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4) >
애당초의 계획은 그러했다.
내가 함께 있음으로써 [매력 독점]를 방해하여 성녀 비앙카의 인기를 서서히 줄이고, 그와 반대로 사하르와 아라셀리의 인지도를 올리는 것.
이곳에서 머문지도 벌써 두 달이 넘어간다. 그간 꽤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역으로 성녀 비앙카에게 악마 소환 의혹을 뒤집어 씌운 뒤 사하르가 나서서 멋지게 일을 마무리하기도 했으며, 비앙카를 거짓말쟁이로 몰고 간 다음 사하르를 정의의 화신으로 만들기도 했고, 검은 여마도사 아라셀리의 화려한 데뷔를 통해 인기를 빼앗아오려고 해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정말 수많은 이벤트가 터졌고, 그때마다 나는 꽤 성공적으로 비앙카의 이미지를 깎아내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내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미 성녀 비앙카는 빙의한 이후 1년이나 자신의 이미지를 에펠탑만큼이나 쌓아 올렸고, 제국의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버린 상태였으니까.
그런 그녀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는, 이런 평범한 방법으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한데 말이다.
그러게. 왜 몰랐을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30년 매일매일 9시 뉴스를 통해 봐왔으면서.
선동과 날조로 거짓된 사실을 유포하고, 상대방이 대응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다시 트집잡아 정신을 공격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퍼뜨려서 음해하며, 들키면 ‘아님 말고’를 시전해서 은근슬쩍 발뺌을 하고, 다시 뒤에서 추잡한 소문을 퍼뜨려 모든 이미지를 실추시키면 되는데······ 이 간단한 것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내 계획은 사하르 공녀를 다시금 신녀의 위치로 세우거나 해서 성녀의 입지를 줄여, 그녀가 ‘회귀’를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게 목표였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정치적인 무언가가 필요한데······. 도저히 지금으로써는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주인공 사냥 의뢰. 언뜻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의뢰에는 사실 어마어마한 리스크가 있다. 바로, 사냥에 실패할 경우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
달마지존을 제외하고서 여태까지는 항상 운명론적으로 확률이 높은 사냥감을 상대해왔기에 이 리스크 자체가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지만, 슬슬 속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이 성녀 비앙카는 여태까지 만나왔던 사냥감 중에서 가장 최악이다.
인정해야만 했다.
평생 사냥 기술을 단련해왔던 내게 있어서, 정계와 이미지 관리 쪽으로는 스킬 레벨이 맥스나 다름없는 성녀는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서담 기사님?”
“예.”
비앙카가 나를 부른다. 세월신교 신전의 호숫가에서 머리에 꽃밭 가득찬 미친 여자랑 꽃놀이따위나 즐기고 있는 내 신세가 처량하다. 이제 이딴 짓 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그···.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제안, 생각해보셨나요?”
“아.”
제안이라 함은, 뻔하지만 나보고 성녀의 수호성기사가 되어달라는 것이다. 즉 사하르 공녀를 버리라는 건데······. 그랬다가는 더 최악의 길로 접어들어서 아예 몸이 두쪽으로 나뉠지도 모르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는가?
그래서 나는 충성심 높은 기사를 이야기해야만 했다.
“우리 둘의 사이가 애틋하지만, 저는 주인님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하지만 충성심 높은 당신을 보고 있으니, 이 시대의 참 된 기사라는 생각이 들어서 멋있네요.”
지랄.
그녀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다. 우리 둘은 정말로 서로에게 아무런 생각도 없다. 서로 정치적으로 접근했을 뿐이니까. 저 살벌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게 우리 둘이 꽤 신경이 곤두 서는 데이트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즐기고 있을 때.
“재미있어 보이는군.”
풀숲이 갈라지며, 창백한 인상을 가진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친, 순간 흡혈귀인 줄 알았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눈매에 피를 머금은 듯한 새빨간 입술. 그리고 무언가에 집착할 경우 결코 놓지 않을 것 같은 고집불통의 콧대까지.
황제, 스라엘이었다.
황제가 뉘집 누렁이도 아니고 이렇게 쉽사리 볼 수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나는 이미 무릎을 꿇으며 한쪽 손바닥을 그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러고선 입으로 “제국의 가장 높은 태양을 뵙습니다.”라고 기계적으로 내뱉었다. 이게 이 나라에서 황제에게 차리는 예법이다.
스라엘은 나와 비앙카를 천천히 번갈아 보더니, 그런 말을 툭 내뱉었다.
