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멸망한 세계에서 나 홀로(1) [아라셀리 삽화] >
지구, 미국 시애틀에는 초인대학병원이 있었다.
말 그대로 초능력자 및 헌터들이 다쳤을 때를 대비한 병원으로서, 신체 구조가 특이한 초인들을 위한 대학병원인 만큼 평소에는 환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으나 그 설비만큼은 최고의 상태를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시애틀의 초인대학병원은 전 세계에서도 알아 봐주는 의료진과 설비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 어떤 초인이라도 이 병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멀쩡히 살아나올 수 있다지만 너무나도 비싼 병원비 때문에 환자가 좀처럼 없다는 슬픈 뒷얘기가 있었다.
앤은 시애틀 초인대학병원의 간호사였다.
그녀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어지간한 S랭크의 헌터가 방문한다고 했을 때도 긴장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있는 최고의 초인이자 무림맹주, 설중연을 담당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은 해도, 사실 그녀를 담당하는 간호사는 앤 말고도 열 명이나 더 있었으며 항상 전속 의사와 무림의 의원이 붙어 다니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게 그 ‘환단(還丹)’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네···. 저도 잘은 모르지만요.”
“이걸 몰라? 무협 소설 보면 맨날 나오는 그, 있잖아. 소림사에서 만드는 소환단! 아마 그거랑 비슷한 거 같은데···. 이걸 실제로 보게 되다니.”
“건들면 안 돼요. 맹주님 드시라고 소림에서 만든 거니까요.”
가짜 환단이 아니다. 중국의 짝퉁 소림이 아닌, 실제 무림에 다녀온 진짜 소림에서 만든 환단이었다. 오로지 설중연만을 위한 귀중한 물건.
이내, 앤은 심호흡을 하고서 환단을 비롯하여 약을 담은 의료카트를 끌고 가장 위층에 위치한 설중연의 병실로 향하였다. 병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그 소문의 ‘무림인’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누군가는 검은색 도복을 입었고, 누군가는 현대적으로 정장을, 누군가는 아예 웃통을 까고 있었다. 하나같이 근육질에 우락부락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으며, 뭔가가 접근이라도 하면 무시무시한 눈으로 째려보는데 어떤 간호사는 눈을 잘못 마주쳤다가 하마터면 지릴 뻔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무림인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무림맹주를 치료하겠다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살기를 흘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친절한 편이라는 사실을 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그래. 험악하게 생겼을 뿐이다.
“오, 간호사 아가씨. 환단은 제대로 챙겨왔군.”
“지나가는 길에 미안한데, 근처에 국밥 파는 데 없나? 없다고? 거 참···. 미국에는 없는 게 왜 이렇게 많아?”
무림인들은 간호사에게 상당히 친절하게 굴었다. 마치 동네 아저씨같은 그들이었지만, 앤은 그들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다. 일전에 몇몇 초인 기자들이 설중연을 취재하겠답시며 몰래 잠입했다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똑똑히 목격하였으니까.
무림맹주의 병실을 호위하는 무림인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지나치고서, 마침내 설중연의 병실 앞에 도착한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듣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병실로 들어서자, 열린 창문으로 스며드는 따사로운 햇살에 비쳐 살짝 노랗게 물든 백금발의 여인이 침대에 앉아있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 머리카락을 흩날렸는데,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얼음의 여신이 현현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오늘의 뉴스입니다! 미국 거대균열에 참전하였던 ‘무림회향회’가 원정대를 배신하고 돌아선 사건이 있었는데요······.
-일각에서는 테러리스트를 받아들인 미합중국의 문제가 아니냐는 비판의 말이 쏟아지는 와중······.
-무림회향회의 모든 무림인들을 무림맹이 구속하였습니다. 미국 내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른 집단에게 맡겼다며 비판의 여론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미합중국 대통령은 ‘무림맹은 그럴 자격이 있다며’ 일축했습니다.
설중연은 뉴스를 보고 있었다. 내용은 대부분 흔한 이야기였다. 며칠 전 거대균열에서 벌어진 그 사건을 며칠이나 다루고 있었으니까.
-테러리스트 방호윈이 사실 SSS랭크의 초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방호윈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무림맹주 설중연에 대한 찬양글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어나더 리그의 길드 마스터 유서담이 임의로 차원에 틈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전부터 그는 던전을 아지트화하는 프로젝트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중국을 향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중국 측에서는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으나, 질타는 멈추지 않고······.
전 세계의 언론이 미친 듯이 폭주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부터 ‘거대균열’의 발생만 해도 수많은 영웅이 나타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큰 이벤트인 만큼 세계의 주목을 받는 와중, 숨어있던 SSS랭크의 무림인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에도 모자라 헌터들을 배신했다? 이만한 빅이슈가 또 있을까!
