한서는 간단하게도 답했다.
“김하수에게 쓸모있는 사람.”
맨 처음, 그러니까 멸망이 시작된 직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이 세계에 갑작스레 괴수가 덮쳐왔을 때 세상의 모든 무장한 군부대가 깔끔하게 증발해버렸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그냥 갑자기 사라졌다고. 군대를 잃은 현대인은 괴수들에게 너무나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모두가 생존을 위해 처절히 투쟁을 하는 와중 김하수만이 섬 하나를 통째로 요새화하여 그곳에서 안전하게 투쟁하였다고 한다.
“제일 처음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그렇지. 조력 발전소의 정비실무를 맡고있던 자라고 했던가.”
“멸망한 세계에서 발전소 담당이 쓸모가 있습니까?”
“있더라고. 듣자하니, 거긴 숙소 내에 각종 영화나 예능프로, 문화생활을 위한 19금 자료가 담긴 컴퓨터는 물론 텔레비전을 비롯한 어지간한 전자가구가 죄다 있다더군. 없는 게 없어.”
전력을 다루는 기술자가 왜 ‘쓸모있는’ 취급을 받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렸지. 일부는 받아들여졌고, 일부는 그러지 못했어.”
“그럼 당신은······.”
“나도 그쪽에서 받아주기는 했어. 내가 거절했지만.”
“예?”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박한서는 아래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확히는 ‘나’만 받아들여졌거든. 멸망이 시작된 이래로, 몇 년이나 동고동락해온 내 가족같은 놈들은 거절당했는데 어떻게 나 혼자 가겠나.”
“왜 거절을··· 쓸모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니, 그건, ······이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군.”
박한서는 침묵했고,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에 굳이 찾아온 이유는, 단순히 하룻밤을 머물기 위함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예.”
나는 이곳에 온 본론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말했다시피, 저는 김하수의 요새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아무나 쉽게 만나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당신과는 교류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김하수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그녀의 표정이 안 좋아졌던 덕분에 예상할 수 있었듯이 당연하게도 거절이 돌아왔다.
“나는 그 근처에도 가기 싫다. 미안하지만 그건 도와줄 수 없겠군.”
“······역시 그렇군요.”
여기서 더 조를 수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박한서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저쪽에서 푹 쉬도록. 자네 친구는 벌써 잠든 모양이니까.”
옆을 돌아보니 아라셀리가 기절하듯 모포에 몸을 푹 누운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잠들기 직전 화분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서 씻기는 한 모양. 뽀송뽀송해진 피부, 젖어서 물기 가득한 머리카락으로 잠든 아라셀리는 머리가 마르는 것을 기다릴 새도 없이 지쳤던 모양이었다.
“예. 감사합니다.”
박한서가 가자 나는 그녀를 안아들어서 매트 위로 옮겼다. 이 좁은 구석에서도 하나뿐인 매트였는데, 나보고 쓰라며 자신은 바닥에서 잠을 청하려고 한 것이다. 그 마음은 기특했으나 애초에 야생에서의 야전 생활이 잦은 내가 맨땅에서 자는 게 훨씬 낫다.
그렇게 나 또한 맨바닥에 몸을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늦은 새벽.
나는 품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무언가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는데, 이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참나.”
굳이 매트 위에 올려놓은 보람도 없이, 아라셀리가 밤사이 내 품에 와서 꼭 안겨 있던 것이다.
“아라셀리. 매트에 가서 자.”
“으음···싫어요···.”
살짝 밀어내니, 오히려 더 안쪽으로 파고든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녀의 몸에 모포를 덮어주고서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이러든 저러든, 본인이 편한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게 가장 좋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아라셀리를 끌어안은 채 다시 잠들었다.
상당히 포근하고 따뜻한 밤이었다.
*
모두가 잠든 새벽.
-목말라···.
구석에 얌전히 있던 화분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새하얀 빛가루가 팔랑, 사방으로 흩어진다. 은빛 정령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잎을 흔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분이 스스로 부유를 하더니 창가로 이동하는 게 아니겠는가? 조심히 창가에 안착한 화분은 빗물에 몸을 적시기 시작하였다.
은빛 정령의 몸체는 비록 식물이었지만, 하반신을 비롯하여 전신이 거의 완성되어 이제는 자그마한 소녀가 꽃에 걸터앉아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다리를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소나기 좋아···.
멸망한 세계에서의 하루가 저물었다.
< 멸망한 세계에서 나 홀로(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