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2) >
회귀자와 빙의자의 대결을 체스로 비유해 보자.
회귀자는 아는 게 많았고, 그 미래의 정보를 폰(Pawn)으로 환산하면 최소 20마리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폰이 가진 힘은 한정되어 있었고 빙의자가 가진 룩(Rook), 비숍(bishop), 나이트(Knight)에게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이제 회귀자에게는 남은 게 없었고 승패는 확정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때, 빙의자가 모르는 숨겨진 말 두 개가 개입했으니 바로 나와 아라셀리였다. 언뜻 두 마리의 말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두 개의 말이 퀸(Queen)이라면 어떨까?
여전히 룩과 비숍, 나이트 도합 6마리를 상대하기는 벅차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서서히 조여들어 오는 여섯 마리의 말에 대응하기에, 퀸의 힘은 강력했으나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상대방이 악수(惡手)를 두면 어떻게 될까?
“기도합시다.”
세월과 계절의 여신, 카데르.
카데르는 이 세상의 ‘시간’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사계(四季)와 흘러가는 모든 나달을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대륙의 절반 이상이 ‘세월신교’를 믿고 있으며, 제국의 국교(國敎)로 지정될 정도였으니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지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카데르 여신의 세월신교는 2~3세기에 한 번씩 ‘성녀’가 나타난다고 한다.
여신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또 행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여인, 성녀.
그러나 성녀가 없을 때에는 전 대륙에서 가장 신앙심이 굳건하고 또 모두의 본보기가 되는 여인이 성녀를 대신하는 ‘신녀’로 지정받게 되는데, 바로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성녀가 나타난 즉시 신녀의 가치는 거침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2회차 인생에서는 그 추락의 폭이 지나치게 과했다. 제아무리 성녀가 등장했다 하더라도 여태까지 가장 높은 곳에서 여신을 믿어왔던 그 모습이 어디 사라지는 건 아닐진대 말이다.
결국 사하르 공녀는 ‘신녀’로서의 모든 권한과 직위를 박탈당했으나······.
“한 번 더 기도합시다. 우리의 세월이 그들에게 닿기를.”
지금, 사하르 공녀는 다시금 세월신교 교황청으로의 출입을 인정받아 기도를 올릴 자격을 얻게 되었다.
비록 예전처럼 신녀의 직위를 가지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사하르 공녀가 가지고 있는 신앙심만큼은 진짜였기에 그저 일개 신도로서 기도를 올리는 것만 해도 꽤 만족한 눈치였다.
그녀가 그러한 자격을 얻는 과정에서 나는 아주 간단한 조언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정말 이게 끝이었다.
사하르 공녀는 정말 과할 정도로 정의감이 특출났는데,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다치는 꼴을 절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귀자의 지식을 이용하여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온갖 힘을 써왔으나······.
그래 봐야 성녀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거다.
그녀 또한 미래의 지식을, 심지어는 사하르 공녀가 어떻게 행동할지조차 전부 꿰뚫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협작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벌어질 사건, 내게 있어서는 ‘에피소드’라 불리는 이벤트를 기다렸다.
그러자 사건이 벌어졌고, 무언가 수를 쓰려던 비앙카 성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뒤늦게 등장한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가 멋지게 일을 해결함으로써 마무리!
요컨대, 키워드는 ‘정의로운 회귀자’였다. 굳이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겠답시고 나서지 않는 것만 해도 주인공 비앙카를 당황하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하다는 의미.
‘어떻게 해서든 사하르 공녀가 신녀의 직위를 되찾도록 해야만 하는데······.’
비앙카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녀가 가진 모든 능력을 잃게 만들어야 한다.
첫 번째 능력, 네 명의 남주인공.
두 번째 능력, 세월과 계절의 여신이 하사하는 ‘시간 회귀’.
회귀의 발동 조건은 모른다. 다만, 가장 신앙심이 두터운 신자에게 내려질 수도 있다는 게 중요할 뿐.