“즐거운가?”
“······!!”
비앙카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나 또한 이 짜릿한 기류를 견디기 힘들어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맙소사.’
로판에서도 남주 사이의 견제나 질투 정도는 가끔 혹은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이다. 그러는 로판도 있고, 아닌 로판도 있지만 이렇듯 적나라하게 ‘데이트 하는 도중’ 다른 남주가 난입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내가 남주가 아니라지만 성녀 비앙카는 주인공 보정에 의해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을 터.
아무래도, 내가 그 보정을 깨뜨린 바람에 뭔가가 잘못된 모양이다.
“폐, 폐하. 그게, 이건······.”
성녀가 당황하는 꼴을 보며, 나는 퍼뜩 어떤 방법을 떠올렸다.
아주아주 위험하지만, 그래도 만약 성공한다면 꽤 괜찮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잘못했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겠지만······. 이제 내게는 방법이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질러봐야 한다.
나는 식은땀을 애써 숨기고서 평온함을 가장한 채 말했다.
“폐하. 저와 그녀는 연인 사이입니다.”
“···네헤?!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물론, 거짓말이다. 성녀와 나는 그저 만나는 것을 즐길 뿐 서로 사귀지는 않았으니 당연히 애인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정치는 선동과 날조를 하는 자에게 승리가 돌아간다.
“왜 그러십니까···? 성녀님. 그때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저희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여태 해왔던 우리들의 시간은 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게. 뭐가 되는 걸까. 나도 모르겠다.
슬쩍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니, 그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비앙카를 쳐다보았다. 원래 같았으면 이러든 말든 비앙카를 향한 끝없는 사랑을 느꼈겠지만, 나로 인해 [매력 독점]에 금이 가버린 상태. 그리고, 황제는 그 틈새를 비집고 서서히 들어가고 있었다.
“···비앙카. 저 기사의 말이 사실이더냐?”
“아, 아니에요!”
사실이든 아니든 이제는 상관없어졌다. 성녀가 나와 함께 호숫가에 오붓하게 앉아서 데이트를 하다가 들켜버렸단 게 중요했고, 거기에서 누구의 말에 더 신빙성이 있는가는 굳이 대보지 않아도 뻔했다.
“성녀님···. 아니라뇨. 여태 저희가 함께해온 시간은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거기에 더해 나도 함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연기를 해준다면?
“아, 아······.”
효과가 아주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
계획 변경이다.
나는 항상 내가 가장 안전하고, 또 확실한 방법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들어가야할 듯싶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자칫하다가는 남자 주인공들에 의해 묻히거나, 정치적으로 묻힐 위험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도리가 없었다.
연예인을 가장 빠르게 묻는 방법! 바로 스캔들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것도, ‘불륜’ 스캔들.
“네? 그게 정말이에요? 성녀님이 바람을······.”
“그렇다니까요. 아휴, 한둘이 아니던데.”
“쉿. 저기 기사님도 성녀님한테 어장 관리를 당하셨다는데···.”
물론 성녀가 기혼은 아니기에 불륜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다. 남자와는 반드시 거리를 둬야만 하는 성녀가 수많은 남자와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고 있다? 뉴스도 없고 게임도 없는 제국에서 이만큼이나 즐거운 가십거리가 더 있을까!
“말도 마요. 나도 봤다니까? 저번 문화의 거리에서 성녀님이 마탑주님과 데이트 즐기던데······.”
“어머머? 그 다음날은 교황님과 사할렌가든으로 산책을 나오셨던데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나는 아주 뒤늦게, 네 명의 남주 모두가 비앙카의 관계를 알아챘는지에 대해서 아라셀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뭐? 네가 말했다고? 미친······.’
‘네. 교수님도 저한테 자꾸 이상한 거 시키시잖아요?’
‘아니, 야 아무리 그래도 사랑에 미친 놈들한테 불을 지피냐······.’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이 상황 역시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내게 주어진 떡밥을 물고 늘어질 줄 아는 아주 질척하고 끈질긴 사람이었으니까.
‘소문을 퍼뜨리자.’
사람들의 입과 입을 타고, 이야기가 전달되어 성녀의 이미지가 깎이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며, 최종적으로는 ‘남주’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
오로지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했던 비앙카가, 알고보니 양다리를 5명에게 걸쳤다? 남주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쯧쯧. 나는 그럴 줄 알았다니까?”
“주변에 여자가 한 명도 없더라니. 전부 남자로 채우려고 그랬던 거 아니야?”
