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주인공은 살인이다-115화 (115/251)

<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3) >

제국에 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혜성같이 등장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사라지는 신비의 검은 여마도사!

모두가 은연중에 성녀 비앙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사실은 다른 사람이었다면?

성녀 비앙카의 이미지는 사실 이전부터 차고 넘치다 못해 충분했다. 아마, ‘검은 여마도사’가 아니었더라도 그녀의 인기는 주인공 보정에 의해 항상 끓어 넘쳤을 테니까.

그런데, 욕심이 과했다. 성녀는 검은 여마도사에게 쏠리는 작은 관심마저도 독점하고 싶었고, 그 결과 역으로 검은 여마도사가 관심을 받게되는 일이 발생해버린 것.

만약 비앙카가 똑부러지게 ‘저는 검은 여마도사가 아닙니다’라고 했다면 검은 여마도사라는 존재는 분명 대단하고 영웅틱한 인물이지만 [매력 독점(SSS)]를 가진 그녀에게 모든 인기가 빼앗겨 별다른 관심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검은 여마도사입니까? 소문대로 아름다우시군요.”

“제발, 그 호칭만은, 제···발······.”

아라셀리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푹 숙였다.

쥐구멍? 아니 개미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서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애초에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이유도 창피하다못해 들키면 기절해버리고 싶은 ‘검은 여마도사’라는 호칭 때문이었다.

저 유치찬란한 이명은 대체 뭐란 말인가? 원래의 세계에서 ‘대현자님’이나 ‘대마법사님’이라 불릴 때조차 현기증이 나던 아라셀리란 말이다.

그런데, 심지어, 검은색의 프릴이 잔뜩 달린, 이 세계의 트렌드를 총집합시킨 화려하다못해 눈이 현혹될 정도인 드레스를 입고서 제국의 수도 밤하늘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으니 아예 죽어버리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약과였다. 본래 유서담은 사람들에게 인식을 단단히 박아야 한다며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아라셀리 등장!’ 따위의 것을 요구했었으나 도저히 거기까지는 할 수 없어서 ‘제가 왔습니다아······.’같은 흐지부지한 대사가 되어버렸으니까.

결과적으로 유서담은 굉장히 실망했지만,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 교황 카인다주가 직접 꼭 만나고 싶다며 직접 초대했을 정도이니까.

거기에 더해, 그녀가 사실은 성녀 비앙카의 시녀이자 여신관이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니 세간이 발칵 뒤집히는 건 당연한 일.

당연하지만 거기에는 유서담의 역할이 한몫했다.

그는 비앙카에게 처음 대쉬가 들어온 이후, 하루를 마다하고 그녀를 찾아가 데이트를 신청했으며 어떻게든 유서담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 사하르 공녀를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 성녀 또한 그와 계속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비앙카의 패시브 스킬 [매력 독점(SSS)]은 유서담의 주인공 사냥꾼에 의해 계속 방해를 받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 그 영향으로 매력 독점에 의해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이 아주 조금씩, 조금씩이나마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유서담의 목적은 비앙카에게 집중되던 인기도를 아라셀리와 사하르 공녀에게 돌려버리는 것.

그런데.

여기서, 유서담조차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으니.

‘내가 언제부터 성녀를?’

아주 약간이지만, 스스로 의문을 품게 된 남자 주인공들이 아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리게 된 것이다.

“이거 아시나요? 저번에 검은 여마도사님이 등장했을 때 찍은 매직 캡쳐인데······.”

“아뇨? 모르는데요? 완전 싫은데요?”

“예쁘게 나왔죠?”

“제발 그거 치우라고요······.”

카인다주는 어쩐지 가슴 속에서 무언가, 흥미로운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성녀 비앙카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순수한 꽃같은 느낌이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도 아름다운, 그런 존재···였지만. 무언가 밍밍하고 싱거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아라셀리는 무슨 말을 해도 톡톡 튀는 반응을 하여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런 느낌.