그러니 이제부터는 미래의 지식을 활용한 철저한 수 싸움이 될 터였다.
회귀자의 지식을 가진 나와 회귀자의 미래마저도 꿰뚫고 있는 빙의자와의 싸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서담 기사님도 오셨군요. 제복이 잘 어울리세요.”
비앙카나 나를 보며 눈웃음을 치자, 나 또한 어색하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비앙카 성녀님도 오늘따라 더 고우시군요.”
그래, 정말 예쁘긴 예뻤다.
그런데 모든 여자가 잘생긴 남자에게 홀라당 넘어가지는 않듯, 남자 또한 예쁜 여자에게 홀라당 넘어가지는 않는다. 즉, 비앙카는 자신이 순수하게 발산하고 있는 ‘매혹’을 내게 걸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회귀자와 빙의자의 구도는 처음이었기에, 나는 조금 더 정치질과 미래의 정보가 충돌하는 치밀한 심리전을 기대했다.
아마도 평범하게 머리싸움으로 갔다면 나는 패배했을 것이다. 비앙카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고, 나보다 머리가 좋은 여자였으니까.
이해는 간다. 매력 독점은 자신이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가장 손쉽게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평소에 나는 비앙카에 비견되거나 혹은 더 아름다운 여인들과 숱하게 얼굴을 맞대면서 면역을 기른 데다가, 심지어 [주인공 사냥꾼]이 [매력 독점(SSS)]에 저항하고 있으니까.
“흐으응···.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제가 ‘신도회 사교모임’을 개최할 생각인데, 당신을 초대하고 싶거든요.”
신도회 사교모임이라.
거기는 신앙심을 가진 신자라면 누구든 참여가 가능하다. 나는 비록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 수 없었지만, 성녀의 허락이라면야 얼마든지.
여기서, 매혹에 걸린 기사라면 자신이 모시는 공녀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수락한다면? 사하르는 철저히 배제될 것이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것이다.
단순한 봉건 제도의 기사를 떠올리면 안 된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 속 기사의 이야기라면 꼭 불가능할 것도 없다.
“물론이지요. 아름다우신 성녀님의 초대를 어찌 제가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내가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자 비앙카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불안한 표정의 사하르 공녀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사교모임의 날짜는 정하셨는지요?”
“으음,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좋다.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더 이야기가 쉬워진다.
“그럼 다행이군요. 혹시 저희 공녀님의 일정에 맞춰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게 무슨······.”
“제가 가는데, 주인님을 모셔야하는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러시지요?”
이게 아닌데, 라는 표정의 비앙카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사하르가 껴있든 말든 나와 함께 할 시간만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좋다는 느낌이었다.
“아니에요. 혹시 어느 날짜가 되시는지요? 그때로 일정 맞춰보겠습니다.”
“달과 기울어질 녘의 열세 번째 날.”
“······!!”
날짜를 말하자, 비앙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공녀님이 그때밖에 시간이 되지 않아서······. 그날이 안 되면 달이 세 번쯤 더 기울어졌을 때나 가능하겠군요.”
그러자 비앙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손톱을 잘근, 씹었다.
이건 일종의 심리전이자 도박이었기에 나도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여기서 비앙카가 나를 포기하고서 정치전으로 돌입하게 되면, 그때는 상황이 더욱더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혹시 그날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유? 댈 수 있을 리가. 그날 하필이면 ‘제국에 큰 위기가 닥친다’고 어찌 미리 말하겠는가?
성녀가 나를 살짝이지만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치, ‘너 뭔가 알고 있지?’라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나는 그저 ‘공녀님의 일정에 맞출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비앙카.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일정이 없는 것은 신자들이 뻔히 다 아는데, 여기서 괜히 ‘그날은 안 된다’라고 했다가는 사하르 공녀가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사교 모임을 해지했다는 오인을 받게 된다.
