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5) >
완벽하지 않은 계획이었다.
성녀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켰으며, 네 명의 남자 주인공들이 서로 대립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거기에 유서담 본인이 휘말려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 제일의 검객에게 칼이 겨눠진 와중에도 서담은 성녀가 주저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주인공]이었다면 그저 상황에 맞춰서, 세계가 돕는 것으로 원하는대로 ‘회귀’를 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귀자였던 사하르 공녀는 사실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었으며, 성녀 비앙카는 주인공이지만 회귀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빙의자이다.
즉, 정식으로 회귀를 위한 준비를 해야만 한다는 의미인데 유서담은 그 조건을 사하르 공녀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시간을 돌리기 위한 조건은, 가장 여신에게 가까운 여신도 한 명과 신앙심 깊은 청신관 99인을 모아서 함께 기도를 올리는 것.’
100인의 신도가 절실히 기도를 올려야만이 세월과 계절의 여신 카데르에게 그들의 목소리가 닿기 때문에.
[주인공 ‘비앙카’에게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그녀에게 위기가 닥쳤다. ‘빙의자’에게 그러한 개연성이 어떻게 돌아오는지는 유서담도 모른다. 아마 높은 확률로 로맨스 판타지 빙의자의 특징 중 하나인 [매력 독점]이 대폭 강화될 터.
‘막아야 하는데······!’
움찔, 유서담이 손끝을 움직이자 검객 소디에르의 칼날이 목으로 파고들었다. 그 외에 다른 세 명의 남주인공들 역시 서로 견제를 하고있는 상황. 그들의 시선이 모두 성녀에게 향해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몰래 빠져나가 그녀를 독점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싸우는 수밖에는 없었다.
유서담의 현재 레벨은 145. 레벨이 살짝 부족하여, A랭크에 머물고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네 명의 남주인공들은 모두 150레벨은 넘어선 S랭크이다. 고작 몇 레벨 차이가 무어가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A와 S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A랭크가 그래도 아직 인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정도라면, S랭크가 되는 순간 일종의 ‘탈피’ 과정을 거쳐서 또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유서담은 비록 F랭크로 살아왔지만 수많은 초능력자가 S랭크로 각성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또한 무수히 많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150레벨 이상의 강자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지 알게 되었다.
물론, 살면서 S랭크와 SS랭크 이상의 적을 숱하게 만나오긴 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정면승부를 피하고서, 무조건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서 싸워냈다. 실제로 SS랭크의 살바토레 코스탄티니가 폭주했을 당시, 그는 수십 대의 버려진 전차를 터뜨리고 발전소 하나를 무너뜨려가며 제압에 성공했던 적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곳에는 발전소도 없고, 마땅히 사용할 도구도 없다.
네 명의 남주인공 전부가 적이다.
여기서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싸움을 피할 수는 없으므로.
‘······정정불당당하게 싸우는 수밖에!’
유서담은 네 명의 남주인공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삐빅!
투슝···!!
“······윽!”
검을 겨누고 있던 소디에르는 갑작스레 그의 몸에서 충격파가 터져나오자 뒤로 살짝 물러났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이거나 마나의 흐름을 감지할 경우 베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는 유서담이 에테르 에너지를 활용한 기술을 사용한다는 점을 전혀 알지 못했다.
급히 검을 휘둘러 유서담을 베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 충격의 반동을 아예 이용하며 멀리까지 굴러간 그는 바닥에 마인을 잔뜩 떨어뜨려 깔아서 소디에르의 진입 경로를 방해한 뒤, ‘Winchester 777’을 꺼내들었다.
이 총은 메가 슈터를 개조한 버전으로 마나(에센스)를 활용한 탄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훨씬 더 가볍고 간편하게 바뀌었지만 한 번 쏠 때마다 단 한 발의 탄환만이 장전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물론, 이제 A랭크의 신체 능력을 가진 그에게 있어서 그런 점은 별 문제도 되지 않았다. 허공을 날아가는 와중에도 능숙한 동작으로 ‘도탄샷’을 장전한 서담은 마탑주 하라윤을 겨누었다.
위기를 감지한 하라윤이 서둘러 둥그런 푸른색의 실드를 펼쳤으나, 애초에 그 점을 노렸기에 유서담은 스킬 [정신 집중(S+)]를 사용하여 신중하게 조준하였다.
마치 세상이 느려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며, 정확한 지점을 노리고 발사.
퉁!
이윽고 탄환이 날아가 하라윤의 실드에 부딪친 그 순간, 마치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탄이 꺾여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더니 황제 스라엘의 복부로 파고들었다.
“크윽! 너, 무슨 짓이냐!”