심지어, 그런 관심을 교황 카인다주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교황과의 면담을 끝낸 뒤 기진맥진한 상태로 신전을 빠져나오자, 수많은 인파가 우르르 몰려와 아라셀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 사람들이 ‘와! 검은 여마도사!’하며 쳐다보기 시작하자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서 도망쳤다.

‘내가 이 나이 먹고 마법소녀 놀이라니······!’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정원에 도착했거늘. 새하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황궁 수석 마법사이자 마탑주까지 동시에 하고있는 천재 중의 천재 6써클 마법사 하라윤. 그리고 굉장히 느끼한 표정과 말투가 특징인 그 남자 또한 아라셀리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던 것.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아라셀리에게 다가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아라셀리의 귓가에 흑장미를 한 송이 꽂는다.

“정원의 모든 꽃들이 시들었어요. 아아, 이제 보니 아니군요. 당신 때문에, 모든 꽃이 죽은 것처럼 보였어요. 가장 아름다운 꽃에 현혹되어버린 걸까요.”

‘히이이익!’

“어찌하여 당신은 꽃보다 아름답게 피었나요. 이 흑장미는 시들겠지만, 당신은 시들지 않겠지요.”

······분명 그의 대사는 한 50년 전 ‘로맨스’ 장르였다면 꽤 성공적으로 먹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라윤은 이 세계에서조차 ‘서브’였고, 심지어 아라셀리는 로맨스는 쥐뿔도 모르는 완전한 일반인. 기름이 흘러 넘치다 못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저 대사에 가슴이 두근대지는 않는다.

‘으아아악! 교수니이이임! 이 마법사가 시공간을 오그라들여서 저를 죽이려고 해요!’

아라셀리는 창백하게 물든 얼굴로 유서담을 애타게 찾았으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라, 잠깐.’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으로 울상을 짓던 아라셀리는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계획이 반드시 유서담이 생각한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분명 그는 똑똑했고, 작전을 짜는 데에 능숙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라셀리 역시 그보다 뒤떨어지지는 않는단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아라셀리는 자신을 이런 처지로 만든 유서담에게 단단히 뿔이 난 상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하라윤에게 말했다.

“혹시, 저에게 대쉬하시는 건가요?”

“꽤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네요. 여타의 귀족 아가씨들과는 확실히 달라요, 그대는.”

“당연하죠. 그런데······. 당신은 이미 성녀 비앙카와 그런 사이가 아니던가요?”

“네?”

설마 여기서 그런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지, 하라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라셀리는 유서담의 영향으로 비앙카의 ‘매력’이 잠시 봉인되어있단 사실을 알고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이 아주 잠깐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 남자들이 자신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하는 이 짧은 틈새에······ ‘의문’을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아, 그건, 그게···.”

“하긴. 그럴 수 있죠. 비앙카 성녀도 다른 남자랑 놀아나고 있던데요.”

그러자, 하라윤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비앙카 성녀는 꽤 남자 주인공들 관계에 철저했다. 그것은, 일종의 ‘주인공 보정’이었다. 1번 남자를 만날 때에 234번 남자에게는 결코 들키지 않았으며 2번 남자를 만날 때에는 134번 남자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뜻. 그 사실은 결코 다른 사람이 말해줘도 들어처먹질 않았으며, 심지어 한 귀로 들어도 한 귀로 흘려버린다.

하지만 유서담에 의해 그러한 보정이 해제된 지금이라면.

“모르셨나요? 흐으음, 아, 이건 진짜 말하면 안 되는데.”

“대체 무슨 소리죠? 부탁입니다. 말씀해주세요.”

“아이 참. 진짜 곤란한데. ···그게, 아무한테도 말 하면 안 돼요?”

정말 별것도 아닌 비밀. 이 세상 모두가 다 아는데, 4명의 남자 주인공들만이 모르고 있던 사실.

성녀 비앙카가, 평소에 하는 행실들.

“그게······, 이번에 세레니티 공작가의 기사 유서담과 비앙카 성녀가 자주 함께 다니던 장면을 꽤 많은 사람들이 봤더라구요. 설마 둘이 그렇고 그런, 아아! 정말.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절대 제가 얘기했다고 하면 안 돼요?”

