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1) >
펑, 퍼어엉!! 사방에서 울리는 폭음에 아라셀리는 고개를 들었다. 현재 그녀는 황궁 내 교회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차. 연회가 열리는 시간 동안 할 일이 없어 조용히 기도(드리는 척)를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사건이 터져버렸다.
그녀는 미래에 대해 전혀 모른다. 회귀자도, 빙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지만 ‘빙의자’가 이 세상의 모든 축복을 몰아받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숱한 차원과 시간을 건너다닌 9서클 대마법사의 통찰력이었다.
‘이번에는 단순 테러 사건인가?’
아라셀리는 급히 코에서부터 턱 아래까지 길게 늘어지는 복면을 썼다. 안이 비치는 반투명한 복면인지라 가까이서 본다면 아라셀리라고 알아볼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누군가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체내의 마력량은 10%도 채 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없다. 늘 그랬듯이 이번 사건도 이 정도의 마력이면 충분할 것이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뒤, 서둘러 검은색의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온몸에 새하얀 빛을 두른 뒤 하늘 높이 치솟았다.
[포톤 무브먼트]
신체 자체를 빛으로 둘러, 물리법칙을 무시하여 날 수 있는 이 7서클의 마법은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음속으로 가속할 수도 있었으며 관성의 법칙조차 무시한 채 급정거를 하는 것도 가능했다.
밤하늘 높이 날아오른 그녀는 양 손가락을 모두 맞대어, 극소량의 마력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평상시에는 마력을 아끼느라 자제하고 있지만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반경 수백 미터 안에 누가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찾았다!’
폭음이 울리는 건물은 총 일곱 채. 그러나 테러라고 보기에는 이상하리만치 피해자가 거의 없···, 아니. 아예 없었다.
‘···이건.’
곡물 창고, 화장실, 사람이 전부 빠진 대접관 등등. 꼭 일부러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을 노린 것처럼, 끔찍하리만치 지축을 뒤흔들어놓는 압도적인 폭발 속에서도 그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마치, 주의를 끌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여덟 번째 건물에서 울리는 폭음과 함께, 아라셀리는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
너무나도 낯설지만, 익숙한 마력의 향기. 인생의 순간에서 몇 번 마주치지도 못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의 향기가 풍겨오고 있었다.
아라셀리는 자신이 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머리는 혼란으로 가득 찼지만, 몸은 이미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듯 그쪽을 향해 나아갔다.
어째서인지 여덟 번째 건물은 상층부를 지탱하는 기둥과 벽을 거의 부수지 않고, 진입을 방해하려는 것처럼 출입구를 비롯하여 쓸데없는 부분만을 박살내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제국의 밤하늘을 고요히 날았고, 마침내 해당 건물의 꼭대기에 내려서서.
“······.”
마침내, 볼 수 있었다.
“역시 검은색 여마법사가 너였구나, 아라셀리.”
“···네.”
그는 어쩐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상 뻔뻔스러운 얼굴로 제멋대로 배짱을 부리던 그에게는 썩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뭐가 그리도 미안한 걸까. 뭐가 그리도······.
“······정말 나를 찾으려고, 이 고생을 하고 다닌 거야?”
“아.”
그제야, 그가 어느 부분에서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서 아라셀리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서 그녀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자신이 여태 했던 고생과 여정을 모두 교수님이 알아주시는 것만 같아서.
아라셀리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딜 가시든, 제가 반드시 찾아간다고 했잖아요. 교수님.”
“···많이 힘들었겠네.”
“아니요.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서담은 자신의 품에 안긴 아라셀리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는 그런 서담의 품을 잊지 않겠다는 듯, 꾹 파고들어서 한참이나 그의 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 테러는 저를 끌어들이려고 일부러 벌이신 건가요?”
“그렇긴 하지.”
반은 맞았다.
