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6) >
‘아깝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단 하나의 생각.
유서담은 반쯤 부서진 기둥에 등을 기대고서 복부에 손을 얹었다. 코끼리에게 짓밟혀도 웃으면서 낮잠을 잘 수도 있다는 1등급의 에테르 슈트가 산산조각 파손된 채였으며, 복부에서는 피가 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템 <새벽의 죽음>의 특수 스킬 ‘죽음의 거부’가 발동됩니다.]
[수명이 빠른 속도로 감소됩니다.]
물론, 일전에 얻어서 입고 있던 이너 아머가 순식간에 몸을 감싸고서 상처를 급속도로 회복시켜주고 있긴 했지만 결국 이 또한 수명을 깎아 먹는 짓이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말이다.
“교수님, 가만히 있으세요!”
싸움이 발생하자마자 달려온 아라셀리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다. 최근,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이벤트 때문에 그녀의 체내 마나량은 1%도 채 되지 않는 상태였고 도저히 싸움에 낄 수가 없어서 멀리 피해있으라고 말했거늘, 기어이 여기까지 쫓아와서 유서담을 대피시키느라 하마터면 그녀도 휘말릴 뻔했다.
“넌··· 마력 없으면 그냥 일반인인 주제에 뭘 하겠다고 여기서······.”
“교수님한테 포션 먹이고 있잖아요!”
다급히 자신의 입에 포션을 흘려 넣는 아라셀리를 보고 있자니 괜히 유서담은 웃음이 나왔다.
지금 당장은 체력이 바닥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다. 그래, 그녀가 없었으면 어쩌면 정말 여기서 허무하게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제3 신전에서 시작되었던 작은 다툼이 이제는 제국의 수도 전역으로 퍼져나가 그 여파로 인해 상처입은 도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S랭크의 힘을 가진 황제와 마도사, 검객과 교황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서로가 성녀를 원했고, 탐했으며, 그녀를 오롯이 독차지하기를 욕망했다. 왜냐, 애초부터 성녀가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여자 하나 때문에 시작된 초인들의 사랑 싸움은 결국 도시를 반파시키는 결과를 일으켰으며······. 끝끝내는 그 싸움이 마무리를 맺은 모양이다.
<서담. 네 명의 남주인공들에게서 개연성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습니다.>
‘전부, 죽은 거야?’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들의 힘은 오로지 ‘주인공’만을 위한 것인데, 주인공을 위하지 않은 싸움이 억지로 발생해서 개연성이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안 죽어도 상관은 없으니까.’
애초에 진짜 주인공이 아니었던 그들은 굳이 죽이지 않더라도 개연성을 얼마든지 빼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지금 벌어진 것이고.
완벽하다.
성녀 비앙카의 이미지가 바닥까지 추락하였고, 네 명의 남주인공이 모두 쓰러진 상황.
이제 성녀는 자신을 지켜줄 무력적인 개연성도, 신앙적인 개연성도 없다. 지금 달려가서 미간에 총알 한 발 박아 넣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서 죽어버릴 텐데, 그러질 못한다니.
마음 같아서는 아라셀리를 보내고 싶지만······. 그녀가 가진 1%의 마력량은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사용해야만 한다. 유서담 자신과는 달리 아라셀리는 다른 차원에 적응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차원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꽤 많은 마력을 소모하고 있었으니까.
여태까지 자신의 의뢰를 도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뭔가, 보답이라도 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찰팍!
“······유서담! 여기에···, 있었군.”
“아, 공녀님···.”
사하르 공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도시 전역을 뒤지고 다녔는지, 평범한 구두는 초인의 발걸음을 버티지 못하고 이미 죄다 헤진 지 오래였으며 빗물이 젖은 머리카락은 목과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고 화장은 죄다 빗물에 쓸려서 흩어져버렸다.
그 아름답고 고고하고 날카롭고 위험한 보석과도 같던 사하르 공녀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망가진 모습. 그녀는 덜덜 떨리는 걸음으로 유서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복부에는 아주 큰 상처가 있었다. 검객 소디에르가, 자신의 모든 오러를 방출하여 끝끝내 유서담을 관통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결국 그는 A랭크에 불과했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봐야 S랭크와의 정면승부에서는 턱없이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정면으로 덤볐으니, 이런 상처 하나쯤은 애교 수준이라고 봐도 좋았다.
사하르 공녀는 자책했다. 분명, 자신이 유서담과 비앙카의 관계를 황제에게 몰래 언질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되는 것을 상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일부러 제국 전역에 소문을 퍼뜨려서 이렇게까지 진흙탕 싸움으로 이끌어버린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어쩌자고,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싸운 것이냐······.”