“뭐? 아니, 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스라엘 역시 S랭크의 신체 내구도를 갖추고 있었기에 이 정도로는 흠집도 내지 못한다. 다만, 둘의 시비를 붙였다는 게 중요했다.
바닥을 구르며 유서담은 탄환을 하나 더 장전하여 교황 카인다주를 노리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접근한 검객 소디에르가 목을 노리고서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미친, 마인밭을 무식하게 뚫고 달려온 거야?!’
채앵!!
윈체스터와 검이 부딪친다. 근력 싸움으로는 한참이나 밀렸기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교황을 놔줄 생각은 없었다.
총알이 안 된다면, 주둥이를 털면 된다.
“앗! 저기! 교황이 성녀를 노린다!”
그러자 마탑주와 황제의 이목이 순식간에 교황을 향해 집중되었고, 직후 소디에르의 검이 유서담의 복부 장갑을 크게 찢어놓았다.
파지지직!!
[잔여 배터리: 61%]
고작 한 번의 검격에 절반 가량의 에테르 실드가 날아가버렸다.
서둘러 윈체스터의 끝에 10cm도 안 되는 짧은 검을 사출해낸 뒤, 에테르를 두른다. 무려 1등급 이상의 출력을 자랑했기에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없는 A랭크의 유서담도 어느 정도는 S랭크에게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한 번의 충돌 직후, 유서담의 정신이 다시금 서서히 느려진다.
찰나의 세계.
검객의 검을 쳐낸 뒤, 빙그르르 윈체스터를 돌리며 탄환 한 발을 장전, 목을 노리고 발사.
“······!”
쐐액!
당연하다는 듯 옆으로 고개를 꺾어서 총알을 피해내는 소디에르를 향해, 발사한 직후 윈체스터를 멈추지 않고서 가슴을 향해 깊게 찔러 넣었으나, 오히려 상대방이 검으로 그것을 쳐낸 뒤 심장을 노리고 뻗어들어왔다.
그러나 검이 쳐내진 직후 옆으로 몸을 날리며 탄환을 재장전, 엉거주춤한 자세에서도 정확히 소디에르의 방향을 향해 벅샷을 발사하여 전방을 터뜨린 다음 한 번 더 뒤로 물러나면서 재장전하였다.
“···신기한 무기를 쓰는군!”
유서담도 이제는 초인의 반열에 들어섰다. 검술, 마법, 사격,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충분히 대단했지만······. 그것들 중 단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전투력이 되어버린다.
평범한 근접 격투를 할 경우 근접 격투의 전문가에게 밀릴 것이며, 원거리 전투를 할 경우 마법사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인전을 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바로 마총검술.
검과 총, 그리고 마법 인챈트 탄환으로 자신의 단점을 모조리 커버한다.
펑, 퍼엉!!
그의 총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 발사했던 ‘도탄샷’ 또한 마나 장벽에 반응하여 튀도록 만들어진 마법의 탄환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바닥에 대고 탄환을 발사할 경우 불기둥이 솟아오르거나 땅이 갈라지고, 갑작스레 자그마한 회오리가 몰아치는 탄환이 날아가는 등 살상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상대방을 정신없도록 만드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윈체스터와 검이 한 번 부딪칠 때마다, 그는 총을 돌려가며 계속해서 또다른 탄환을 장전하였다. 애초에 이 탄환은 모두 예카테리나가 인챈트 해주었기에 탄수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걱정할 것 없었다.
<서담. N60방향 7m 거리에 마탑주가 있습니다.>
자신의 사각에 위치한 남주들의 위치를 의뢰인이 브리핑해주면, 일부러 그쪽으로 가서 서로의 공격이 충돌하도록 한다.
콰아앙!!
“크윽, 너 이···!”
“네가 피하지 못한 잘못이다.”
서로의 공격을 섞어서 서로에게 피해를 입힌다. 이미 신전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그들의 마력 탐지로는 감지할 수 없는 에테르 지뢰가 잔뜩 설치되어 있었고 언제든 터뜨릴 준비가 완료되었다.
“젠장······!”
소디에르의 평정심이 서서히 깨져갔다. 정정당당하게 검과 검이 맞대는 승부라면 이 긴박한 순간에서도 얼마든지 즐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저 상대는 사람의 화를 돋구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지간한 소드 엑스퍼트의 수준을 가진 잽싼 발놀림을 이용하여 여기저기 신나게 뛰어다니며 괴상망측한 마법을 설치해대는데, 자꾸만 사방에서 전기가 번쩍거리질 않나 불꽃이 튀질 않나 땅이 흔들리거나 무너지질 않나 짜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다른 세 명이 싸우고 있는 전장으로 도망가서 서로의 공격이 엉키게 만들고선 저 혼자 도망가고는 했는데, 심지어 검술 실력도 꽤 수준급이라 단칼에 베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크아아악!!”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소디에르가 가장 먼저 모든 힘을 해제하고 말았다.