서담은 애초에 아라셀리가 이 세계에 와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으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도 적었다. 다른 장소들과는 달리 세월과 계절의 여신관들이 머물고있는 교회나 신전은 남자들의 접근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으니까.
그때, 생각해낸 방법.
찾을 수 없다면, 불러오면 되지 않겠는가?
어째서인지 아라셀리는 어떠한 특정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반드시 나서서 그것을 해결하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것처럼.
“1년이나 기다렸어요.”
서담은 아라셀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간 그녀가 했을 고생을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이 대체 뭐라고 이런 소녀가 자신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걸어서 여기까지 쫓아온단 말인가. 해준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그 마음에 과연 보답해줄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알 수 없어서, 유서담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너 마력이 왜 이래?”
“아, 그게···.”
그녀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던 서담은 문득, 아라셀리의 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심장을 두르고 있는 마나 써클이 완전히 굳어있는 것이다.
<불완전한 방법으로 차원을 통과한 탓입니다. ···꽤 급했던 모양이군요. 시간의 파편을 통과할 방법조차 모르는 채, 타차원에서의 마력 응집법을 연구하기도 전에 다른 세계로 뛰어들었으니까요. 조금만 더 노력을 했다면 충분히 완벽한 차원 전이가 가능했을 텐데···. 심히 안타깝습니다.>
‘허.’
대체 뭐가 그리도 그녀를 급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제가 다 부족한 탓이죠······.”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자존감이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천재이자 현자였던 아라셀리 라인칼이 그쪽 세계에서 바닥을 벅벅 기어다니는 자존감으로 살아왔을 것을 생각하니 아련하기도 했다.
“넌 충분히 대단해. 일단은···. 잠깐. 뭐 하냐?”
심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1년 전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미지의 힘, 마력이었다. 그러나 서담은 그것을 움직이라고 명령한 적이 없었고, 화분 또한 최근에는 ‘개화’ 준비 때문에 잠자코 있는 상태였을 터.
“······교수님. 이거 제 마나 써클링이죠?”
“맞아.”
“어떻게 이걸······.”
“좀, 사연을 말하자면 복잡한데···. 누가 네 써클링을 훔쳤는데, 그놈 족치고 다시 훔쳤어.”
맞는 말이긴 할 거다.
“게다가······. 제 써클링보다 더 진보했네요. 뭔가, 제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기술력···. 이건 호흡법을 접목시킨 건가요?”
“어, 맞는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서담의 가슴팍에 조용히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제야, 서담도 뒤늦게아라셀리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다가 심장 부근에 손을 얹었다.
느껴졌다. 유서담의 심장의 마나 써클이 아라셀리에 의해 강제로 회전하면서, 그로 인해 응집된 마력이 조금씩이지만 그녀에게로 흡수되고 있는 기현상이.
‘허, 미친.’
통상적으로 타인이 타인의 마나 써클에 간섭하는 건 힘들다. 간섭하려고 하면 할수록 마력 써클이 반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담은 알고있다. 분명 엄청 힘들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그것은 일전에 예카테리나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며 깨달은 사실이다.
그래, 분명 같은 방식의 마나 써클링을 익히고 있다면 얼마든지 상대방의 마력을 회전시켜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몸과 영혼이 완전히 귀속되어있기에 감각마저 공유할 수 있어서 가능했던 일.
그런데, 아라셀리는 영혼 교감조차 없이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유서담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단순히 마력이 들어오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둘이 가진 마력의 DNA자체가 아예 뒤섞이고 있었다.
[마력의 최대량이 대폭 상승합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오르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유서담이 두 눈을 크게 뜨자 아라셀리가 열띤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으음······. 좋네요.”
마법사에게 마법은 곧 인생과 같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인 마법이 어느 날 썩둑, 잘려나간다면 그 마법사는 사지가 절단된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아라셀리는 현재 딱 그런 심정으로 차원을 여행하고 있었다. 한정된 마력량으로 어떻게든 세상을 이겨내야만 했던 것.