현재 사하르 공녀는 꽤 여러 사건을 긍정적으로 해결함으로써 다시금 이미지를 회복하고 있었고, 많은 신자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와중인데 성녀가 그런 식으로 ‘뻔한 견제’를 해봐야 결국 이미지가 실추될 뿐이다.
“······좋습니다.”
결국 성녀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상대방이 악수를 둔다면, 나는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할 자신이 있었다.
* * *
‘연기한 겁니다.’
기도를 올리는 시간이 끝난 뒤, 유서담은 그리 말했다. 사하르 공녀는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그의 표정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정체도 모른다. 이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심지어 기사는 맞는지 아닌지조차 모른다. 그냥, 어느 날 갑작스레 툭 나타나서 자신을 이끌어주었고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저는 성녀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자신에게 믿음을 주기 위하여. 어쩐지 불안해하는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사하르 공녀는 ‘궁금하지 않다’며 거짓말을 했지만 유서담은 그러한 사실까지 아는 것처럼 시원스레 웃으며 “그냥 제가 말하고 싶어서 말했습니다.” 능청을 떨었다.
그래서, 사하르 공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너처럼 똑같이 말했었다. 그런데도 떠나가서, 나를 완전히 잊었지.’
이 감정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인연에 대한 집착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사람을 잃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사람이라고는 제국에서 감시를 하기 위해 보내온 황제의 시종들뿐이었으니, 남은 일평생을 혼자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가슴이었으니, 고작 단 한 사람이 들어왔을 뿐인데도 이토록이나 크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사하르 공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세월신교의 신전에서도 세레니티 공작가의 저택은 훤히 보였는데, 정말이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어쩐지, 그 점이 창피해진 사하르 공녀는 이전에 유서담에게 변명을 하기도 했다.
‘나의 저택은 쓸쓸하지 않아. 모두가 떠나갔음에도, 여전히 장소는 그 자리에 남아 있거든. 그리고 장소는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해 점점 세월을 맞이하여 풍파가 되어갈 뿐이니, 결국 나는 세월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야.’
그러나 그는 품위 없게도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런 말을 한다.
‘아, 창피하단 뜻이죠? 모른 척할게요.’
‘······.’
이해력은 참으로 좋은데, 눈치라고는 더럽게 없는 남자였다.
그때 사하르 공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으나, 애써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만간 떠나간다고 하였다.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을 다시금 세상의 빛을 향해 건져낸 이후에.
그러니, 더 이상 그가 자신의 인생에 깊게 파고들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해야만 했다.
* * *
[에피소드 ‘추락하는 천사(4)’가 시작됩니다.]
“······슬슬 시작되는가.”
유서담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비앙카와 실실거리며 떠들었다. 그에 비해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탓이었을까, 비앙카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과연, 유서담 기사의 말대로 비앙카 또한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는 모양.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관계없다.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사하르는 검을 들고서 일어났다.
다른 이들이 예쁘장하고 헐렁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온 데에 비해, 사하르는 철저하게 몸을 감싸는 드레스를 입은 상태였다. 왜냐, 그 안쪽에 몸에 딱 달라붙는 전투복을 숨겨두기 위해서였다.
제국의 수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래, 기억난다. 1회차 당시 이곳은 철저하게 망가지고 부서졌었다.
아직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마치 신이 진노한 것만 같았다. 하늘이 쩌적 갈라지며, 불길한 붉은 반점이 구름처럼 세상을 뒤덮더니, 거기서 튀어나온 새하얀 날개를 가진 무언가.
그것은, 정말이지 천사처럼 아름답고 고운 날개를 가졌다.
그러나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적대국이자 어둠을 숭배하는 흑마교단에서 보내온 악마였다.
현재 제국의 최강자라 불리는 4인은 일전에 연회장에서 성녀를 위험에 처하도록 만든 흑마교단을 직접 처리하기 위해 나가 있는 상태였다.
1회차 당시, 그들은 상당히 허무하리만치 단 4명이서 흑마교단을 아주 멋지게 처리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결국 흑마교단을 처리하느라 정작 제국 내에서 발생한 재앙을 막지 못했다는 것.