사하르 공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유서담의 목적도, 목표도, 의미도, 그 무엇도 자신은 알지 못한다. 그저 어느 순간 난데없이 등장해, 자신을 위해 움직였던 사내.
그는 자신을 다시금 태양빛이 드리우는 세상으로 끄집어 올려주었으며, 다시금 세상 사람들과 황제에게 인정을 받게 해주었고, 심지어는 한 명의 자그마한 신도로서 카데르 여신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과분했다.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이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너무 고마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인데. 이만하면 소소하게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성녀, 비앙카를 죽여야 합니다.”
피를 울컥 쏟으며 내뱉는 그의 말에 사하르 공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꽉 쥔 손바닥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결국, 유서담은 성녀를 죽이기 위해 이런 꼴이 되어서까지······.
“···원래 어릴 땐 싸우면서 크는 거죠.”
퍼뜩, 그가 평소처럼 떠는 너스레에 사하르는 정신이 들었다. 표정이 서서히 펴진다. 알고있다. 이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역시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을 내뱉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철렁였던 가슴이 진정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사하르 공녀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위해, 무얼 하면 되겠느냐?”
지금은 정신이 나가빠진 채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유서담은 결코 허투루 사건을 벌이지 않을 터. 이만한 일을 벌였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텐데 그는 아직 그것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유서담은 눈동자를 굴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성녀에게 달려가서 목을 뎅겅 끊어버리라고 하고는 싶지만······.
아~♩
아아♪♬
도시 전역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 찬송가가 그러기엔 늦었음을 알려주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먹구름의 사이가 갈라지며, 자그마한 빛무리가 저 멀리 교회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성녀, 비앙카가 여신 카데르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늦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무슨 소리지?”
“당신을 위해서, 한 번 더 기도를 올리십시오.”
“그···건······!”
“기도를 올려서, 여신 카데르에게··· 시간을 되돌리기를 청하십시오.”
사하르 공녀의 눈동자가 덜덜 떨려왔다.
“불···가능하다. 나는, 나는 신녀의 자리에서 쫓겨났단 말이다.”
“아뇨.”
“게다가, 나를 믿고 따라줄, 99명의 청신관도, 그 어떤 신관도 없다. 내 믿음은 저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다.”
유서담이 손을 뻗어, 사하르 공녀의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떠서,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와 눈을 마주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니었다. 몇 가지의 정보를 토대로 추론을 해낸 결과이니까.
애초부터 유서담이 견제를 했던 상황은, 비앙카가 다짜고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개연성’에 의하여 강제 회귀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비앙카는 개연성에 의한 강제 회귀가 불가능해졌다.
네 명의 남주인공들이 폭주하고, 제국민들이 모두 성녀를 흉보는 최악의 상황, 그녀는 이제 언제 죽어도 개연성이 의문을 표할 만큼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기도를 통해 회귀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성녀는 애초에 성녀로서가 아니라 ‘로맨스 판타지의 엑스트라 컨셉 주인공’이기 때문에 신성력이 아닌 ‘매력’의 보정을 받는다. 분명, 틀림없이 99인의 청신관을 비롯하여 많은 신관을 데리고서 기도를 올리겠지만······.
보정을 받지 않은 그녀와 신관들의 신앙심은, 이미 시간을 한 번 되돌리는 데에 성공했던 사하르 공녀에게 미치지 못한다.
“가서, 당신의 여신께··· 기도를 올리세요.”
그리 말한 뒤, 유서담이 힘없이 팔을 바닥에 내려놓자 사하르 공녀는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들었다.
여신님을 뵐 낯이 없다. 신녀의 자리를 박탈당하고서, 모든 신앙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낯짝 두껍게도, 뻔뻔스레, 다시금 여신님께 찾아가, 부탁을 드릴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하르 공녀는 천천히 무너진 제3 신전의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조건은 열악하다. 저쪽은 최소 100인 이상의 신관들이 모여, 정갈하게 신도복을 갖추고서 제대로 된 여신상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사하르 공녀의 몰골은 여신님을 뵈기에는 추잡스럽기 그지없었으며 신전 또한 모든 게 반파되거나 부서진 채였고, 그나마 남아있는 여신상마저도 날개가 박살이 나버린 상태였다.
그래도.
장점이 딱 하나만큼은 있었다.
쏴아아아······.