마력이 서서히 차오르는 충만한 감각에 아라셀리는 간만에 행복감을 느꼈다.
펑, 콰아아앙···!!
“허, 참···.”
바깥에서는 여전히 요란스럽게도 폭탄이 폭죽처럼 터지는 와중, 아라셀리는 그렇게 그의 품에 안겨서 잠에 빠져들었다.
유서담은 차마 그녀를 깨울 수 없었다.
*
“비앙카. 어떻게 된 일이야?”
교황, 카인다주는 다정다감한 성격이다. ‘내가 문 열어줄게’, ‘그 가방은 이리 줘. 내가 들어줄게.’ 등등 비앙카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호의를 보인다는 의미.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력 독점(SSS)’의 효과였다.
비앙카. 그녀는 틀림없이 예쁘고,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로 그런 절대적인 호의를 끌어낼 수는 없다. 그런데 이번에 주인공 보정을 비틀 수 있는 무언가가 개입하여 처음으로 그것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어떻게, 네가 악마가 나타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이런 당연한 의문을 간신히 물을 수 있게 된 것일 테고.
어젯밤. 성녀의 생일을 축복하기 위한 연회장에 악마가 나타났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 있던 귀족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성녀가 악마의 등장을 예고했다며.
어떻게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았을까? 교황인 자신조차 받지 못한 신탁을 그녀가 받았을 리는 없으니 말이다.
“그게···.”
카인다주는 안절부절하는 비앙카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있는 자신이 퍽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이런 싱숭생숭한 감정을 대체 언제부터 느꼈단 말인가. 모르겠다. 다만 중요한 건, 여전히 그녀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이었고 어떻게든 해명을 해야만 한다는 게 중요했다.
“귀족들이 난리가 났어. 네가 악마를 불러온 거라고.”
그리고 그와 대조되게도, 사람들에게 핍박받던 ‘사하르 세레니티 공녀’는 현재 악마를 홀로 퇴치한 여인으로서 다시금 그 이미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비앙카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게 아닌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비틀렸을까. 어째서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일까.
‘······내가, 개입한 탓에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녀는 최대한 합리적인 방향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사하르 공녀는 회귀자로서, 2회차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여태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사전에 정리함으로써 황제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였다. 실제로, 원작의 사하르는 많은 사건을 해결하며 황제와 점점 더 가까워졌으니까.
하지만, ‘황제의 사랑’이라는 보상이 없다면? 오히려 사건을 해치우면 해치울수록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멸시와 압박밖에 없다면? 과연 그래도 원작의 주인공 사하르 세레니티가 똑같이 활동을 할까?
‘내가 안일했어.’
그래, 생각해보니 그렇다. 자신 같았어도 보답없는 사랑을 계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비앙카는 사하르 공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그녀가 바뀌게 된 계기. 그녀가 갑작스레 황제의 사랑을 포기하고서,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이유.
······그리고 거기에는, ‘유서담’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설마, 사하르 공녀······. 그 기사와 정분이라도 난 거야? 어이가 없네.’
확신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심증은 있다. 사하르 공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면, 황제의 사랑을 포기하고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이대로는 곤란해.’
1년간, 사하르 공녀를 ‘신녀’의 자리에서 게워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녀가 다시금 정신을 부여잡고 이미지를 되찾아 세월과 계절의 여신의 신녀가 된다면 ‘회귀’ 능력을 또다시 부여받을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선 안 된다. 결코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아니지, 가만 있어봐.’
비앙카 성녀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이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스스로가 거울을 봤음에도 솔직히 조금 반해버릴 정도로 말이다. 여태껏 대화를 나눈 이들 중에서 자신에게 홀딱 빠지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지금도 밤잠을 설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틀어막으며 생각했다.
‘만약 사하르 공녀가 기사 유서담에게 의존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사하르 공녀에게서 그를 빼앗아오면 되지 않겠는가?
< 은색 머리 공녀님의 로맨스릴러(1) > 끝