바로 이날이 문제였다. 사하르 공녀는 악마를 상대로 처절하고 또 처절하게 싸워냈다.
백성들이 몰살당하고, 귀족과 기사들이 썰려 나가는 그 절망스러운 와중에도 그녀는 검을 절대로 놓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서 있던 사람은 성녀였다.
온화하고 차분하다고 알려진 지금의 성녀와는 달리, 성격 괴팍하고 더럽기로 유명했던 1회차 당시의 성녀.
그녀는 사하르 공녀가 악마를 물리치는 그 순간에 화려한 빛무리와 함께 등장해 세상에 아름다운 신성력을 흩뿌렸다.
모두가 성녀를 찬양하고, 또 숭배했다.
‘그때부터 나는 성녀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면서 사는군······.’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유서담이라는 남자가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쩌적! 쩌저적!!
갈라진 붉은 하늘의 틈새에서 새하얀 날개를 가진, 끔찍한 검붉은 악마가 등장하자, 순식간에 사교 모임을 비롯하여 제국의 수도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다.
그 거대한 악마가 가진 위용에, 일반인들은 고개를 드는 것조차 하지 못한 채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으, 으아악! 저, 저게 뭐야!”
“악마다! 아, 악마가 나타났다!!”
“사, 살려······.”
누군가가 절규했다. 누군가는 도망치기 위해 일어나다가 쓰러졌고, 누군가는 절망하여 자리에 주저앉았으나, 결코 그 어떤 ‘누군가’도 싸우기 위해 일어난다는 선택지를 택하지는 못했다.
그저, 평소처럼.
“성녀님!!”
“성녀님, 부디 저희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성녀가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아··· 나는, 그게······.”
비앙카는 떨리는 눈동자를 하는 와중에도, 애써 침착을 유지하였다.
아마 그녀에게도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결코 성녀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녀 또한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이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전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검은 여마도사’가 등장하면 몸을 숨기는 것. 그리고, 사하르 공녀가 악마를 성공적으로 물리치면 자신이 등장하는 것.
하지만 이 방법의 전제에는 ‘검은 여마도사’가 성녀 비앙카의 말이여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검은 여마도사, 즉 아라셀리는 결코 비앙카의 말이 아닌 사하르 공녀의 말이었다.
“성녀, 나와 함께 싸우도록 하시오. 저 악마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 당신이 가진 그 ‘마법’의 힘과 나의 검이라면 피해가 없이 막아낼 수 있을 터이니.”
“나는, 그게······.”
그녀는 항상 ‘검은색 여마법사’가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을 해왔다. 그러나, 명확히 부정을 하지 않고서 ‘글쎄, 난 아니라니까?’라며 은근히 ‘속는 사람은 없고 속이는 사람만 있는 듯한 뉘앙스’의 거짓말을 해왔기에 결국 사람들은 성녀 비앙카가 곧 검은색 여마법사라고 믿고 있었다.
“왜 그러지?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사하르 공녀는 다시금 모두에게 그 사실을 새겨넣었고.
그 순간.
“저, 저기······!”
“그 마법사가 나타났다!”
하늘에서, 휘황찬란한 빛무리와 함께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마법사가 나타났다.
복면을 벗은 채, 아예 개성 만점의 휘황찬란한 검은색 드레스(유서담의 요구였다)까지 차려입은 아라셀리가 말이다.
그녀는 굉장히 쪽팔려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모두에게 얼굴이 훤히 보이도록 하고서 쓰지도 않을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9써클의 위대한 마법으로 만들어진 강렬한 폭죽 마법과 복잡하고 화려한 마법진이 세상 전체에 스며들었다.
“제, 제가 왔습니다아!”
직후,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와아아아!!”
“여마법사가 나타났다!!”
이제 누구도 성녀에게 주목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아버렸다. 성녀와 검은색 여마법사는 아예 개별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그에 사하르 공녀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고, 성녀 비앙카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게 아닌데······!’
<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