교회와는 달리, 이곳의 신전은 천장이 무너져 내려서 뻥 뚫려있었다. 모두가 건물 안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자신만큼은 뚫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면······. 어쩌면, 나의 말은 여신님게 더 빠르게 닿지 않을까?
소나기를 한몸에 맞으며, 사하르 공녀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우스웠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바보처럼 웃으며, 양손을 모으지도 않은 채, 무릎을 꿇지도 않은 채, 시원스레 열려버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신님. 제가 왔습니다.”
*
빛의 기둥이, 교회를 향해 쏟아진다.
비앙카와 500인의 신관들은 그 신성스러운 빛을 한몸에 받으며 따스한 여신의 기운을 느꼈다.
‘아아, 그래. 이거야.’
여태껏 몰랐다. 아니, 알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할 수 있었다. ‘성녀’였기에, 여신에게 가장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에.
서서히, 서서히, 비앙카는 자신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현실이 벗겨지고, 또다른, 한 차원 더 높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어떤 ‘형상’이 있었다. 온 사방에 톱니바퀴의 태엽 시계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신비로운 보랏빛 세상의 한가운데에 고요히 서있는, 마치 여인의 형태를 띤 은색빛의 무언가.
틀림없이 그것은 ‘여신 카데르’였다.
세월과 계절을 관장하는 시간의 여신이자, [원작]에서 악녀 사하르 공녀의 태엽을 되감아주었던 바로 그 신적인 존재.
‘저예요! 성녀 비앙카! 여신님, 제 말을 들어주세요!’
그래,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그리 생각하며 비앙카는 환히 미소를 지으며 여신 카데르를 불렀으나, 어쩐지 위화감이 들었다.
‘어, 누구랑 닮은 것 같은······.’
그 순간, 여신이 고개를 돌려 다른 어딘가를 쳐다보았고.
화아아악···!
“······아?”
비앙카는 다시금 현실에 내동댕이쳐졌다.
“뭐야?”
“무슨···.”
“신성한 빛이 사라졌어···?”
비앙카는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교회였다.
그 아름다운 보랏빛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신비로운 세상과 여신 카데르는 온데간데 사라졌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신성한 빛기둥 또한 감쪽같이 없어진 채였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비앙카가 당황하여 그리 말하자, 바깥에서 남신도 한 명이 교회의 문을 박차고 들어와 외쳤다.
“서, 성녀님! 저쪽에, 또다른 신성의 빛기둥이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뭐···라고?”
웅성거리며 일어나는 신도들을 제치고서 성녀는 황급히 교회의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과연, 남신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들에게 쏟아지고 있었을 그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다른 장소로 옮겨간 것이다!
“저 위치는······.”
성녀의 표정이 점점 더 창백해진다. 저 위치,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설마, 제3 신전이라고?’
*
몽롱한 보랏빛의 세계로 풍덩, 몸을 내던진 사하르 공녀는 시간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여신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성녀 비앙카를 제쳐두고서 달려와주신 것이다.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아무런 감흥도 기쁨도 일지 않았다. 여신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오히려 여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바람에 더욱 서글퍼졌다.
1년 전을 떠올린다. 처음 시간을 되돌렸을 때는, 정말로 기뻤다.
자신을 버렸던 이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잘못 쓰였던 인생을 다시 한 번 제대로 펼쳐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왜 기뻐했을까? 당연하지만, 그때는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잃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간을 되돌리면, 유서담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의문이 자꾸만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비록 짧았으나, 두 번의 인생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던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전에는 이런 소중한 것이 없었기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시간을 되돌렸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래.
분명 시간을 되돌린다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것이다.
원한다면 황후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신녀의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며,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했던 성녀 비앙카를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없애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장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리거늘.
그때는 몰랐다.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이들에게 잊혀지고, 모든 추억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그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가슴 찢어지고,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화악! 따스한 빛무리가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여신, 카데르. 얼굴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은색의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으냐?
“······예. 하지만, 그와의 추억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욕심이 과하구나.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는 없는 법이야.
알고있다. 단 한 번이라도, 원하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그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이 생겼는데.
그 두 개 모두를 부여잡고 싶은 욕심 정도는 부려도 되지 않겠는가?
-···의지를 꺾을 생각이 없어보이는군. 나도 한때 그랬었지.
여신 카데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하르가 언급했던 유서담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은색 머리칼의 소녀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소녀는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모양인지라 이쪽 세계의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서담은 참으로 특이한 존재였다. 시간의 흐름이 변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에 휩쓸리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뒤편으로 황금색의 어떤 신비롭고, 우아하고, ···안타까운 존재가 그를 감싸고 있었으나 카데르는 굳이 그곳을 바라보지 않았다.