“······그렇군요.”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라윤은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이 상황이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대체 나는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가’라는 그런 뻔하지만, 도저히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가 주어지고 만 것이다.

그렇게, 하라윤이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자 아라셀리는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금 교황청으로 발을 돌린다.

‘으흐흐, 교황한테도 똑같이 말해야지!’

*

그 시각,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는 황궁에서 황제 스라엘과 마주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저를 부르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따사로운 바람이 나른하다.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흰색의 꽃밭은, 마치 사하르 공녀를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연 공녀를 제외하고 누가 저 꽃밭에 어울릴까. 그녀가 이곳에 들어선 순간, 이미 공녀는 이 꽃밭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산들산들 흔들리는 커튼 자락을 보며 사하르 공녀는 태양의 무늬가 그려진 찻잔에 입술을 대었다. 붉은 입술이 홍차를 천천히 받아들이자, 스라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전의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어서 불렀다.”

“평소처럼 편지를 보내셔도 좋았을 텐데요.”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꼭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었다.”

“예. 황제 폐하의 부름이시라면, 저는 달려가야지요. 그런데, 감사 인사를 들었으니 이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서 죄송하군요.”

“······그럴 수는 없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었다.

황제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려 세월과 나달을 다시 한 번 달려왔다.

부딪치고, 넘어지고, 상처입고, 피를 흘렸지만 끝끝내 황제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나날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시간을 포기하였고, 쓸쓸히 죽어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짓밟고, 망가뜨려놓고.

‘이제 와서······ 이딴 관심을 보인다고? 내게?’

기대했던 만큼 충족감이 있을 줄 알았다. 예전 그때처럼 가슴이 콩닥거리고, 설레이고, 그의 날카롭지만 따스한 집착 한 마디에 또다시 반해버릴 줄 알았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콩깍지가 벗겨지고나서 다시 보니, 그의 내면은 추악하고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괴로웠는데. 얼마나 아팠는데. 그렇게 힘들게 해놓고서는, 이제 와서, 본인만 모든 것을 잊고 다시 관심을 보인다고?

심지어 이 관심이 사실은 비앙카에 대한 감정이 아주 잠깐, 유서담 때문에 옅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는 사하르 공녀로서는 정말이지 역겹기 그지없었다.

여태껏 살아온 모든 인생이 아까워졌다. 고작 저런 남자를 사랑했던 자신이 가엾어졌다.

어쩐지 추락하는 듯한 처참한 기분에 사하르 공녀는 세상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무얼 위해 이리도 열심히 살아왔던가. 대체 무얼 위해 시간을 되돌렸단 말인가.

나는, 여태 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하··· 하하.’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것은 참을 수 없었기에 스라엘 또한 그녀의 미소를 보고야 말았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느냐?”

“후후···. 사실, 제게 고민이 있었거든요.”

더 이상, 저 얼굴을 보는 것조차도 고통스럽고 순간순간이 끔찍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더 보고 싶은 얼굴이 하나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나락에서 억지로 건져올려버린 그 남자.

지금쯤, 성녀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을 그 남자가.

부들부들,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사하르 공녀는 눈빛을 살벌하게 떴다.

알고있다. 유서담은 지금 자신을 위해, 그녀에게 붙어서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그런 배려를 알고있음에도, 도저히 비앙카 성녀를 용서할 수가 없어졌다.

“고민? 무슨 고민이지?”

“황제 폐하께서는 참으로 좋은 사내입니다. 이렇게 저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시는 것조차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소리더냐.”

“폐하는 분명 성녀 비앙카와 함께하기로 약조하신 것 같은데······.”

“아, 그래. 틀림없이 우리의 사이가 좋긴 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폐하.”

스라엘이 표정을 찌푸리자, 사하르 공녀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떼었다.

“제 수호기사 유서담과 성녀 비앙카가 정분이 났단 말입니다.”

“······!”

그에 꽤 충격을 받은 듯, 항상 무표정하던 황제답지 않게 그가 눈을 부릅 뜨자 사하르는 정말 즐겁다는듯 비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부터, 정말 즐거워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3)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