소드 엑스퍼트 상급의 힘을 가진 그의 오러는 형체를 이룰 수 있는 수준이 되었는데,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불꽃처럼 제3 신전 전체에 이글거렸다. 여태까지는 이성을 유지하며 모든 힘을 쓰지 않으려고 했거늘, 이제는 더 이상 그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저 망할, 무식한 놈이······!”
한 명이 진심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다른 남주들 역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하늘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쏟아져 내리자 제3 신전이 단 한 번의 일격에 반파되었으며,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건물 내에 있던 모든 기둥이 썰려버렸고, 신성의 힘으로 바닥을 쿵 내려찍자 빛의 기둥이 쏟아져 내린다.
<남주들이 본래의 힘을 드러냈습니다! 유서담 헌터도 슬슬 진심을 보여주시죠!>
“나는, 처음부터, 진심, 이였다고! 으아악!”
······덩치 큰 고래 4마리를 짜증나게 만들었던 새우 한 마리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물살에 휩쓸리며 이리저리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
그 사이, 신전에서 몰래 빠져나온 성녀 비앙카는 빠른 걸음으로 수도를 가로질렀다.
투툭, 투투두둑.
···쏴아아!!
먹구름이 꼈을 때부터 불안하더니만, 결국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늘러붙는 신도복이 영 불쾌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잘못됐어. 이래서는 안 돼.’
욕심이 많았다. 인정한다.
처음에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고, 그래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네 명의 남자들을 이용한다면 얼마든지 사하르 공녀를 묻어버리고, 자신이 ‘여주인공’의 자리를 꿰찰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말았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는 자신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에도 멈추지 않고서 사하르 공녀를 매장하려 했다. 이미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단 한 명의 남자조차 놓아주고 싶지 않아 ‘저는 당신밖에 없어요’라는 달콤한 말로 그들을 속이고 현혹하였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다시 한 번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그래, 애초에 네 명으로도 충분했는데 한 명 더 욕심을 부린 게 원흉이다. 그 남자만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터.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시간을 써내려가자. [원작]에서 사하르 공녀가 그랬던 것처럼, 기도를 올리자.
나는 여신 카데르에게 가장 가까운 ‘성녀’니까.
기도는 얼마든지 받아주실 것이다.
퍽!
“윽!”
“···!”
정신없이 달리던 와중, 누군가와 부딪치고 만다. 바닥에 넘어진 비앙카와는 달리 상대방은 넘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자신처럼 비를 맞으며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사하르 공녀가 서있었다.
“···성녀. 유서담 기사는 지금 어디에 있나?”
공녀는 어쩐지 굉장히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그런 것따위 비앙카가 알 바는 아니었기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교황청을 향해 질주하였다.
벌컥!
교회의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마침 기도를 올리고 있던 수백 명의 신도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비앙카를 쳐다보았다.
“성녀님?”
“대체 무슨···! 비에 다 젖으셨습니다!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500명의 신도들. 빠짐없이 모두 자리에 위치해 있다. 가장 신앙심 깊은 99인의 청신관들과 401명의 백신관들, 이들은 모두 교황청 소속으로서 자신의 편이었다.
성녀는 숨을 가파르게 고르고서 말했다.
“······모두들, 들으세요.”
난데없이 교황청의 정문을 박차고 들어선 성녀가 흠뻑 젖은 채 고요히 말하자, 모든 신관들이 침묵하였다.
“지금부터, 아주 특별한 기도를 올릴 겁니다. 이에 대해 질문은 나중에 따로 받도록 하겠어요. 하지만······. ‘믿음’이 중요한 기도이기에, 모두들 저를 믿고 따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신앙’의 양이 중요하다. 가장 여신에게 가까운 신관 1명과, 청신관 99명만 있어도 충분한데 거기에 401명의 백신관까지 있다면 틀림없이 ‘시간 회귀’는 성공할 것이다.
그녀는 처벅처벅, 물기가 가득한 발걸음으로 여신상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털썩, 꿇고 주저앉았다.
그러고선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가슴에 공손히 모았다.
사아아······ 새하얀 빛무리가 성녀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하자 모든 신관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으며, 성녀 역시 진심을 가득 담아 세월과 계절의 여신 카데르를 불렀다.
‘여신이시여, 부디 제 말이 들리신다면···. 저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소나기 내리는 밤, 어느 한 소녀가 부르는 찬송가가 도시 전체에 울려퍼진다.
<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