-부럽구나. 나도 너처럼, 의지할 사람이 있었더라면 시간을 수천 번이나 돌리지는 않았을 텐데······.
어차피 저 유서담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시간을 돌리더라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터.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지는 여신 카데르조차 모르지만······ 그녀는 그 점을 이용해 사하르 공녀에게 아주 즐거운 시련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와의 추억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게 정말입니까?”
-유서담과 그의 제자를 지금 이 시간대에 고정하고서, 1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을 때, 그는 추억을 잃지 않은 채 이곳에서 다시 깨어날 것이야.
“그럼···!”
-하지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는 말에, 사하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카데르는 멈추지 않았다. 인연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하르 공녀의 바뀐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 혼자 회귀하는 것이 아닌, 성녀도 함께 1년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
-둘 모두 똑같은 미래를 알게 되겠지. 어떠냐, 흥미롭지 않느냐? 너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세계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의 힘만으로 싸워야만 한다. 유서담의 도움조차 없이 과연 너 혼자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유서담은 조만간 떠나갈 것인데, 고작 그와의 짧은 추억을 남기겠다고 이만한 리스크를 감수하겠느냐?
두근, 두근, 심장이 떨려온다.
이건 바보같은 짓이다. 머저리가 아니라면 이런 조건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평소의 공녀였다면, 거부하고서 혼자 시간을 되돌렸겠지.
유서담은 조만간 ‘자신의 세상’으로 떠나갈 것이고, 그때가 되면 자신은 이곳에 홀로 남게 될 테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다른 세상에서도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을 여전히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예. 하겠습니다.”
여신 카데르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고작 추억을 버리지 못해서 저런 바보같은 조건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좋다. 너와 성녀 둘 모두의 시간을 되돌려주마. 과연 1년이 다시 흐르고, 유서담이 깨어날 때까지 네가 살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카데르는 맑고 고운 선명한 눈동자로 자신을 또렷하게 응시하는 사하르 공녀를 바라보며 서서히 크게 웃었다.
-아마도 너는, 성공하겠지. 나와는 다르게.
이윽고, 시간이 되돌아간다.
*
[세계선의 변화를 감지합니다.]
“윽···!”
유서담은 힘겹게 눈을 뜨고서, 품에 꽉 끌어안고 있던 아라셀리를 떼어냈다. 그녀는 결국 시간의 흐름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버린 상태. 그녀는 바닥에 조용히 내려놓고서 고개를 들어올린 서담은,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엥?”
그는 일전에 무한 회귀자를 만난 적이 있어서 알고있다. 다른 이가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자신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았고 원래 있던 장소와 시간 그대로 남아있는단 사실을.
분명히 공녀가 회귀하기 직전, 그가 쓰러져있던 장소는 다 무너져가던 제3 신전의 귀퉁이였거늘, ······온 사방에 금칠이 된 것처럼 번쩍거리는 이 휘황찬란하고 화려한 신전은 대체 뭐란 말인가?
뭔가, 잘못되었나, 그런 생각이 든 유서담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자.
끼익···쿵!
길게 늘어진 레드카펫의 끝에 닿아, 용이 똬리를 틀고있는 듯한 조각이 새겨진 은색빛깔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위풍당당하게 들어섰다.
“사하르··· 공녀님?”
그녀는 여전히 은색의 아름다운 머리칼에, 자수정을 닮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그러나 피폐하고 기운없던 이전과는 달리 자신감에 가득 찬 그 당장하고도 위엄있는 눈동자는, 그녀를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사하르는 서담을 보고선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이마를 툭, 쳤다. 그곳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왕관이 있었다.
“공녀가 아니라, 여황이다.”
“······예?”
“황제를 꼬셨고, 죽였다. 꽤 성공적인 쿠데타였지.”
“아니, 그게 무슨···.”
“성녀는 교황과 함께 파묻었다. 뒷맛이 꽤 씁쓸했는데······.”
“잠깐만요. 좀 천천히 말씀해주시죠.”
그러자, 사하르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는 크게 웃었다.
“그래. 내가 너무 급했구나.”
그녀는 장난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어쩐지 유서담의 악동같은 표정을 닮아있었다.
“그간, 그대가 없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아주아주 많은 일이 있었고, 사하르는 그 모든 일들을 극복해냈다.
“·····그러니까. 천천히 이야기해주도록 하지.”
이제는 다시,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