별것도 아닌 사실조차 훌륭한 먹잇감이 된다. 평소에는 당연했던 사실조차, 소문을 듣고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무언가가 미심쩍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소문으로 파생되었으며,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사실’을 직시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즐길거리가 생겼으니 물어뜯고 씹을 뿐이다.
안타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왜냐, 그것은 성녀 비앙카가 사하르 공녀에게 했던 짓과 아주 똑같았으니까. 그녀는 그저······. 자신이 했던 짓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뿐이었다.
“흐음······.”
공작가로 돌아가려던 나는 내게 도착한 한 장의 쪽지를 확인하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수도의 변방에 위치한 제3 신전이 목적이었다. 인적이 드문 장소였으나, 아주 간혹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성녀 비앙카였다.
[해가 구름에 잠기는 시간까지, 그 장소로 와주세요!]
이 장소는 ‘유서담’이라는 인물과 비앙카가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마련한 장소였는데, 때마침 그녀가 나를 몰래 쪽지로 호출하였다. 아마도 제국에 퍼진 소문에 대해 어떻게든 하기 위해, 급하게도 나를 찾은 모양.
‘어디로 숨었나 했더니, 결국 여기였나.’
하긴.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찾을 사람은 나밖에 없긴 했다.
나에게 의지하기 위해서? 그럴 리가 있나. 나를 질책하기 위해서, 따지고 들기 위해서겠지. 아마 그 장소에는 몇몇 자신의 부하들이 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길 수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뭐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최소한 성기사한테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몰래’ 나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한낱 기사 따위가 황제, 마탑주, 세계 제일의 검객, 교황의 틈새에 껴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몰래’ 가는 게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한낱 기사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몰래’ 성녀와 만나줄 생각이 없었다.
아주 당당한 걸음걸이로, ‘몰래 가는 척’만 하면서, 그녀와 나만의 비밀 장소로 들어섰다.
100년 전의 양식으로 지어진 다 낡은 신전의 벽을 타고 넝쿨이 자라나고 있었다. 반으로 꺾인 기둥의 사이로 이끼 같은 것들이 껴있다. 은은하게 지는 노을빛을 받아, 검은 머리 성녀는 오늘따라 퍽 외모 버프를 많이 받을 것이다.
“성녀님. 여기 계셨군요.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리 말하며 성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 장면은 아주아주 로맨틱한 장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뒤쫓아 들어온, 네 명의 남자 주인공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 어···?”
성녀는 저도 모르게 동공을 태평양만큼이나 넓힌 채,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은··· 정말 아주 조용히 신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탑주는 하늘에 둥실 떠있었고, 검객은 기둥 위에 걸터앉은 채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고 있었으며, 황제는 당당하게도 정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고, 교황은 여신상에 몸을 기댄 채였다.
···와, 누가 ‘남주’들 아니랄까봐 등장씬도 아주 공을 들였다. 쟤들은 저게 멋있는 줄 알고 저렇게 폼잡고 있는 건가?
“화, 황제 폐하? 교황 성하까지······ 어떻게······?”
나는 아주 당황한 사람을 연기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슬쩍 품에 손을 집어넣고서 에테르 블레이드를 어루만졌다. 마른 침을 삼킨다. 이제부터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성녀, 그간 내게 속삭였던 사랑의 약조는 모두 거짓이었소?”
“헛소리를 하는구나 교황. 그녀는 나만을 바라보기로 하였다. 또다시 허튼 소리를 했다가는 입술을 도려내도록 하지.”
“비앙카···. 나의 피앙세.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함께 꽃피웠던 모든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추억들은···. 모두 거짓이었던 거야?”
“마탑주. 성녀는 당신따위와 추억을 꽃피우지 않았으니, 조용히 물러나도록 하시오.”
성녀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하게 물들어간다. 네 명의 남주들이 점점 더 살벌한 분위기로 서로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주의! 개연성의 강력한 충돌이 예상됩니다!]
[주인공 사냥꾼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날 것을 권유드립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성녀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뒤로 서서히 물러나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자세히는 나도 듣지 못했지만, “그래, 다시 시작해야······.”라면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진 모르겠으나, 가만히 둘 수는 없다. 성녀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에테르 블레이드를 꺼내들자, 누군가가 내 목에 검을 겨누었다.
세계 제일의 검객, 소디에르였다.
“어딜 가려는 거지?”
“······하하.”
아무래도, 나도 저 개싸움에 휘말린 듯싶다.
<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