한데, 그런 SSS랭크의 무림인을 설중연이 성공적으로 제압한 데다가 어나더 리그의 유서담이 차원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혀가며 무림회향회를 설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더욱 더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키워드가 너무나도 많았으나, 그래도 단연코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이는 다름 아닌 설중연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설중연이 지금 자신의 앞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꿈만 같았다.
“저어···. 맹주님.”
그녀를 부르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피폐하고 우울한 눈빛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애태우게 만들었다. 설중연은 결코 미소를 짓는 법이 없었다. 조금만이라도 웃어준다면, 정말로 아름다울 텐데.
‘잠들어 계셨을 땐꽃의 요정 같았는데······ 깨니까 얼음같으시네.’
설중연이 천천히 일어서자, 얇은 환자복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볼륨있는 몸매가 드러났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저 몸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앤이 침을 꿀꺽 삼키고서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려는데, 병실의 문이 조용히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아으, 맹주님.”
맹주의 비서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신혜지라는 이름의 한국인 소녀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맹주님이 그렇게 멍하니 계시면, 주변 사람들이 긴장해서 아무것도 못한다고 했잖아요. 스마일, 스마일. 좀 웃으세요.”
“노력은 하고있다.”
“또 누구 생각하느라 그러셨죠?”
신혜지는 ‘무슨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다. ‘누구 생각’이냐고 말했다.
설중연의 머릿속에 무엇으로 가득 차있는지 정도는 이제 신혜지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긴요. 그만 걱정 더세요.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유서담이잖아요.”
유서담을 걱정하는 건, 사실 설중연 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방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무공과 마법을 다루는 것에도 모자라, 이제는 차원까지 건드려버린 사내. 그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아니, 그 전에. 닫혀버린 거대균열에서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한편, 헌터 유서담이 거대균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나더 리그 길드의 책임경영자 예카테리나에 따르면, 조만간 복귀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자세한 내막은 밝히지 않아······.
마침 뉴스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신혜지 또한 유서담의 행방이 궁금하긴 했으나, 지금 당장은 그에 대한 생각으로 시름시름 앓고있는 설중연이 더욱더 걱정되었다.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믿고, 기다리세요. ···지금 엄청 바쁜 거 아시죠? 유서담 헌터가 돌아오기 전에 모두 마무리 지어놔야 할 거 아니에요.”
유서담은 말했다.
자신은 거대균열에 갇히더라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다고.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유서담 헌터가 돌아올 때까지······. 그러고 계실 건 아니죠?”
그녀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고 침울해있어서는 안 되었다.
무림맹주로서 설중연이 해야만 하는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내팽개친 채로 구석에서 썩고있는 설중연의 모습은 유서담 또한 원치않을 것이다.
“···네 말이 맞다.”
우울한 표정을 풀 수 있었던 설중연은 비로소 미소를 띠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희미한 미소였기에, 언뜻 봐서는 알아챌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세상에, 세상에세상에!’
앤은 고작 그 정도만으로도, 온 세상이 환해진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꿈을 꾸고는 했다.
그 꿈은 대부분 어떤 소녀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아직도 그녀의 노랫소리가, 그 자애로웠던 미소가 생생하다.
레이나 주, 돌아가신 양부모님보다도 내가 더욱 믿고 의지했던 소녀.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주저앉으려 했던 나를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었다. 절망어린 현실에 슬퍼하고 있을 때면, 나를 다독여주었다.
우리는 당시 서로에게 등을 기대어 믿고 의지하였다. 나는 정말로 레이나 주를 돌아가신 양부모님보다도 더욱 믿고 따랐고, 그녀 또한 나에게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을 해주었다.
9년 전, 초거대균열 속으로 그녀가 빨려들어가기 전까지는.
꿈은 이어서 7년 전으로 앞당겨진다.
헬 게이트. 이 세상의 모든 끔찍한 재앙이 뒤섞인 그곳에서는 그 어떤 꿈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류의 헬 게이트 정복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감히 인간이 발을 디딜만한 공간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곳에서 레이나 주를 보았다.
그것은 결코 환각도 아니었고, 착각도 아니었으며, 꿈도 아니었다.
레이나 주와 나는 눈을 마주쳤고,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어째서 그때 정신을 잃었을까.
지금도, 꿈속에서 그녀는 이렇게나 생생하다. 얼굴도 모르는 친부모와, 아주 어린 시절 돌아가신 양부모님을 대신하여 나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레이나 주가 지금도 저렇게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데···.
어느덧 꿈속의 나는 헬 게이트를 향해 한 발자국 더 내디뎠고.
‘서담, 바깥으로 오지 마십시오.’
이내, 거대한 황금색의 빛에 휩싸였다.
*
“···허억!”
눈이 번뜩 뜨였다. 방금, 무슨 꿈을 꾸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윽···.”
머리가 지끈거린다. 허공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잔잔한 마력과 따스한 열기가 풍겨왔다. 머리를 부여잡기 위해 왼손을 들어올리려는데, 무게감이 느껴져 고개를 내렸다.
그곳에는, 온몸에 피칠갑을 한 아라셀리가 내 왼팔을 꽉 껴안고서 잠들어 있었다.
“뭐···야?”
<그녀가 며칠 동안이나 당신을 간호했습니다. 위독한 상태였는데··· 자신의 피와 마력을 사용해서까지 서담을 치료하더군요.>
“그럼, 이 피는······.”
<당신의 피입니다.>
서둘러 복부를 비롯하여 전신의 상처를 확인하였다. 완쾌가 되지는 않았으나, 상당히 아문 상태. 움직이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어보였다. 게다가 허공에 둥실 떠있는 불꽃이 내 몸을 뎁혀주어서 체온 또한 정상이었다.
<어서 그 불꽃을 끄는 게 좋아보입니다. 그녀가 마지막 마력까지 쥐어짜내가며, 당신을 위해 켜둔 것입니다.>
의뢰인의 말이 떨어진 즉시, 손을 휘저어서 불꽃을 껐다. 그제야 나는 저 불꽃에 체온 유지를 비롯하여 피로 회복 등의 마법이 담겨있음을 깨달았다.
휘이잉···!!
불꽃이 꺼지자마자, 싸늘한 추위가 들이닥쳤다. 뒤늦게 불꽃 덕분에 내가 따뜻하게 있을 수 있었음을 알아챔과 동시에, 이 너무나도 작고 왜소한 불꽃이 두 사람이나 지켜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머리를 맴돌았다.
서둘러 아라셀리의 얼굴을 살펴보니, 창백한 안색에 식은땀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이제보니 그녀는 얇은 거적데기 하나로 몸을 간신히 감싸고 있는 채였다. 추위를 버티기도 힘들 텐데, 심지어 아라셀리의 체내 마력량은 1%도 채 안 되었다.
거의 체력이 회복된 나보다 훨씬 위험한 상태.
인벤토리를 열어 두터운 망토를 꺼내 아라셀리의 몸에 두른 뒤, 내 마력으로 따사로운 불꽃을 소환하여 그녀의 근처에 세 개나 띄워두었다. 그러고선 아라셀리를 품에 끌어안아 체온을 보존시켜주며 따뜻한 물을 조심스레 입에 흘려넣었다.
“으음······.”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아라셀리가 눈을 서서히 떴다.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천천히 열어서 단어를 꺼냈다.
“교···수님···.”
어쩐지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자, 무언가가 가슴에 북받쳐올랐다.
“너, 왜 이렇게 무리해가면서까지···.”
말을 꺼낸 직후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그녀에게 할 말은 이게 아니었다.
“···고맙다.”
그러자, 아라셀리가 희미하게 웃으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심장의 마나 써클이 서서히 회전한다. 내 의지도, 화분의 의지도 아니었다. 아라셀리의 의지대로 내 심장이 뛰기 시작하더니, 그녀에게 마력을 공급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마력이 돌아오니 서서히 신체 기능도 돌아왔으며, 몸이 따뜻해지니 안색도 좋아지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교수님···.”
“그래.”
“교수님······.”
“여기 있으니까, 말해.”
그녀는 잠꼬대처럼 입술 안에서 몇 개의 단어를 웅얼거렸다.
“아프지···마세요······.”
그러더니, 새근새근 고운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어버린다.
나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되어 한참이나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저, 아프지 말라는 별것도 아닌 그 한마디가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말이었지만 진심이 담겨있기에 너무나도 크게 와닿았다.
문득, 아주 예전에 보았던 그녀의 운명을 떠올랐다.
자신의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성공한 위대한 대마법사 아라셀리 라인칼. 그녀는 세상을 구한 뒤, 모두의 칭송을 받는 영웅이 되어 살아간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셀리는 그러지 않았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나날이 남은 자신의 세계를 포기한 채, 나를 쫓는다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시간을 건너고 공간을 건너 수많은 세상을 기약 없이 유랑하며, 아라셀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수많은 고통과 인내를 감내하며, 그렇게까지 나라는 존재가 과연 쫓을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모르겠다.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동이 터오를 때까지 아라셀리를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멸망한 세계에서 나 홀로(1) [아라셀리 삽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